천수천인전 계수나무 자신의 날개와는 비교도 할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날개를 가진 그들은 마구잡이로 죽이고 죽이는 일에 열중하였다. 이미 보이는 곳은 모두 죽은 이들과 찢어진 날개들 그리고 피로 천지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비월은 멀어져가는 의식속에서 맨두와 강효랑이 날개가 뜯긴 고통속에서 자신을 그들의 몸아래에 숨기는 것을 느꼈다. 맨두가 전사들의 시선을 가리는 동안 강효랑은 남은 모든 힘을 발휘하여 기여코 비월을 자신의 몸아래 숨겼다. 비월은 얼마지나지 않아 차가워지는 강효랑의 몸을 느끼고 눈물을 흘렸다. 음령족의 특징인 음률소리가 사라지자 무차별적인 살인은 멎었다. 이유도 모르는 체 음령족은 같은 천인족에 의해 멸족당하였다. 살아있는 동안은 온몸으로 음률을 내는 종족인 음령족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비월은 차갑게 얼어가는 강효랑의 시체아래서 한쪽 날개가 뜯긴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의식을 잃어갔다. 날개치는 소리가 들린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죽은 시체를 처리하는 흑호족이 나타났다. 천인들이 죽으면 어디든지 나타나 시체를 치우는 것이 그들의 임무였다. 대장인 호하는 주위를 둘러보다 맨두의 시체에 다가갔다. 맨두의 시체를 치우자 그 속에는 강효랑의 시체가 있었다. 강효랑의 시체는 그나마 사지육신이 멀쩡한 시체였다. 강효랑의 시체를 들어올리던 호하는 강효랑이 안고 있는 어린 시체를 보고 놀랐다. 한쪽의 날개가 뜯겨진 모습으로 아직까지도 피를 흘리고 있었다. 대부분의 시체가 차갑게 식어버리면 피도 멎어버리는 데 아직도 피를 흘린다는 것은 그 시체가 아직 온전히 죽지않았음을 의미했다. 그동안 수많은 살육의 현장을 다녔지만 살아있는 시체는 처음이였다. 호하는 어린 시체를 들어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그때 어린 시체가 눈을 뜨고 호하를 쳐다보았다. 호하는 자신이 죽는 순간까지도 그 눈빛을 잊지못했다. 1. 화룡족과 거래하다. 비월은 다리사이로 파고드는 익숙한 감촉에 눈을 번쩍 떴다. 비월이 본것은 호하의 아들 파라였다. 파라는 비월과 눈이 마주치자 송곳니를 드러내며 빙긋이 웃었다. 아침마다 겪는 일이지만 좀처럼 익숙해지지않는 느낌이였다. "비켜주세요. 파라." "쯧쯧...이제 그만 얌전하게 안겨라 월아." "소리지를거에요." "언제쯤이면 허락할건데?" "평생 지난다해도 허락받을 생각은 꿈도 꾸지말라구요,암컷도 많은 데 왜 자꾸 저에게 이러시는 겁니까?" 비월이 비난하는 사이에도 파라는 자신의 것을 자꾸만 비월의 사타구니 사이에 비벼대고 있었다. 그 행동이 갈수록 미묘해져서 비월은 같이 반응하려는 자신의 것을 느끼고 식은 땀을 흘렸다. 자신이 반응을 보인다는 것을 아는 즉시 파라는 망서리지 않고 달려들 것이다. 파라가 눈치채기 전에 쫓아내야 했다. 비월이 소리를 지르려고 입을 벌린 순간 파라가 비월의 입술을 덮쳤다. 삼켜버릴듯 덤벼드는 솜씨가 하루이틀에 쌓인 솜씨는 아니였다. 비월의 비명소리는 파라의 입속으로 사라졌고 파라는 비월의 혀를 제맘대로 갖고 놀고 있었다. 주먹을 휘두르고 밀어내고 발버둥을 쳐댔지만 파라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 비월은 파라를 떨쳐내지 못했다. 비월은 파라의 무게와 호흡곤란으로 어질어질 현기증을 느끼고 눈을 감았다. 비월의 저항이 사라지자 덤비듯 달려들었던 파라의 행동이 달래듯 부드러워졌다. 입술이 떨어져 나가자 비월은 미친듯이 숨을 들이쉬었다. 그동안에도 파라는 비월의 옷의 끈을 풀고 드러난 가슴 주위를 건드리고 있었다. "그...만.." "포기해라, 월아 언젠가는 먹힐 거 지금 하자." "포기하긴 뭘 포기해!" 파라는 등뒤에서 울린 목소리에 흠칫 놀라 휙 뒤를 돌아보았다. 아버지 호하가 잡아먹을 기세로 파라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버지." "이 자식이 그렇게 덤비지 말라고 말했건만 틈만 나면 덤비는 구나. 몇번을 말해야 알아듣겠냐? 월아는 네 동생이라구." "에이 아버지 동생보다는 반려로 삼고 싶다구요." "죽을래, 포기할래?" "아버지이~~~~" "요놈아 니 덩치에 애교가 가당키나 하냐? 월아 질식하기 전에 당장 비키지 못해?" 파라가 미적거리며 일어섰다. 그의 바지 앞섶이 커다랗게 부풀어 있었다. 그꼴을 본 호하가 혀를 찼다. "이 미친 놈아, 월아가 싫다고 하면 어림도 없다. 당장 꺼져." 투덜거리며 자신의 옆을 지나가는 파라를 발로 '뻥'차버린 후 호하는 비틀거리며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비월에게 다가가 부축해주었다. 벌어진 옷 사이로 파라가 남긴 흔적이 여러개가 보였다. "널 괴롭히려는 의도가 없다는 건 알지?' "핫하하.. 그럼요, 솔찍히 파라가 진짜로 덮칠 생각이였다면 뻔히 호하가 오는 시간에 맞춰 일을 벌이진 않았을 거에요." "그래 저녀석은 다만 네가 귀엽고 사랑스럽다는 표현을 그런식으로 하는 거란다. " 비월의 옷을 바로 입혀주며 호하가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오늘은 어디로 가나요?" "후우우~남천에 숨어사는 로수족이란다. 어찌하여 천제의 살육이 멎을 줄 모르는 구나. 이제 시체처리도 한계에 이르렀는데 자꾸 죽이니 암담하다." "화룡계곡은 아직 연락이 없나요?" "그들은 우리부족이 가진 천붕세마리를 요구하고 있단다. 너도 알다시피 천붕이 없으면 시간안에 살육현장에 도착하지 못하게 되고 그사이 수인족이 그시체를 먹게되면 새로운 부족이 생겨나게 된다는건 알지? 천제가 그걸 용납할리 없으니 천제의 살육대상에 우리부족이 포합되겠지." "어쩔수가 없군요. 제가 직접 그들을 찾아가 보겟습니다. 그래도 안된다면 늪족을 찾아가 보기로 하지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어떻게든 해볼게요." "괜찮겠느야? 네 체력으로는 너무 무리가 될텐데......" 호하가 안쓰러운 듯 비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사라져버린 양쪽 날개로 진작에 죽어도 죽었을 비월이였지만 강효랑의 시체를 먹으며 살아났다. 자신과 피가 섞인 자를 먹어 죽은 자의 힘을 받아서 살아나기는 했지만 그건 비월의 피에 수인족의 피가 조금이라도 흐르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죄책감과 고통에 미쳐가던 비월을 이만큼 회복시킨건 호하와 파라였다. 또 한명의 지대한 공을 세운 사람은 수야라는 부족민이였고. 살리기위한 목적으로 남겨진 날개를 뜯어내고 비월은 숨만 붙어있는 시체나 다름없었다. 감정도 느끼지 못했고 느낌도 없었다. 그저 멍하니 하루종일 앉아있거나 잠을 잤다. 번식기를 제외한 시기에는 전투형인 수컷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부족민은 그 덩치가 우람하고 거대한 데 비해 비월은 어린아이도 아니고 성인도 아니 조그맣고 여린 선을 가지고 있었다. 대부분의 부족민은 비월이 번식기가 되면 암컷으로 변이하리라 믿고 은근히 접근하여 비월을 건드려댔다. 덕분에 번식기가 되면 암컷으로 변이하는 부족민 일부는 비월을 괴롭히고 시기하였다. 특히나 파라를 반려로 찍어둔 수야의 괴롭힘은 강도가 심했다. 실어증에 우울증까지 무감각상태에 빠져있는 비월은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자극을 받지 못하는 상태였다. 왠만한 충격도 느끼지못하는 비월이 수야의 괴롭힘만은 느낄 정도로 수야의 괴롭히은 가도가 지나쳤다. 날개를 잃어 높은 곳에 오르지 못하는 비월을 높은 나뭇가지에 올려놓고 사라져버린다거나 물속에 빠뜨리고 절벽에서 밀어냈다. 그때마다 떨어지고 굴러서 뼈가 부러지고 피부가 벗겨져 피가 철철 흘렀고 익사할 뻔 한적도 두세번은 되었다. 문제는 비월이 주위를 의식하지 못하는 터라 범인이 누구인지 밝히지를 못한다는 것에 있었다. 파라가 펄펄 뛰면서 위협을 해댔지만 그럴수록 비월을 괴롭히는 강도가 심해질 뿐이였다. 사람들은 비월을 괴롭히는 그누군가를 비난했지만 비월은 그반대였다. 자신을 좀 먹어가던 죄책감과 절망감 그리고 고통에서 해방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수야가 죄를 지은 비월을 신을 대신해서 벌주고 있는 것만 같아서 몸은 고통스러웠지만 마음은 편안해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수야의 괴롭힘은 비월이 고통을 견디지 못해 울음을 터트릴 때까지 계속되었다. 한번 울음이 터진 후 비월의 말문이 같이 터진 것이다. 수야는 자신이 괴롭힌 걸 비월이 파라에게 말할까봐 눈치를 보았고 그 뒤로 괴롭히는 걸 그만두었다. 파라가 우울증과 실어증을 극복한 비월을 아침마다 덮치기 시작한 것이 그때부터였고 호하가 부족민을 통솔하면서 느낀 여러가지 생각과 어려움을 하소연하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비월은 이 두명이 자신이 다시 우울해질 틈을 주지않기위해 일부러 신경써주고 있다는 걸 느끼고 마음을 조금씩 열기 시작했다. 호하에게 있어 비월은 아들이였고 파라는 진담인 지 농담인지 모를 말로 반려로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무엇이 되었든 비월은 파라와 호하에게 있어 가족이였다. 문제는 번식기가 다가왔을 때였다. 수야가 암컷으로 변이하지 않았다. 파라가 비월과 짝짓기를 할거라 짐작하고 다른 수컷과 교미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은근히 수야의 짝을 고대하고 있던 다른 부족민들은 아쉬워하였고 암컷으로 변이한 다른 부족민들은 안심하였다. 그만큼 수야는 부족민 수컷들의 우상이였던 것이다. 그러나 황당한 일은 당연히 암컷으로 변이할 것이라 믿었던 비월이 번식기가 다 지나도록 변이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파라나 수야 모두 충격으로 한동안 말도 하지 못했다. 그 후로 여러해가 지났지만 비월은 한번도 변이하지 않았고, 수야는 여러번 변이하여 파라 주위를 맴돌았지만 여전히 파라와는 짝짓기를 하지 못했다. 결국 비월이 암컷으로 변이하지 못하는 돌연변이라는 것이 증명된이후에도 자포자기 심정인지 파라는 수컷이라도 좋다는 식으로 비월을 덮치고 있었다. 언젠가는 변이하리란 기대를 버리지 못한 모양이라고 속편한 생각을 해버렸다. 문제는 덮치는 강도가 점점 더 심해진다는 것이지만. 비월의 특이한 점은 그것뿐만이 아니였다.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비월은 전혀 자라지 않았다. 파라의 절반밖에 되지 않았고 암컷보다도 작았다. 미성숙체인 수컷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성장하는 건 머리카락뿐인 듯 비월의 흑단같은 머리카락은 키를 넘어선지 오래였다. 또 체력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약했다. 한시간이상 서있는 게 고작이고 세시간이상 앉아있질 못했다. 그에 반하여 머리는 보통부족민보다 두배는 좋았다. 호하가 넋두리 하듯 털어놓았던 고민을 비월이 간단하게 해결해 주었다. 족장인 호하는 물론 장로들도 이제는 어려운 일은 비월과 의논했다. 흑호족의 가장 큰 고민은 천인족의 시체처리였다. 천인족의 시체는 그 호흡이 멎은 뒤에도 그 육체에 죽은 자의 능력이 머물기 때문에 같은 천인족이나 지계족이 그 시체를 먹으면 아무 변화가 없으나 수인계의 인간이 그 시체를 먹게되면 그 외모와 능력을 흡수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것이 새로운 종족인 천수족이 태어나는 과정이였다. 모습이 천인족이 되었다해도 그 본질은 여전히 수인족이라 천제의 통제를 벗어나게 되어버린다. 능력이 뛰어나도 통제가 되는 천인족이나 지계족은 별 문제가 되지 않지만 능력이 떨어지지만 그 번식력이 뛰어난 천수족은 그 개체수의 급증으로 큰 힘을 발휘하게 되어 커다란 위협이 되었다. 현상뿐이라면 별문제가 되지 않았을 테지만 천년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천수족이 천인족을 공격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죽여도 죽여도 끊임없이 공격해오는 천수족의 수에 밀려 천인족은 궁지에 몰렸고 그 와중에 번식기에 들어간 암컷들이 천수족에게 당해 수많은 돌연변이들이 생겨났다. 열성인자를 가진 돌연변이는 오래지 않아 사라졌지만 우성인자만을 가지 돌연변이들은 천인족과 천수족 그리고 지계족을 무차별로 죽여갔다. 그 돌연변이가 천이족이라 불리는 공포의 대상이였으며 혐오의 대상이였다. 십이지천이 모두 나서서야 상황이 진압되었고 천수족은 거의 멸망하였고 천이족은 십이지천에게 포섭되거나 제거되었다. 죽일 방법이 없어 무저갱에 봉인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었다. 때문에 천인족의 시체처리는 매우 중요한 일이였고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되는 힘든일이기도 했다. 그런데 천제의 살육이 잦아지고 시체가 늘어가자 처리하는 것도 한계에 이르고 있었다. 땅에 묻는 것만으로는 수인족의 손을 피할수가 없기에 반드시 태워야 하는데 시체하나를 태우기 위해서는 시간이 만만치않았다. 또한 그 비용역시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화장을 하기위해서는 여러가지 비싼도구들이 필요했고 한번 구입하면 영원히 쓸 수 있는 물건들도 아니라 자주 사용할수록 질이 떨어져 새로 구입해야하는 문제가 산재해 결국 재정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장로들과 호하가 비월과 고민한 결과가 용암에 시체를 녹이는 일이였고 그 용암이 있는 곳이 화룡족이 살고 있는 화룡천이였다. 허락을 얻기위해 간 장로들이 가져온 소식은 조건부 승낙이였다. 흑호족에게 있어 생명줄이나 다름없는 천붕세마리를 요구해 온 것이다. 흑호족에서 소유하고 있는 천붕은 모두 여섯마리였다. 하루에 천리를 날고 순식간에 목표지점에 데려다주는 천붕이야말로 시체를 시간안에 처리해야하는 흑호족에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것인데 그중에 절반인 세마리를 요구해 오는 것은 협상할 생각이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아니면 더 많은 것을 받아내기 위한 위장이거나...... 천붕 두마리가 높이 비상하였다. 비월은 그 속력과 높이에 심한 현기증을 느끼고 파라의 가슴속으로 파고 들었다. "하하하. 드디어 네가 내마음을 받아주는 구나." "닥쳐요. 아니면 토해줄테니까." "앙탈도 심하지." 하며 비월의 등을 쓰다듬어주었다. 비월이 화를 내며 파라를 뿌리치지 않는 건 그의 손길에 흑심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였다. 짖궃은 말로 긴장감을 풀어주었고 따뜻한 손길로 두려움을 없애주었다. 비월은 파라에게 보이지 않게 미소지었다. 마음이 편안해지자 짖궃은 생각이 든 비월이 일부러 파라의 등을 끌어안았더니 당장 다리사이에서 반응이 왔다. "어이구야. 제발 참아줘 월아, 여기서 하는 건 위험하다구." 태연하게 비월의 행동을 받아들이며 내뱉은 말에 같은 천붕을 타고 가는 장로들이 호탕하게 웃어댔다. 그들은 파라가 장난을 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였다. 비월은 평소에 자신을 가지고 장난치면서 좋아하던 파라가 곤란해하자 없는 장난끼가 발동했다. 파라의 등을 안은 손에 힘을 주고 가슴에 얼굴을 부벼댔더니 신음을 터트리며 비월을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비월은 갈비뼈가 압박당하자 '헉'하고 숨을 삼켜야했다. "장난은 그만! 천붕위라고 해서 내가 아무것도 못할거라고 믿는 거라면 큰 오산이란 걸 바로 보여주마." 하며 비월의 귀에 작은 소리로 말했다. 비월은 자신의 의도를 간단하게 알아채버린 파라의 말에 무슨 소리를 하는 지 모르는 척 어색한 순간을 모면해보려고 했지만 붉어진 볼을 쓰다듬는 파라의 손길에 이미 들통난 것을 알 수 있었다. 평소에 안하던 짓을 하면 뒷수습이 어렵다는 것을 절실히 느껴야했다. "키스해줄까?" 속삭이듯 말하며 짖궃게 눈을 빛내며 얼굴을 가까이 가져오는 파라의 모습에 비월은 그의 옆구리를 꼬집어버렸다. "아얏 이런 고양이." 웃음소리가 더욱 커졌고 비월은 엄살을 부리며 큰소리로 떠들고 있는 파라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멀리서 화룡천이 보였다. 하늘 높이 솟아오르고 있는 검은 연기가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열기때문인지 화룡천의 하늘은 항상 붉은 빛을 띠었다. 열혈지옥이 이보다 더할까 싶을 정도로 화룡천은 인간이 살기에는 무척이나 힘든 환경을 가지고 있었다. 열기를 막아주는 결계가 없다면 아무도 살지 않는 땅이 화룡천이리라. 화룡군주가 열어놓은 결게를 통과하여 착륙지점에 내려선 일행은 그 더운 열기에 숨이 막히는 걸 느껴야했다. 천붕 역시 자꾸만 퍼덕이며 날아오르려고만 했다. 일행이 다 내려선 걸 확인한 파라가 천붕을 날려보냈다. 천붕을 부르는 호각을 불지않는 한 천붕은 돌아오지 않는다. 비월은 화룡족 전사의 옷을 입은 일행들의 맨앞에 서잇는 사람이 이야기 들은 적 있는 화룡족의 재사인 차람이란 걸 짐작했다. 다른 화룡적에 비해 그는 꽤 침착해보이는 인상이였다. "어서 오십시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이리 환영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저는 흑호족장님의 대리하여 온 월아라고 합니다. " 차람이 비월을 찬찬히 살폈다. 자신도 화룡족답지않다는 소리는 많이 들었지만 저 작은 자는 전혀 흑호족답지 않았다. 비월이 슬며시 파라의 손을 잡았다. 더운 공기때문인지 호흡이 가파왔던 것이다. "저는 화룡족의 재사인 차람이라고 합니다. 이곳은 열기가 심한 곳이니 안으로 드시지요." 파라는 자신의 손을 잡은 비월을 힐끗 쳐다보더니 가볍게 안아들어 화룡족의 시선을 끌었다. 그들의 호기심이 가득한 시선이 비월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차람 역시 안색이 별로 안젛은 비월의 모습에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어디 불편하십니까?" "보기 좋지 않은 모습을 보여 죄송합니다. 며칠전 심하게 앓고 난 뒤라 아직 회복되지 않았군요. 일이 급박하여 무리하게 출발하였더니 조금 어지럽습니다. " 비월은 자신의 원래 체력이 이런 걸 알면 저 눈치빨라보이는 차람이란 자가 그걸 이용할 생각을 할까봐 급히 병을 앓았다고 했다. "그런데 월아님은 전혀 흑호족답지 않군요. 정말 흑호족이 맞습니까?" 은근히 떠보는 말에 파라와 장로들이 긴장하였다. 세상에서 완전히 멸족되었어야 할 음령족이란 사실이 밝혀지기라도 하면 큰 소요가 일어날 것을 능히 짐작하였던 것이다. 긴장하여 비월을 쳐다보는 장로들에 비해 비월은 이외로 차분하였다. "돌연변이입니다." 비월이 무슨 대답을 하나 잔뜩 기대하며 쳐다보고 있던 화룡족이나 같이 왔던 흑호족이나 놀라서 한동안 멍하니 비월을 쳐다보았다. 돌연변이라는 말은 금지된 말이나 다름없었다. 천년전 천수천인전 이후로 가끔 그 후손에서 격세유전으로 돌연변이가 태어나기는 했으나 스스로 밝히는 경우는 없었다. 돌연변이라는 말자체처럼 돌연변이는 경원시되고 멸시하고 외면되는 존재였다. 원하든 원하지않든 돌연변이로 태어났다면 누군가에게 맞아죽어도 할말없는 것처럼 인식되고 있었다. 그런데 흑호족의 대리로 온 자가 스스로를 돌연변이라고 당당하게 너무 당당해서 아무런 생각도 들지못하게 만들어버렸다. 너무 당당해서 오히려 나머지 인간들이 당황해버렸다. 궁안은 밖과는 달리 시원했다. 시원한 공기가 폐속으로 들어오자 그제서야 비월은 정신이 맑아지는 걸 느꼈다. 한 호흡한 후 여유있게 웃으며 아직도 뻣뻣하게 굳어서 안내를 하고 있는 차람을 쳐다보았다. 이외로 순진한 면이 있는 그가 어떻게 복잡다단한 재사일을 하는 건지 궁금했다. 차람은 자신이 이곳저곳을 자세히 파헤쳐보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숨기지 않는 비월의 모습에 또한 당황했다. 어쩌면 적진이 될지도 모르는 곳에서 상대방의 실정에 대해 내놓고 관찰하는 비월의 태도가 너무나 당당하여 시찰나온 왕같다고 생각했다. 분명 비월이 조심스럽게 살펴보았다면 적진을 염탐하는 거라고 할 수 있었을 텐데 대놓고 살피는 것에 멈추지 않고 시설이나 군사력에 대해서 물어보자 차람은 대답도 못하고 진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게다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곤란해서 이마를 닦는 차람을 보더니 '덥지요'란다. 분명 비월의 행동에 대해 뭐라고 해야할 것 같은데 딱히 떠오르는 말이 없어 답답한 심정이었다. 속으로 '이게 아닌데...'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뽀족하게 일침을 가할만한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게다가 일이 급하여 찾아왔다는 흑호족의 대리는 피곤하다며 내일 회담을 하자고 했다. 차람은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을 지경이였지만 이미 결정이 난 듯이 비월이 거처를 물었고 차람은 얌전히 그의 일행을 안내해준 후 멍하니 서 있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자 '끙'거리며 신음소리를 뱉어낸 후 곧바로 화룡궁주가 있는 곳을 찾아갔다. 온천탕안에서 목욕을 즐기며 옆에 있는 암컷을 희롱하고 있던 화룡궁주 훈바가 무엇이 그리 못마땅한 지 장황하게 보고하고 있는 차람을 쳐다보았다. 만족하지못한 암컷은 어떻게든 훈바의 관심을 끌어보려고 했지만 훈바의 식어버린 열정은 다시 타오르지 않았다. "흐음, 정말 특이한 사내로군 그들이 찾아오는 거야 짐작하고 있었지만 그리 당당하단 말이지? 게다가 급한 일이라면서 회담을 내일로 미뤘다고?" "그렇습니다. 그들이 순순히 응해올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그 대리인의 태도는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는 것이였습니다. " "기대되는 군. 내일 그들이 제시하는 조건은 무엇일까?" 훈바가 온천탕안에서 일어났다. 잘 그을린 구리빛 몸이 물기를 머금은 체 반짝이고 있었다. 차람은 아무리 같은 남자라지만 전혀 부끄러운 줄 모르는 훈바의 행동이 부담스러웠다. 같은 수컷끼리의 교합이 드문일이 아니여서 마치 훈바의 행동이 유혹처럼 느껴져 얼굴이 붉어졌다. 여관이 급히 다가와 물기를 닦아주려 했지만 훈바는 여관의 손을 거부하고 자연히 마를 때까지 휴게실을 거닐었다. 맨몸으로. 비월은 같이 온 장로들을 밖으로 보내 각 방향으로 흩어져 몇가지를 살피게 했다. 부족민의 안색과 먹는 음식, 입는 옷 그리고 주거형태에서 자주 유행하는 질병까지..... 장로들이 나가자 스스로는 휴식에 들어갔다. 파라는 언제 닥칠지 모르는 위험으로부터 비월을 보호한답시고 비월이 눕자 옆에 누우며 팔배개를 해주었다. 너무 피곤해서 신경전을 할 여력이 없는 비월은 얌전하게 파라의 행동을 받아들였다. "파라, 내가 잘할 수 있을까요?" 흑호족 밖으로 나와 일을 처리하기는 처음이였기에 두려움이 앞섰다. 파라는 불안한 듯 자신의 가슴팍만 쳐다보고 있는 비월의 어두운 안색을 보고 비월의 걱정을 알 수 있었다. 그동안 부족민의 크고 작은 일을 처리하기는 했지만 오늘처럼 막중하고 큰일은 처음인지라 자신감이 생기지 않는 모양이였다. 파라는 희미하게 웃으며 비월의 긴머리를 쓰다듬었다. 마음이 약해진 것은 그만큼 체력이 떨어져서 생기는 일종의 비월의 버릇이엿다. "너는 잘 할 수 없어." "엣?" 당연히 자신감을 부추키는 말을 해줄줄 알았던 파라가 김새는 소리를 하자 비월이 눈을 치켜뜨고 파라를 쳐다보았다. 자신은 걱정스러워 죽겠는데 그의 안색은 느믈느믈거렸다. 왠지 모를 불안감이 드는 비월이였다. "걱정마라, 그대신 내가 잘 할 수 있거든." 하며 비월을 더욱 가슴팍으로 끌어당겼다. 그제서야 비월은 파라와 자신의 말이 엇갈리고 있는 걸 느끼고 한숨부터 내쉬었다. 하지만 일부러 자신의 말을 엉뚱하게 돌려버린 파라가 한심스럽다거나 얄밉지는 않았다. 이런식으로 해서라도 비월의 긴장감을 풀어주려는 의도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처음에는 의도뿐인 말이 얼마지나지 않아 행동으로 옮겨진다는 것이 문제였다. 생각은 좋은 데 자제가 안되는 것이다. "윽!!!" 벗겨진 어깨를 깨물렸다. 비월은 혹여 밖으로 신음소리나 고함소리가 들릴까 노심초사해서 소리를 삼키려 하면서 파라를 저지해 보려고 했지만 이미 목덜미에 두개 드러난 어깨에 세번째 울혈이 생겨나고 있었다. "그만하지 못해요? 읏!!!파라!!!" 비월이 기겁을 하며 날아가버리려는 이성을 붙잡고 파라의 귀를 잡아당겨 밀어냈다. 그 입술이 젖어서 반들거리고 있었다. 비월이 사납게 노려보자 넉살좋게 히죽 미소를 짓는다. 비월이 얼른 그의 품에서 벗어나며 아래를 내려다보니 깨물린 유실이 붉게 변해있는 걸 볼수 있었다. 얼른 옷을 여미고 발로 파라를 저만치 밀어냈다. 그리고 등을 돌리고 시트를 팔 끌어당겨 온몸을 덮었다. 파라의 장난질에 반응해버린 자신에게 화가났다. 아직도 가슴언저리와 허리부분이 욱씬거릴 정도로 반응하고 있었다. 바보같으니.... 파라가 살그머니 등뒤고 다가와 비월을 끌어안았다. "이제 긴장 풀렸지?" 정말 미워할 수가 없는 인간이였다. 비월은 씁쓸하게 미소지으며 눈을 감았다. 차람은 놀라는 훈바의 얼굴을 보고서야 자신이 대리인의 외모를 설명해주지 않은 걸 깨달았다. 그의 행동이나 말에 대한 설명만 하는라 미처 외모에 대해 설명해줘야겠다는 걸 잊어버린 것이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 지 모르지만 차람이 보기에 대리인은 너무 연약했다. 변화기의 암켯보다도 작은 체구라니..... 그렇다고 어린아이로 보기에는 그 눈빛에 어린 혜안이 두렵다. 전투형의 수컷과도 다르고 머리를 쓰는 학사형과도 다르다. 그는 자신의 말처럼 그 어느것에도 속하지 않은 외형을 가진 돌연변이가 분명해보였다. "흑호족의 족장 호하의 대리인 월아라 하옵니다. 이쪽은 그분의 아드님이신 파라라 하구요." 비월은 훈바의 놀라워하는 시선을 모른 척 자신을 소개했다. 그제서야 훈바가 정신을 차리고 헛기침을 한번 한 후 비월에게서 눈을 떼었다. 워낙 그을린 피부라 잘보이지 않지만 차람은 훈바가 얼굴을 붉힌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에 왠지모를 불안감을 느끼고 주먹을 쥐었다. 저 다혈질에 참을성 없는 궁주가 혹여 말썽을 부리는 건 아닐까하고 조마조마한 심정이었다. 좀처럼 대리인에게서 눈길을 돌리지 못하는 것이 차람의 불안감을 더 가중시켰다. "우리가 제시한 조건을 승낙하는가?" 드디어 본론이다. 그제서야 차람은 막혔던 숨을 내쉬었다. 이번 흑호족일행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느낀 것이지만 대리인과 후계자는 차람의 예상을 벗어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당연히 불안하고 초조해야할 그들의 표정이 담담해서 오히려 차람을 불안하고 초조하게 만들었다. "저희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차람과 훈바가 멍하니 비월을 쳐다보았다. 어제 차람이 느꼈던 당혹감이라는 것을 훈바도 느껴야했다. 너무 태연해서 마치 그런 조건을 내세운 훈바를 나무라는 것 같지 않은가. 서슴없고 너무나 당당한 질문을 하는 비월의 행동에 차람과 훈바는 아쉬운 쪽이 자신들이었던가 하는 의심을 해야했다. 훈바는 차람이 대리인의 뻔뻔스러울 정도로 당당한 말과 행동은 대책이 안섰다며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쉴때 혀를 찼던 걸 후회했다. 정말 대책이 서질 않았다. "우리는 무리한 요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전부를 원하는 것도 아니고 일부를 달라는 것이다. 어차피 그대들은 시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 멸족위기에 처할 것이 아닌가? 그에 비하면 우리의 요구가 지나치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훈바는 상대방이 뻔뻔스럽게 나온다면 이쪽도 뻔뻔하게 대처하자는 생각으로 입을 열었다. 이제 어쩔거냐고 비월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비월의 표정이 어떻게 변하는 지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그러나 곧 얼굴을 찌푸린 자는 훈바였다. 당황하거나 창백하게 질릴 걸 예상했던 비월이 미소지었던 것이다. "조정을 원하십니까?" 값을 흥정하자는 장사치같다고 생각하며 너무 솔찍하게 나오는 것도 부담스럽다는 걸 철저하게 느끼는 훈바와 차람이었다. 너무 적나라하게 아무것도 숨김없이 드러내니 이쪽도 속의 것을 숨기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원하지 않는다면?" 한번 쯤 저 차분한 얼굴이 변하는 걸 보고싶다는 생각에 비웃듯 딴지를 걸었다. "어차피 저희 부족이 가진 천붕의 절반을 요구하신 건 저희 부족을 곤란하게 만드는 일이라는 건 잘 알고 계시리라 봅니다. 다른 요구도 없고 조정의사도 없으시다면 저희가 조건을 다시 제시하겠습니다. " "조정의사가 없다고 했을 텐데?" "천붕 여섯마리를 드리겠습니다. " 경악한 자들은 훈바와 차람뿐만이 아니였다. 불안한 마음을 감추고 차를 마시며 자신들의 표정을 감추고 있던 파라와 장로들도 너무 놀라 마시던 차를 뿜어내고 말았다. 훈바와 차람도 그에 못지않은 반응을 보였다.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멍하니 비월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도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대신 시간안에 시체를 저희부족에게 실어다 주십시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훈바와 차람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게 무슨 망발인가? 왜 우리가 그런 일을 해야하지?" "흥분을 가라앉히고 저의 이야기를 들어십시요. 저로서는 이 방법이외에 더 좋은 방법을 모르겠습니다. 양쪽 부족에게 가장 적절한 조건이 아닙니까?" "그게 어디가 적절하다는 건가? 흑호족만 이득을 보는 것이 아닌가?" "왜 그리 생각하십니까? 천붕은 많을 수록 유용하게 쓸수가 있습니다. 저희부족으로서는 나머지 세마리로는 시간안에 살육현장에 모두 도착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궁주님께서도 세마리보다는 여섯마리의 천붕이 더 유용하게 쓰일 것이구요. 화룡족이 시체를 실어다 주면 저희는 시간안에 사체처리를 할 수 있어 좋고 화룡족은 천붕이 여섯마리를 얻을 수 있어 좋지 않습니까?" 딱히 틀린 말은 아니였지만 훈바와 차람은 억울한 심정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화룡족에게 천붕이 꼭 필요한 것이라면 귀가 솔깃할만한 조건이지만 문제는 화룡족에게 천붕은 그다지 중요한 재물이 아니라는 것에 있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분통이 터질 것만 같아 훈바가 숨을 몰아쉬며 비월을 노려보았다. "우리가 왜 굳이 그래야 하는가?" 차람이 내린 결론이였다. 굳이 비월이 내건 조정을 받아들일 필요를 못 느낀다는 말이였다. 조건이 맘에 들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만이였다. 그래서 도전적인 시선으로 비월을 쏘아보았다. 그시선에 조금이라도 당황하면 덜 얄미울텐데 여전히 비월은 여유있고 차분했다. 곤란한 것은 그들이 아니라 화룡족인 것처럼....... "저희는 시간안에 시체를 처리하지 못하고 사체는 수인족에게 먹혀 새로운 종족이 태어나고 이에 천제께서 분노하여 저희부족을 멸족시키시겠지요." 그게 어디 남의 이야기냐? 하고 따지고 싶을 정도로 비월이 미운 차람과 훈바였다. 자포자기하듯이 말하는 폼세가 저리 당당해도 되는 지 의심스럽다. 훈바는 계속되는 신경전이 답답한지 들썩거리고 있었다. 흑호족에게 무언가를 더 받아내겠다고 생각한게 잘못인 듯 하다고 결론 지은 훈바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가 천붕세마리를 받지 않겠다면 그대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해주겠는가?" 처음부터 화룡족의 속셈은 이것이였다. 더 많은 걸 받아내기위해 위협한답시고 도리허 분통만 터질뻔 했지만 그말이 나온 순간, 차람과 훈바는 넋을 잃어버렸다. 비월이 너무나 환하게 미소지었던 것이다. 그미소가 너무나 매혹적이라 차람도 훈바도 서신을 떼지못했다. 파라와 장로들의 표정도 그제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솔찍히 그들은 거의 실신직전까지 몰려있었다. 비월은 상대방 뿐만 아니라 같은 일행들도 같이 경악시키고 질리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전투가 있을 때마다 다치는 전사들을 치료해 드리겠습니다. " 비월의 말에 훈바와 차람이 동시에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고보면 반응하는 모습이 똑같다는 생각이 드는 비월이였다. "그런 건 우리도 할 수 있다. " 그나마 잇속 빠른 차람이 버럭 화를 내며 다른 걸 더 요구해왔다. "치료나름이지요. 호흡이 멎지않고 목이 절단된 경우를 제외한 모든 경우의 외상을 원상태와 비슷하게 회복시켜 드리겠습니다. " 또다시 침묵. 훈바와 차람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회담장소에 있는 다른 자들도 비월과 협상을 하기 위해서는 왠만한 심장을 가지고는 힘들겠다고 공통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게 가능한가? 팔과 다리가 사라진다해도 원상복구가 가능한가 말이다. " 흥분하면 상대방의 의도대로 끌려간다는 것을 알았지만 훈바도 차람도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유는 화룡족의 가장 큰 고민거리가 전사자와 부상자가 다른 부족에 비해 월등히 많다는 것 때문이다. 전투가 있을 때마다 다혈질에 급한 성정이 강해 자제하지 못하고 적들의 도발에 쉽게 흥분하여 달려들어 날뛰는 바람에 공격 역시 제일 많이 받아 다치거나 죽는 자들이 많았다. 덕분에 화룡족이 살고 있는 화룡천에 가장 많은것이 치료소였다. 베이거나 뼈가 부러진 정도라면 치료로 왠만큼 회복이 가능하지만 팔다리가 잘려나간 경우는 치료를 받는다해도 정상적으로 생활하는 것이 불가능하여 폐인취금을 받기 일쑤였고 그 경우 활달한 성격에 그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는 경우가 속출했다. 그충동을 이겨낸다해도 폐인이나 다름없는 삶을 살아가느 것이 대부분이였다. 그런데 지금 무식하고 미천하기 그지없는 흑호족의 빈약한 수컷이 내놓은 조건이 무엇인가. 그들의 오랜 숙원을 단번에 날릴만한 것이 아닌가. "한가지....." "무 ,무엇인가?" 불안한 시선으로 비월을 쳐다보는 훈바와 차람의 모습은 마치 전세가 역전된 분위기였다. 물론 자신들은 느끼지 못하는 것 같지만. "날개는 복구되지 않습니다." 한가지란 말에 잔뜩 긴장했던 훈바와 차람이 탁자를 내리쳤다. 화가 났다는 표시가 아니라 안도한 듯한 느낌으로 무의식중에 내리친 것이다. "날개는 필요없다. 정녕 그것이 가능하단 말이지?" 훈바가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기세로 비월을 노려보았다. 만약이라도 거짓이라고 하면 비월을 가만두지 않을 기세였다. "거래하시겠습니까?" 비월은 아무런 대답없이 훈바와 차람의 대답만 기다렸다. 훈바와 차람은 침묵을 한참동안 침묵을 지켰다. 훈바가 차람을 돌아보았다 어떻게 하면 좋을 지 묻는 시선이였다. 차람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로서는 꼭 필요한 것이 아닌 천붕보다 화룡족의 오랜 숙원을 해결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중요했던 것이다. "만일 그대가 제시한 것이 사실이라면 화룡계곡의 사용을 허가한다. 그러나 다만 급한 불을 끄기위한 얕은 수작이라면 그대 부족의 존망은 내손안에 달렸다는 걸 명심하라." "저희 부족의 존망을 걸고 어찌 실언을 하겠습니까?" 잔뜩 긴장하며 일의 진척을 보고 있던 사람들이 환호하며 가슴졸였던 것을 털어버렸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진땀나는 회의였다는 그들의 생각이였다. 서로에게 축하의 인사를 하며 환하게 미소지었다. "양측에 좋은 일이 잘 마무리 되었으니 축하를 아니할 수 없지. 내 성대한 연회를 열터이니 참석해 즐겨주기 바라네." 하면서 비월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훈바였다. "감사하옵니다. 그럼 연회가 시작될때까지 잠시 물러가도 되겠사옵니까?" 비월은 바닥이 빙그르 도는 걸 느끼며 파라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파라가 비월의 상태를 눈치채고 장로들에게 눈치를 보냈다. 장로들도 곧 비월의 상태를 눈치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면서 정말 힘든 회의 였다느니 피곤하다느니 하면서 비월의 상태를 숨기기위한 연막을 쳤다. "준비가 되면 부를터이니 쉬어도 좋다." "감사하옵니다. 그럼 연회때 뵙겠습니다. " 자리에서 일어난 비월이 파라의 팔을 잡고 회의실을 나가자 침묵하고 있던 차람이 입을 열었다. "놀라운 자이옵니다. 어제 도착해서 바로 회의를 하지 않고 여기저기 살핀 것은 오늘 있을 회의에 대비하여 미리 사전조사를 해서 대안을 제시하기 위한 방책이였던 같습니다. 무식하다고 전해지는 흑호족에 저런 인재가 있다니 천만 뜻밖이였습니다. " "게다가 아름다워! 내 이때까지 작은 것이 아름다워 보이기는 처음이야." 차람은 훈바의 말에 흠칫했다. 아무래도 훈바의 눈빛이 마음에 걸렸다. 절제가 부족한 화룡족은 전투에 있어서는 절대로 물러서지않아 상대방에게는 무척이나 두렵고 골치아픈 존재인 만큼 내부적으로 문제도 많았다.흑호족이 단순무식하다면 화룡족은 과격무절제하였다. 흑호족이 무식하여 당했다면 화룡족은 알면서도 도발당하면 참지못해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어느쪽이 더 낫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으나 그 후유증은 화룡족이 더 심했다. 왜 자신이 당한지를 모른다면 단순히 약해서 그런가보다고 하고 말겠지만 알면서도 당한다면 그 순간만 참았으면 당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을 알기에 뒤늦은 후회로 머릴 쥐어뜯고 싶은 심정으로 자기 연민에 빠져 허우적거리기 일쑤였던 것이다. 그중에서도 훈바의 자제력은 그야말로 최악이였다. 그나마 머리가 비상하고 대처능력이 뛰어났기에 망정이지 머리마저 없었다면 진작에 화룡족의 족장은 바뀌어도 수십번 바뀌었을 것이다. 상대방의 함정에 빠져서도 교묘하게 빠져나와 오히려 상대방을 공격하는 능력도 재능이라면 가장 커다란 재능이였다. "안됩니다. 엉뚱한 생각을 하시는 거라면 이번만큼은 제가 무슨일이 있어도 막을 것입니다. " 단호한 차람의 말에 훈바가 눈을 치켜떴다. "중요한 협상대상자입니다. 행여라도 일을 그르치셔서 저희부족의 오랜 숙원을 풀 절호의 기회가 사라진다면 저는 목숨을 걸고서라도 훈바님을 막을 겁니다. " 오랜 숙원이란 말에 훈바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그리고 치켜떴던 눈을 제자리로 돌렸다. "참아보도록 하지 ." "절대로 참으셔야 합니다." "제기랄, 알았어!!!!!!!" 훈바가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가버리자 차람은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어버린 어깨에 힘을 뺐다. 정말 죽을 각오까지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손이 빠른 그들의 족장은 오늘안으로 일을 저지르고도 남았을 것이다. 부족의 오랜 숙원만 아니였다면 훈바는 자신을 베고서라도 자기뜻대로 하고말 인물이였다. 다행이라면 다행이였다. 차람의 걱정을 아는 지 모르는 지 해가 완전히 지고 달이 뜰무렵에 준비된 연회에 나타난 비월의 모습은 신비로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 역시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오늘만은 아니였다. 힐끗 훈바의 눈치를 보니 비월을 보는눈이 심상치 않았다. 차람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제발 훈바가 이성을 잃어버리지 않기를 빌고 또 빌었다. 훈바가 옆에 앉아 있는 무희가 따르는 술을 마실때마다 차람은 가숨이 내려앉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절제력이 부족한 그들의 족장이 술이라도 취한다면 그야말로 사고아닌 사고가 날 것이 뻔했던 것이다. 훈바가 앉은 자리로 다가온 비월이 연회에 불러준것에 대해 감사의 인사를 했다. 훈바가 호탕하게 웃으며 마음껏 즐기고 가라고 하자 비월이 웃었고 훈바의 웃음소리는 멎어버렸다. 차람이 급히 훈바의 옆에 있는 무희에게 눈짓을 보냈다. 만일을 대비해 차람은 평소에 훈바가 가장 좋아하는 무희를 일부러 훈바 옆에 앉혀서 훈바가 이상한 행동을 하려는 즉시 훈바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리도록 하라고 지시했던 것이다. "훈바님 제가 준비한 춤을 보여드릴까요?" 그제서야 비월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던 훈바가 무희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순간 안도의 숨을 내쉰 건 차람뿐만이 아니였다. 파라역시 비월을 쳐다보는 훈바의 노골적인 시선에 긴장을 했던 터라 훈바가 시선을 돌리자 안도하며 지정석으로 가서 훈바의 시선이 비월에게 닿는 중간에 앉아 비월의 모습이 가려지도록 했다. 비월은 아직 체력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 앉자마자 파라의 옆구리에 기대었다. 파라가 걱정스러운 듯 비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음악이 바뀌고 화려한 옷과 장식을 한 무희가 유혹적인 춤을 시작하였다. 무희의 춤을 생전처음보는 비월과 파라는 넋을 잃고 화려한 춤사위를 쳐다보았다. 발끝하나로 하늘까지 가볍게 날아오르고 뱅글뱅글 돌때마다 넘어지지않을까 걱정하면서 열심히 보느라 훈바의 시선이 무희를 떠나 비월에게 닿아 있는 건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훈바의 시선을 느낀 건 차람뿐이였다. 차람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쥐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이토록 긴장되고 시간이 가지 않는 연회는 정말 처음이였다. 밤이 깊어갈수록 연회는 질탕해졌고 비월은 그 소란 와중에도 파라에게 기대어 잠이 들어있었다. 차람은 훈바가 무희를 끼고 연회장 밖으로 나가는 뒤모습을 보고서야 긴장을 풀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전쟁터에 나가 피터지게 싸우는 것이 나을 거라고 생각하는 전형적인 화룡족다운 차람이였다. 무희의 교성이 높아질수록 훈바는 갈증에 시달렸다. 아무리 무희를 탐해도 갈증이 사라지지않았다. 자꾸만 뇌리에 남아있는 건 자신을 보며 미소짓던 비월의 모습이었다. 참아야 한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그럴수록 마음속에서는 더욱더 그 미소를 차지하고 싶어졌다. 그 길다란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자신의 몸에 감고 싶었다. 아래에 있던 무희가 '헉'하고 신음소리를 터트렸다. 그렇지않아도 큰 훈바의 것이 질감을 늘렸던 것이다. 그녀로서는 훈바가 왜 이렇게 흥분하는 지 알 수는 없었지만 이제까지 느껴본 적이 없을 정도로 만족스러웠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훈바가 상처입은 짐승마냥 거칠게 움직이자 무희의 신음소리는 애절한 비명소리로 변하였다. 밤새내내 훈바는 좀처럼 지칠 줄 모르고 이미 기절한 무희를 탐했다. 아침에 훈바의 침상을 찾아온 차람은 비명을 삼켜야 했다. 노련한 걸로 유명한 무희가 의식을 잃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다리사이에서 흘러내리는 피라니..... 처음도 아닌 무희를 이정도로 만들어 버린 훈바가 두려워지는 차람이였다. "새벽녘에 떠났습니다." 차람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밖으로 달려나가는 훈바를 간신히 붙든 차람은 절망적인 기분이였다. "이미 떠났으니 지금 가셔도 소용없습니다. 게다가 지금 훈바님은 알몸이시라구요." 차람의 손을 뿌리치려던 훈바의 어깨에서 힘을 빠져나갔다. "작별인사도 없이 떠나다니 무례한 자들이로군." "어쩔수 없었습니다. 밤새 또 다른 부족이 멸족되었다고 연락이 와서 급히 떠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 "뭐? 또? 도데체 천제는 무슨 생각이신지....." 2. 만월의 축제. 품가와 척하는 죽일 듯이 자신의 앞을 가로 막고 있는 서나려를 노려보았다. "당장 비켜서지 못하겠는가." 품가의 호령에도 서나려는 눈썹하나 꿈적하지 않았다. "어허, 이 무슨 무례인가? 비켜서시게." 척하의 달래느 듯한 말투에도 서나려는 움직이려 들지않았다. "네놈이 감히 우리를 무시하려는 것이더냐? 아무리 천제폐하의 귀여움을 받는다해도 네 건방진 태도는 정녕 두고 볼 수 없을 지경이로고, 내 천제폐하께 질책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네놈을 기여코 사단내고 말리라." 품가가 등에 매고 있는 검을 꺼내려는 걸 척하가 막았다. "참게, 그보다 중요한 일이 있지 않은가." " 내...내 .. 저놈을 가만히 두면...." 품가는 분이 풀리지 않은 듯 당장에라도 서나려를 죽이지 못하는 것이 한이라는 듯 노려보고 있었다. "서나려, 어이하여 우리를 막는 설명하여라. 그제서야 품가와 척하를 없는 자 취굽하던 서나려가 입을 열었다. "소유주님과 계십니다. " 순간 품가와 척하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언제부터 와 계신가?" 먼저 정신을 차린 척하가 물었다. "오늘 아침에 도착하셨습니다. " 품가와 척하는 서로를 쳐다보았다. 소유주가 와 있다면 바로 옆에서 전쟁이 일어난다해도 꼼짝도 하지 않을 천제를 잘 알기에 두사람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소유주가 나온 후 기별해주겠는가?" 아까전의 기세는 어디로 갔는 지 힘없이 품가와 척하가 말하자 서나려가 고개를 끄덕였다. 율파는 의식을 잃은 소유주의 검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시나이라를 잃어버린 후 미쳐서 날뛰는 그에게 탁제균이 데려온 아이가 소유주였다. 처음에는 그가 시나이라를 먹고 그의 외모로 변형되었다는 것을 알고 소유주를 죽이려 했지만 차마 너무나 닮은 모습에 검을 쳐들었던 손을 내렸다. 이제는 이세상에 없는 아이. 그나마 그아이를 먹어서 그아이의 능력을 받은 소유주라도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에 율파는 시나이라에게 주지 못했던 감정을 소유주에게 주었다. 차마 시나이라에게 할수 없었던 그렇지만 그아이가 자라면 해보고 싶어했던 행위를 소유주에게 행했다. 그 뜨거운 감정을 소유주에게 쏟았다. 시나이라에게 해주지 못했던 것을 모두 주었고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주었다. 로수족의 날개도 주었고, 지룡족의 생명수도 가져다 주었다. 그외 여러부족이 가지고 있는 보물들을 다 가져다 주었다. 주지 않으려하면 멸족을 시켜서라도 가져다 주었다. 하지만 이아이는 시나이라가 아니였다. 선물을 받고 기뻐하는 소유주를 보며 흐뭇해하는 것도 잠시 혼자가 되면 떠오르는 건 맑으면서도 깊은 눈동자로 자신을 쳐다보던 작은 얼굴이였다. 저승의 신이 데려가 버린 아이. 율파는 고개를 저어 시나이라의 모습을 지웠다. 이제 그에게는 소유주가 있었다. "탁제균!!!" 찢어지는 듯한 고함소리에 모든 사람이 돌아보았다. 정원에 사뿐히 내려선 자는 새하얀 날개를 가진 금발머리가 보석처럼 반짝이는 자였다. 여신처럼 아름다운 그모습에 사람들은 넋을 잃었다. 숙하는 사람들의 시선은 아랑곳없이 탁제균이 머물고 있는 곳으로 곧장 걸어갔다. 투명한 얼굴에 홍조가 어렸고 가냘픈 몸이 바람결에 하늘 거리는 듯 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아름다운 얼굴에서 시선을 돌려야했다. 숙하의 시선에 어린 독기때문이였다. 누군가 걸리면 반드시 팔다리 하나는 부러져야 멈춰질 듯한 독기였다. "탁제균!!" 굳건히 닫혀있는 육중한 문을 거칠게 밀며 무작정 들어선 숙하는 그곳에 있는 이외의 인물에 움찔 놀랐다. 자신을 쳐다보는 탁제균과 자주의 모습에 숙하의 안색이 핼쓱해졌다. "어인 일이신가? 숙하비령장군!!!!" 탁제균이 빙글빙글 웃으며 당황하여 얼어비린 숙하에게 물었다. 숙하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자신이 그를 찾아온 이유를 까맣게 잊어비리고 말았다. 그저 두려운 듯 자주의 안색을 힐끗거리며 쳐다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전쟁의 신이라 불리기도 하고 저승의 신이라 불리우는 자! 시선하나로 마주선 자를 얼려버리는 자!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했다. 천제마저도 두려워하는 자가 그였다. 자주는 머뭇거리며 입을 열지 못하는 숙하를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서 탁제균에게 허리를 숙여보이고 숙하가 열어젖혀 놓은 문으로 다가갔다. 숙하는 그가 자신의 옆까지 다가오자 움찔 놀라며 몇걸음 비켜섰다. 몇걸음 떨어진 곳에서도 느껴지는 그의 냉기에 숙하는 등골이 서늘해지고 식은 땀이 흐르는 것만 같았다. 오래전 선천제의 반려였던 명주라는 자가 그를 사모하여 천제를 죽이고 자신의 아일르 천제위에 올려 자주를 자신의 새반려로 맞이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그 음모는 사전에 자주에 의해 밝혀졌고 자주는 직접 자신의 손으로 천제에게 반역을 일으킨 명주를 잡아갔다. 천제는 명주에게 이유를 물었고 명주는 자신의 마음이 거부당한 실의에 빠져 죄를 인정하고 스스로 죽어갔다. 그 일이후 누구도 자주를 좋아한다해도 내색하지 않았다. 자신을 좋아한다는 자를 냉정하게 내쳐버린 그가 무서웠던 것이다. 그 돌연변이 천이족이 나타나기 전까지 누구도 자주에게 다가가지도 자신의 마음을 내색하지도 못했다. 그 천이족은 여리여리하고 가냘픈 외모와 달리 성격은 화룡족에 버금갔다. 게다가 고집은 말도 못하게 쎄서 아무도 당하지 못할 지경이였다. 천제는 물론 십이지천 누구도 무서워하지 않았고 천궁을 마음대로 휘젓고 다녔다. 결국 감당하기 힘든 처지의 천이족은 자주에게 넘겨졌다. 그날 이후 자주가 살고 있는 월궁에는 날마다 전쟁을 방불케하는 소란이 벌어졌고 가끔 어전회의에 참석하는 자주의 얼굴에 새겨진 손톱자국에 모두들 경악했다. 그리고 자주에게 대든 그 천이족이 자주의 손에 죽었을 거라고 단정했지만 월천의 소란은 계속되었고 어느날인가 자주가 천제에게 그 천이족을 반려로 맞이하겠다고 선언했다. 그 사건은 천지개벽이후 천수천인전에 버금가는 충격을 가져왔다. 특히 선천제의 동생이며 자주를 연모하던 혜림아는 그 소리에 혼절을 해버릴 지경이였다. 반려의 식에 나타난 천이족은 그야말로 꽁꽁 묶여있어서 다른 이들을 더욱 놀라게 만들었다. 식이 진행되는 동안 천이족은 분을 이기지 못하고 잠시도 쉬지않고 소리를 질러대고 욕설을 내뱉었지만 자주는 못들은 척 아예 무시해버렸고 결국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제풀에 지쳐버린 천이족이 자주가 하는대로 끌려다녀야 했다. 제일 중요한 맹세의 의식을 어떻게 치룰까하고 조마조마해서 지켜보던 사람들은 자주의 맹세가 끝나고 천이족이 맹세의 말을 할 차례가 되자 잔뜩 긴장한 채 천이족을 쳐다보았다. 천이족이 득의의 미소를 짓자 모두들 그가 맹세의 의식을 거부하리라는걸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천이족이 입을 열어 말을 하려는 순간 자주가 미소지었다. 미소짓는 자주의 모습에 넋을 잃어 엉뚱한 대답을 한 천이족을 비난할 처지가 못되는 것이 그날 그 식장에 있던 자들은 모두 자주의 미소짓는 모습에 넋을 잃어버려 모든 사황을 잊어버렸던 것이다. 한마디로 자주의 미소는 사람도 죽일 수 있을 정도로 살인적이였다. 나중에야 정신을 차린 천이족이 이건 무효라고 길길이 날뛰었지만 이미 식은 끝난 후였다. 그날 이후 그 반려의 식에서 자주의 미소를 보았던 자들은 한동안 몇날며칠동안 끙끙 앓았다는 후문이 있었다. 그러고 혹여나 해서 참석했던 혜림아는 몸져 누워버렸다고 한다. 어거지로 반려의 식을 치룬 자주와 천이족이 돌아간 후 월궁에서 두문불출하는 그들의 행동에 별의별 소문이 다 퍼졌으나 확인된 것은 없었다. 몇번인가 도망치다 잡혀들어가는 천이족의 모습이 몇몇의 눈에 띄었을 뿐 자주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다. 그런 그가 모습을 드러낸 것은 몇년의 시간이 지난 후였다. 그의 손에는 나이가 어려보이는 작은 아이가 안겨있었다. 그 천이족을 그대로 닮은 외모에 순백의 날개가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아이였다. 낯가림이 심하여 좀처럼 자주 곁을 떠나지 않던 아이! 그러면서도 자신의 보호자인 자주마저 거부하는 시선으로 보던 아이! 그가 모습을 드러낸 얼마 후에 알려진 사실은 자주의 반려였던 그 천이족의 죽음에 대한 소문이였다. 알을 낳은 후 체력이 급격히 떨어져 얼마후 호흡이 멎어버렸다는 것이다. 대부분 그를 아는 자들은 수컷형으로 알을 낳아서라고 단정지었다. "어째서 그가 당신을 찾아온거지요?" 숙하는 소문으로만 들었던 자주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흑진주처럼 반짝이던 검은 머리카락과 그 싸늘한 표정! 수근거리는 소문만으로도 충분히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그의 외모와 냉기는 상상을 불허했다. 반려를 잃었고 하나뿐인 후계자까지 잃어버린 그의 냉기는 해가 갈수록 더해갔다. 그런 그가 탁제균을 만나고 있다니 놀라운 일이었던 것이다. "대답할 수 없는 건 묻지말아줘요. 월천궁주에게 죽고 싶지 않으니까." 항상 느글거리고 사람 좋아보이는 미소로 무장하고 있는 탁제균이지만 자신에게 손해가는 일은 절대로 하지않는다는 신조를 가진 그를 잘알기에 숙하는 자주의 일은 더이상 묻지 않았다. 솔찍히 그 역시 자주가 두려웠던 것이다. "그보다 어인 일로 이곳까지 왕림하셨지요? 비령 장군?" 자주가 있었을 당시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던 용무가 자주가 사라진 지금 번뜩 떠올랐다. 용무가 떠오르자 마자 숙하의 얼굴에 무시무시한 살기가 가득 어렸다. " 탁제균!! 당신이 나에게 이럴 수 있는 건가요?" 탁제균은 어렴풋이 숙하가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짐작하였으나 눈꼽만큼도 내색하지 않으면서 정말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마저 갸웃해보였다. "다짜고짜 무슨 말인가? 이럴 수 있냐니...." "시치미 떼지 말아요." 그래도 모르겠다는 표정의 탁제군의 모습에 숙하는 이를 갈았다. "소유주를 다시 데려온 자가 당신이 아니란 말인가요?" 숙하의 얼굴에는 확신이 서 있었다. 맨처음 소유주를 천궁에 데려온 자가 탁제균이니 이번에도 빙해궁으로 유배되었던 소유주를 데려온 것도 그라고 단정지은 것이다. "소유주가 돌아왔는가?" "당신이 데려왔잖아요!!!!!" 숙하는 당장이라도 탁제균에게 달려들어 목이라도 조를 기세였지만 탁제균은 침착하기만 했다.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이구려. 난 이곳을 떠난적이 없다오." "거짓말!!!" "내가 뭐가 아쉬워서 거짓말을 한단 말이오." 그제서야 숙하는 더이상 그를 다그치지 못하고 멍하니 탁제균을 쳐다보았다. 그라고 확신하고 따지려 왔는 데 그럼 누가..... "그럼 누가?" "그걸 어찌 알겠오.'' "그런 가짜 시나이라를 누가...." 풀지못한 응어리가 많은 듯 숙하는 진정을 하지 못하고 안절부절을 못했다. "천궁 문지기에게 물어보구려. 소유주를 데려온 자가 누군지 그는 알게 아니오." 그제서야 불안정하게 이리저리 정신없이 왔다갔다하던 숙하의 발걸음이 그림처럼 툭 멎었다. 너무 격분하여 지레짐작으로 이런 짓을 할 자는 탁제균 밖에 없다고 단정해 버려서 가장 간단한 이치를 미처 생각하지 못한 걸 안 것이다. 작별인사도 없이 서둘러 떠나버리는 숙하의 뒷모습을 보며 탁제균은 픽 웃었다. 솔찍히 직접 데리러 가지는 않았지만 일이 그렇게 진행되도록 유도한 것은 자신이였던 것이다. 숙하는 온몸으로 몰려오는 허탈감을 감당하기 힘들어 비틀거렸다. 한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는 자가 자신을 배신하다니.... 하물며 소유주를 빙해궁으로 유배되도록 같이 모의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제와서 자신을 배신하고 소유주르 데려오다니.... 용서할 수가 없었다. 정신을 차림 숙하는 따질 건 따져야겠다는 심정을 날개를 펴 그가 있는 만화궁으로 날아갔다. 천궁의 남쪽에 위치한 만화궁은 한번도 꽃이 진적이 없는 꽃들의 궁전이였다. 선천제가 그를 위해 선물한 곳으로 십리밖에서도 만화궁의 향기를 밭을 수 있다는 말처럼 만화궁은 온갖 기화요초와 향기가 진한 향초들이 많았다. 그러나 지금 숙하는 그걸 감상할 기분이 아니였다. 가슴속에서 만화궁의 주인에 대한 분노와 미움이 들끓어 오르고 있었기 때문에 만화궁의 화려한 꽃들도 숙하의 마음을 달래주지 못했다. 만화궁에 내려서자 마자 숙하는 그가 항상 머물러 있는 곳으로 곧바로 찾아갔다. "혜림아님!!" 그렇지 않아도 근자에 숙하가 자신을 찾아오리란 것을 알고 마음을 다지고 있던 혜림아는 숙하의 목소리가 들리자 긴 한숨부터 내쉬었다. 아름답지만 도도하여 접근하기 힘들어 한번도 다른 수컷과 교미한 적이 없고 율파에 대해 남다른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도와주고 싶었지만 그만큼 자신 역시 마음속에 간직한 열정을 지울 수가 없어 누명을 씌워 유배를 보낸 소유주를 데려올 수 밖에 없었다. 그 천이족을 닮은 아이를 그 역시 두번다시 보고 싶지 않았지만 그를 볼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귀뜸에 혜림아는 실망한 숙하의 모습은 염두에도 없었다. 그를 볼 수 있다면 그를 기쁘게 할 수만 있다면 혜림아는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숙하가 배신감을 느끼리란 것이 떠올랐지만 무시했다. 숙하를 도와주고 싶긴 하지만 자신의 마음을 위해서라면 몇번이고 배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변명같지만 소유주에게는 죄가 없지 않은가....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더니 벌컥 문이 열렸다 . 비월은 힐끗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고는 대번에 눈살을 찌푸렸다. 저절로 한숨도 나왔다. "파라." 그의 양팔에는 평소 비월의 목욕을 도와주는 어린 아이 두명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파라에게 붙잡혀 있는 아이들의 표정을 보니 대충 무슨일이 벌어진 것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 안으로 들어오려던 파라를 어떻게든 막아보려 했으나 힘이 딸려 막지 못한 듯 울상이였다. "지마, 계림 나가 있으렴.." 그제서야 파라의 두팔을 놓고 그를 한번 쏘아본 후 터벅터벅 밖으로 걸어나갔다. 파라는 싱글벙글 웃으며 탕 옆으로 다가오더니 허리를 숙여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비월에게 손을 뻗어 안아올렸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이건 정말...." 얼굴이 붉어진 비월이 손을 뻗어 탕 옆에 둔 천을 집으려 했으나 손이 닿지 않았다. 이때까지 맨몸으로 마주선 적이 없어 당황스럽고 낯 부끄러웠다. "지마와 계림이 문밖에서 걱정하고 있더군. 너무 오래있는다고....." 말인 즉슨 아이들이 걱정하고 있어 자신이 대신 들어와 본거라는 여운의 말이였지만 빙글빙글 웃고 있는 얼굴을 보면 전혀 신용이 가지 않는 말이였다. "제가 보기엔 억지로 밀고 들어오려는 당신을 아이들이 막으려고 한 것처럼 보이던데요. !!!! ..잠깐 뭐하는 거에요? 파라!!! 하지 말아요.." 파라가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는 비월의 어깨에 입술을 대고 그 물방을 삼켰다. "파라!!!그건 먹는 물이 아니라구요. 하지 말라니까요." 몸을 비틀어도 보고 두손으로 밀어도 보았다. 그몸짓이 재미있는 지 파라는 자꾸만 웃으며 더욱 짖궃게 천천히 핧아댔다. 파라가 웃는 모습에 비월은 열이 받아버렸다. 그래서 자신의 어깨를 감싸들고 있는 파라의 손목에 얼굴을 대고 있는 힘껏 깨물어 버렸다. "어엇!!!!..이런.." 파라가 놀라서 비월을 놓았다. 피는 나지 않았지만 이빨자국이 선명한 것이 악의가 가득했다. 비월이 득의의 미소를 지으며 탕옆의 천을 들어 자신의 몸에 둘렀다. "월아, 너 정말.... 네가 고양이냐? 깨물다니...이것봐라 선명하게도 물었네." "그러니까 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이빨자국을 쓰다듬던 파라가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쾌재를 부르고 있는 비월의 모습을 보고 히죽 웃었다. 솔찍히 물린 곳이 아파서 비월을 놓아준 것이 아니였다. 다소곳하고 점잖은 성격의 그가 외양과 달리 어린아이처럼 자신을 깨물어버리리라고는 상상도 못했기 때문에 놀라서 손을 놓아버린 것이다. "미리 경고했잖아요. 파라는 혼이 나야 정신을 ...우왓..!!!." 파라는 껄껄 웃으며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훈계를 하려는 비월을 덥썩 들어올렸다. "그래서? 결국에는 이기지도 못할 거면서 도발을 했다 이거군." "누가 도발을 했다는 거에요?" 비월은 얼굴이 새빨갛게 변해서 소리를 질렀다. 자꾸만 비월의 몸에 둘뤄진 천을 벗기려는 파라의 손을 잡고 안간힘을 쓰느라 비월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게다가 파라가 침상이 있는 곳으로 가려고 하자 기겁을 하며 바둥거렸다. 급히 호하가 어디있는 지 기억을 떠올리고 호하가 멀리 나가있음을 기억해내자 허겁지겁 파라의 옷을 움켜쥐었다. "자..잠깐만.. 잠깐만요. 저기 파라, 바람 쐬고 싶어요." 걸음을 옮기던 파라가 우뚝 서더니 어색하게 웃고 있는 비월을 보더니 히죽히죽 웃었다. "이대로?" 하며 비월의 몸을 간신히 가리고 있는 천을 눈으로 쫓았다. 비월의 시선도 파라의 시선을 따라 가다 거의 벗겨진 천을 보고 이맛살을 찌푸렸다. 힐끗 파라를 돌아보니 눈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그게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 '흥' 콧웃음을 치고 외면하자 파라가 유쾌하게 웃으며 비월을 침상으로 데려가 조심스럽게 비월을 침상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마른 천을 가져와 아직까지도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는 비월의 머리를 부드럽게 말려주었다. 한동안 화가 나서 뻣뻣하게 굳어있던 비월도 얼마지나지 않아 긴장이 풀렸는 지 어깨에 들어간 힘이 빠지고 파라에게 기대었다. 그리고 파라가 흥얼거리는 노래에 귀를 기울이다 그대로 잠이 들었다. 혜림아는 한바탕 휘젓고 두고보자는 시선으로 엄포를 놓는 숙하를 보내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어디론가 향했다. 만화궁에는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비밀궁이 하나 더 있었다. 지하계단을 내려가면 들어갈 수 있느 이 궁은 만화궁에서 일하는 몇몇만 알고 있는 통로로 그들은 이곳이 저주 걸린 곳이라 여겨 근처에 볼일이 있어도 멀리 돌아갈 정도로 꺼리는 곳이였다. 그래서 그곳으로 통해서 갈 수 있는 지하의 비밀 궁전이 있다는 것은 아무도 몰랐다. 게다가 이 계단의 끝 지하 비밀궁전의 입구는 혜림아만이 풀 수 있도록 봉인이 되어있었다. 혜림아는 어둑한 계단을 내려가며 얼핏 보았던 자주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달아오르고 속에서 거친 파괴 욕구가 솟구치고 있었다. 봉인을 풀자 평범한 돌문이 나타났다. 돌문은 육중한 무게에도 불구하고 혜림아가 밀자 소리도 없이 스르르 열렸다. 돌문을 열자 안을 밝히고 있는 야명주의 빛이 새어나왔다. 혜림아는 등뒤로 문을 닫아 다시 봉인을 걸고 문 안 쪽에 있는 또 다른 계단을 밟아갔다. 처음에는 좁았던 계단이 내려갈수록 넓어졌고 나선 모양으로 되어있어 위에서는 밑부분을 볼 수 없고 아래에서도 윗부분을 볼 수 없는 구조로 되어있었다. 둥근 벽면에 기대어 한참을 내려가자 넓은 광장이 나왔다. 마지막 계단을 밟고 혜림아가 본 것은 한편의 지옥도였다. 서로 먹이를 차지하기 위해 싸우는 짐승들의 아수라장이 혜림아의 등장으로 한편의 그림처럼 정지하였다. 붉게 충혈된 그들의 눈에는 오로지 혜림아가 먹을 수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만을 가름하려는 듯 했다. 그러나 곧 혜림아가 살아있는 생물임을 확인하자 관심을 끊고 오로지 차갑게 식어버린 천인족의 시체를 차지하기 위해 상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죽는 즉시 폐기처분되어야할 천인족의 시체들이 이곳에서는 아무 제제도 없이 짐승들에게 먹히고 있었다. 그것도 천궁의 일부분인 만화궁의 지하에서..... 혜림아는 터져나오려는 구역질을 간신히 참아냈다. 비틀거리며 그 아수라장을 건너 더 안쪽으로 걸러갔다. 여러개의 입구가 나타나고 그중에서도 가장 어두운 빛이 새어나오는 방으로 다가간 혜림아는 그방에서 흘러나오는 광장에서와는 다른 소리에 걷는 속도를 늦추었다. 입구로 들어선 혜림아는 그 넓은 방에서 벌어지고 있는 장면에 처음보는 것도 아니면서 얼굴을 붉혔다. 방안에는 자욱하게 향이 피어오르고 있었고 그 속에서 수많은 자들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교미를 하고 있었다. 이미 천인족의 시체를 먹어 변형된 수인족 즉 천수족들이 죽지않고 잡혀온 천인족들을 범하고 있었다. 혜림아는 그 광경에 다시 한번 현기증을 느꼈다. 자신이 저지른 일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 새삼 깨달았지만 이미 돌아서기엔 그 죄가 너무 커서 외면하는 수밖에 없었다. 더 안쪽으로 발걸음을 옯기자 천수족이나 천인족이 교미후 낳은 알들이 볕이 드는 유일한 방에 놓여있었다. 이곳은 지하궁에서 유일하게 볕이 드는 방으로 만화궁이 처음 지어질 당시부터 있던 방이라고 했다. 만화궁을 짓던 자는 이곳의 볕이 가리지않도록 만화궁을 지었고 그것을 기억하는 자가 사라진 지금도 이렇게 환하게 햇볕이 들고 있었다. 알들 옆에는 이미 깨어진 알껍질들이 어지럽게 널려있었다. 그것은 이곳에서 이미 태어난 아기들이 많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아이들이 어디로 보내지는 지는 혜림아로서는 알 수 없었지만 그 알껍질을 볼때마다 섬뜩한 미래가 상상되었다. 천수족끼리의 교합에서는 대부분 예전 수인족의 형태로 아기들이 태어나지만 천인족과 교합하면 대부분 천수족의 모습이거나 가끔 천인족의 모습으로도 태어나고 특이한 힘이나 능력을 가진 돌연변이들도 태어났다. 가토가 천인족을 죽이지 않고 잡아들이는 것은 이런 이유때문이였다. 결국 이곳에서도 계속 알을 낳다가 죽게되는 건 마찬가지 였지만 . 하여간 이곳에서의 천인족은 인간이 아닌 알을 낳는 물건일 뿐이였다. 이미 교합의 방에 들어서면서 마신 향에 취해 죄책감을 잊어가고 있는 혜림아의 등뒤로 누군가 다가와 어깨를 끌어안으며 옷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혜림아는 나른하면서도 몽롱한 기분에 취해 등뒤의 자가 자신의 옷속에서 유실을 건드리자 온몸이 저릿해지며 다리에 힘이 풀려 비틀거렸다. 혜림아의 반응에 등뒤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리고 손이 바빠졌다. 혜림아는 이미 이성을 잃고 상대가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수컷형으로 알을 가지게 되면 위험하다는 것을 알지만 이미 그런건 까맣게 잊어버린지 오래였다. 오로지 목덜미를 깨물고 유실을 건드려대는 손길에 이미 욕정에 사로잡혀 온몸에 들끓는 열기가 발산되기만을 바랐다. 밖에서 들리는 비명소리나 신음소리, 그리고 자신을 지켜보는 시선들 어느것도 혜림아의 이성을 찾아주지는 못했다. 지하궁을 뿌옇게 흐리고 있는 연기속에는 환락성분이 담긴 최음가루가 섞여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이 지하궁으로 내려올 때마다 혜림아는 상대가 주군지도 모르고 관계를 가졌다. 때로는 암컷과 때로는 수컷과...어떨땐 여러명과 같이... 그러나 언제나 혜림아가 환락에 취해 보는 상대는 자주였다. 한번도 자신에게 미소 지어준 적이 없는 자주가 이곳에서는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탐하고 있었다. 이것이 환상일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혜림아는 그 환상에 매달려 다리를 벌리고 상대를 받아들였다. 그 모습을 냉정하게 지켜보는 자는 지하궁의 또다른 주인인 가토였다. 그리고 만월의 축제는 연인들의 축제였다. 이때에 이르면 전투형이던 수컷 중에서 일부가 암컷형으로 변이한다. 그리고 화려한 옷을 입고 수컷을 유혹하는 것이다. 이 기간중에는 사소한 다툼은 없어진다. 만월의 축제가 전부족적인만큼 천인족은 물론 지계족, 수인족조차도 서로를 발견하더라도 죽이지 않고 외면한다. 비월은 부담스럽게 쳐다보는 파라의 시선에 식은 땀을 흘리고 있었다. 올해는 기여코 비월을 안을 결심인 파라는 기왕이면 비월이 마음의 준비를 하기를 바라고 며칠전부터 부담스런 시선을 주고 있었던 것이다. 애써 그 시선을 외면했지만 비월은 그 시선이 낯간지러워 미칠지경이였다. 반려가 있는 수컷이나 암컷은 이때만큼은 다른 자들을 시중드는 일을 하였다. 만월의 축제에만 변이하는 자가 있는가하면 항상 변이하고 있는 자들도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수컷형으로 변이해보아야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체격의 소유자로 대부분 알을 닦고 보살피거나 병자들을 치료하는 일을 하였다. 때문에 만월의 축제가 아닐때에도 알은 태어나지만 가장 많은 알이 태어나는 때는 만월의 축제가 지난 다음달부터였다. "이건 파파베라(양귀비)꽃이고 이건..." 식은 땀을 흘리고 있는 비월의 침상에는 교합 때 흥취를 더하기 위해 자주 애용한다는 환각제를 비롯 기분을 좋도록 유지시켜주는 향초에 쾌락을 부추기는 최음제까지 여러가지 약재들과 재료들이 놓이고 있었다. "저기....파라? 왜 이런걸...." 비월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파라의 의도를 모르는 척 묻자 파라가 사납게 노려보는 바람에 비월은 움찔하며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올해는 그냥 넘어가지 못할 모양이였다. 이럴 때 호하는 어딜 갔는 지 코빼기도 보이지않아 비월의 속을 달이게 했다. " 아버지는 화룡궁에서 불러서 가셨다. " 누군가를 찾는 듯 자꾸 문을 쳐다보는 비월의 모습에 비월의 생각을 눈치 챈 파라가 퉁명스럽게 내뱉는 말에 비월의 안색이 굳었다. "무슨 일로?" "나도몰라 어제 그모산지 재산지 모를 자가 와서 아버지를 모시고 갔거든." "아니 그런걸 왜 이제야 이야기 하는 거에요? 장로들은요? 그들도 같이 갔나요?" "축제가 코앞인데 그들이라고 정신이 있겠냐? 아버지가 무슨일 있겠냐고 하시면서 몇명만 데리고 갔어. 축제 전에 오신다고 했으니 곧 오시겠지." 여전히 퉁명스럽게 말하는 파라였지만 좀전과는 달리 걱정하는 비월의 모습에 조금 긴장한 눈치였다. "도데체 무슨 일일까요? 그들과 만날 이유가 없잖아요? 저번 부상자들은 깨끗이 치료를 끝내서 돌려보내는 데...." " 별일 없을 거야. 곧 축젠데 설마 금기를 깨겠어?" 만월의 축제 때에는 철전지 원수라해도 죽이지 않는다는 걸 말하는 것이다. 별격정하지 말라는 파라의 위로에도 비월은 왠지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딴 생각에 빠지는 비월을 지켜보던 파라가 한숨을 내쉬더니 비월을 번쩍 안아들었다. 비월이 놀라 쳐다보자 씨이익 미소 짓고 성큼성큼 그대로 밖으로 나왔다. 비월은 떨어지지 않으려고 파라의 목에 팔을 둘러야 했다. 문을 열자 비월은 보지 못했지만 안을 기웃거리던 암컷들이 파라가 비월을 안고 나타나자 굳어버린 채 두사람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리고 곧 체념의 한숨을 내쉬더니 발걸음을 돌려 왔던 길로 사라졌다. 혹시나 올해는 하고 왔다가 여전히 파라의 관심이 비월에게 있음을 확인하자 포기하고 돌아가 버린 것이다. "오랫만이에요. 파라 어디 가는 길인가요?" 그때 수야가 건장한 수컷전사와 함께 두사람에게 다가왔다. 그러면서 파라에게 안겨있는 비월의 뒤통수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비월은 뒤통수에 느껴지는 살기에 차마 고개를 돌려 수야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파라의 어깨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그러자 뒤통수에 느껴지는 살기가 한층 강해져서 저절로 몸이 굳어지는 것 같았다. "수욕하러..." "월아랑 같아 간다는 말인가요?" "응 곧 축제라 그전에 긴장을 풀어주려고.,.." 미소지으며 머뭇머뭇 말을 줄이자 파라의 뒷말이 무엇인지 수야는 알 수 있었다. 자신이 그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른 자랑 당당하게 교합하겠다는 의사를 드러내는 파라가 수야는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그건 마치 자신에게는 흥미가 없으니 더이상 다가오지 말라고 단호하게 끊어내는 것과 같았다. "해조가 이번 상대인 모양이군. 잘 선택했다. 해조는 알아주는 전사인데다 건강하고 성실한 자라 그의 알도 튼실할거야. 그럼 이만." 수야는 파라의 발소리가 멀어지도록 고개를 들지 못했다. 혹시라도 자신이 다른 수컷과 함께 있으면 질투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질투는 커녕 잘해보라고 응원까지 해주다니.... 수야는 더이상 그에게 기대할 수 없음을 알고 절망했다. 파라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고갤르 들지 못하고 있는 수야의 발 아파에 무언가 뚝뚝뚝 떨어졌다. 해조가 그런 수야를 품에 안고 등을 토닥여주었다. 그는 물론 대부분의 부족민은 수야가 아주 어릴 때부터 파라만 바라봐 온것을 알았다. 성인이 되어 알을 가질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 그때까지 파라에게 접근하는 상대를 물리치며 그의 반려 자라를 노렸던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해에 호하가 어린 모습이지만 성인인 비월을 주워왔고 죽어버릴 줄 알았던 비월이 살아나자 파라는 그 곁을 떠나지 않고 보살피고 감싸고 돌았다. 그모습에 수야는 거의 반미치광이처럼 광분하였다. 길길 날뛰며 호하에게 항의하자고 장로들을 부추켰다. 자신이 죽여서 먹어버리겠다고 서슴없이 떠들고 다녔다. 하지만 말하는 것과 달리 한번도 전투에 참가해본적이 없는 수야가 비월을 죽이지 못할 것이란 걸 모두 알았기에 괴롭히는 걸 모르는 척, 못 본 척 해주는 걸로 수야의 화가 풀리길 바랐다. 물론 도중에 비월이 죽어버려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도 있었고. 한동안 비월은 수야에게 놀아나는 헝겊인형같았다. 부족민들은 비월을 괴롭히는 수야가 파라에게 발칵당하지 않도록 여러가지로 노력했고 그런 것을 눈치채지 못한 수야는 비월을 괴롭히는걸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열심히도 괴롭히는 것에 열중했다. 해조도 알면서도 모른 척 해주었지만 그의 생각은 부족민과 달랐다. 비월을 보는 파라의 눈에서 평범이상의 감정을 보고 혹여 비월이 죽기라도 하면 파라가 수야를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라는 걸 직감했다. 때문에 수야가 나무에 올려놓고 사라진 뒤 떨어져내리는 비월을 받아주기도 하고 물속에 빠트린 후에는 뭍으로 건져다두고 압사직전에 놓이면 비월을 누르고 있는 바위를 치우기도 했다. 그런데도 비월은 상처와 부상이 가실 날이 없었다. 좀처럼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수야의 괴롭힘은 비월이 침묵에서 깨어나자 멈추었다. 아니 그때부터 수야는 되돌아올 수많은 보복을 생각하고 숨어지내야 했다. 비월을 볼때마다 경기하듯 놀라는 수야를 보면서 해조는 저런 심장으로 어떻게 그런 짓을 했는 지 한심해하면서도 그 모습이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아직도 파라를 포기하지 못하고 질투심을 유발시켜보려는 듯 화려하게 변이한 후 자신을 찾아와 파트너가 되어달라고 했을 때 빤히 수야의 생각이 눈에 보였지만 해조는 승낙했다. 그리고 지금 눈믈을 뚝뚝 흘리며 서럽게 우는 모습이 너무 안쓰러워 위로를 해주면서 이녀석을 어떻게 홀려볼까 생각하는 해조였다. 게다가 이번에 자신과 교합하면 수야에게는 첫상대가 되는 셈일테고..... "물이 따뜻하네." 비월은 처음 와보는 동굴이 그리 어둡지 않은 것도 신기했고 물이 따뜻한 것도 신기해 자꾸 손으로 물을 떠올려 들여다보았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물이라니.... 그때 비월이 몸을 담그고 있는 물 주위로 향긋한 향이 나는 풀잎이 가득 떨어져 내렸다. 풀잎과 꽃잎은 물위에도 비월의 머리위에도, 젖은 몸위에도 떨어져 내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비월을 이곳에 데려다 놓고 사라졌던 파라가 헝겊 가득히 따왔는 지 향기나는 풀잎과 꽃잎을 비월이 있는 주위에 뿌리고 있었다. 비월이 쳐다보자 방글방글 웃었다. 그리고 곧 파라도 한곳에 옷을 벗어둔 후 물속으로 들어와 비월에게 다가왔다. 갈색의 피부가 물에 젖어 반질반질 윤기가 흘렀다. 비월은 파라가 다가올수록 가슴이 두근두근 빠르게 뛰는 걸 느끼고 당황했다. 붉어진 얼굴을 느끼며 제발 파라가 물의 열기때문이라고 착각해주기를 빌었다. 비월을 보는 파라는 약간 긴장한 듯 하면서도 묘하게 즐거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비월은 부끄러우면서도 그런 여유있어 보이는 파라의 모습에 괜히 심술이 솟아나는 기분이였다. "로즈마리라는 풀이야. 피로를 풀어주고 병에 강하게 해준다고 하더군." 어쩔줄 몰라하는 비월을 모르는 척 파라는 아기를 씻기 듯 비월을 씻겨주었다. 비월은 그 손길에 왠지모르게 코 끝이 시끈해져오는 걸 느끼며 미소지었다.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 글다가도 비월이 당황하거나 놀라면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고 비월을 배려해주는 그가 비월은 너무 ....사랑스러웠다. 그리고 ..미안했다. 그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건 아니지만 자신은 너무 약해서 알을 낳을 수도 가질 수도 없는 몸이 아닌가.파라가 족장의 후계자만 아니여도 반려로 맞이하겠다고 결의만 보이지 않았어도 비월은 자신을 속여가면서까지 그를 거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물며 그에게 반려만 있었어도... 아니면 자신이 알이라도 가질 수 있었다면....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파라가 잠든 비월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화룡천궁에 다녀온 아버지와 장로들이 두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안색에 불안한 생각이 들었지만 파라는 우선 비월이 깨지않도록 서두르지않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비월을 침상에 내려놓았다. 밖으로 나와 호하와 장로들을 마주쳐다보는 자리에 앉았다. 파라가 다가와도 그들은 멍하니 바닥만 쳐다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요? 왜 안색들이 그렇습니까?" 이쯤되면 주먹질이라도 한대 했을 호하가 잠잠했고 장로들은 안쓰러운 듯 파라를 쳐다보다 눈이 마주치면 급히 외면했다. 그모습에 왠지모를 불안을 느끼고 파라는 긴장하는 자신을 느꼈다. 말이 나오기도 전에 몸이 먼저 사태를 파악하고 대비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아버지?" 파라가 불안한 듯 자신을 쳐다보며 말을 꺼내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는 호하에게 재촉하듯 부르자 호하가 파라를 외면했다. 마치 파라에게 큰 잘못이라도 한 듯 그 표정에는 미안해하는 기색이 가득했다. '뭡니까?" 파라가 자신을 외면하는 아버지에게서 시선을 돌려 장로들을 쳐다보았다. 그들도 파라와 시선이 마주치는 것을 피하고 있었다. "화룡천에서 무슨일 있었던 겁니까?" 그제서야 장로 한명이 결심을 한 듯 여전히 파라의 시선을 마주치지 못한 채 입을 열었다. "화룡궁주가 월아를 달라고 합니다." 파라는 머리속이 번개에라도 맞은 듯 번쩍하고 타버리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한순간에 머리속이 텅 비어버리는 기분이였다.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한참 후에야 격렬한 기세로 일어선 파라가 비월이 잠든 침상으로 가려고 하자 호하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반려로 맞이시겠다는 구나." 파라의 움직임이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아무도 말을 꺼내지 못하고 한동안 멍하니 바닥만 쳐다보았다. 반려라 함은 만월의 축제나 그이외의 시기에도 단순히 알을 낳기 위해 교합하는 것과는 그 의미가 천지차이였다. 반려의 의식을 치루게 되면 두 당사자는 동등한 위치에 서게 되는 데 화룡족장 정도되는 자의 반려 자리라면 화룡족장의 권세를 그대로 가지게 되어 또 한명의 화룡족장이 생기는 것과 같은 일이였다. "왜 월아입니까?" "...." "그는 월아가 알을 낳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습니까?" '그럴지도 모른다고 설명했단다." "그런데도 월아를 반려로 맞이하겠다는 겁니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모를 정도로 어리석은 인물이 아닐텐데요." "너를 ...." 호하는 차마 입을 열기 어려운 듯 말을 끊어버렸고 장로가 또 한번 한숨을 내쉰 뒤 입을 열었다. "월아를 반려로 맞이신 후 자넬르 양자로 맞이하겠다고 하였다네." 그말은 흑호족을 화룡족과 통합시키겟다는 것과 같은 말이였다. 천인계를 유지하는 십이지천 중 한곳인 화룡족과 통합된다는 것은 곧 흑호족이 지계를 벗어나 천인족이 내리는 명령을 받지 않아도 되고 화룡족의 보호를 받는 동시에 수인족과 익수족등 수계족과는 완전히 분리되어 짐승취급을 받지않아도 된다는 의미였다. "어째서 월아입니까? ...왜요? 게다가 족장이 그런 조건을 내세운 걸 알면 화룡족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요." "근 한달간 오십여명이 죽어났다고 한다. 게다가 화룡족장에게만 주어지는 '단 한번의 절대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 "미쳤군요." 파라가 무심결에 내뱉은 말에 호하가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그래 화룡족장은 거의 미쳤다고 하더구나 화룡족의 암컷이나 수컷들이 누구도 그와 교합하지 않겠다고 했단다. 그의 침실에 들어간 자는 거의 죽어나오고 있단다. 살아나온다 해도 두번다시 알이나 가질 수 있을 지..... 의심스럽다고 하더라." "그런 자에게 월아를 보낼 수 없습니다."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파라가 진저리를 쳤다. 건강한 사람도 죽어나오는 방에 비월이 가다니.... 그날로 죽어나올 것이 분명했다. "차람인지 하는 재사의 말에 의하면 월아는 괜찮다고 하더라. 그들의 족장이 월아를 가지고 싶은 욕망에 저지르는 만행이라고 하니까. 처음에는 그도 반대하는 입장이였지만 지금은 제발 좀 와달라고 빌고 있는 상태더구나." "파라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는 힘이 없네 자네 심정은 충분히 이해하네만 우리가 월아를 보내지 않으면...." 말을 잇지못하고 머뭇거렸지만 그 방에 있는 모든 자들은 뒷말이 무엇인 지 알았다. 그들에게는 화룡족을 이길 힘도 없었고 저항한다해봐야 멸족당한 끝에 비월만 끌려가 노리개가 되겠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비월이 스스로 걸어가든가 아니면 끌려가든가 정도가 선택의 전부였다. 파라는 장로들의 말을 듣고 있는 비월을 쳐다보았다. 창백하게 질려가면서도 입가의 미소는 지우지 않고 듣고 있는 모습이 그의 가슴을 후벼파고 있었다. 그런 비월을 파라는 위로해 줄 수도 없었다. 비월이 힐끔 자신을 쳐다보았을 때도 그저 외면하고 말았다. 비월이 낮은 목소리로 허락을 했다. 그말이 그 한마디가 자신을 책하는 것만 같아 파라는 슬프게 웃었다. 당장에라도 모두를 버리고 그들이 죽든 말든 도망치자고 할 수가 없는 자신을 저주하며 파라는 말없이 웃고 있는 비월에게서 시선을 돌려버렸다. 호하가 나간 후 파라는 죄를 청하는 죄인처럼 비월의 시선을 외면한 채 그곳에서 나가지도 못한 채 기다리고 있었다. 부스럭 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선 비월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소리가 파라의 심장을 조각내고 있었다. "울지 말아요." 작고 따뜻한 손이 파라의 숙여진 고개를 들어올렸다. 시야가 흐릿한 게 눈물이 흐르고 있었던 모양이였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입술이 자신의 입술위에 떨어졌다. "걱정말아요. 저는 흑호족의 이단아 월아에요. 그러니 그곳에 가서도 슬프지 않게 잘 살거에요. 게다가 파라가 항상 옆에 있어 줄거구요..... 설마 날 그곳에 버려두고 멀리 가버리려는 건 아니지요?" "월아.. 왜 하필이면 ...왜 하고 많은 중에......" "그러게 말에요." 파라는 자신이 계속 울고 있는 곳도 모르고 비월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비월은 그저 파라의 눈물을 손으로 닦아주었다. 어쩔 수 없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된 것이 잘 된 일인지도 모른다는 것도..... 그리고 이런 자신을 살려주고 보살펴준 흑호족에게 보답할 기회이기도 하니까. 후회하지말자고 비월은 생각했다. 어차피 자신의 힘으로 바꿀 수 없는 것이라면 오히려 이용해보자고 다짐했다. 자신이 울면 파라가 더 괴로우리란 것을 알기에 비월은 웃었다. 3. 반려의 식 "화룡궁주가 반려의 식을 치룬다고?" 율파는 소유주가 먹여주는 과일을 먹으며 보고를 하는 척하와 품가를 쳐다보았다. 반투명한 천개너머 척하와 품가는 율파와 소유주의 모습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선명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얼핏 윤곽만으로도 누가 누군지 구분할 수 있었고 대충 무엇을 하고 있는 지도 알 수 있었다. 예전같으면 다른 궁주들 앞에서 저런 식의 행동을 한번도 보여준 적이 없는 반듯한 천제였건만 저 여우같은 소유주가 돌아온 이후 천제는 넋이라도 빼앗긴 듯 정사는 뒷전이요. 하루종일 소유주와 지내고 있었다. "상대는 누구라고 하던가?" "흑호족의 아이라고 합니다." 척하는 대답을 하면서도 여전히 소유주인 듯한 그림자를 노려보았다. "흑호족? 그 시체 처리를 하는 지계의 흑호족말인가?" "네." 품가 역시 노골적으로 율파를 유혹하는 듯한 몸짓을 하는 소유주를 노려보았다. "어허, 어이하여 그런 천한 부족의 아이와 반려의 식을 한단 말인가?" 천하다지만 천수족은 아닙니다. 소유주보다는 백배천배 낫습니다. 라고 두사람 모두 속으로 되뇌었다. "또 그 반려의 상대가 몸이 약하여 흑호족의 아이도 후계자로 한다고 합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모르는 사람이라면 단순무식대왕인 남천궁주 뿐이리라. "오호. 통합한단 말이지. 도데체 어떤 아이길래 화룡궁주가 마음을 그리 빼앗겼단 말인가?" 율파가 심드렁하게 척하와 품가의 이야기를 듣다가 강한 흥미를 드러내자 소유주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율파에게 매달려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자신이외의 다른 것에 흥미를 보이는 율파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저 차갑고 아무것도 없는 빙해궁으로 유폐되어 죽을 날만 바라보던 순간에도 돌아가기만 하면 절대로 숙하와 혜림아를 용서하지 않겠다며 그러기 위해서는 순종적이고 착한 모습으로는 율파를 마음대로 조종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탁제균이 보내온 수컷들에게 여러가지 유혹하는 방법을 배웠다. 의기양양하게 자신을 쫓아낸 혜림아가 거만하게 자신을 찾아와 용서를 한다는 듯이 말했을 때는 고마워서 어쩔줄 몰라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속으로는 혜림아를 비웃었다. 애초부터 아무런 죄도 없는 자신을 유폐시킨 것은 그가 아니였던가. 뻔뻔스럽게도 자신의 죄는 생각도 않하고 온갖 생색이라니... 소유주는 살기를 감추기 위해 자신의 눈빛를 감추려고 고개를 조아렸다. 속으로는 앙심을 품었지만 혜림아에게는 절대로 내색하지 않았다. 자신이 돌아온 이후 율파는 잠시도 자신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세상에서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없다는 듯이 옆에 두고 한발자국도 떼어놓지 않으려고 해서 소유주를 기쁘게 만들었다. 천제에게 고개를 숙이는 자들은 자신에게도 고개를 숙여야했다. 이제부터다. 그 오만하고 자신을 멸시하며 깔보던 숙하를 차라리 죽고싶다고 생각하도록 만들어주리라. "그럼 식은 언제인가?" "만월의 축제의 마지막 날이라 하옵니다." "그렇다면 열흘 밖에 남지 않았군. 어찌 그리 서두른단 말인가?" "그의 화급한 성격으로 보아 그곳도 많이 참는 것이라 보옵니다. 그나마 천제폐하께 연통을 하고 승낙을 받아야 하기때문에 그정도로 미룬 듯 하옵니다." "흐음..이런 소유주야 그만 하거라." 자신에게 달라붙어 몸으 더듬는 소유주의 손을 잡아 그손에 입을 맞추었다. 소유주가 없는 지난 동안 율파는 시나이라를 잃어버린 그때보다는 덜했지만 무척 상심했었다. 날마다 새로운 자들이 그의 밤시중을 들었지만 율파를 만족시켜준자는 없었다. 허무감만 쌓였다고 할까. 그래서 돌아온 소유주가 그에게는 소중하고 또한 만족스러웠다. "그대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그동안 그의 공을 생각하면 축사를 보내야 한다고 여겨집니다. 해마다 수많은 부상병과 전사자가 생기는 화룡족인지라 전사도 부족하고하니 새로운 부족을 받아들여 그 공백을 매꿈으로서 다시 생길 전투에도 활약을 할 것이옵니다. " 화룡족의 그 화급한 성격은 유명한 것이였다. 물불 가리지 않고 상대방을 공격하는 성정때문에 가장 많이 다치고 죽으면서도 가장 많은 공을 세웠던 것이다. 그래서 왠만하면 전투가 있을 때 화룡족 근처에는 가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였다. 모진 놈 옆에 있다가 날아온 화살에 맞으면 그보다 억울한 일이 어디있겠는가. 그리고 한번 눈이 뒤집힌 그들은 가끔가다 제분에 못이겨 적이고 아군이고 날뛰어 황당한 일을 당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렇다면 내 직접 그를 축하해 주고 그의 반려도 한번 봐야겠군." "황공하옵니다." 품가와 척하가 돌아간 후 소유주가 돌아온 뒤로 처음으로 침상에서 벗어났다. 언제까지나 침상에서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인지라 화룡궁주의 반려의 식을 계기로 그동안 밀린 일도 하고 정사도 보아야겠다는 생각이였다. "소유주 너도 화룡천에 같이 가자꾸나. 한번도 그곳엔 가본적이 없지? 가보면 정말 이런 곳에서도 사람이 사는 구나 하고 신기할 것이다. " 소유주는 내심 율파가 일어서자 불만스런 표정을 지었다가 그 소리에 활짝 얼굴을 폈다. 그런 공식적인 행사에 동행이라니.... 자신이 다른 자들에게 인정받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말이다. 자주와 훈바는 그리 가까이 지내는 사이는 아니였다. 오히려 극과 극처럼 원수가 안된게 용할 정도로 판이한 성격의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자주는 하루종일 아무것도 안하고 가만히 앉아 명상에 잠길 수 있지만 훈바는 10여분동안 움직이지 않으면 폭발하고 말 성격으로 이곳저곳을 휘저어야 직성이 풀리는 인물이였다. 그런 자주가 훈바의 반려의 식에 온것은 소유주때문이였다. 냉정하고 감정이 없다고 알려진 자주였지만 소유주에게 보이는 관심은 유별났다. 소유주가 빙해궁으로 끌려간 후 직접 탁제균을 찾아가 소유주가 돌아올 수 있도록 손을 써달라고 부탁까지 할 정도였다. 덕분에 탁제균은 혜림아를 이용하여 소유주를 데려오고 자주에게도 받을 빚을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소유주는 돌아온 후 율파의 침소에서 나오지 않아 그의 모습을 본자가 없었고 자주도 마찬가지였다. 율파와 소유주가 훈바의 반려의 식에 참석한다는 말에 친하진느 않지만 직접 식에 참석하러 온 것이다. 화룡천궁은 하늘에서 내려서기도 전부터 용암의 뜨거운 열기때문에 숨이 막혀왔다 .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사람이 살아가나 의심스러웠던 생각은 궁안에 들어서면서 그 서늘한 공기에 지웠다. 궁안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음식냄새에 음악소리. 길거리는 온갖 꽃 장식와 리본 장식으로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었다. 게다가 만월의 축제기간이라서 인지 유난히도 화려하게 치장한 암컷들이 많았다.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여러천궁의 인물이 섞여서 마치 화룡천궁은 천인족 만물시장같았다. 수야에게 있어서는 두번다시 오지않을 기회였지만 그는 왠지 조금도 기쁘지않았다 처음에는 들떠서 파라의 방으로 정해진 곳으로 찾아갔다. 그리고 문을 열고 화룡족 특유의 붉은 옷을 입은 파라를 보고 가슴이 벅차서 미소지은 것도 잠시 그에게 다가갈수록 그 미소는 얼어붙었다. 이제까지 수야는 그토록 슬픈 눈을 본적이 없었다. 미소짓고 있는 데 왜 자신의 가슴이 저려오는 지 알 수가 없었다. 모두가 기뻐하는 이 속에서 파라도 미소를 짓고 있는 데 그모습이 더 슬퍼보였다. ' 흑호족이라면 비월에 대한 파라의 마음을 모르는 사람이 없어 걱정스런 마음도 없지 않아 있었는데 파라가 아무렇지도 않게 미소 짓고 있자 모두 안도하고 파라의 눈치를 보며 자제했던 기쁨을 맘껏 발산했다. 조금 후면 해가 지고 만월의 축제의 마지막 밤이 열리게 된다. 바로 반려의 식이 시작되는 것이다. 모두들 그 식을 보기위해 광장으로 몰려갔다. 수야는 흥분된 마음으로 파라를 찾으러 온 것이다. 그러나 파라의 방에서 그의 눈을 보자 몰려오는 알 수 없는 감정에 참을 수가 없어 들고 있던 꽃다발을 파라에게 집어던져버렸다. 파라는 수야의 행동에 더욱 진한 미소를 지었을 뿐이다. "이 바보야. 차라리 울어버려 그렇게 아프게 웃으려면 차라리 울어버리라구. 도망치지 그랬어? 모두 버리고 도망쳐버리지 그랬어. 왜 그렇게 웃는 건데? 울어버려 제발." 수야는 파라에게 달려들어 마구주목질을 하면서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질러댔다. 파라는 아무런 감각이 없는 자처럼 그저 아무 반응없이 인형처럼 웃으며 고스란히 수야의 주먹질을 받아냈다. 오히려 지친 수야가 파라의 붉은 옷을 잡고 대성통곡을 하였다. "허어어엉엉...울어 ..어 ..엉엉...울어버리라구. 제발." 그제서야 파라의 미소가 일그러지며 눈물이 맺히더니 또르륵 굴러떨어졌다. 그리고 대성통곡하는 수야를 붙잡고 소리죽여 흐느꼈다. 모두가 기뻐하고 있는 만월의 마지막 밤이 그렇게 열리고 있었다. 식장에 나타난 두 당사자의 모습을 보고 가장 놀란 사람은 율파와 자주였다. 달빛이 가득한 제단 앞에 제물이 바쳐지고 곧이어 훈바와 비월이 등장하였는데 그모습을 무심히 쳐다보고 있던 율파가 먼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고 그와 동시에 냉정하기로 유명한 자주 역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비단 율파와 자주만큼은 아니지만 혜림아를 비롯한 숙하, 탁제균 그리고 소유주의 얼굴을 알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놀라 숨을 들이키거나 비명같은 신음을 터트렸다. 게다가 율파가 내뱉은 한마디에 어리둥절해 하던 나머지 사람들도 놀라서 웅성거렸다. "시나이라!!!!!!!!" 엄숙해야할 식장은 순식간에 어수선해졌고 반려의 식은 제대로 시작도 전에 중단되고 있었다. 훈바는 어찌된 일인지 몰라 당황하다가 다가오는 천제와 자주의 모습에 비월을 품안으로 끌어들여 망또로 감싸안았다. 그로서는 천제와 자주가 놀라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가까이 다가온 천제가 비월을 향해 손을 내뻗었다. 절대로 복종해야 하는 입장인 훈바였지만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며 더욱 비월을 끌어안았다. "천제폐하!!!" 그리고 천제의 행동을 저지할 생각으로 그를 불렀으나 그는 거의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기여코 비월의 팔을 잡았다. "시나이라냐?" 훈바는 더이상 비월을 숨길 수가 없어 끌어안은 팔을 풀었다. 그러나 완전히 경계를 늦춘 것은 아니였다. 정작 천제의 움직임을 멈추게 한 사람은 자주였다. "잠깐 진정하십시요. 그는 시나이라에게 있었던 날개가 없습니다." 그제서야 천제율파는 정신을 차린 듯 텅비어있는 비월의 등뒤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절망적인 한숨을 내쉬더니 손을 놓았다. 그가 시나이라라면 당연히 있어야 할 순백의 날개가 없는 게 그제서야 눈에 보인 것이다. 율파처럼 정신이 나간 것은 아니였지만 자주 역시 놀라서 비월에게 다가왔다. 그는 율파와는 달리 뚫어져라 비월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비월의 귀를 쳐다보더니 다시 비월의 얼굴을 확인이라도 하듯이 쳐다보았다. 그 와중에도 비월의 안색은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담담하기만 하였다. 이 모든 일이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 초연해 보였다. "이름이 무엇인가?" 자주의 물음에 비월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지만 그건 찰라지간의 일이였다. "월아입니다." "아름다운 이름을 가졌구나. 이 반려의 식은 진정 네가 원하는 바인가?" 이번에는 훈바가 긴장하여 자주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왜 그런 걸 물어보느냐. 당신에게 그럴 자격이 있느냐를 묻는 듯한 힐난어린 시선으로. 그러나 자주는 훈바의 시선을 아랑곳없이 비월만 쳐다보고 있었다. 잠깐동안 머뭇거리던 비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습니다." 비월이 잠깐동안이지만 망서리는 기색을 보이자 긴장했던 훈바가 비월의 대답에 만족스럽게 미소지었다. 본인이 원한다면 그 누구라도 설혹 이곳에서 비월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천제라 할지라도 막을 수가 없는 것이 반려의 식이였다. 자주는 비월의 대답을 듣고도 한참을 비월을 쳐다보았다. 비월은 누구도 마주보지 못한다는 자주의 시선을 아주 담담하게 받아내서 또한 지켜보는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얼마후 자주는 비월에게서 시선을 떼고 훈바에게 무례한 점에 대해 사과한 후 아직도 비월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천제를 데리고 참관석으로 갔다. 그 모든 걸 지켜보고 있던 소유주와 숙하의 눈에는 불꽃이 타올랐고 탁제균과 혜림아의 눈은 차갑게 가라앉고 있었다. 식은 잠시 중단된 것을 빼고는 제대로 진행되었다. 소유주는 숙하가 자신을 가짜 시나이라라고 부른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이름에는 무척이나 민감하였다. 그런데 자신의 연인인 율파가 화룡족장의 반려가 된자를 시나이라라고 불렀다. 소유주도 자신과 너무나 닮은 그 자를 보고 놀랐었다. 그러나 닮은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고 믿었기에 대수럽지않게 넘어갈 수 있었는데 자신을 한번도 시나이라로 착각한 적이 없는 율파가 화룡족장의 반려를 시나이라로 착각한 것은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 걸까?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건 위험신호였다. 율파가 잠시도 자신의 곁을 떠나지 않고 자신을 지켜주던 율파가 화룡족장의 반려에게서 눈을 돌리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이 바로 옆에서 그의 주의를 끌어보려고 애를 쓰고 있는 것도 모를 정도로..... 뒤늦게 식장에 들어선 파라는 이미 훈바에게 안겨 의식을 잃어버린 비월을 쳐다보자 억장이 무너지고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였다. 훈바는 알고는 있었지만 갑자기 픽 쓰러져버리는 비월의 모습에 놀라 어쩔줄 모르고 있었다. 호하를 제외한 나머지 흑호족은 식장안에는 들어올 수 없었다. 지계족을 멸시하는 천인족이 가득한 식장인지라 사소한 마찰이 생길 수도 있다는 생각때문이였다. 덕분에 호하는 다가올 수 없을 정도로 먼자리에 위치해 있었고 당황한 훈바가 막 식장안으로 들어오는 파라를 보자 그에게 구원을 청하는 시선을 보냈다. 파라는 냉정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눈앞의 현실을 외면하며 평소처럼 비월을 받아서 안아들었다. "체르노빌 잎을 달이고 편안한 곳에서 쉬게 해야 합니다." 그제서야 수근거리고 웅성거리는 식장을 벗어나 훈바와, 비월을 안은 파라가 궁주의 침소로 향했다. 식장안에 있는 수많은 암컷들이 훈바의 옆에서 비월을 안고 걸어가는 파라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근엄하고 귀족적인 분위기는 없지만 그보다 더 암컷들을 유혹하는 생명력과 건장함이 있었다. 게다가 왠지모를 우수까지..... '저 자가 이번에 훈바님의 후계자가 된 흑호족 청년이란느 건가요?" "어머 전혀 지계족같지 않군요." "하지만 흑호족이라면 그 천인족 사체를 처리하던 지계족이 아닌가요? 아무리 그런다고 그런 자를 후계자로 삼다니.... 훈바님의 생각은 알수가 없다니까요." 파라를 보고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는 인물은 숙하와 혜림아정도였다. 심지어 소유주까지 파라의 모습에 자신의 심장이 뛰는 걸 느꼈다. 지배자의 권위가 아닌 진정한 수컷의 야성이 암컷들의 마음을 자극하고 흔들어 놓고 있었다. 훈바는 익숙하게 비월을 보살피는 파라의 모습에 조금 심기가 불편해졌다. 어쩔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비월의 몸에 닿는 파라의 손길이 불쾌하였다. 정성스럽게 비월을 보살피던 파라가 허리를 펴고 훈바에게 다가왔다. "부탁드립니다. 훈바님 월아는 교합이 처음이오니 부드럽게 대해주십시요." 파라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뭣?" 훈바는 믿을 수가 없었다. 비월이 성인 된 것이 꽤 오래전 일이라는 걸 알기에 처음이라는 소리에 놀라면서도 은근히 기뻐하는 마음으로 미소 지었고 그것을 파라는 아픈 마음으로 보고 있었다. "그리고 절대로 알을 가지게 해서는 안됩니다." "네가 말하지 않아도 잘 안다. 이제 가도 된다." '녜,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뒤돌아서 밖으로 나가는 파라의 발걸음은 무겁고 더디었다. 도저히 떨어지지 않는 발결음으로 밖으로 나와 문을 닫으며 파라는 자신을 저주하였다. 훈바는 자신이 태어난 이래 이토록 무언가를 갈구해본적이 없을 정도로 가지고 싶은 자를 드디어 손에 넣었지만 정작 그 당사자는 혼절한 상태라 훈바의 애타는 마음은 전혀 몰라주고 있었다. 훈바는 비월을 바로 코앞에 두고도 안을 수 없는 자신의 입장에 안달이 났다. 고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훈바는 비월의 옆에 비스듬히 누웠다. 처음에는 그냥 팔배개를 해줄 요량이였는 데 왠지 미진한 느낌에 자신의 몸위에 끌어올려 뉘었다. 자신의 몸위에서 미약한 숨을 쉬며 엎드린 채 잠이 든 아니 혼절해 있는 비월의 희미하게 뛰는 심장소리와 자신의 거칠고 힘찬 심장 뛰는 소리가 같이 느껴졌다. 비월에게서 희미하게 나고 있는 약초냄새가 훈바의 욕망을 부추키고 있었다. 자꾸만 부드러운 비월의 몸을 열기를 갈구하는 물건의 욕구를 눌러참으며 이를 악물었다. 무언가를 절제한다는 것은 훈바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은은한 향이 나는 비월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이런 기분도 괜찮구나 싶었다. 세상의 욕망이란 건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아기처럼 쌕쌕 숨을 내쉬며 깊이 잠이 든 비월의 모습을 보며 후바는 잠을 청해보려 없는 인내심을 죽을 힘을 다해 끌어내었다. 혜림아는 정신없이 자주를 쳐다보았다. 언제나 변함없는 모습, 언제나 변함없는 표정, 그에게 다가가며 혜림아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주체하지 목하고 얼굴을 붉혔다. 환각속에서 그에게 안기는 환상으로 관계를 맺고 알을 낳기를 여러번. 비록 실질적으로 자주와는 아무런 연관도 없었지만 혜림아에게 있어서는 자신과 자주의 결실같은 알들이였다. 직접적인 교합은 없었지만 항상 혜림아는 정신적으로 그와 맺어졌다고 믿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어했다. 그러나 자주에게 다가갈수록 혜림아의 안색이 굳어졌다. 자주의 옆에서 소유주가 다정한 표저을 지으며 자주에게 술을 따라주고 있었던 것이다. 다가오는 혜림아를 보더니 비죽거리는 미소를 지으면서..... 혜림아는 손톱이 살을 파고 들어가도록 주먹을 움켜쥐었다. 감히 비천하기 그지없는 천수족따위가 그의 자주에게 추파를 던지고 있다니.... 당장이라도 끌어내서 갈갈이 찢어 죽이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났다. 비록 소유주 옆에 율파가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지만 혜림아의 눈에는 소유주와 자주밖에 보이지 않았다. 직접 다가가 자주에게 말 한마디 하지 못하는 자신을 비웃기라도 하듯 소유주는 의기양양하게 보란 듯이 자주에게 술을 따르고 마주보며 웃기도 했다. 그건 율파의 옆에 앉아있는 숙하 역시 마찬가지 심정이였다. 혜림아가 소유주와 자주만 보듯이 숙하는 율파와 소유주만 보고 있었다. 그이외 장면은 보기를 거부하는 듯이.... 하루종일 꾸미고 가꾼 암컷의 모습인 자신을 율파는 한번도 제대로 봐주지 않았다. 연회가 무르익어 갈 무렵 자주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소유주와 율파가 좀전에 침소로 사라진 후였다. 혹여 자신을 봐주기를 바라며 가까운 곳에 있던 혜림아는 자주가 그냥 밖으로 나가버리자 그 허탈함을 감추지 못하고 바닥만 쳐다보았다. 숙하 역시 소유주를 데리고 사라져 버린 율파의 모습에 쓴 웃음을 내쉬며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죽여버리겠어....감히 ....천한 천수족 ... 주제에..." 숙하는 술잔을 기울이며 이를 갈고 있었다. 그 모습이 자신의 모습과 같아서 혜림아 역시 주저앉아 술잔을 기울였다. 몇명인가 십이지천이 와서 인사를 했지만 혜림아나 숙하나 누가 누구인지 기억도 못할 정도로 서로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 자주가 찾아간곳은 식이 끝난 후 비월을 안고 식장을 나갔던 파라가 묶고 있는 곳이였다. 반려의 식이 끝난 후 훈바의 후계자로 명명되어진 자. 후계자의 방에 머문다는 걸 들었기에 그곳은 쉽사리 찾을 수 있었다. 인기척을 내고 방안으로 들어서자 그는 달빛이 들어오는 곳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자주의 등장에 그를 쳐다보았지만 자리에서 일어서지는 않았다. 다른 자들은 흑호족 사내를 후계자로 삼은 훈바가 미쳤다고 했지만 자주는 오히려 훈바의 선택이 탁월했다고 여겼다. 자주와 파라는 한참동안 서로를 쳐다만 보고 있었다. 그저 서로를 가만히 관찰하는 그런 시선으로 아무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쳐다보았다. 자주가 다가가 파라의 맞은 편에 앉기전까지 그 침묵은 계속되었다. "그 아이의 날개는 어찌된건가?" 자주는 비월이 자신이 알고 있는 그 아이임을 전혀 의심하는 않는 단호한 음성으로 담담하게 파라에게 물었다. 파라의 눈썹이 잠시동안 이지만 꿈뜰거렸다. 그러나 그에게서 비월에게 느껴지던 익숙한 무언가를 느끼고 한동안 빤히 쳐다보았다. " 잘라내야 했습니다. 한쪽 날개로는 균형이 맞지않아 그나마 희미해지는 호흡을 유지하기 힘들었습니다. " 파라는 비월과 비슷한 기를 풍기면서도 곁에 있는 것만이로도 냉기가 느껴지는 그가 거북했다.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고 차분하고 담담한 말투가 비월의 적인지 아군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날개를 잃었는 데 용케도 죽지않았군." '월아가 당신이 알고 있는 자인지 어찌 확신하시요?" "월아란 그아이가 내가 아는 자인지는 나도 확신할 수는 없었네. 다만 그아이가 귀를 가리고 있길래 혹시나 해서 떠본 것이네." "귀? 그 흉터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역시 그거로군." "월아의 흉터를 알고 있는 당신은 월아와 어떤 관계입니까?" 술이 확 깨버린 파라가 경계태세로 돌입하였다. 몸이 당장이라도 달려들 수 있게 긴장하기 시작했다. 변해버린 월아를 알아보고 흉터를 알고 있다면 그가 월아를 공격한 흉수 일수도 있다는 생각에 파라는 잔뜩 긴장했다. 파라가 노골적으로 자신을 경계하며 살기를 들어냈지만 자주의 기세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저 빤히 파라의 눈을 쳐다볼 뿐이였다. "지금은 말할 수 없지만 한가지는 맹세하지 자네와 마찬가지로 그아이는 내게 생명같은 아이지." 그걸로 되었다. 그가 거짓말을 했든 진실을 말했든 상관없었다. 파라는 살기를 거두고 그에게 술잔을 권했다. 4.인내하기 시합. 비월은 머리를 감싸쥐었다. 도저히 화룡족의 과격하고 급한 성격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전쟁에 나가서 부상당하는 것이야 어쩔수 없다지만 부족내에서 술에 취해 싸우는 것도 어쩔수가 없다지만 낮잠자다 잠꼬대로 시비가 붙어싸운다는 것은 보다보다 처음보는 일이었다. 게다가 그걸 보면서 부추키는 자들의 모습은 비월을 황당하게 만들었다. 비월뿐만 아니라 예전에는 흑호족이였으나 지금은 화룡족이 된 부족민들도 넋을 잃고 흙먼지속에서치고 박고 싸우는 자들을 쳐다보았다. 시간이 지나도 싸움은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몇명이 더 가세하여 판은 더욱 커지고 있었다. 원래 싸움이 빌미가 된 일은 잊혀진지 오래요 여기저기서 내기까지 걸고 싸움을 더욱 부추키는 것뿐만 아니라 응원까지 하고 있었다. "하하...화룡족이 원래 이렇습니다. 별일 아니죠." 차람이 얼어있는 비월이 안쓰러운지 어색하게 웃으며 별일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별일 아니라고 하는 차람의 말에 더욱 굳어버린 비월이였다. "이자식들. 그정도밖에 못하나? 그 힘아가리없는 주먹질이 주먹질이라고 할수 있는 거냐고... 돌이라도 집어서 찍어버려." 이것이 그들의 족장이란 자가 소리친 말이였다. 그말에 왁자지껄 웃어대는 부족민의 모습에 비월이 비틀거리자 파라가 급히 부축했다. "조금 과격하지요? 하하하...." "다치기 전에 말려야하지 않을 까요? 왠지 점점 커져가는 것 같은데....." "팔하나 부러지는 거야 아무것도 아니지요. 머리를 부딪혀 죽는 경우가 가끔 있지만 오늘은 양호합니다." 여기저기 피를 흘리고 악다구니를 쓰고 있는 자들도 이미 실신한 자들도 속출하고 있는 데 양호하단다. 파라와 비월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이건 아니다 싶었던 것이다. 어떻게 잠꼬대 하나로 이정도로 싸움이 커진단 말인가. "응?시합?" 훈바는 비월이 권하는 차를 간신히 마시며 고개를 휙 돌렸다. 그로서는 차보다 술이 훨씬 좋았다. 안주로는 기름기가 좌르르 흐르는 고기라도 먹으면 더욱 좋을 텐데.... 풀냄새가 나는 차라니....아무리 참아보려고 해도 견디기가 힘들었다. 도데체가 차를 마시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결론을 내린 훈바였다. 비월이 고개를 돌린 사이 훈바는 입안에 차마 삼키지못하고 머금고 있던 찻물을 화분에 뱉어버렸다. "광장에 열개 정도의 기둥을 세우는거에요. 그리고 매주 시합을 해서 이기는 자에게 상도 주고 기둥에 이름도 새겨주는 거에요." "기둥을 세워 무슨 시합을 한다는 거지?" "누가 오래 버티나 하는 시합이지요." "그런 걸 뭐하러 해? 피터지게 싸우는 것도 없고 시시하겠구만." 비월은 한숨이 터져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피터지게 싸우지 않아 시시하다니..... "흐음. 이길 자신이 없나보군요." 설득해서 들을 성격이 아님을 다시한번 느낀 비월은 그의 호승심을 자극했다. "누가 이길 자신이 없다는 거야?" "훈바님요. 그러니까 그렇게 뒤로 빼시는 거잖아요. 게다가 이건 평범한 시합이 아니에요. 서로 편을 갈라 상대선수를 자극하여 뛰쳐나오게 만드는 쪽이 우승하게 하는 시합이에요. 거기에 이 시합은 정식적인 허가를 준 도박게임이 될거에요. 자기가 원하는 선수에게 돈을 걸어 그 선수가 이기면 몇배나 되는 이익을 볼 수 있겠지요.:" 도박이란 말이 나오자 훈바의 눈에 광채가 반짝났다. 듣기만해도 흥분해서 날뛸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것만 같았다. "언제부터 할건가?" 비월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지만 훈바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찻잔을 들어 그 미소를 감추었다. "여러가지 대안을 생각해보고.... 또 앞으로 일어날 여러가지...일도 .생각해야하고....." 훈바는 미적거리며 차만 마시고 있는 비월의 태도가 너무 답답해서 머리속에서 열이나는걸 느꼈다. 벌써 머리속에서는 시합으로 열광하는 사람들이 보이건만..... "아무리 생각해도 앞으로 한달정도는 걸릴 것 ...." "한달? 어떻게 한달씩이나 기다린다는 거야? 당장 서두르게 하겠다." 비월은 어깨를 으쓱하며 더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여기서 말 한마디 더 한다는 건 쓸데없는 짓이란 걸 알기 때문이다. 기름통에 불을 던졌으니 나중일은 보지않아도 뻔했다. "그보다" 훈바가 비월에게 바짝 다가왔다. 비월이 움찔 놀라며 윗몸을 기대고 있는 쿠선에 몸을 깊이 묻으며 훈바와 거리를 두었다. 등줄기를 따라서 진땀이 솟아나고 잇었다. "저기... 피곤해서...쉬고 싶은데요.." 비월이 억지로 웃으며 입가에 경련이 일어나는 걸 느끼며 슬글슬금 옆으로 빠져나가려하자 훈바가 비월이 향하는 쪽 쿠션에 팔을 뻗어 그 진로를 가로막았다. 비월은 애써 훈바의 의도를 모르는 척 반대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훈바는 비월의 행동에 픽 웃으며 비월이 몸을 튼 쪽으로도 손을 뻗었다. 비월은 훈바가 내뻗은 두팔 사이에 갇히자 딱딱하게 굳어서 힐끗 훈바의 눈치를 살폈다. 훈바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빠져나갈 궁리만 하는 비월이 얄미워 가소롭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훈바님?" "일주일이나 기다렸으면 충분히 기다린 것 같은데 내가 목석인 것 같은가?" "그게 ...아니라..." ''이제 왠만큼 기력도 회복되었을 텐데 언제까지 도망만 다닐거지?" "도망다니지 않았어요.'' "도망 다니지 않았다? 나만 보면 슬금슬금 피하면서?" "저기...그게 그러니까." 비월은 훈바의 눈에 어린 욕망에 두려움이 생겼다. 파라야 비월이 거부하면 멈추어 주었지만 그에겐 그럴 이유가 없을 뿐더러 지금까지 지켜본 화룡족의 성격으로 보아 한번 발동이 걸리면 도중에 멈추는 건 불가능해보였다. 그래서 비월은 그가 두려웠다. "하지만 지금은 훤한 대낮이라...누가 들어오기라도 하면..." "대낮이라 안된다? 어제는 어두워서 두렵다고 하지 않았던가?" 비웃음이 실린 훈바의 말에 비월은 할말을 잃었다. 첫날밤이야 의식을 잃어서 무사히 빠져나갔으나 그 다음날 부터 비월은 자신이 댈 수 있는 모든 핑계를 대며 훈바를 피해다녔던 것이다. "저기 ...그러니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아 이거다 하는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게다가 훈바는 해볼테면 해보라는 시선으로 비월을 지켜보고 있었다. 솔찍히 비월이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말도 안되는 핑계로 도망다니는 걸 봐주었다. 그리고 끙끙거리며 핑계 댈 궁리를 하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 그만 오늘까지 이른 것이다. 하지만 더이상은 자신이 무리였다. 오늘마저 그냥 넘긴다면 이성을 잃어버리고 비월을 난폭하고 안아버릴 것만 같아 두려웠다. 조금이라도 자제할 수 있을 때 적당히 자신을 풀어줘야 했다. 훈바가 손을 뻗어 붉어진 비월의 볼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그 검고 긴머리도 쓰다듬었다. 머리카락 사이로 손을 넣어 귀볼을 더듬자 비월이 움찔 놀랐다. 다른 손으로 허리를 끌어당기자 머뭇거리며 끌려왔다. 손가락으로 입술선을 따라 쓰다듬고 등을 쓰다듬어도 비월은 더이상 저항하지 않았다. 작은 가슴이 두방망이질하는 것이 그대로 느껴졌다. 살며시 입을 댈때까지만 해도 최대한 부드럽게 다루겠다고 생각했던 훈바였으나 비월이 그 작은 입을 열어 훈바의 혀를 받아들이자 그의 이성은 저멀리 사라져버렸다. 자신을 붙잡고 있는 비월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훈바가 벗겨버린 옷이 흘러내렸다. 훈바는 갈증난 사람처럼 비월의 피부를 빨아들였다. 여기저기 붉은 자국이 생겨났다. 훈바의 혀가 비월의 유실을 건드리자 비월의 몸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경련을 일으켰다. 신음소리를 억지로 참아보려는 듯 입술을 깨물고 있는 모습에 훈바가 심술궃게 웃으며 집중적으로 유실을 건드렸다. 혀끝으로 살짝 건드렸다가 입술사이에 넣고 빨기도 하고 이빨로 살짝 물기도 했다. 고집스럽게 부들부들 떨면서도 비월은 신음소리를 삼켰다. 버거울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훈바가 최대한 부드럽게 자신의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는 걸 알지만 비월이 감당하기엔 그의 것이 너무 컸다. 아무리 참아보려고 해도 비명이 저절로 터져나왔다. 온몸이 저미듯 아려왔다. 숨쉬기가 어려워지고 있었다. 괴로운 건 훈바 역시 마찬가지였다. 처음이라는 건 들었지만 이정도로 비좁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삽입이 용이하도록 장미유를 발랐는데도 끝까지 들어가지도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자신의 것을 감싸고 경련을 일으키듯 부들부들 떠는 바람에 그 진동이 그대로 자신에게 몰려와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만 같았다. "천천히...숨을 쉬어....으읏...월아...제발 몸에서 ...힘을 ..빼.." "으으...그..만..악." "월아..힘을.. 안그러면 나중에... 힘들어져.." "으읏.. 시..싫어... 제발..놔주세.요." 눈물어린 시선으로 애원을 해왔으나 오히려 그모습에 훈바는 더 흥분하고 말았다. 훈바가 더욱 파고 들려고 하자 비월이 훈바의 몸을 밀어내려고 손을 뻗었다. 훈바는 자신의 몸에 닿는 비월의 뜨거운 손에 전율했다. "으악... 아파...제발 ..움직이지.. 말아..으으.. 주세요...." 훈바는 살아오면서 처음으로 죽을 정도로 인내해야 했다. 차라리 적과 싸우는 것이 쉬웠다. 자기자신과 싸운다는 것은 미쳐버리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다. 천천히 파고 들어가 기쳐코 비월을 차지했을 때 훈바는 세상의 모든 것을 얻은 것처럼 환희에 젖었다. 게다가 도중에 기절해버려 힘없이 늘어져버린 비월은 정신이 있을 때보다 삽입이 용이했다. 머리속이 하얗게 변할 정도로 등골이 경련을 일으켰다. 여운을 즐기며 비월만큼이나 힘들었던 훈바는 그대로 쓰러져 잠이들었고 그 뒤 비월은 이주일 정도 침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부족민들은 그들의 족장의 정력에 낄낄거리며 웃어댔고 훈바는 자신이 정작 한번밖에 못했다는 소리는 죽어도 하지못했다. 와아아아아.... 여기저기에서 환호성 소리가 터져나왓다. 처음에는 기둥이 세워지고 관람서깅 만들어질때까지만해도 사람들은 별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경기장이 완성되고 내기가 걸리자 사람들의 눈에서 광채가 쏟아졌다. 사람 키의 네배높이의 위치한 기둥의 윗부분은 한사람이 앉아있으면 적당한 너비였다. 처음에 팀 대표로 뽑힌 자들은 가장 용맹하고 힘이 쎈 자들로 부족민의 환호성을 받으며 사다리를 타고 기둥 위로 올라갔다. 한명씩 올라갈때마다 그 선수에게 내기돈을 건 사람들의 박수갈채와 응원소리가 터져나왔다. ''지금부터 제 1회 시합을 시작하겠습니다. 선수들은 어떤 도발과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그 자리를 지키셔야 우승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관중 여러분께서는 모든 수단 방법을 가리지말고 상대편 선수를 자극하고 도발하여 경기대위에서 뛰쳐나오게 만드십시요. 그리하면 자기편 선수의 부담이 줄어들 것입니다. 여러분 시작하십시요. 건투를 빕니다. " 차람의 말이 끝나자 박수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때부터 시작된 열 띤 공방전이 너무 혼란스러워 비월은 도중에 경기방법을 변경시켜야했다. 선수도 열명, 경기방해자도 열명 해서 시간안에 선수를 탈락시키지 못하면 다른 경기방해자로 교대하는 방법으로 경기를 진행시키기로 했다. 첫번째 경기방해자가 나섰다. 그런데 첫번째 경기방해자가 두번째 경기방해자로 교대하기도 전에 여섯명의 선수가 경기대위에서 뛰어내려와 경기방해자와 싸움을 일으키는 불상사가 생겨버렸다. 덕분에 남은 네명의 선수들은 적어진 부담으로 귀를 틀어막고 버티어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해수루, 지금 당장 내려오지 않으면 네가 가장 아끼는 매매를 내가 갖는다." "야 고래. 내가 너를 위해 특별히 화주를 준비했는데 언제까지 거기에 있을 거냐? 늦으면 명항이 다 마셔버릴걸." "이 유황불에 튀길 변태 새끼야. 내가 두렵냐? 니놈이 꼬리를 말고 거기 있는 게 가관이다..하하하하..." "소율라....어서 내려와 . 진하게 한판하자..." 가지 각색의 원색적인 말들이 튀어나올 때마다 관중은 죽어라 웃거나 야유를 보냈다. 선수들은 도발을 당할 때마다 들썩거리며 몇번이라도 뛰어내려올 것 같았지만 용케도 참아냈다. 하지만 세번째 경기방해자가 나타나기전에 두명이 더 뛰어내려와 또다시 경기장밖에서 치고박고 싸우기 시작했다. 결국 우승을 한 자는 준우승을 한 자보다 한발 늦게 바닥으로 내려온 차이로 승리하였다. 비월은 그황당한 승리에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날 이후 화룡성 여기저기에 경기장 모형의 연습장이 생겨났고 너도나도 출전을 바라며 연습에 들어갔다. 게다가 다른 천궁에까지 소문이 나서 시합날이면 다른 천궁의 부족까지 구경을 위해 행차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대부분 화룡족보다 흑호족이 우승을 차지하자 흑호족은 흑호족만의 시합과 화룡족은 화룡족만의 시합이 마련되었다. 비월은 대부부의 시합을 참관할 수 없었다. 침대에 일어날만 하면 훈바가 비월을 안았기에 또다시 침대신세를 져야하는 생활이 계속되었던 것이다. 비월이 훈바를 비난하자 훈바는 짖궃게 웃더니 비월을 안아서 시합장까지 데려오기도 했다. 사람들은 느끼지 못하는 사이 화룡족은 조금씩 인내하는 것에 익숙해져갔고 시간이 지날수록 어처구니 없는 일고 싸으는 일도 줄어들었지만 누구도 그것을 눈치채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비월은 화룡족의 성정이 조금씩 변해가는 동안 조금씩 체력이 더 악화되고 있었다. 훈바는 비월이 의식을 잃어가는 시간이 늘어갈수록 거정이 쌓여갔다. 파라를 붙잡고 원인을 알아보려고 했으나 파라 역시 원인을 알아낼 수가 없었다. 의원들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며 훈바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파라는 비월이 며칠동안 의식을 차리지 못하자 언젠가는 이대로 영원히 눈을 뜨지못하고 그대로 사라져버리는 건 아닐까하는 생각에 안절부절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뽀족하게 떠오르는 치료방법이 없었다. 비월이 의식을 차릴때까지 잠시도 마음 편하게 자지못하고 비월이 깨어나서야 잠이 드는 일이 반복되자 파라 역시 보이지 않게 지쳐가고 있었다. 이대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자 파라는 비월의 어린시절을 알고 있는 월궁의 궁주를 떠올렸다. 비월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더 알아낸다면 어쩌면 비월을 살려낼 방법도 알아낼 것만 같았다. "훈바님, 다녀올 곳이 있습니다. 월아가 회복할만한 방법이 더이상 떠오르지 않아서 다른 방법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 파라가 잠을 이루지 못하는 동안 훈바 역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비월을 회복시키는 것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못한다는 사실에 더 괴로워하고 있었다. ''걱정하지마라. 그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내기만 하면 내 무엇이든 다 해주겠다." 파라는 피곤해보이는 그를 보며 그럼 비월도 줄 수 있느냐고 물어볼 뻔 한 자신을 간신히 자제했다. 어차피 안되는 것을 아는 데 자신만 참으면 되는 걸 알기에 말을 속으로 삼켜버렸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어딜 가는 지 말해주지 않을 텐가?"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파라의 표정은 훈바의 표정만큼이나 어두웠다. 그래서 더이상 묻지 않았다. 천붕이 멀리 날아오를 때까지 지켜보며 부디 자신을 대신하여 그가 비월을 회복시킬 방법을 찾아내길 신에게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천붕에 올라 월천으로 향한 파라는 화룡궁에 비해 너무나 서늘한 월천의 하늘에 당도하자 추위부터 느껴야 했다. 천중이 월천의 광장에 내려앉자 월궁의 전사들이 경계하며 다가왔다. 그리고 파라가 입고 있는 화룡천의 후계자 복장을 알아보고 내궁으로 데리고 갔다. 미리 연통을 받은 자주가 파라를 마중나왔다. 자주는 차분하고 표정없는 얼굴로 파라를 맞이했다 그를 데리고 내궁으로 직접 들어선 자주는 파라를 자신으로 데려갔다. "그 아이는 어떤가?" 그아이라면 비월을 말한다는 걸 안 파라가 고개를 저었다. 자주의 안색이 순간이지만 흔들린 것이 자신의 눈의 착각인지 혼란을 느끼며 파라는 권하는 차를 마셨다. 파라역시 그동안 비월때문에 많이 마셔보기는 했지만 여전히 좋아할 수 없는 음식임을 잘 알기에 억지로 인상이 써지려는 걸 참아냈다. "많이 좋지않습니다. 갈수록 체력이 떨어져서 하루종일 일어나지 못하고 또 며칠씩 의식을 차리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음, 날개를 잃은 부작용이 지금에서야 일어나는 모양이군. 날개를 잃고도 용하게 살아났지만 이제는 한계에 이른 것인 지도 모르겠군." 파라는 애써 외면하고 있던 사실을 그를 통해 확인받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걸 느꼈다. 하루에 서너시간 밖에 의식을 차리지 못해도 좋았고 가끔 자신과 산책을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날개가 또 하나의 심장이라고 하는 것처럼 보통 날개를 가진 사람들이 심장이 멎지않아도 날개를 잃으면 바로 호흡이 멎어버리듯이 우연찮게 강효랑의 시신을 먹고 살아나기는 했지만 언젠가는 비월도 그들처럼 호흡이 멎어버리면 어쩌나 하는 생각으로 잠시도 마음 편할 날이 없던 파라였다. 행여나 생각하고 있으면 그게 현실로 나타날 까봐 더 깊이 묻어버리고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고 했었다. "방법이 없을 까요?" 비월이 죽을 지도 모른다는 데 자신의 생명이라고 해 놓고 너무나 냉정한 그의 반응에 파라는 치가 떨리고 괜히 찾아 온것이 아닌가 후회되었다. 차분하고 냉정한 그의 반응에 파라는 자신의 힘으로는 어림도 없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그를 죽여버리고 싶다는 살의를 느꼈다. 한참후 조용히 차를 마시던 자주가 눈을 지긋이 감듯이 입을 열었다. "그 아이의 본명은 비월이네. 어릴 때는 소비월이라고 했고 시나이라라고 부르기도 했지. 시나이라는 천제이신 율파가 지어준 이름일세. 그아이를 낳은 자는 진비월이라고 하며 나의 반려였지." 파라가 들고 있던 찻잔을 떨어뜨렸다. 그가 비월과 어떤관계가 있을 거라고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설마 부모이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비월의 어미인 진비월은 천이족이였으며 아주 특이한 자였지. 소비월이 알에서 깨어나는 걸 한번도 보지 못하고 죽어버렸지만." 냉정하기만 했던 그의 말끝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파라는 그가 그 반려를 잃은 것을 아직도 괴로워하고 있다는 걸 충분히 느껴야했다. 저렇게 감정이 없어보이는 자가 저나마도 흔들리고 있는 모습이라니.... 벌써 꽤 많은 시간이 지난 일인데도 그의 괴로움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아보였다. "그는 잠시도 눈을 떼고 있을 수가 없었네. 잠깐만 한눈을 팔아도 온갖 말썽을 부려 월궁 전체가 들썩거리게 만들기 일쑤여서...." 파라가 있든 말든 그는 회상에 잠겨 그를 떠올리고 있었다. "월궁을 유지하고 있는 결계석 중 하나를 훔쳐다 내다 팔아먹질 않나 그 결계석으로 사들인 고양이족 아이와 정원에 숨어서 놀질 않나. 지하감옥에 잡혀있는 수인족을 풀어주어 월족이 다치기도 했지. 그런데도 월족은 진비월을 미워하지 않았네. 자신의 행동으로 다친 월족을 찾아가 펑펑 울면서 나을 때까지 정성껏 치료를 해준다며 더 악화시켰지만 그의 진심을 알기에 그들 역시 진비월을 용서했디. 원래 월족의 성격은 차분하고 냉정한 편인데다 잘 흥분하지 않는 성격인데도 진비월이 말썽을 부릴때마다 기겁을 해서 여기저기를 뛰어다니고 가슴 졸이고 소리를 질러댔지. 그가 이곳에 있는 동안은 월궁은 조용할 날이 없었네. 하지만 사람들은 활기차고 좋다고도 했지. 가끔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놀라게 만들지만 않는다면 말일세. ..... 그날일만 없었다면.... 알을 낳느라 약해져 있지만 않았어도 그렇게 쉽게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네. 그렇게 비참하게 당하지도, 그렇게 허무하게 죽지도 않았을 테지." 파라는 자주의 넋두리 속에 느껴지는 원망의 기미에 긴장했다. "그건 월아의 잘못이 아니잖습니까? 왜 월아를 원망하는 겁니까?" 파라는 자신을 쳐다보는 자주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였다. 가슴이 얼어버릴 것 같았지만 자신이 시선을 피하면 자주의 마음을 인정하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는 생각에 버티어 내었다. 처음에는 당장에라도 비월을 죽일 듯한 시선을 하던 자주의 표정이 차츰 풀어지더니 원래의 색으로 돌아왔다. 여전히 무표정이였지만 파라는 알 수 있었다. "알고 있네 알고 있지만 그를 잃은 절망감, 상실감 그 아득한 슬픔에 그 아이를 원망했네. 이래서는 안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내 자신을 추스릴 수가 없었지. 알에서 깨어난 후 일주일동안 사람이 아이를 닦아주어야 하지만 나는 알에서 막 깨어난 그 아이를 그대로 방치했네. 그 아이때문에 그가 죽은 것만 같아 그아이를 증오했네. 엿새가 지나가도 손을 내밀지 않았지. 음령족인 강효랑이 몰래 아이를 빼내여 닦아주어 겨우 살려냈지만 그 후유증인지 그아이는 음령족의 특징인 노랫소리를 내지 못했지 강효랑은 죽을 각오로 내게서 그아이를 데려갔네. 그리고 나대신 부모가 되어주었지. 그래도 상관 없었네. 어차피 그아이를 받아들일 마음이 없었으니까. 그아이를 볼때마다 그아이 때문에 죽은 것 같은 나의 반려가 떠올랐으니까." 파라는 왜 엉뚱한 곳에 화풀이를 하였느냐는 시선으로 자주를 노려보았다. 비월이 직접 죽인 것도 아닌데 다만 태어난 것 자체가 증오의 대상이 되어야 하냐고 따지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아냈다. 유난히 약하던 비월이 날개를 잃어서라고 생각했는데 어릴 때부터 약했던 것이 원인이라고 생각하니 그가 미웠다. "그런데 이런 나를 벌하기 위해서인지 그아이는 진비월을 그대로 닮아가더군, 가끔 강효랑이 월천으로 찾아와 그아이를 보여줄때마다 나는 괴로웠네. 마음속에서 그아이를 지웠는 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아이의 시선에 감도는 거부의 시선이 나를 아프게 했네. 그아이를 밀어낸 것은 나인데 그아이에게 거부당하는 내가 싫어서 그아이를 강효랑에게서 빼앗았지. 나를 보면서도 강효랑만 찾는 모습에 화가 나기도 하더군. 처음으로 천제궁에 그아이를 데려가 그아이의 탄생을 알리고 진비월의 죽음을 알린 후 진비월의 죽음을 마음에 묻었네. 율파님이 여러가지로 그아이에게 관심을 보였지만 그때마다 어색해하며 당황하는 아이의 모습에 내 죄를 느껴야했네. 사랑받는 것이 어색한 아이라니..... 다가오는 자를 차갑게 거부하는 모습이 예전의 내모습이라 어이가 없더군. 외모는 진비월인데 성격은 나를 닮다니.... 아이는 좀처럼 맘을 열지 않았네. 오직 강효랑이 옆에 있을 때만 밝게 웃는 모습에 가슴이 찢어지더군. 천천히 그아이의 마음을 열거라고 다짐했는데 그아이마저 진비월처럼 습격을 받아 다행히 죽지는 않았지만 귀에 영원히 사라지지않을 흉터가 생겨버렸지. 나는 두려웠네 또다시 사랑하는 이를 잃을 까봐 음령족에게 보냈는 데 범인을 잡으려고 하는 동안 그아이가 죽어버릴 줄 꿈에도 몰랐었지. 누군지는 몰라도 용서할 수가 없었지. 진비월을 죽인자들과 그 작은 아이를 죽인 자들이 동일인물일지도 모른다는 것에 월족의 모든 전사들을 파련하여 조사시켰네. 그래서 알아낸 것이라고는 진비월을 죽인 자들이 천수족일지도 모른다는 것과 비월은 어이없게도 영토분쟁으로 음령족을 공격한 같은 천인족이 원인이라는 것인데 음령족을 공격하도록 선동한 자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더군. ...... 이날까지 그아이가 살아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네. 비월을 그대로 닮은 천수족인 아이가 나타났으니까. 그아이는 비월의 시신을 먹은 게 분명했고 그래서 더이상 비월의 죽음을 의심할 수 없었지.비월을 닮은 아이에게 다가가 비월의 시체를 준 사람이 누군지 알아보려고 했지만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지. .... 화룡족장의 반려의 식에서 죽었다고 믿었던 그 아이를 보고 내가 얼마나 놀랐으리란 것은 짐작도 할 수 없을 것이네. 나를 기억하면서도 모르는 척 외면하는 그아이의 시선으로 그리고 그아이의 귀에 있는 흉터로 그아이라는 걸 확신했지만 아직도 어둠속에서 그 아이를 해치려고 했던 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상태라 아는 척 할 수 없었지. 다만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기뻤으니까. 아는 척해서 또다시 그아이를 죽음의 위기속으로 몰아넣을 수 없었네. 그아이가 죽는다면 나도 살 수 없겠지." 너무나 담담해서 오히려 자주의 말속에 담긴 격렬한 감정을 느끼며 파라는 숨이 막혀오는 걸 느꼈다. 어쩌면 그동안 가장 괴롭고 아팠을 자는 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야 훈바에게 비월을 빼앗기기야 했지만 여전히 볼수도 만질 수도 있지않은가. 몇십년동안이나 죽은 반려때문에 아파하고 죽어버린 줄 알았던 아이때문에 괴로워하며 그 흔적없는 범인을 증오해야 했던 그의 슬픔의 깊이에 파라는 현기증이 일었다. "데려오게." 자주의 말에 파라가 의문어린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현재 자주와 파라는 자주의 반려였던 진비월이 가장 좋아했던 월궁의 정원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다른 곳은 잘 관리가 되어 있었는 데 자주가 파라를 데리고 가는 곳은 관리가 안되었는 지 갈수록 나무와 여러가지 덩쿨 식물 그리고 잡초가 무성했다. 마치 사람들의 발길이 한번도 닿지 않은 듯 보였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더이상 어둠속에 숨은 자의 시선을 두려워하며 망서릴 필요가 없겠지. 그아이가 내아이라는 게 밝혀진다해도 내가 지켜내겠네. 그아이에게 저질렀던 과오를 갚기 위해서라도 내목숨을 걸고 그 아이를 살려낼 것이네. 그리고 월궁으로 데려올 것이네." "화룡족장님이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처음으로 파라는 자주의 미소를 보고 그만 넋을 잃어버렸다. 미소하나가 인상을 이렇게 바꿀 수 있다니 마치 기적같다고 파라는 생각했다. 같은 수컷임이 분명한데 파라는 자주의 미소에 심령이 흔들리는 걸 느꼈다. "화룡족장에게 말하게. 월아를 보내지 않으면 그아이가 곧 죽을 거라고. 그런데도 월아를 보내지 않으면 그자는 월아의 반려로서 자격이 없는 셈이니 더이상 망서리지 않고 전쟁이라도 해서라도 그아이를 찾아올 것이네." 파라는 몇번인가 호흡을 가다듬고 자신만만해보이는 그의 모습에 미소지었다. "무서운 분을 적으로 두게 되겠군요. 하지만 그는 월아가 살 방법이 그것뿐이라면 화야 내겠지만 보내줄 겁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지금 어디고 가시는 것 입니까?" 파라의 질문에 자주가 손을 들더니 무언가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서로 엉켜 앞을 막고 있던 동쿨 식물들이 움직이더니 한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작은 구멍을 만들었고 자주는 따라오라며 먼저 그 속으로 들어갔다. 파라는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자주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비월이였다. 아니 진비월이였다. 너무나 똑같은 모습에 파라는 커다란 얼음속에 보관되어 있는 자를 넋을 잃고 쳐다보았다. 닮았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정도로 닮았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잠든 듯 눈으 감고 봉인되어 있는 모습이 도저히 죽은 자라고 여겨지지않았다. 금방이라도 눈을 뜨고 파라 자신을 쳐다볼 것만 같았다. "천인족은 죽은 뒤 반드시 그 시신을 파기하여야 한다는 건 알지만 도저히 이 모습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건 볼 수가 없었네. 그래서 이곳에 봉인하고 파기하였다고 보고했지. 이런 일을 예상한 것은 아니지만 어차피 이렇게 된일 나는 이사람을 이용하여 월아를 살릴 것이네. 자네도 한번 써 본 방법이니 잘 알 것이네." 파라는 자주가 냉정해 보이는 것과 달리 그 내면에서 피눈물을 흘리는 것이 보이는 듯 했다. 시체조차 파기하지 못하고 이렇게 간직해온 그가 스스로 그것을 없애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 심정이 어찌 멀쩡할 수 있을까. "이걸 아는 자는 자네와 나 그리고 화룡족장 뿐이여야 한다는 걸 명심하게. 행여라도 월아가 이사실을 안다면 그아이가 괴로워할 것이 뻔하니 절대로 비밀을 지켜야 할 것이네." "명심하겠습니다." "지금 바로 연통하여 화룡족장과 월아를 데려오게." 파라가 결계밖으로 나가자 자주는 진비월을 돌아보았다. 진비월이라면 자신의 뜻대로 하길 바라리란 걸 잘 알고 있었다. 아니 자신이 죽지않고 살아있다 해도 그는 아이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놓을 위인이였다. "이 방법밖에 없다는 걸 알아. 하지만 너무 괴롭군. 이못습마저 이제는 보지 못하게 되는 건가?" 자주가 웃었다. 하지만 눈에서는 소리없는 눈물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지켜주지 못했던 그의 반려! 짖궃은 눈빛으로 장난을 치며 자신을 도발하던 말썽꾸러기! 하고 많은 보석중에서 결계석을 훔쳐 시장에 내다 판 배짱 넘치던 성격! 그 결계석이 월궁 안에 있으면 월궁유지에는 큰 지장이 없었지만 만일에 하나라도 월궁 밖으로 유출되면 월궁은 한쪽을 기울어 무너져 내리기 때문에 월궁의 전사들은 혼비백산하여 결계석을 찾느라 온 시장을 다 뒤지고 다녀야했다. 그동안 진비월은 정원 한구석에서 고양이족 아이와 노느라 정신없었다. 이성을 잃어버릴 정도로 너무 화가 나서 찾아갔더니 고양이족과 정원에서 놀다 잠이 들어있었다. 깨워서 다르쳤더니 아둥바둥 대들면서 서럽게 펑펑 울어댔다. 그냥 두면 죽어버릴까봐 그냥 둘 수가 없었다며 나쁜놈이라고 자주를 물어뜯었다. 그래서 더이상 야단칠 수가 없었다. 할퀴고 물어뜯느라 기운이 다 빠진 진비월을 끌어안고 자주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눈물이 날 정도로 웃었다. 정신없이 뛰어나가던 자신의 부족민의 모습이 떠오르자 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당황하고 허둥지둥거리는 월족이라니...... 하지만 진비월은 자주가 웃는 것이 자신을 놀린다고 생각했는 지 그일로 앙심을 품고 틈만 나면 결계석을 내다팔았다. 그때마다 월궁의 전사들은 혼비백산하여 시장통을 뛰어다녀야했다. 온갖 말썽이란 말썽을 다 부리면서 오히려 자주가 나무라면 달려들어 할퀴기 일쑤였다. 너무나 심술궃고 너무나 당당해서 그리고 너무나 순수하고 맑아서 가슴속에 그런 고통을 가지고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선천제가 집착하던 음령족이 죽자 선천제는 수인족에게 그 시체를 먹게해서 변이한 그 수인족을 강간하여 진비월이 태어났다고 한다. 돌연변이 천이족으로 태어났지만 천제의 피가 흐르는 진비월은 천인족 모두에게 부담스럽고 꺼림직한 존재였다. 말썽을 부려도 죄를 지어도 함부로 할 수가 없고 그렇다고 받아들이기엔 그가 경멸받아 마땅한 천이족이라는 사실에 자주에게 보내진 것이다. 유일하게 모든 자에게 냉정한 그라면 말썽을 부리는 진비월을 냉정하게 다룰 수가 있을 거라고 여겼던 것이다. 보이지 않는 멸시와 경멸에도 진비월은 스스로를 포기하지않고 끊임없이 마음을 내보이고 마음을 주었다. 아낌없이 사랑하고 상처받으면 울고 괴로워하고 뭐든지 열심이였다. 아무리 하찮은 목숨이라도 진비월에게는 소중하고 안타까워보였던 것 같았다.그런 그가 자주는 사랑스러웠다. 열이 받아 소리소리를 지르는 그에게 자신으 반려가 되어달라고 하자 멍한 표정으로 그대로 굳어버리더니 곧 정신을 차린 후에 자신에게 미친게 아니냐고 했다. 그냥 안들은 걸로 하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그를 억지로 반려로 맞이했다. 나중에 사기 당했다며 길길이 날뛰던 모습이 이렇게 생생한 데...... 자주는 울었다. 아낌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주지 못한 것이 미안해서...... 그의 분신을 외면해버린 것이 미안해서.... 그리고 그를 지켜주지 못한 자신이 미워서...... 자주는 두번 5.월궁에서 훈바는 잡아먹을 듯이 자주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로서는 비월을 살릴 수 있다는 말에 월궁으로 따라오기는 했으나 자주를 보자 긴장을 했다. 파라가 다녀올 곳이 있다고 했을 때 그가 다녀온 곳이 월궁이라는 것은 상상도 못했다. 게다가 월궁궁주와 파라가 알고 있는 사이라는 것이 영 찜찜했다. 그는 자신의 반려의 식에서 비월을 '시나이라'라고 부르는 율파와 자주를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꾸만 자주가 이대로 비월을 빼돌릴 궁리를 하는 게 아닌가 의심스러웠다. '당신이 왜 월아와 나를 불러들였는 지 알고 싶오." "파라에게 들었을 것 아니요." 살기를 감추지 않는 훈바의 태도에도 별 반응없이 훈바와 파라를 데리고 결계로 다가갔다. 따라오든 말든 말대로 하라는 듯한 그 태도 또한 맘에 들지 않는 훈바였다. 비월을 안은 채 자주를 따라가며 투덜거리는 훈바의 모습에 파라가 실소를 터트렸다. 한번 본적이 있는 파라도 다시 놀라는 데 훈바의 놀라움은 어떠하겠는가. 자신의 팔안에 안겨있는 비월을 자신의 품안으로 바짝 끌어안아 그 존재감이라도 확인하려는 듯한 훈바의 행동에 파라는 고개를 저었다. ''이는 누구요?" 한참 후 입을 연 훈바가 봉인되어있는 시체에서 시선을 떼지못하고 자주에게 물었다. 그 목소리가 떨리고 있음은 착각이 아니였다. "월아의 부모 중 한명이요." "부모 중 한명? 그런 사람이 왜....설마 ....당신이?" 그제서야 무언가를 짐작한 훈바가 시체에서 시선을 돌려 의문어린 시선으로 자주를 쳐다보앗다. 그 시선에는 간절히 자신의 생각이 틀리기를 바라는 듯한 빛이 가득했다. "당신이 안고 있는 아이는 내 아이요. 율파님이 시나이라라고 불렀던 그 아이이기도 하고......" 훈바는 믿고 싶지 않아도 믿어야 했다. 가장 확실한 증거가 자신의 앞에 있지 않은가. 반려의 식에서 비월의 팔을 잡아오며 시나이라를 외치던 율파의 영상이 계속 머리속에 재생되었다. "월아가 누구였던 지금은 나의 반려요. 이제와서 부모라 하더라도 내게서 월아를 데려갈 수 없소." 훈바의 단호한 말에 자주가 한참을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훈바는 그제서야 잔뜩 긴장했던 어깨에서 힘을 뺐다. 파라는 죽은 듯 누워있는 비월의 모습에서 눈을 뗄수가 없었다. 희미하게 들썩이는 가슴이 시선을 돌린 순간에 멎어버릴 것만 같아 두려워서 차마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지 못했다. 벌써 열닷새였다. 살아있는 생명체가 보름동안이나 아무것도 먹지 않고 살 수 있을까싶어 자주를 자꾸만 의심하는 자신을 다스려야했다. 그건 훈바도 마찬가지 였다. 몇번이나 자주에게 달려들어 비월이 이대로 깨어나지 않으면 자신의 목숨을 걸고 자주를 죽이겠다고 으르렁거렸다. 그러나 파라는 차마 비월이 깨어나지 못한다해도 그래서 자신의 심장이 파괴되는 괴로움을 당한다해도 자주를 비난하지 못하리란 것을 알았다. 자신의 반려의 몸과 피를 자신의 아이에게 먹여야하는 그의 심정을 다는 아니지만 왠만큼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자신 역시 비월의 자식에게 비월을 먹여야 한다면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로우리란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자주는 비월이 깨어나도 절대로 진비월의 이야기를 하지 않도록 두사람에게 주의시켰다. 훈바와 파라는 비월이 깨어날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한 일도 하겠다고 맹세했다. 세사람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비월은 전혀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자주의 얼굴도 굳어가고 있었다. "제발 월아. 죽지만 말아줘. 내게 웃어주지 않아도 되고 말도 걸어주지 않아도 좋으니까 죽지만 말아줘. 어떤 모습이라도 상관없으니까 제발 살아있어만 줘." 훈바가 화룡궁에 간 어느날, 자주는 잠시도 비월의 곁을 떠나지않는 파라가 걱정되어 그를 쉬게하려고 그에게 다가가다 그의 고백을 들었다. 약물에 담겨있는 비월의 손을 잡으며 파라는 울고 있었다. 자주는 자신이 파라의 말을 들었음을 내색할 수 없었다. 파라의 눈은 어쩌면 진비월을 바라보던 자신의 눈과 닮았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갑게 식어가는 진비월의 몸을 끌어안고 죽지만 말아달라고 빌었던 그 순간이 떠올랐다. 흑호족인 그와 훈바는 그 세력을 비교할 여지가 없었다. 어쩌면 비월은 흑호족을 위해 아니 저 청년을 위해 훈바에게 간 것은 아닐까 싶었다. 저토록 애모하는 청년의 진심을 알고나 있는 걸까? 그날밤 파라를 재운 후 자주는 미루어두었던 마지막 의식을 시작했다. 비월이 깨어나길 바라는 자의 간절한 염원이 영면에 든 비월을 충분히 깨울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죽은자와 산자의 경계에 선 월족의 족자으로서 명한다. 음령족이며 월족의 피를 가진 시나이라여. 그 영면에서 해방되어라. 이땅이 망하는 그날까지 너의 생명을 이 땅위에 머물도록 명한다. 깨어나라 월족의 힘이여.] 자주의 손목에서 혈관이 터지더니 핏줄기가 비월이 누워있는 곳으로 떨어져 내렸다. 오직 월족의 순수한 피를 가진 자만이 부릴 수 있는 주문이였고 월족의 피가 흐르는 자에게만 소용이 있는 주문이였다. 비월의 반쪽은 여러종족의 잡다한 피가 섞여있지만 나머지 반쪽은 순수한 월족의 피를 유지해온 자주의 피가 섞여있었기에 가능한 주문이였다. 진비월에게 조금이라도 월족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면 진비월 역시 살릴 수 있었겠지만 진비월은 한방울의 월족의 피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자주를 아프게 만들었던 능력이였다. 약물이 붉게 변해갈 무렵 자주의 손에서 저절로 났던 상처가 저절고 아물었다. "이제 내곁으로 돌아오거라 나의 아이야. 너를 기다리는 자에게로." 자주는 의식없는 비월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결계를 빠져나갔다. 파라는 누군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잠에서 깨어났다. 희미한 약물냄새와 나무 냄새 그리고 기화요초의 냄새. 순간 자신이 어디에 있는 건지 기억이 났고 놀라서 퍼뜩 고갤르 들어 비월이 있는 곳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눈을 믿지못해 한참동안 자신의 눈을 비벼야했다. "왜 여기서 자고 있는 거지요?" '월아?" 자신이 보고 듣고 있는 데도 파라는 자신을 믿을 수가 없었다. 꿈이라면 깨어나고 난 후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아 눈도 껌벅이지 못하고 비월이 사라질까봐 시선도 돌리지 못했다. "파라? 왜 그러는 거에요? 그리고 여긴 어디지요?" "월아!!!" "?" "월아!!!" "파라?" "꿈이 아니야. 이건 꿈이 아닌 거군..!!!!!!!!!!.....월아.." 파라가 한참을 중얼거리더니 비월을 꼭 끌어안았다. 파라가 너무 격렬하게 떠는 바람에 비월도 같이 흔들리고 있었다. 비월은 도데체 어찌된 상황인지 알 수가 없었지만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고 그것때문에 파라가 걱정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정말 고마워. 살아줘서....." 울먹이는 듯한 파라의 음성에 아무것도 묻지 않고 격해진 파라가 가라앉길 기다렸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본 비월은 이곳이 어디인지 알 수가 없어 당황했다. 기화요초에 나무냄새가 나는 정원인 것은 알겠는데 화룡궁에 이런 곳이 있었던가하고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아니다라는 결론이 났다. 결국 이곳은 화룡궁이 아니라는 것인데.....그렇다면 어디일까? 한참후에야 정신을 차린 파라로부터 들은 건 자신의 체력이 한계에 이르렀고 치료하기 위해 월궁으로 왔다는 것이다. 그것은 월궁의 궁주가 자신의 정체를 알았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만나고 싶지 않았던 사람!!!! 파라가 그와 월궁주의 관계를 어떻게 알았을 까? 그만이 자신을 살릴 수 있다는 것은 또 어떻게 알았을 까? 자신때문에 그의 반려가 죽었다고 믿으며 자신을 증오했으면서 점점 그의 반려를 닮아가는 자신의 모습에 집착하던 사람. 자신을 바라보며 그의 반려를 떠올리던 그사람. 자신이 습격을 당했을 때 그의 반려의 죽음이라도 떠올렸는 지 죽을 것처럼 괴로워하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강효랑을 불러 자신을 부탁하며서도 잠시도 시선을 떼지못하던 그 모습을 차갑게 외면해버렸다. 어차피 그가 보고 있는 건 자신이 아닌 그의 반려일테니까. 용서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 슬퍼하는 모습을 애써 외면했는 데 그가 자신을 살려낼 줄이야.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 지 반쪽이기는 하지만 비월은 알았다. 자신을 감싸고 있던 붉은 색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목숨의 반을 걸었으리라. 자신의 능력도...... 이제는 그를 용서해야 하는 가 보다고 고개를 숙이는 비월이였다. 언젠가 아버지라고 한번만이라도 불러주지 않겠냐고 지나가던 말을 하던 그에게 이제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았다. 훈바는 깨어난 비월을 꼭 끌어안고 온 얼굴에 입을 맞추고 비월을 들어올려 빙글빙글 돌기도 하며 환호성을 질러댔다. 파라는 어린아이같이 환호하는 훈바의 모습에 고개를 저었고, 자주는 한숨을 내쉬었으며 비월은 소리소리를 지르며 훈바를 나무랐다. 훈바의 호탕한 웃음소리는 그동안 두려워했던 기억이라도 떠올렸는 지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비월이 어지럽다고 내려달라고 애원하자 조심스럽게 내려주더니 자주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비월과 파라가 그가 무슨 짓을 저지를 지 몰라 긴장하고 그 진로를 지켜보았다. 털썩!!! 훈바가 무릎을 꿇었다. 비월과 파라는 물론 자주마저도 놀랐다. "고맙오. 월족의 궁주여. 이후 나 훈바 화룡족의 주인은 그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줄 것이며 월족과는 절대로 싸우지 않을 것을 맹세하오." 자주가 당황하여 비월을 돌아보았다. 비월이 고갤르 끄덕이자 그제서야 한숨을 내쉰 후 훈바를 일으켜세웠다. "부모로써 당연히 해야할 일을 한것 뿐이오. 이정도까지 나의 아이를 사랑해 주어 도리허 고맙구려." 부모란 말에 비월이 움찔 어깨를 떨었다. 그동안 자신이 그를 외면해왔음을 떠올린 것이다 .자신에게 보내는시선이 그의 반려를 보기위한 시선이라고 단정하고 무시해버렸다. 그 애절하고 안타까워하던 시선도 모른 척했다. 그런데 그는 부모로써 당연히 자신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희생했다. 영생을 산다고 하는 월족 족장의 생명을 자신의 반려도 아니고 자신을 위해 반이나 희생한 것이다. 훈바는 자주에게서 들은 비월을 노리는 자가 있다는 말에 흥분하여 눈을 번뜩이며 그게 누구냐고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이를 갈아댔다. 하지만 몇십년이 지난 지금도 꼬리도 잡지 못했다는 말에 당황했다. 겨우 살아난 비월이 또 죽을 지도 모른다는 것은 훈바는 물론 파라에게도 너무나 끔찍한 일이였다. 그래서 당분간 비월은 월궁에 남아있기로 했다. 비월이 깨어난 후 며칠동안 조심스럽던 훈바가 비월이 완전히 건강해진 걸 확인하자 음흉하게 웃으며 비월을 긴장시켰다. 이리저리 빠져나가는 것도 한두번이고 결국 붙잡혀 처소로 끌려들어간 비월은 생전처음 밤새도록 훈바에게 시달렸다. 그동안 쌓인 것을 모두 풀려는 듯 훈바는 몇번이고 울고 애원하는 비월을 달래며 안고 또 안았다. 날개를 잃은 후 처음으로 뛸 수 있게 되었으면 무얼 하겠는가. 밤새도록 훈바에게 안겨 허리가 나가서 침상신세를 져야하는데..... 너무 화가 난 비월은 훈바의 얼굴과 몸에 그 보복으로 선명한 이빨자국과 손톱자국을 새겨놓았다. 다음날 자랑스럽게 훈장이라도 단 듯한 표정으로 식사를 하러 온 훈바의 얼굴을 본 자주가 마시던 차에 사레가 들려 콜록거려야 했다. 설마 비월마저 제 어미처럼 상대방의 얼굴을 할퀴고 물어뜯으리라고는 생각 못했던 것이다. 훈바가 낄낄 거리며 비월이 물은 자국을 보여주자 파라가 앞으로 조심하셔야겠다고 핀잔을 주었고 훈바는 히죽 웃었다. 그는 지금같아서는 전쟁에 나가서도 상대방이 무슨 도발을 하던 웃고 넘길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였다. 다시 울지않겠다고 맹세하며 온몸으로 울었다. 혜림아는 불안스럽게 온 방안을 걸어다니고 있었다. 화룡족의 족장의 반려의 식을 보고 온 이후 혜림아는 계속 이런 상태였다. 자주는 부정했지만 화룡족의 족장의 반려는 그아이가 분명했다. 그귈르 가리고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그걸 모를 자주가 아닐텐데 그가 그 사실을 부정했다. 불안했다. 어떻게 살아났는 지 모르지만 날개를 잃는다해도 꼭 죽는 건 아닌 모양이였다. 아니면 천이족의 후손이라 그런 것인지도.... 그때 죽여버렸어야 했는 데 어떻게 살아난 것일까. 초조하게 입술을 물어뜯으며 온 방안을 헤집고 돌아다니던 그는 더이상 초조함을 이기지 못하고 지하로 내려갔다. 아무래도 자신이 혼자서 해결할 일은 아닌 듯 했다. 한동안 멈추었던 천제의 살육때문인지 더이상 시체를 뜯어먹는 장면은 보이지 않았다. 천수족으로 변이한 자들이 잡아온 천인족과 혹은 같은 천수족과 교미를 하고 있었다. 가토가 왜 자꾸만 천이족을 만들어 내는 지는 알 수도 짐작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차마 알면 알수록 커져만 가는 자신의 죄를 느끼고 철저히 외면해버리려고 노력했다. 오늘은 맑은 정신을 유지해야 했기 때문에 헝겊으로 입과 코를 가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적나라하고 유혹적인 모습들을 볼 수 있었지만 혜림아는 동요하는 자신을 진정시켰다. 자신이 찾는자가 머무는 곳에 다다른 혜림아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으로 혜림아를 안았고 혜림아의 마음을 알아주었던 자. "가토?" 그러나 가토는 혼자가 아니였다. 천개가 내려진 침상위에서는 끊어질 듯 하면서도 계속 이어지는 신음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얇은 천 너머로 어렴풋이 교미를 하는 사람의 윤곽이 보였다. 한명은 누구인 지 짐작도 할 수 없었지만 한명은 가토이리라. "가토!" 혜림아의 부름에 격렬하던 움직임이 잠시 멈추더니 곧 다시 움직이기 시작해서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끝났다. 그리고 움직임이 멈춘 후 천개가 들리며 얇은 천하나만 걸친 가토가 모습을 드러냈다. 혜림아는 잠깐 열린 천개사이로 상대가 누군지 살폈으나 침상위에 쓰러져 있는 뒷모습만 얼핏 보았을 뿐 누구인지 확인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얼핏 본 윤곽으로 보아 암컷은 아니였다. 혜림아는 왜 자신이 기분이 나빠지는 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은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상대들과 교미를 하기는 했지만 가토는 한번도 그런 모습을 보여 준 적이 없어 그를 자신만의 것으로 여기고 있었던 것일까? "어인 일인가, 율아?" 가토는 혜림아를 부르는 법이 없었다. 언제나 율아라고 부른다. 왜 그렇게 부르냐고 물었더니 가토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대체적으로 천제의 혈족은 '율'이라는 이름자가 들어가서 혜림아도 천제의 혈육이라 알기 쉽게 그리 부르는 것이라고 했다. "천인족인가요?" 하며 침상쪽을 쳐다보았으나 가토는 대답해 줄 생각이 없어보였다. 대답을 들을 수 없다는 걸 직감한 혜림아는 입술을 질근 깨물고 자리에 앉았다. 가끔 보이는 가토의 단호한 표정은 그 어떤 것이라도 다가가기 힘든 오라를 내뿜었다. 이미 여러번 겪은 일이라 새삼 실망할 것도 없다고 스스로를 달래는 수밖에 없었다. 힐끗 본 가토의 몸매에 입술이 말라갔다. 탄탄하면서도 투명하리만치 맑은 몸매와 자잘한 근육으로 다져진 긴 팔다리. 자주를 좋아하지만 않았다면 그를 좋아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여러번 하는 혜림아였다. "시나이라가 살아있는 것 같아요." 가토의 표정만 쳐다보느라 그때까지 침상위에 꼼짝도 하지 못하던 실루엣의 주인공이 그소리에 경련을 일으키는 걸 보지 못했다. 그걸 알아챈 가토였다. 가토의 입가에 서늘하면서도 일그러진 미소가 그려졌다.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 아이를 죽여주세요." "흐음." 가토의 시선은 여전히 침상쪽으로 향해있었다. "알았네. 생각해보도록 하지." 가토가 일어서자 혜림아가 따라 일어서며 가토에게 다가왔다. 은근한 유혹의 향기를 내뿜으며. "안아주세요." 스스로 안겨오는 혜림아를 쿠션이 쌓여있는 곳에 조심스럽게 눕히며 가토는 힐끔 침상쪽을 쳐다보았다. 혜림아는 가토의 애무에 자지러지는 교성을 지르며 적극적으로 그를 받아들였다. 그러면서 가끔 천개너머 인물에게 시선을 보내 그곳에서 어떤 반응이 나타날 지를 확인해보려고 했으나 침상쪽은 누가 있는 건가할 정도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아무리 교성을 높여도 침상쪽의 인물은 관심이 없는 모양이엿다. 혜림아는 자신을 자극하는 가토의 부분에 전율하며 다리로 그를 휘감았다. 이제까지 그가 상대해온 상대중에서도 가토는 최고였다. 그러나 언제나 가토는 끝까지 가는 법이 없었다. 혜림아가 그의 씨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면 그는 자신의 몸에서 빠져나가버렸다. "왜?" 혜림아가 빠져나가는 그를 붙잡으려하자 그가 미소지으며 혜림아의 귓속에 속삭였다. "내 아이는 내 반려만이 가지게 할거라오. 그대가 내 반려가 되어주겠다면 생각해 보겠오." 혜림아는 반려가 되어달라고 청하는 듯한 가토의 말에 잠시 흔들렸지만 자주의 얼굴이 떠오르자 더이상 가토를 붙잡을 수가 없었다. 가토는 자신의 팔을 놓는 혜림아의 모습에 더욱 진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생각을 빤히 들여다보는 듯한 시선이였다. 그리고 이미 예상했던 반응인 듯 조금도 실망하는 기색은 없었다. 옷을 추스려입고 지하궁을 빠져나가는 혜림아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자주가 자리에서 일어나 침상으로 다가가 천개를 들어올리고 침상위를 쳐다보았다. 바닥만 쳐다보고 있던 침상위의 그가 가토를 돌아보았다. 그눈에 가득한 것은 증오와 살기였다. 그 눈빛에 가토가 한쪽 끝만 올리는 미소를 지었다. 가소롭다는 듯한 그 미소에 다하는 눈썹을 찌푸려보인 후 고개를 돌려버렸다. 도망치고 싶어도 이방을 빠져나가지 못하는 자신의 다리를 내려다보며 다하는 입술을 깨물었다. 발목에 채워진 봉인구만 아니라면..... 멀리 날아가 버릴텐데... 봉인구의 열쇠는 가토의 귀에 걸려있었다. 몇번인가 빼앗아보려고도 하고 훔쳐보려고도 했고 애원도 해보았다. 가토는 그저 비웃으며 다하의 모든 행동을 무시해버렸다. 게다가 도망치려는 기미만 보여도 며칠동안 걷지도 못하게 혹독하리만치 지독하게 범해왔다. "들었겠지? 율아가 시나이라를 죽여달라는 군." 두번다시 쳐다보지 않겠다는 듯이 각오를 다지던 다하의 몸이 뻣뻣하게 굳고 어깨가 쉴새없이 떨리고 있었다. 그 떨리는 몸을 보며 가토가 뒤틀린 미소를 지었다. 다하가 유일하게 반응을 보이는 것은 진비월과 관련된 일뿐이였다. 정작 진비월은 사라진지 오래이건만 그가 남긴 작은 조각하나에도 흔들리는 다하의 모습은 가토의 심기를 거슬리고 있었다. "적극적으로 유혹해오는 율아의 정성을 생각해서라도 그의 뜻을 받아들여 줄 생각이다." 다하가 흠칫 놀라더니 고개를 휙 돌려 가토를 쳐다보았다. 가토의 진짜 의도를 알아보려는 듯이 살피는 시선이였다. 가토는 흔들리고 있는 다하의 시선을 피하지않고 마주 쳐다보며 자신의 의도를 그대로 드러냈다. 곧 가토의 의도를 눈치챈 다하가 울 것같은 시선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지금 다하를 시험하려고 하고 있었다. 스스로 유혹해보라는 듯이 혜림아처럼 적극적으로..... 말을 하지 못하는 다하이지만 어떻게든 가토를 설득해야 한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다하가 뻣뻣하게 서 있는 가토에게 다가가 그의 목을 끌어안아 숙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에게 입을 맞추었다. 가토는 쉽사리 다하에게 유혹당하지 않을 생각인 지 입을 열지 않았다. 아무리 다하가 입술을 빨고 더듬어도 입을 벌리지 않았다. 다하의 다리사이에는 한참전에 가토가 몸안에 뿌려놓은 정액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가토가 혜림아에게 한말을 듣지 못한 다하로서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알 수가 없었다. 좀처럼 입을 벌리지 않는 가토의 태도에 다하는 자신 스스로가 너무나 비참해지는 기분에 목이 아릿해지고 눈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아니 이런 식으로 그를 유혹해야만 하는 자신의 처지에 가슴이 먹먹해져 견딜수가 없었다. 그까짓 자존심이 뭐라고 진비월의 아이가 죽을 지도 모르는 데 자존심을 버리지못하는 자신이 너무 미웠다. 다하는 더이상 견디기 힘든 자기환멸에 스스로를 비웃으며 가토의 목을 잡고있던 손을 풀었다. 아니 더이상 어떻게 해야하는 지 방법도 몰랐다. 어차피 해도 안될거라면.... 다하가 포기하고 손을 거두어들이려고 하자 가토가 물러서려는 다하의 허리를 움켜쥐고 자신에게서 떨어져가는 입술을 덮쳤다. 미처 호흡을 정리하지 못한 다하가 급하게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평소처럼 그를 밀어내려고 손을 댔으나 등뒤로 꺽였을 뿐이였다. 손이 꺽여 가토의 몸에 자신의 몸이 밀착되자 다하는 고개를 저어 가토를 떨쳐내려고 했다. 가토는 평소보다 더 거칠었다. 다하를 침상위로 밀친 후 버둥거리는 다하를 내리눌렀다. 그는 여전히 일그러진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지만 눈에서는 분노와 실망만이 가득했다. '그걸 유혹이라고 하는건가? 다하. 여전히 잘하는 게 하나도 없는 바보로구나. 하기야 천궁에서도 버린 혈육이니 잘난게 있을 리가 없지. 네 아버지는 네가 태어나자마자 죽이라고 했다더군. 그 음령족만 아니였다면 넌 지금 내게 이런 굴욕적인 일을 당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이렇게 된 것도 그 음령족의 조각인 진비월때문인데 왜 그 음령족을 원망하지 않는건가. 맘에 둔 자에게 고백도 못하고 남에게 빼앗겨버리는 바보이니 남들이 다하는 유혹도 애원도 못하는 것도 당연하다 이건가?응?" 격렬하게 저항하던 다하의 움직임이 얼어버린 듯 멈추었다. 저항 뿐 아니라 숨까지 쉬지 않았다. 이제까지 다하를 지탱해오던 마음이 산산히 부서지고 있었다. 너무나 약하게 아슬아슬하게 지켜온 마음이 무너지고 있었다. "네가 말을 할 줄 알아서 고백을 한다해도 진비월이 받아주기나 했을까? 아무것도 잘하는 것도 없고 사람들에게 경멸이나 받는 너같은 존재를 누가 좋아해주겠는가. 진비월 역시 너를 속으로 경멸하고 있었을 지도 모르지." 그나마 다하를 이때까지 지탱해주던 진비월의 미소가 산산히 흩어졌다. 가토는 멈춘 다하의 저항에도 여전히 자신에게 마음을 닫고 있는 그러면서도 그런 조그마한 녀석의 작은 조각에도 온 마음을 쏟는 그가 미워 그가 상처받을 것을 알면서도 그를 비웃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자신이 먼저였다. 누구보다도 먼저 다하를 눈에 넣은 건 자신이였다. 이리저리 채이며 상처받으면서도 수줍게 미소 짓던 어린 시절의 모습에서부터 그는 자신의 것이라고 마음속에 새기고 있었는 데 다른 자에게 마음을 줘버린 그가 미웠다. 그래서 그런 그가 미워서 가토는 그에게 잔인해졌다. 진비월의 죽음의 소식에 쉽게 무너져내리는 그를 억지로 범해버리고 자신의 궁에 가두었다. 말을 못하는 선천제의 혈육의 행방불명은 누구의 관심도 끌지못했다. 결국 이날 이때까지 다하는 가토의 수중에 갇혀 매일 유린당하고 있었다. 그리고 가토가 전해주는 진비월의 조각에 대한 소식에 상처받고 괴로워하고 기뻐하며 살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다하?" 너무 반응이 없자 가토는 섬뜩한 예감이 뇌리를 강타하자 급히 다하의 호흡부터 확인했다. 자신이 만들어 놓은 흔적이 가득한 심장에 귀를 대자 희미하게 심장뛰는 소리가 들렸지만 정상적이라고 하기에는 그 맥동이 너무 희미했다. 게다가 점점 그나마 남아있던 맥동이 사라져 가고 있었다. 가토가 급히 다하의 입술에 숨을 불어넣으며 심장을 압박했다. 전에도 이유없이 아프고 죽을 뻔한 저이 있는 데 너무 화가나서 그 사실을 잊어버린 자신을 나무라며 심장을 압박하는 것에 정성을 쏟았지만 반응이 돌아오지 않았다. "안돼!!!" 왜 반응이 돌아오지 않는 것일까. 설마 이대로 호흡이 멎어버리는 건 아닐까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숨이 막히고 식은 땀이 주륵주륵 흘러내렸다. 그때 천개가 걷히며 탁제균이 모습을 드러냈다. "뭡니까?" 침상위의 상황을 보던 탁제균이 일그러진 가토의 표정에 놀라 물었다. 왠만해선 가토의 얼굴에서 미소를 지울수가 없는데 사람을 죽일 때 조차도 그는 미소를 짓는데 그런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숨을 쉬지 않아..." 잔뜩 억눌린 듯한 신음같은 소리에 그제서야 탁제균이 다하에게 다가갔다.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다하의 온몸을 도배한 가토가 만들어 놓은 듯한 흔적들. 생긴 지 얼마되지 않은 것부터 희미해져가는 흔적까지 남의 몸에 흔적 남기는 걸 꺼리는 가토가 얼마나 마음을 주고 있는 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였다. 탁제균은 다하의 호흡과 맥박부터 살폈다. 비정상적일 정도로 느리지만 그에 반해 치명적이지 않은 흐름. "가사 상태입니다. 충격을 받으면 스스로를 방어하기위해 그 충격으로 부터 벗어나려고 가끔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 "죽는 건 아니겠지?" "녜." "언제 깨어나지? 별일은 없겠지?" "개인별로 다릅니다. 금방 깨어나는 경우도 있고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겨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삻의 의욕이 없으면 이대로 영면에 드는 자도 있습니다." "영면? 영원히 잔다고? 그건 죽는 거잖아." "드문 경우지만 아주 없는 건 아닙니다." 가토는 떨리는 손으로 다하의 머리를 쓸어넘겼다. 가토의 손길에도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는 다하의 신체에 가토는 심장이 떨리는 두려움을 느꼈다. 자신에게 유린당하면서도 포기하지 않던 생명을 그까짓 몇마디네 포기한다구? "그보다 의논 드릴 것이 있습니다. 시나이라가 살아있는 것 같습니다." 탁제균의 말에 눈앞이 깜깜해져 멍하니 있던 가토가 퍼뜩 고개를 들어 탁제균을 쳐다보았다. "시나이라? " "녜 어찌된 일인 지 날개를 잃고도 죽지않은 모양입니다. 이대로 두면 계획에 차질이...." "알고 있어. 혜림아가 다녀갔어..그리고 당분간 내버려둬." "녜?" "내버려두라고. 천년을 기다려온 일이다. 쉽게 무너질 계획이 아니다. 그러니 그아이를 내버려두고 소유주에게 율파를 더욱 유혹하여 동천족 중에 빙해족을 공격하게 명령을 내리도록 유도하라고 해." "하지만 아무리 천제가 소유주에게 빠져있다고 해도 빙해족을 공격하라고 명령하라는 건 쉽게 응낙하지 않을 겁니다. " "정 안되면 그방법을 쓰라고 해." "그건...." "이제 올 만큼 왔다. 더이상 천제는 불필요한 존재야. 그 아비에 비하면 이용하기는 쉬웠지만 너무 물러서 더이상 기대할 것도 없다.게다가 시나이라가 살아있다는걸 안다면 오래지 않아 소유주를 버릴 것이 분명하니 그 전에 우리의 목적을 달성해야겠지." "녜" 탁제균이 물러가자 가토는 침상위에 죽은 듯이 누워있는 다하를 쳐다보았다. 생각같아서는 진비월의 흔적이란 흔적은 모두 세상에서 없애버리고 싶지만 지금 다하를 깨울 수 있는 건 그 마지막 흔적인 시나이라였다. 소유주가 진비월을 닮기는 했으나 전에 한번 소유주를 본 다하가 죽일 듯이 소유주를 노려본걸로 보아 소유주로는 다하를 깨울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끝까지 나를 배신하는 구나. 다하. 그런다고 내가 널 포기할 줄 아느냐? 천년이다 내가 이세상에 깨어난 후 천년동안 기다려온 자가 바로 너다. 천년동안 기다려 온 전쟁도 미루고 지켜내고 싶은 것이 너란 말이다. 명심하거라 네 스스로 호흡을 멈추는 순간 그 진비월의 아이 역시 살아남지 못하리란 것을....." 가토의 입가에 사라져버렸던 미소가 서서히 돌아왔다. 훈바는 희미하게 깨어나는 의식너머에서 옆구리의 존재를 의식했다. 규칙적으로 들리는 호흡소리와 약간의 미열로 인해 따뜻하게 느껴지는 육체가 그의 팔안에 있었다. 살그머니 눈을 뜨고 보니 비월이 훈바의 가슴에 이마를 대고 주먹을 꼭 쥐고 웅크린 채 자고 있었다. 먼저 유혹하면 한번만 하겠다는 훈바의 말에 어설픈 유혹을 하던 모습이 떠올라 훈바는 웃음이 터져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그는 태어난 이래 양귀를 잡아당겨 입을 맞추는 유혹은 처음당했다. 너무나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치자 질끈 입술을 깨물고 귀를 비틀어댔다. 여기저기를 깨물어대는 데 그게 또 은근히 저릿하니 자극적이라 훈바는 손이 근질거리는 걸 간신히 참았다. 좀처럼 반응하지 않는 훈바의 모습에 열이 받은 비월이 훈바의 물건을 움켜쥐려고 했다가 자극받은 훈바에게 그대로 당했다. 의기양양해 하던 비월은 얼마지나지 않아 빨리 끝내달라고 애원하기에 이르렀다. 훈바는 좀처럼 사정하지 않고 조절을 하면서 새벽녘까지 비월을 안았던 것이다. 비월은 이게 한번이라면 여러번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고 따져물었다가 민망한 소리란 소리는 다들어야 했다. 결국 훈바가 사정을 할 무렵에는 비월은 시든 채소마냥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자신의 몸안에 가득 한 액체에 곤혹스러워하며 혹여 알이라도 생길까싶어 그것을 몸안에 가두려고 했으나 훈바가 바로 비월을 일으켜세워서 손을 넣어 액체를 흘러내리게 만들었다. 바둥거리며 어떻게든 힘을 주고 흘러내리는 걸 막아보려고 하자 훈바가 비월의 예민한 부분을 자극하여 힘이 빠진 비월에게서 쉽사리 모든 액체를 뽑아내 버렸다. 무엇보다도 훈바가 비월이 알을 가지지 못하게 하려는 건 비월을 낳은 진비월이란 자의 이야기 때문이였다. 그 진비월이란 자도 너무 작은 체구로 알을 낳느라 고통스러워하다가 기진 맥진하여 죽었다지 않으가. 원망하듯 노려보는 시선은 별거 아니였다. 저런 원망하는 시선마저도 그에게는 사랑스럽기만 했던 것이다. 한번 죽을 뻔한 것만으로 충분했다. 두번다시 죽음의 문턱을 넘게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화룡궁으로 돌아가면서 훈바는 파라에게 비월을 잘 지켜달라고 했다. 아직까지 치료가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화룡궁으로 데려가지 못하는 것이다. 낮에는 화룡궁에 밤에는 월궁에서 보내는 훈바의 모습은 화룡족에게나 월족에게나 익숙한 모습이 되어갔다. 빙해족이 멸족당했다. 자주 있는 살육이기는 했지만 빙해족의 멸족은 그 의미가 달랐다. 그들은 천인족이기는 하지만 그에 더불어 요정족이기도 햇다. 몇명 남지 않은 수에 극진히 보호받을 정도로 귀한 종족이면서 그들의 피는 극독이라 한방울이 한사람을 거뜬히 즉사시킬 수 있으며 그들의 피가 땅에 떨어지면 그곳은 아무것도 자랄 수 없는 황무지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그들은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 극한의 땅인 만년 빙 속에서 살고 있었다. 그런 그들이 지극한 보호를 받는 이유는 그들이 만들어내는 결계석때문이였다. 천계를 유지하는 대부분의 결계석이 그들의 눈물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 결계석이 영원불멸한 보석이 아닌 터라 깨어지거나 유실되기도 하여 새것으로 교체해주지 않으면 그보석으로 결계를 치고 있는 많은 궁전들이 무너지는 사태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보석은 계속 만들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보석을 만들어내는 빙해족이 멸족당했다. 명령을 내린 사람도 문제지만 그 명령을 따른 사람들도 문제였다. 아무리 천제의 피에 속박당한 자들이라고 해도 천제의 이번 명령은 따르면 안되는 명령이였던 것이다. 이지가 상실되지 않고서야 어찌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게다가 돌아온 그들을 천제는 또한 모두 죽이게 만들었다. 도데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를 천제의 행동에 수백년만에 십이지천이 모두 한자리에 모이고 있었다. 천궁에 몰려 온 열두개의 하늘을 지배하는 궁주들은 천제를 만날 수가 없었다. 천제는 빙해족을 멸족시킨 전사들을 죽인 후 심처로 들어가 버린 것이다. 아무리 기별을 보내도 그는 그곳을 나오지 않았다. 천제의 허락없이는 그누구도 들어갈 수 없는 곳이 심처였다. 오직 천제만의 공간이였다. 궁주들은 천제가 심처에서 나올 때까지 지루한 시간동안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궁주들은 대부분 안면이 있었다. 그동안 여러번 궁주위가 바뀐 곳도 있었지만 대부분 백여년 전 궁주회의가 있을 때 본 얼굴들이였다. 일천궁주만 제외하고는..... 궁주위가 바뀌게 되면 천궁에 보고가 들어가고 천제의 허락이 떨어져야 하기 때문에 한번 쯤은 천궁으로 와야했다. 그들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은 자주와 훈바였다. 자주야 백년전에도 이백년 전에도 그전에도 다른 자들이 기억하기 훨씬 전부터 월궁을 다스려온 것으로 알려진 나이 불명과 그 냉험한 성격으로 유명한 인물이였고 훈바는 백여년전에 아비를 죽이고 화룡궁을 물려받은 자로 그 화급하고 무절제한 성정으로 하도 많은 일을 저지른 자라 유명한 자였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다른 궁주들의 시선을 끈것은 일천궁주였다. 백년전은 물론 이백년 전에도 그를 본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오늘에 이르러서도 그를 볼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 못했던 다른 궁주들은 일천궁주라고 나타난 자에게 강한 호기심을 드러냈다. 게다가 그 화려한 외모라니... 천상베일의 미녀라는 혜림아나 숙하도 그의 미모에 빛을 잃을 지경이였다. 그렇지만 그는 그 화려한 외모와는 달리 결코 암컷은 될 수 없는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부드럽게 정제된 강한 힘이 느껴지는 모습에 가끔 암컷으로 변이하여 유희를 즐기는 북해빙천의 궁주는 그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못하고 있었다. 일천궁주에게 호기심으 드러내지 않는 사람은 자주와 훈바였다. 훈바는 비월을 생각하는라 다른 곳에 시선을 돌림 틈이 없었고 자주야 원래가 주변에 관심이 없는 성격이였던 것이다. "어이하여 천제의 살육이 이지경에 이른 것이오." 남천궁주였다. 그는 오래전 자신의 지배를 받고 있던 지룡족을 잃었다. 대부분의 남천의 땅을 기름지게 가꿀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그들이 있을 때는 남천은 흉년이라는 말이 없었다. 그런데 최근에 들어 평작을 유지하기도 힘들었으니 그의 불만이 하늘을 찌르는 것은 당연했다. "빙해족이라니..... 천인족을 멸망시킬 의도가 아니라면 어찌 빙해족을 멸족시키신단 말이요.'' 남천궁주의 말에 대부분의 궁주들의 표정이 어두운 수심에 잠겼다. 빙해족이란 말 한마디로도 그들의 가슴은 무겁게 가라앉고 있었다. "어찌하여 율파님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어진 심기가 흔들리셔서 이리 무서운 일을 궁주들의 의논도 없이 단독으로 처리하시고 그에 대한 일언 반구도 없으시단 말인가. 게다가 그런 천수족따위에 휘둘리셔서 중대한 이 사태를 의논하러 온 궁주들을 천대하시다니..... 천계가 어찌되려고...." 여기저기서 터져나오는 불평불만에 궁주들의 감정은 더욱 고조되어갔다. 일천의 궁주는 그 와중에서도 노골적으로 추파를 던져오는 북해빙천의 궁주의 시선에 빙그레 미소지었다. 일천의 궁주가 살그머니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북해빙천의 궁주도 잠시 후 그 뒤를 따라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서천의 궁주가 콧웃음을 쳤다. 6. 천제 혜림아. 다음 천제가 내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찾아온 율파의 천인오쇠 증상에 천인계는 경악했다. 게다가 아직까지 율파의 상대들이 단 한번도 알을 낳지 않은 상태라 천인계는 큰 혼란에 빠져들었다. 끝없는 실정과 과오로 수많은 잘못을 저지르기는 했지만 천제이기에 존재가치가 있는 것이 천제였다. 아무리 폭정을 일쌈고 함부로 사람을 죽여도 처단할 수 없는 자가 천제이기도 했다. 새로운 천제가 태어날때까지 그저 천인족은 참으며 기다려줘야했다. 그런데 그 수많은 시간들 속에서 단 한번도 끊긴 적이 없는 적통이 끊길 위기인 것이다. 그들이 기억하느 천제의 혈육이란 천수족과의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이미 죽은 진비월과 그리고 순수 천제의 혈육이며 율파의 친동생이였지만 말을 하지 못하던 다하와 선천제의 사람을 받았던 그의 동생이지만 절반의 절반의 피를 가지고 있는 혜림아와 시나이라라고 불리던 자주의 아이가 전부였다. 하지만 그중에서 다하는 행방불명된지 오래고 시나이라는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가장 안전한 천제위를 물려받을 수 있는 혈육은 다하였지만 수십년전에 행방불명된 그의 얼굴을 기억하는 사람이 드물정도로 그를 찾는 일은 요원했다. 그렇다고 이미 천인오쇠에 접어든 율파가 알을 가지게 한다는 보장도 없었다. 그토록 많은 날을 교미한 소유주에게서 회임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걸로 보아 어쩌면 율파의 호흡이 멎는 순간까지도 알은 태어나지 않을 가능성이 다분했다. 기본적으로 천제의 피가 흐르는 천인족의 수명이 다른 천인족에 비해 그 수명이 짧기는 하지만 이정도로 짧은 경우는 이례를 찾아볼 숙 없었다. 그렇다고 다른 암살이나 독살의 기미도 보이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유달리 빨리 진행되는 율파의 노화속도에 급해진 것은 천인족이였다. 대부분의 십이지천궁이 빙해족의 결계석으로 유지된다면 천궁은 천제위를 이어받은 천제의 몸 자체가 결계석으로 작용했다. 그런 천제위가 공석이 되어버린다면 천궁이 무너지는 것은 시간 문제였고 십이천궁도 바로 무너지는 건 아니지만 중심을 잃어버린 결계석들이 중압을 이기지 못하고 오래버티질 못해 훼손되는 속도가 빨라지고 말것이였다. 결국 새 결계석을 구하지 못하면 당연한 수순으로 결계석이 파괴된 십이천궁은 지상으로 무너져 내릴 것이 뻔했다. 십이지천궁의 모든 전사들이 필사적으로 행방불명된 다하를 찾았지만 만화궁의 지하에 갇혀 있는 다하를 찾아낼 수 있을리가 없었다. 만화궁 밑에 또다른 지하궁이 있다는 사실도 모르는 그들이였으니까. 결국 십이지천의 궁주들은 혜림아를 다음 보위에 추대하였다. 엉겹결에 지고무상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르게 된 혜림아는 뜻밖의 행운에 환희에 젖었다. 게다가 이제까지 단 한번도 자신을 보아주지않던 자주마저 자신을 보아주고 있질 않은가. 자신이 그의 반려를 죽이게 했다하여도 이제 그는 자신에게 보복할 수 없는 그런 위치에 오른 것이다. 평생을 숨 죽이며 가슴을 졸였는 데 이제는 그 압박으로부터 해방되어 혜림아는 당당하게 보좌에 앉았다. 끝없는 축하선물이 쌓여갔다. 자신의 눈앞에서 진비월이 대여섯명의 수컷에게 강간당하며 죽어가는 그날 만큼이나 혜림아는 기뻤다. 어떻게나 반항하는 지 할퀴는 그 손목을 부러트리고 입을 짓이기고 욕정에 눈이 먼 수컷들에게 던져주었더니 수컷들은 진비월이 숨이 멎은 후까지도 유린하였다. 자주가 아닌 다른 자를 받아들이며 절규하던 진비월의 그 눈을 보며 혜림아는 미소지었었다. 이제 그 진비월도 사라졌고 자신은 지고지상의 자리에 올랐으니 자주만 손에 넣는다면 부러울게 없었다. 새로운 천제의 등극으로 천인계는 백일축제에 들어갔다. 천제의 만수무강과 공명정대한 정치를 펴도록 기원을 드리는 축제였다. 거리마다 꽃과 음악이 넘쳐나고 날마다 천제에게 복을 내려달라고 비는 지상계의 인파들이 천궁이 떠 있는 지상의 제단에 재물과 꽃다발을 바치고 있었다. 혜림아는 수신호위를 몰래보내 소유주를 잡아오라 명령했다. 예전의 원한을 잊어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또 한번 자신의 멸령에 즉각 행동하는 그들의 모습에 뿌듯해 하는 그였다. 지하감옥에 갇혀 있느 소유주의 모습에 혜림아는 미소를 지었다. 저 저주스럽던 천이족을 닮은 것도 용서할 수 없건만 자주에게 추파를 던졌으니 혜림아가 벼르고 있었던 것도 당연했다. 소유주가 자신을 지켜주고 있던 율파가 언제까지 건재하리란 것을 믿고 그런 짓을 한 것이라면 한마디로 운이 없었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누가 혜림아가 천제위에 오르리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말이다. 율파가 선처제들이 죽음을 맞이하는 후궁에서 죽을 날을 기다리는 것에 비해 소유주는 예전보다 더 요염하고 생기있어 보였다. 마치 율파의 생기라고 빼앗아 먹은 듯한 모습이였다. "꼴이 말이 아니구나..소유주," 혜림아의 빈정거림에도 소유주는 놀라거나 두려워하지않고 오히려 빙그레 미소지었다. "등극을 경하드리옵니다. 천제폐하. 만복을 빌어드리옵니다." 사근사근하면서도 진정으로 비는 듯한 모습에 혜림아는 기쁘다기보다는 소유주가 자신을 빈정거리는 것만 같아 화가 났다. "닥쳐라. 천한 것 너따위의 경하 받고 싶지 않으니까. 곱게 죽여주지는 않겠다." 혜림아의 호통에도 소유주는 태연하기만 했고 그 모습에 더욱 울화가 치미는 혜림아였다. "네 따위가 감히 나를 능멸하려하느냐?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도 살려줄까말까 하는데 웃어? 진정 네가 뜨거운 맛을 봐야 후회라는 걸 하겠느냐?" 열이 받은 혜림아가 길길이 날뛰며 수신호위를 부르려고 하자 소유주가 입을 열었다. "월천의 궁주가 그분의 반려를 죽이도록 사주한 자가 혜림아님이란 걸 아신다면 어찌하겠습니까?" 펄펄 끓는 열혈지옥 같던 혜림아의 심장이 북해빙궁의 만년설처럼 얼어붙은 건 순식간이였다. 그 일을 소유주가 어찌 아는 것일까? " 그....그걸 어찌 알았느냐?" "흐음 제가 왜 그걸 말해야 하는 건가요? 곧 죽을 목숨으로서..." 장광하게 늘어놓으려는 소유주의 말을 혜림아가 급히 막았다. "말하여라. 그럼 살려주겠다." 그러나 소유주는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다. 오히려 초조하게 안달하는 혜림아의 모습을 여유있게 쳐다보고 있었다. "살려준신다 해도 이런 곳에 평생 가둬두시거나 매일 고문하신다면 그게 살려주시는 것이라 할 수 있을까요?" 속을 꿰뜷어 보는 듯한 소유주의 말에 혜림아는 소유주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생각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비아냥거리는 저 목을 쳐버리고 싶었지만 그러기에 그가 가지고 있는 비밀이 혜림아에게는 너무 커다란 무게로 다가왔다. "원하는 것이 무어냐?" 그제서야 소유주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갖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걸 갖을 수 있게 도와주시고 저를 자유롭게 해주세요." "그게 무엇이냐?" "화룡족의 후계자입니다. 그를 수중에 넣고 싶습니다. 그리하면 이일은 평생 비밀로 지킬 것이며 더불어 혜림아님이 월천의 궁주님과 맺어지도록 도와 드리지요." 언제 소유주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는가 싶을 정도로 혜림아는 반색을 했다. 그리고 소유주가 진비월을 죽인 일을 어떻게 알았는 지에 대해 알아보려 했던 것도 까맣게 잊어버렸다. 이제까지 월천의 궁주와 자신을 맺어지도록 도와주겠다고 한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 "진정 나를 돕겠느냐?" "제 목숨을 가지고 어찌 망발을 하겠사옵니까." 혜림아는 소유주의 입가에 떠오른 비웃음은 보이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철천지 원수였던 소유주에게 자유는 물론이려니와 거처까지 마련해 주었다. 비월은 대부분의 시간을 정원에서 보내고 있었다. 파라가 옆에서 말동무가 되어주었고 시종들이 그이외의 것을 가져다 줬다.시종들이나 시녀들은 파라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고 파라가 짖궃게 미소라도 지을라치면 온통 얼굴이 빨개져서 허둥거리며 도망치기 일쑤였다. 그 모습에 파라가 웃음을 터트렸고 비월은 고개를 설래설래 저었다. "아무래도 천제의 천인오쇠 이전부터 여러가지로 의심스런 것들이 있습니다. 그중 가장 큰 의혹은 천인오쇠 바로전에 천제율파가 내린 빙해족 멸족 명령인데 호하의 말로는 시체가 부족하다고 합니다. 다른 부족이야 워낙 수가 많고 일일이 확인할 수 없었지만 빙해족은 수가 적어서 확인하기가 쉬웠다고 하다군요. 그런 점으로 보아 그동안 천인족의 시체들 역시 없어졌을 수도 있다는 결론이 납니다. 누가 무슨 이유로 천인족의 사체를 가져갔는 지는 모르지만 그게 수인족은 아니라는 거지요." 비월은 어깨에 내려앉아 부리로 비월의 볼을 건드리고 있는 작은 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차분하게 말하고 있었고 파라는 햇볕이 잘드는 곳에 펴둔 자리위에 놓여진 쿠션에 기대어 뒹굴고 있었다. 시종들이 가져다둔 과일과 음식을 먹으며 입을 열었다. "너의 생각은 무엇이냐? 누가 그 사체를 가져갔을까? 다른 천인족이야 먹을 수라도 있다지만 빙해족은 근처에 있는 것만으로도 해를 입을 수 있는 극독으로 이루어진 종족이다. 그것을 가져다 무엇에 쓰겠느냐?" "그것까지는 알 수 없습니다. 제가 짐작한 것은 두 빙해족이 살아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 여유있게 과일을 베어먹던 파라가 너무 놀라 과일을 제대로 씹지도 않고 삼켜 벌떡 일어나 앉아 한참동안 콜록거려야했다. 파라의 기침소리에 작은 새는 날아가 버렸고 비월은 조용히 작은 과일을 집어들어 입에 넣었다. "설마.." " 살아있을 가망성이 많습니다. 저라면 두 빙해족이 알을 낳도록 만들어서 그들의 눈물로 계속 결계석을 만들어내 그 결계석으로 십이지천궁을 지배하겠습니다." 소름이 돋아 파라는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살육 와중에 어떻게 그들을 빼냈단 말이냐?" "그것이 두번째 의문이지요. 천제는 왜 빙해족을 죽이고 온 전사들을 모두 죽였을까요? 그것은 혹시 모자란 빙해족의 수를 감추기 위한 방책은 아니였을까요?" "하지만 아버지가 새체를 확인하면 들통이 날 것이 뻔한데 왜 그런 짓을...." "어차피 호하는 말할 수 없습니다. 사체가 분실된 것은 호하의 책임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호하도 그것이 걱정되어 제게 연락을 하신거구요." 침묵이 흘렀다. 여유롭던 표정도 한가하던 표정도 사라진 파라가 심각하게 생각을 하는 동안 비월은 저 멀리 월궁의 하늘 위를 쳐다보고 있었다. 파라의 심사는 복잡하기만 했다. 아버지에게 덮어씌우기 위해 벌린 일이라고 보기에는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비월의 말을 긍정하기에는 그 뒤에 벌어질 일이 너무 심각했다. "그보다." 한참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던 파라는 돌변한 비월의 말퉁 눈썹을 치켜떴다. "파라지요?" "뭐가?" "훈바님에게 내가 알을 낳지 못하게 하도록 말한 사람말에요." 파라가 고개를 휙 돌렸지만 바로 비월에게 귀를 잡혀 비틀렸다. "우아아악...그만" "언제였어요? 언제 이야기 했길래 건강해진 지금도 알을 가지지 못하게 하는 거냐구요?" "아파....그만 비틀어... 오래전 일이라구 . 게다가 그때는 네가 너무 약해서 혹여라도 알이 생기면 죽을 것만 같아서 부탁했던 거야. 지금까지 그러고 있을 줄은 몰랐다구." 비월이 원망스러운 듯 파라를 노려보았다. 교미가 끝난 후가 훈바와 비월의 싸움의 시작시간이였다. 어떻게든 알을 가져보려는 비월과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걸 막아보려는 훈바의 실갱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치열해졌지만 언제나 비월의 패배였다. "책임지고 훈바님을 설득해주세요." "싫어." "왜요?" "어차피 건강해졌다지만 여전히 암컷으로 변이하지 못하잖아. 건장하고 체구가 큰 수컷도 알을 낳는 건 힘들다고 월아처럼 이렇게 조그마한 체구로 그것도 수컷의 몸으로 알을 가지겠다니.. 그런 위험은 사양하고 싶다구." 비월이 사납게 노려보아도 파라는 식은 땀을 흘려가며 비월의 시선을 외면했다. 끈질기게 노려보는 통에 견디지 못한 파라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무리 노려봐도 소용없다구, 절대로 나는 반대니까." 그뒤 파라의 얼굴에는 훈바의 얼굴에 자주 등장하는 손톱자국이 생겨버렸다. 나중에 파라에게서 비월의 말을 전해들은 훈바가 파라의 심저을 안다면서 서로 위로하며 같아 술잔을 기울이다 비월이 나타나 던진 술병에 맞아 머리에 혹을 하나씩 더 달아야 했다. 그러면서도 서로의 혹을 쳐다보며 낄낄낄 웃어대는 두사람이였다. 다행스럽게도 다하는 며칠이 지나지 않아 깨어났다. 하지만 그 눈에서는 아무것도 읽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그를 유린할 때마다 증오와 분노섞인 감정을 담고 있던 그 눈은 생기를 잃어버렸다. 일천궁에 그를 불러들여 천진한 눈으로 자신을 신뢰하며 자신이 준 차를 마시고 있는 다하에게 진비월이 죽었다는 이야길르 해 주었다. 놀라서 커다랗게 떠진 눈을 보며 그 눈에 어린 경악과 슬픔을 보고 비틀린 감정을 느꼈다.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때문에 격정을 이기지 못해 찻잔을 움켜쥐고 고갤 숙인 채 눈물을 뚝뚝 흘린느 모습에 가토는 다하가 쥐고 있는 찻잔을 빼앗아 내려놓고 다하의 두 손목을 움켜쥐고 천천히 끌어당겨 자신의 품안에 가두었다. 조심스럽게 눈물에 젖은 입술을 맛보면서 가토는 전율했다. 이것이였다. 자신이 천년동안 찾아온 감정이 바로 이것이였다. 다하는 가토가 그저 자신을 위로해주려고 하는가 보다고 믿어버리고 그를 거부하지 않았다. 아랫입술을 빨고 윗입술마저 삼키며 차맛이 나는 혀가 다하의 입안으로 침입하였다. 이때까지 입술이 살짝 맞닿는 입맞춤밖에 해본적이 없는 다하는 생전처음으로 당하는 깊은 입맞춤에 놀라 가토를 밀어내려고 했다. 달콤한 기분에 취해 자신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다하의 행동에 가토는 한결 부드러워진 감정으로 황홀경에 취해 있다가 다하의 작으 거부의 손길하나에 추락을 맛보았다. "진비월이 어떻게 죽었는 지 자세히 알려주지 않았군요. 월천궁주가 입단속을 시켰으니 사람들은 대부분 모르고 있지만 아는 사람은 알지요. 손이 부러지고 발이 꺽이고 손톱이 전부 부러졌다더군요. 게다가 얼마나 많은 수컷에게 당했는 지 그의 다리사이에서 끝없이 많은 정액이 흘러나오더랍니다. 무엇이 그리 원통했는지 눈도 감지 못했다하더군요." 다하가 죽을 힘을 다해 가토를 거부하였다. 가토는 다하를 내팽겨친 후 두팔을 자신의 손으로 결박하고 몸을 내리눌렀다. 그리고 조금의 배려도 없이 다하의 옷을 찢어내어 그 몸에 자신의 흔적들을 새겨갔다. 다하가 몸부림을 칠수록 다하의 몸에는 가토가 물어뜯은 흔적들이 생겨났다. 큭큭거리는 비명소리가 가토의 기분을 더욱 최악으로 만들었고 다하는 더욱 괴로워졌다. 다하의 몸이 비명을 질러대는 것을 알면서도 가토는 그대로 다하의 몸안으로 들어갔다. 다른 자에게 마음을 줘버린 그가 미워서 그의 비명소리를 무시해버리고 거칠게 그의 몸을 차지했다. 자신을 받아들인 곳이 너무 뜨거워 화상이라도 입은 듯 가토 자신도 그 뜨거움을 고스란히 느껴야했다.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듯 저항하는 그에게 벌을 주듯 그렇게 다하를 유린하였다. 다하의 다라사이에서 흘러내리는 피와 자신의 것이 분명한 정액을 보며 가토는 만족했다. 그리고 후회했다. 그날 이후 다하는 고열과 격통에 앓아누웠고 가토의 손이 닿을 때마다 경기를 일으켰다. 그 눈에 가득한 두려움이 시간이 지날수록 증오와 경멸로 변해갈때까지 가토는 다하를 놓지 않았다. 그런데 그 눈에서 분노와 슬픔이 사라졌다. 가토가 손을 내밀어도 움찔 놀라거나 거부하듯 물러서던 버릇이 사라졌다. 그 투명한 눈 어디에도 자신에게 보이던 감정이 전혀 비추이지 않았다. "다하?"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 가토를 보았는 데 그 시선이 텅 비어있었다. "다하." 고개를 갸웃하며 가토를 보는 데 그가 누구인지 전혀 모르는 듯 했다. 한참을 가토를 쳐다보더니 환하게 미소지었다. 가토에게 보이는 첫미소였지만 가토는 기쁘지 않았다. 그 미소의 의미가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였다. 그건 자신에 대한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는 걸 의미했다. 그동안 가토가 억지로 맺어왔던 모든 관계를 완전히 지워버렸다는 그런 의미였다. 그래서 자신에게는 절대로 미소지어주지 않을 거라고 평생을 소유해도 그 미소를 받지 못할 거라고 각오하고 있었는 데 막상 그 미소를 받고 나니 더 괴로워지는 기분이였다. 이제 그나마도 자신은 다하에게 아무것도 아닌거이다. 그는 자신이 전혀 모르는 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다하는 알에서 막 깨어난 아기처럼 신기한 것을 발견한 사람처럼 가토에게 다가와 얼굴을 만져보고 손을 더듬어보고 머리를 잡아당겨 보며 가토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분노와 증오를 모르던 시절보다도 아니 남을 배려하고 뭐든지 사랑하려고 하던 시절보다도 더 오래전의 자신으로 다하는 돌아가 버렸다. 한참동안 가토를 탐색하던 다하가 고갤르 갸웃하더니 가토의 볼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자신의 손을 들여다보더니 촉촉히 젖은 자신의 손을 혀로 쓸어보더니 인상을 찌푸리고 다시 가토를 보더니 가토를 끌어안고 얼굴을 가토의 품안에 부비적거렸다. 다하가 비정상적인 행동을 하는 동안 가토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다하가 행동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긴장을 풀고 나른하게 잠이 든 다하의 모습에 가토는 처음으로 가슴이 뛰었다. 7.밝혀진 진실하나. 다하가 탁제균을 보더니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꼈는 지 후다닥 일어서더니 주위를 둘러보고 가토를 발견하자 죽어라 뛰어가 가토에게 달려들었다. 가토는 등뒤로 덮쳐오는 작은 덩치를 알아채고 웃음을 터트렸다. 죽어라고 파고드는 모양새가 무언가에 놀란 모양이였다. 고개를 드니 탁제균이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다하가 깨어난 후 가토는 일천의 정원에 하나의 결계를 만들고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만들었다. 탁제균만이 가토가 만든 결계의 틈새를 알아보고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뭡니까? 저 반응은.....깨어났다기에 보러왔더니 색다른 반응을 보이는 군요." 가토는 다하를 끌어안고 쓰다듬어주며 다하를 달래고 있었다. "알에서 막 깨어난 아기같군요." "맞아 기억이 하나도 없어서 내가 하나하나 가르치고 있었어." "정말입니까? 그런 일이 가능하긴 한가요?" "글쎄, 나도 처음 겪는 일이라.... 보기보다 나쁜 건 아니야. 보라구 평소에는 나만 보면 도망칠 궁리만 하더니 지금은 나 이외의 것은 모두 경계하고 내게만 의지하고 있잖아. 잘 가르쳐서 반려로 맞이할까 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영향받지 않겠군요." 의미심장한 탁제균의 말에 가토의 눈이 빛났다. 그동안 일만 벌이려고 하면 어떻게 안건지 다하가 스스로를 죽이려고 해서 여러번 미뤄야했다. 지금 자신의 품안에서 죽어라 고개를 묻고 있는 모습에 가토는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렇군 . 이제야....." 가토는 탁제균이 보고있든 말든 다하의 얼굴을 들오 입을 맞추었다. 다하가 간지러운지 웃으면서 움추러들면서도 거부하지 않고 두팔로 가토의 목을 끌어안았다. "많이 달라졌군요. 만족하십니까?" " 응, 어차피 기억이 있든 없든 변한 건 없으니까. 다하는 다하야." 가토의 입맞춤이 길어지자 다하가 숨을 쉬느라 헐떡였다. 가토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터트리며 다하를 가슴 깊이 끌어당겨 안았다. 숙하는 간신히 월궁의 정원에 내려서서 한참을 중심을 잡느라 비틀거려야 했다. 어깨에서 흘러내리는 피에 현기중이 일어났다. 날개의 깃털이 흩어지고 있었다. 그전에 자신의 호흡이 멎기전에 자주를 만나야 했다. 자신이 내려서는 걸 보았으니 곧 병사들이 달려올 것이다. 하지만 그걸 기다리고 있을 시간이 자신에게 남아있지를 않았다. 주저앉고 싶고 쉬고 싶은 마음을 다그치며 저원을 가로지르던 숙하가 본 것은 화룡궁주의 품에 안겨있는 그의 반려였다. 반려의 식에서 천제율파가 시나이라라고 불렀던 자. 그가 월궁에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가 시나이라임을 증명하는 것이 아닌가. 선천제가 수명이 다할 날을 기다리는 후궁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을 율파가 시나이라가 살아있음을 알았다면 얼마나 원통해할까. 죽었다는 것을 믿던 당시에도 그 시나이라와 비슷한 자에게 정신없이 빠졌던 그가 아닌가. "어인 일인가. 숙하비령장군. 게다가 그 날개는?" 자주의 반문에 숙하는 울컥 눈물이 쏟아졌다. 자신의 아름다운 날개를 찢으며 웃어대던 소유주가 떠올랐던 것이다. 그곳에는 혜림아도 있었다. 당연히 자신을 도와주리라 믿었던 혜림아는 자신이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기에 죽어줘야겠다고 했다. 그때 탁제균이 찾아오지 않았다면 그래서 그들의 시선이 흩어지지 않았다면 자신은 지금 천궁의 지하감옥에서 처참하게 죽어있을 것이다. 그로서는 탁제균이 일부러 시간에 맞춰 나타난 것도, 자신이 도망치는 것을 알면서도 소유주가 모른 척 한 것을 전혀 생각지 못했다. "저는 곧 죽을 겁니다. 그전에 제말을 들어주십시요." 숙하는 자주만을 보기를 바랬기 때문에 비월과 훈바 그리고 파라는 자주가 숙하를 월광욕실로 데리고 갈 동안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저 분이 시나이라님이 맞으신가요?" 숙하의 말에 자주는 망서리다 그가 곧 죽을 것을 알기에 고개를 끄덕여 긍정을 표시했다. 숙하는 자신은 물론 율파가 새삼 가여워져 눈물이 났다. 그가 죽어서 이제 그의 마음을 차지할 기회가 왔다고 기뻐했던 자신이나 그가 죽었다고 믿고서 절망하여 그런 가짜 시나이라를 사랑했던 율파나..... "그럼 혜림아님을 조심하세요." 자주가 긴장하여 숙하를 노려보았다. 지금 자신이 들은 말이 무슨 말인지 순식간에 이해해버린 것이다. "지금 그게 무슨 뜻인 줄 알고 하는 소리인가?" 자주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분입니다. 진비월님과 시나이라님을 공격하신 분은 혜림아님이세요. 진비월님을 죽이란 것도 모자라 그분을 여러 수컷에게 능욕하게 만들고 팔다리를 꺽게 만든 분도 그분이시라구요." 냉혈한으로 불리는 자주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숙하의 말을 부정하고 싶어도 부정할 수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비월이 다만 알을 낳다가 쇄약해져 죽은 걸로 알고 있으니까. 그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자신과 몇몇의 측근 그리고 범인일테니까. 진비월이 죽은 장면을 본것처럼 이야기 하는 데 어찌 믿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왜 그가 진비월을 죽여야 했단 말인가. 하지만 대답을 해줘야 할 숙하는 자신의 할일을 다한 사람처럼 자주의 앞에서 죽어있었다. 자주는 차갑게 얼어붙어있었다. 이제까지 본적이 없을 정도로 그는 차갑게 더 차갑게 굳어가고 있었다. 그 두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몇시간이 지나도 기척이 없자 걱정이 된 비월이 월광욕식에 들어왔을 때 자주는 팔짱을 낀 채로 정원을 내려다 보고 있었고 그의 뒤에는 숙하가 죽어있었다. 자주는 바로 뒤에 숙하의 시체가 있는 걸 의식하지 못하는 듯 그저 정원을 내려다 보며 생각에 잠겨있었다. 비월은 그 모습이 한폭의 그림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무것도 묻지않았다. 숙하가 그에게 무엇을 말했는 지 알 수 없지만 그것이 결코 가벼운 내용은 아닐거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아무리 궁금해도 자주의 침묵을 깰 수가 없었다. "그가 왜 여기에 와서 죽은 것이요?" 훈바가 자주에게 물었다. 숙하의 시체가 처리되고 하루가 지난 후의 일이었다. 훈바로서는 무진장 참고 또 참은 후의 일이였다. 아무리 성질 급하고 무절제한 훈바이지만 머리가 나쁜 사람은 아닌지라 숙하가 굳이 하고 많은 사람중에 자주를 찾아온 것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숙하가 자주를 찾아와 알려준 사실이 무엇일까 고민하다 그것이 자주의 주위의 인물에 대한 것일 가능성에 긴장하여 자주를 다그쳤다. 지금 자주 주위의 인물이라고는 비월이 전부가 아닌가 말이다. 하루하루 그를 지키기위해 훈바는 날마다 싸우면서도 비월에게 알을 갖지못하게 하고 날마다 월궁으로 퇴청하고 날이 밝으면 파라에게 부탁하고 화룡궁으로 등처아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비월을 지킬 수 있는 일이라면 그보다 더한 일도 할 수 있는 훈바였다. 훈바의 재촉에 자주가 그를 마주보았다. 그 시선에 훈바의 불안은 더욱 커졌다. "그대는 월아를 위해서 어디까지 희생할 수 있겠오?" 어쩌면 자주는 훈바의 대답여하에 따라 그와도 전쟁을 치뤄야할지도 모른다는 걸 계산하고 있었다. 훈바 역시 자주의 물음에 그걸 느끼고 있었다. 자신은 비월을 위해 어디까지 희생할 수 있을까? 한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는 일이였다. 하지만 비월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정도는 가볍게 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게 자신의 부족민과 관련이 되면 망서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 목숨은 줄 수 있오. 하지만 내 부족민과 관련이 되면 망서리지 않을 수가 없구려." 자주는 훈바의 말이 그의 최선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비월을 위해 죽을 수는 있지만 자신의 부족을 위해서는 망서리지 않을 수 없는 건 자신도 마찬가지 였다. 그래서 훈바를 이해하지만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내가 만일 월아를 포기하고 돌아가라고 하면 어찌하겠오?" 훈바가 바짝 긴장하여 자주를 노려보았다.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 전투자세로 돌입하는 것이 결전이라도 불사할 시세였다. ''아를 포기하지 않으면 그 아이가 죽을 지도 모른다고 해도 나와 싸울 것이요?" "왜 월아가 죽는단 말이요. 누가 월아를 해친다는 것이요?" "한가지 더 묻겠오. 월아와 천인계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그대는 어찌하겠오." 훈바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이 쳐다보았다. 그로서는 왜 월아와 천인계를 양자택일 해야하는 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주가 무슨의미로 그런 질문을 하는 건지 그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왜 그래야 하는 거요?" 훈바로서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로서는 비월을 포기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천인계를 버릴 수도 없었다. 하지만 굳이 선택을 한다면 그는 자신이 괴로워지더라도 천인계를 선택할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을 믿고 의지하고 있는 자신의 부족민을 어찌 배신한단 말인가. "월아를 죽이려고 하는 자가 천제 혜림아이기 때문이요." 청천벽력이 따로 없었다. 그야말로 넋을 잃어버린 훈바였다. 말도 안된느 소리가 아닌가. 왜 혜림아가....... "왜?" " 그는 이미 나의 반려인 진비월을 죽였오. 월아가 왜 흑호족 속에 있었는 지 한번도 의심해본적이 없었던 거요? 왜 내가 그아이를 죽었다고 믿고 있어야 했는 지 왜 그아이가 그의 어미를 먹어야했는 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오? 왜 ....나도 모르오 왜 천제가 진비월을 죽인 것도 모자라 월아마저 죽이러했는 지 나는 모르겠오. 하지만 한가지는 분명하오 나는 그를 죽일 것이오. 내 이름과 영혼을 대고 맹세하오. 그를 반드시..." 훈바는 자주의 눈이 불타오르는 걸 보았다. 그에 동조하지 못하는 자신이 너무 안타까웠지만 그의 심정은 이해했다. 하지만 그 상대가 천제라지않은가. 훈바가 화룡궁으로 돌아오자 차람이 온갖 불펴불만을 터트리며 자신이 화룡궁주냐며 따지고 들었다. 왜 모든 일을 자신이 처리해야 하냐며 차라리 자신에게 궁주자리를 넘기고 훈바에게 놀러다니라고 윽박지르며 머리를 움켜쥐고 발광을 하였다. 그동안 해도 저물기 전에 월궁으로 도망쳐버리는 훈바 덕분에 온갖 잡무에 시달리게 되자 그나마 차람의 장점이던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내고 만것이다. 솔찍히 차람은 그리 머리가 뛰어나게 좋은 편이 아니였다. 그런데도 화룡궁의 재사가 된것은 그나마 그가 참을성이 많고 인내심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화룡족이 저질러놓은 뒤처리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인정받는 재사였다. 하지만 지금 모습은 누가봐도 역시 화룡족답다라고 할 만한 모습이였다. 평소같으면 시끄럽다고 일침을 가했을 훈바가 너무 조용하자 길길이 날뛰며 불을 뿜어대던 차람이 제풀에 놀라 조용해져서 훈바의 눈치를 살폈다. 그동안 대들때마다 당한 효과였다. 아무리봐도 훈바의 상태가 이상했다. 자신이 그리 대들고 발광을 했건만 가만히 있는 훈바라니..... 게다가 표정도 심상치 않은 것이 한번도 본적이 없는 표정 일명 고민하는 표정이 아닌가. 화룡족장이 고민이라니.... 천지가 경악할 일이 아닌가. "훈..훈바님 어디 아프십니까?" 결국 차람이 참지못하고 훈바에게 물었다 . 화룡족장이 아프다니 말도 안되는 소리겠지만 왠지 그런것 같다고 의심이 들 정도로 훈바는 평소와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차람, 너라면 네 반려를 죽인 자가 있다면 어찌하겠느냐?" "당연히 죽여야지요." "그가 이세상에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인물이라도?" "그게 무슨 소용입니까? 내 반려를 죽였다는 데 제 힘이 닿는 데까지 최선을 다해 복수 할겁니다." "그게 천제라 해도?" "녜에엥? 천제폐하요?????" 차람역시 망서리는 눈치였다. 그러나 곧 고개를 들더니 훈바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평생 같이 하기로 한 자가 죽었는 데 어찌 천제폐하라 해서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저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니 세상을 적으로 돌려서 라도 그를 죽일 겁니다. 그러다 안되면 제 반려를 따라 죽는 한이 있더라도요." 역시 단순무식 차람이였다. 나은 거라고는 조금 더 인내심 강한 화룡족이라는 것뿐. "나 천제하고 싸울까?" "왝? 설마 천제폐하께서 월아님을 해치셨습니까?" 차람의 목소리가 날카로와지더니 벌떡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아직은 아니고." ''그런데 이곳에 계시면 어쩌자는 겁니까? 천제폐하로 부터 월아님을 지키셔야지요." "천인계가 위험해질지도 모르잖아." "어이구야. 참으로 딱하십니다. 천제께서 그리 쉽게 훈바님 손에 죽어주실것 같습니까? 지금 중요한 것은 어떻게든 천제폐하로부터 월아님을 지키시는 것이잖아요. 어찌하여 화룡족은 성질만 급해서 정작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는 종종 잊어버린답니까? 그러니까 과격무식하다는 소리를 듣지요." 훈바를 나무라듯 쳐다보는 차람의 시선에도 훈바는 화가 나지 않았다. 평소라면 있을 수도 없는 일이지만 지금 현재로서는 차람의 말이 옳든 그르든 훈바의 마음을 가볍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차람." "녜 훈바님." "나중에 천제와 싸우더라도 너는 내편이지?"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 우리가 언제 천제폐하를 위해 싸웠습니까? 우리는 우리를 위해 싸웁니다." "고맙다." "어이구야. 정말 별일이십니다. 내 평생 훈바님께 그 소리를 듣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리고 고맙다니. 혹여 다른 놈들에게 그런 소리하지도 마십시요. 그건 당연한 것이라고요." 훈바가 호탕하게 웃으며 차람의 어깨를 두드렸다. 차람도 앞으로의 일은 걱정도 되지않은 듯 유쾌하게 웃었다. "그보다 내가 이야기 했던가? 글쎄 월아에게 나를 유혹해보라고 했더니..." 훈바는 비월이 알면 펄펄 뛸 이야기를 차람에게 하고 있었다. 얼마지나지 않아 차람이 온 바닥을 굴러다니며 웃어댔다. 너무 웃어서 숨도 못쉬고 눈물까지 흘려대며 바닥을 벅벅 긁어대었다. 남천족이 염마천족을 공격하였다. 천인계는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빙해족이 멸족당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이런일을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놀라기보다는 드디어라고 가슴 답답한 한숨을 내쉬었을 뿐이였다. 남천족이 내놓은 이유는 염마천족의 수컷이 남천족의 암컷을 납치 겁탈했다는 것이지만 다른 때였다면 관심도 끌지못했을 사건이 전쟁이라는 엄청난 사태를 가져온 것은 바로 남천을 유지하는 가장 오래된 결계석때문이였다. 남천에서는 열심히 변명을 하였지만 그 내막을 짐작하지 못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누구도 남천족을 비난하지 못했다. 비단 결계석의 일은 다른 사람의 일이 아니라 내일이라도 자신들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사태였던 것이다. 살고자 발버둥치는 것을 누가 비난하겠는가.하지만 이해는 이해고 도의는 도의였다. 다른 부족들이 관망하는 사이 남천과 친분이 두터운 서천이 남천에 가세했고 그와 더불어 염마천을 돕고 나선 건 동천이였다. 천제로서도 막을 수 없는 전쟁이였다. 전쟁을 하지말라고 하는 것은 남천족에게 앉아서 죽으라는 소리와 같았던 것이다. 게다가 이 모든것이 선천제의 망령든 명령때문에 벌어진 일이 아닌가.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그런 명령을 내린단 말인가 대부분의 부족들이 관망하는 자세를 취하는 또다른 이유는 이미 전쟁에 참여한 네 부족들이 양패구상이라도 한다면 그 후 그들이 남긴 결계석을 차지할 계산도 깔려있었다. 처음에는 빠른 시간안에 결전을 내려하던 상황이 갈수록 지지부진해지자 격렬했던 전시는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잦은 소규모전이 있었지만 큰 흐름은 없었다. "결계석은 빙해족의 눈물로 정제하고 얼려서 만든 보석이라고 알려져있습니다. 제가 살펴본 바로 그 보석에는 두가지의 특징이 있었습니다. 매우 단단하고 투명한 재질이며 차갑다는 것이지요. 겉모양은 마치 얼음을 깍아놓은 것 같다는 점이 결계석의 눈에 띄는 점 입니다. 왜 다른 부적이 아닌 만년빙 속에서 사는 빙해족의 눈물만이 결계석을 만드는 재료가 될까요?" 비월의 말에 파라와 자주 그리고 훈바와 차람이 고개를 갸웃하면서 생각에 잠겼다. 언제부턴가 비월이 여러가지 보석이란 보석은 모조리 모아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게 결계석을 연구하는 일이였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오늘 갑자기 결계를 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해서 화룡궁에서 일을 보고있는 차람까지 불렀다. 파라와 자주가 꽤 오랫동안 사색에 잠긴것에 반해 훈바와 차람은 좀이 쑤시는 지 자꾸만 들썩이고 있었다. 영문도 모르고 끌려온 차람은 조용한 월궁의 분위기가 답답하여 미칠 지경이였다. 이런 곳에 용케도 훈바가 날마다 찾아왔구나 싶었다. 비월은 죽을 상을 하고 있는 차람과 훈바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까지도 인내하기 연습이 많이 필요한 것같다고 강도를 좀더 높이는 방법을 연구해야겠다고 생각하는 비월이였다. 그때 시종이 비단보자기를 씌운 쟁반을 들고 들어와 그들이 앉아있는 탁자 중앙에 내려놓고 물러갔다. 사색하는 것이 영 내키지 않았던 훈바와 차람이 호기심을 드러내며 그 쟁반을 쳐다보았다. 비월이 보자기를 들어올렸다. 그곳에는 세개의 각기다른 단단해보이는 보석이 놓여있었다. 쟁반에 하얗게 서리가 맺혀있는 걸로 보아 보석이 굉장히 차가운 상태라는 걸 알수 있었다. 그 중 하나는 진짜 결계석이라고 해도 믿을만한 모형이였지만 크기가 너무 작아 결계석으로 사용하기에는 무리처럼 보였다. "이건 뭡니까?" 차람이 또 수수께끼놀이라도 하려는 건가 싶어 긴장하며 비월을 눈치를 보며 물어보았다. 옆에 있는 훈바도 긴장하는 눈치였다. 전에도 당해봐서 알지만 비월은 사람의 심장을 쥐었다폈다하는 재능이 아주 뛰어났고 그런 것을 이미 겪은 훈바와 차람은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자신들은 자각하지도 못하는 사이 뒷걸음질까지 쳤다. "세개의 실험작이랍니다. 성능은 자신할 수 없지만 오늘 마지막 실험을 끝내면 바로 작업에 들어갈려고 합니다. 투명한 것은 자주님이 반투명한 것은 차람님이 그리고 붉은 색은 훈바님이 각기 가지고 세방향으로 가셔서 각자 결계주문을 외워주세요.결과를 보고싶습니다. " 자주가 먼저 발현한 결계는 보통결계와 다를바가 없이 투명한 모습이여서 십이지천궁을 유지하는 결계와 별다를 바가 없었고. 차람이 발현한 결계는 반투명한 상태로 차람의 윤관이 어렴풋이 보이는 상태였다. 그리고 훈바가 발현한 결계는 보석의 색처럼 피처럼 붉으면서도 그속이 들여다보이는 상태의 결계가 만들어졌다. 비월의 신호에 세명이 만들어낸 결계가 사라졌다. "느낌이 어떠셨나요?" 비월의 질문에 그들의 대답은 똑같았다. 시야만 제외하면 평소의 십이지천을 유지하는 결계와 별다를게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제가 며칠전에 만년빙궁에 가서 만들어본 결계석입니다. 크기만 다를 뿐 십이지천궁을 유지하는 결계석과 똑같은 것이지요." 비월의 담담한 말에 네사람의 안색은 파리하게 질려가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는 비월이 사람같지않아 보이고 있었다. "결계석은 굳이 빙해족의 눈물로 정제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그저 적당한 크기의 재질이 단단한 보석을 불속에 넣고 꺼내어 만년빙속에 다시 얼리고 하는 일을 여러번 반복하여 보석속에 있는 불순물을 제거하면 결계석으로 이용할 수 있는 것이지요.도중에 견디지 못하고 깨어지거나 녹아버리는 보석도 있었지만 이 세종류의 보석은 그 용암속에서나 만년빙속에서 견디어낸 것입니다. 오직 빙해족의 눈물만이 결계석을 만든다는 통설은 틀린겁니다 그런 소문이 난 것은 다만 만년빙속에서 작업을 할 수 있는 자들이 빙해족뿐이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보석을 처음 용암속에 담글때 그 더위를 견디지 못하고 괴로워하느라 흘린 눈물을 보고 사람들이 추측을 한 것 같습니다. 저는 용암보다 만년빙의 추위에 더 괴로웠지만요. 그런 점에서 화룡궁주님의 화룡검을 빌려주신것에대해 감사드립니다. 그게 없었다면 저는 지금 꽁꽁 얼어버렸을테니까요." 훈바는 차람이 휙 노려보는 것을 느끼고 식은 땀을 흘렸다. 화룡검이 무엇이던가 바로 화룡족장의 상징이 아니던가. 비월이 흥미를 가지고 빌려달라고 했을 때 망서리면서도 빌려주었더니 그런 용도로 사용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고 그걸 차람이 알게될거라고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차람은 훈바가 화룡검을 비월에게 빌려주었다는 사실보다 비월이 결계석을 만들어냈다는 사실때문에 곧 비월에게 시선을 돌려 그 사람같지 않은 짓을 저지른 비월을 쳐다보며 저자가 진정 사람인가를 의심하는 시선을 보냈다. 비월의 말은 일종의 관념을 깨뜨리는 충격과도 같은 것이였다. 훈바는 물론 차람 그리고 파라,자주까지도 너무나 충격이 커서 멍하니 얼이 빠진채 비월을 쳐다보았다. 세상에 단단하기만 하다면 어떤 보석이라도 결계석을 만들어 낼수있다니.... 그렇다면 다른 부족의 결계석을 빼앗기위해 전쟁을 일으킨 부족은 얼마나 허무하겠는가. "월천궁주, 당신의 아이는 정말 어떤 머리구조를 가지고 태어난 건지 궁금해 미치겠오. 어떻게 다른 보석으로 결계석을 만들어낼 생각을 하느냔 말이오." 훈바의 넋두리같은 말에 차람과 파라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며 훈바의 말에 동감을 표시했다. 심지어 자주마저도 훈바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모르겠오. 그아이의 어미가 유별나기는 했지만 저정도로 유별나지는 않았는 데...." 비월이 빤히 듣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두사람이 비월이 유별나다고 의논하는 사이 파라는 비월이 대견해서 웃고있었다. 전에도 알고 있었지만 비월은 흑호족시절에도 상상도 못했던 일들을 자주 일으켰었다. 다른 때같았다면 잘했다고 끌어안고 칭찬이라도 해주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수가 없는 자신의 입장에 그저 속으로 자랑스러운 듯 비월을 쳐다보았다. "이건 정말 굉장한 돈벌이가 되겠는 데요. 결계석을 만들어 팔면 저희는 세상에서 가장 큰 부자가 될거에요." 한참이나 생각에 잠겨있던 차람이 손뼉을 치면서 내뱉은 말에 나머지 사람들이 동시에 차람을 쳐다보았다.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보는 세사람과는 달리 훈바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차람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덥썩 잡았다. "차람 넌 역시 천재야. 왜 진작 그 생각을 못했지?" 하며 두사람은 서로를 붙잡고 호탕하게 웃었다. 자주와 비월,파라는 손으로 이마를 감싸쥐었다. "화룡적이군." "둘이 똑같군요." "단순해." "무엇이라? 결계석을 만들어 냈어?" 가토가 벌떡 일어나 탁제균의 멱살을 잡아챘다. 다하가 놀라 가토에게서 뒤걸음치는 것도 알지 못할 정도로 가토는 흥분하고 있었다. "시나이라가 다른 보석으로 결계석을 만들어 남천족에게 보냈답니다. 긴가민가하여 남천궁주가 결계주문을 외우자 완벽하게 결계가 새로 형성되었답니다. 그래서 저희에게 약조했던 것을 취소하고 싶다고 연락을 해왔습니다. " "어떻게?"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 가토가 탁제균을 잡고있던 멱살을 놓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천년이 넘도록 다른 보석으로 결계석을 만들어낼 생각을 해본 자는 한명도 없었다. 덕분에 빙해족만 처리하면 쉽사리 천인계를 흔들어놓을 수 있을 줄 알았다. 만일에 사태에 대비하여 여분의 결계석도 확보해 둔 상태였고..... 그런데 다른 보석으로 결계석을 만들어내다니...애써 위험을 무릅쓰고 성사시킨 계획이 단숨에 물거품이 되어버리질 않았는가. 모든 것이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한 것은 천제율파의 갑작스런 천인오쇠증상때부터였다. 어차피 처리하려고 했던 자였지만 갑작스런 천인오쇠 증상으로 자신이 손을 쓰기도 전에 후궁으로 물러날때만 해도 별 신경쓰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손아귀에 놀아날 혜림아를 천제위에 올리며 앞으로 상황이 더 자신에게 유리하게 돌아갈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직접 자신의 손으로 그의 숨통을 끊어놓지 못한 것이 아쉬웠지만 모든 것은 만족스런 상황이였다. 그 진비월의 조각이 살아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부터 슬금슬금 들었던 불안이 점점 마음 한구석에서 자라나고 있었다. "도데체 그녀석의 머리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해 내는 것인가. 설마 남천족에게 공격당한 염마천족이 가만히 있는 건 아니겠지?" "남천족장이 두개의 결계석을 구하여 그에게 보내고 향후 십년간 남천족의 특산물을 필요한 만큼 대주겠다고 했답니다. " 부족민이 죽기야 했지만 그보다 더 큰 보상을 해주겠다는 데 쓸데없는 소모전으로 전쟁을 계속 끌고갈 이유가 없어졌다는 설명이였다. "진작에 죽여버렸어야 했는 데....." 한참 살기를 피워내고 있는 가토의 옆구리에 작은 생명체가 파고 들었다. 흠칫 놀라 돌아보니 다하가 잔뜩 겁에 질려서 걱정스러운 안색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평소와는 다른 가토의 모습에 당황스럽기도 하고 혼란스럽기도 한 모양이였다. 그 겁에 질린 모습에 가토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다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제서야 다하가 안도의 숨을 내쉬며 가토의 품안에 파고들며 얼굴을 부벼댔다. 탁제균은 가토의 온화해진 표정에 눈썹을 찌푸렸다. 그가 아는 가토는 무슨일이 있어도 자신의 일이 틀어지면 그일이 원상복구될때까지 살기를 멈추지 않는 인물이였다. 그래서 그를 옆에서 보필하는 자들은 모두 일이 틀어지지않도록 긴장하고 문제가 생겨도 빠른 시간안에 해결하려고 고군분투를 했다. 그런데도 자신의 뜻대로 일이 해결되지 않으면 아무리 신뢰하던 부하라 하더라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처리할 정도로 잔혹한 인물이기도 했다. 자신의 일을 위해서라면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않았고 천륜은 물론 금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어기기도 했으며 기여코 자신의 뜻대로 일을 추진시켜나가는 그를 모든 수족들이 경애하고 두려워하였다. 자신들이 차마 해내지 못하는 일을 해내는 그에게 대리만족을 느끼고 통쾌하게 생각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런데 저런 조그맣고 말도 못하는 작은 천인족때문에 가토가 흔들리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탁제균의 눈에 가토의 틈이 보이기 시작했다. 자신이 눈치챈 것을 다른 자들이 눈치채지 못할거라고 단정할 수 없는 일이다. 새로운 지배자가 될 자에게는 조금의 틈도 있어서는 안된다고 믿는 탁제균이였다. 가토의 품에서 활짝웃고 있는 다하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탁제균의 눈에 좋게 보일리가 없었다. 그나마 기억을 잃기 전의 다하는 괜찮았다. 오히려 자신에게 마음을 열어주지 않는 다하의 모습에 천제혈족에 대한 가토의 증오심이 더욱 깊어져 갔으니까.하지만 지금의 다하는 아무 거리낌없이 가토를 마음속으로부터 받아들이고 그를 다독여 마음을 온화하게 만들고 있었다. 언제 가토가 다하를 위해 전쟁을 하지 않겠다고 할지 모를 상황인 것이다. 더이상은 위헙했다. 기억을 돌아오게 만들든지 아니면 ...제거해야 할 지도 몰랐다. "월아?" 시장을 지나가던 파라는 너무나 익숙한 뒷모습에 당황하며 사람들 속으로 묻혀 들어가는 작은 체구의 사람을 쫓아갔다. 그렇게 위험하다고 혼자서 다니지 말라고 했건만 건강해진 뒤로는 틈만나면 몰래 성을 빠져나와 여기저기를 쏘아다니며 이것저것을 구경하고 다녔다. 길거리에서 노점판의 음식을 먹기도 하고 찻집에 들어가 차를 마시다 수컷들에게 들러싸여 구혼을 받고 있기도 했다. 발견될 때마다 파라와 월족전사들을 당황시키고 긴장시키기 일쑤였다. 어떤 월족전사들은 그핏줄이니 오죽하겠냐고 까지 할 정도였다. 술에 취하게 만들어 숙소까지 끌고 갔던 수컷이 파라의 손에 요절나기도 했다. 그런데 그렇게 혼이 나고도 긴장감이 조금도 없이 또다시 길거리에 혼자 나서다니.....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열심히 쫓아가던 파라는 그 뒷모습의 임자가 어느 커다란 저택으로 들어가자 멈춰서서 따라들어가야하는 지 망서려야 했다. 너무나 익숙하게 마치 아는 집을 찾아가기라도 하는 듯한 태도가 자꾸 마음에 걸렸다. 혹시나 다른 중요한 일로 약속된 방문은 아닐런지 자신이 따라들어가서 방해가 되는 것은 아닌지 저어되었다. 잠시 망서리며 고민을 하던 파라는 곧 다짐을 하였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비월이 월천의 거리에 저런 큰 저택의 주인을 알고 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실례는 실례라도 위험한 짓을 당하고 난 뒤에 후회하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에 걸음을 저택으로 옮겼다. "파라가 사라졌어요." 저녁무렵 천붕을 타고 월궁의 정원에 내려서는 훈바에게 비월이 달려와 걱정스럽게 말했다. 훈바는 비월의 근심 걱정이 가득한 눈빛에 은근히 심술이 솟아나는 걸 느꼈다. 어쩌다 가끔씩 보이는 파라를 향한 특별해보이는 감정은 훈바를 울컥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다른 암컷이라도 만나고 있겠지. 무얼 그리 걱정하는 거지? 막 깨어난 미성숙체도 아니잖아." 퉁명스럽게 튀어나오는 훈바의 말에도 비월은 파라의 걱정때문에 그의 불편한 심기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한번도 이런 일이 없었는 걸요. 이렇게 오래 자리를 비운적이 없었어요. 무슨일이 있다면 사전에 저에게 이야기를 했다구요." "금방 돌아오겠지." 무심한 훈바의 반응에 비월은 서운함이 몰려왔다. 그에게 있어 파라는 핏줄을 나눈 형제보다도 가까운 관계의 사람이였다. 아무 미련없이 떠날 수 있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비월에게 생의 의미를 주는 상대였다. 그에게 있어 파라는 자주보다도 더 가까운 자였다. 비월은 도와주려는 생각이 없어보이는 훈바의 태도에 눈을 부라리며 돌아섰다. 다른 때와는 달리 이번만큼은 훈바도 화가 났다. 비월에게 있어 파라가 특별하다는 걸 인정하고 있었지만 자신보다 파라를 우선시하는 비월의 태도에 참을 수가 없었다. 비월의 파라에 대한 행동은 단순히 형제들사이에 보이는 애정을 넘어서고 있었다. 훈바는 돌아서서 가고 있는 비월에게 달려가 번쩍 들어 어깨에 들쳐메고 사람들의 시선도 아랑곳없이 처소로 향했다. "내려놔요. 당장 내려놓지 않으면 가만 있지 않을 거예요." 발버둥을 치며 비월이 항의를 해오자 훈바는 비월의 엉덩이를 철썩 내리쳤다. 비월이 움찔 놀라며 숨죽인 신음같은 비명을 내질렀다. 비월은 월족 사람들이 쳐다보는 데 아랑곳없이 자신의 엉덩이를 친 훈바가 얄미웠다. 이게 무슨 창피란 말인가. 저기서 웃고 있는 자들은 평소 비월의 잦은 외출에 골머리를 썩이고 있던 자들이 아닌가. 아주 고소해하면서 비월과 훈바를 쳐다보고 있었다. "두고봐요. 이일을 후회하게 만들어줄거야." "더이상 입을 열면 여기서 옷을 벗겨버릴테니 믿지 못하겠다면 입을 열어봐" 으르렁거리는 훈바의 말에 비월은 얼른 손으로 자신의 입을 가렸다. 훈바가 한번 내뱉은 말은 기여코 실천하고 마는 성격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은 훈바가 사랑스런 반려를 안고가는 거라고 생각했는 지 얼굴을 붉히며 소근거리거나 웃고 있었다. 비월은 잽싸게 주위를 둘러보며 아는 얼굴을 찾아보려 했으나 아는 사람을 발견할 수 없었다. 결국 침소까지 끌려와 침대에 내던져진 비월은 잽싸게 기어 도망치려 했으나 훈바가 비월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그 바람에 목이 졸려 뒤를 돌아본 비월은 훈바가 짖궃게 웃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주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아무리해도 침소에서는 비월은 훈바를 이길수가 없었다. 비월은 잡힌 옷을 벗어던져버리고 옆으로 빠져나갔다. 그 모습에 훈바가 눈을 반짝이며 다가오는 게 아닌가. "용서하지 않을 거에요. 건드리기만 해봐요." 훈바가 다가올수록 한걸음씩 뒷걸음질치며 비월이 으름장을 놓았으나 훈바는 그 모습에 콧웃음을 쳤을 뿐이다. "다가오지 말라니까요." 등뒤로 벽을 느끼며 비월이 마지막 으름장을 놓았지만 훈바는 비월이 무슨소릴 하든 완전히 무시하고 비월을 번쩍들어 침대에 내려놓고 옷을 벗겼다. 비월이 낑낑거리며 훈바를 밀어내려고 했다. 좀처럼 순순히 자신을 받아들이려 하질 않는 비월의 모습에 훈바는 열이 받았다. "명심해. 너의 반려는 파라가 아니라 나야." 순간 죽어라 저항하던 비월이 스르르 힘을 뺐다. 그 눈에 스민 깊은 슬픔에 훈바는 이성을 잃어버렸다. 파라는 자신의 중심으로 몰려드는 감각에 눈을 떴다. 머리가 욱씬거려 저절로 신음이 터져나왔다. 주위를 둘러보던 그는 기겁을 하고 벌떡 일어나려고 했으나 덜컹거리는 소리와 손목이 아파오자신이 결박당해 있다는 것을 그제서야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상황이 묘한 것이 자신이 결방당해 있는 곳이 화려한 침상이라는 것이다. 거기에 더불어 자신이 벌거벗은 상태이고 자신의 몸위에 비월과 너무나 흡사한 자가 올라타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파라가 정신을 차리고 눈을 뜨자 빙그레 웃으며 침대 옆 향로에 무언가를 뿌려넣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 가루가 타면서 묘한 향이 방안에 퍼졌고 그 향을 맡자 머리속이 하얗게 비워져갔고 몸속에서 열기가 끓어 올랐다. 소유주는 파라가 열기 가득한 한숨을 내쉬자 환하게 웃으며 자신의 옷을 벗고 좀전에 하던 일을 계속하기 시작했다. 그는 파라가 완전히 이성을 잃자 침대옆에 숨겨두었던 목갑을 꺼내어 그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자신의 입에 머금었다가 파라의 입에 입을 맞추며 파라에게 넘겼다. "으으윽..." 파라가 무의식적으로 거부를 하려는 듯 몸을 비틀자 눈살을 찌푸리던 소유주는 몇개인가를 더 꺼내어 파라에게 먹였다. 파라에게서 거부반응이 사라지자 그제서야 만족하게 웃으며 열락에 들떠있는 파라의 몸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기 시작했다. 파라는 결박당해있는 손목이 답답한지 마구 흔들며 끊어내고 붉어진 눈으로 소유주를 쳐다보았다. 소유주가 까르르 웃으며 파라의 손목을 결박하고 있는 봉인구를 풀어주자 파라가 소유주에게 달려들어 소유주의 몸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며 그를 범하였다. 소유주는 자신의 몸속에 가득찬 그를 느끼며 몰려드는 쾌락과 고통에 신음소리와 비명을 질러댔다. 이성을 잃고 본능만 남은 파라는 그저 한마리의 발정난 짐승일 뿐이였다. 8.파라의 반려 며칠만에 나타난 파라는 행복해보였고 비월은 불행해보였다. 파라가 돌아왔다는 말에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그를 마중하러 나왔던 비월이 멈춰섰다. 파라의 옆에는 비월 자신과 너무나 닮은 소유주가 서 있었고 파라는 그를 보며 환하게 미소짓고 있었다. 비월을 발견하자 행복한 듯 미소지으며 소유주가 자신을 알을 가졌다고 말했다. 비월은 자신의 얼굴이 굳어버리는 것도 모르고 멍하니 두사람을 쳐다보았다. 뒤따라오던 자주가 놀라 소유주를 노려보았다. "소유주!!!!" 파라의 옆에서 파라만큼이나 행복해보이던 소유주가 자주를 발견하더니 굳어버렸다. 파라는 소유주를 알고 있는 자주도 의아했고 자주를 보고 굳어버린 소유주도 의아했다. 소유주를 돌아보며 어떻게 된일인지 물어보고 싶었으나 소유주가 두려움에 떨면서 자신의 뒤로 숨어들자 마음이 아파와 소유주를 보듬어 안았다. "약한 사람입니다. 을박지르지 말아주십시요." 소유주를 감싸며 파라가 자주에게 힐난하는 시선을 보냈다. 비월은 멍하니 파라가 감싸고 도는 소유주를 쳐다보았다. 자주에게서 선천제 율파에게 자신과 닮은 연인이 있다는 말을 들었지만 이정도로 닮았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사랑스러운 듯 안쓰러운 듯 소유주를 쳐다보는 파라의 시선에 비월은 가슴속에 비수라도 맞은 듯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알을 가졌다는 파라의 말에 자주가 얼굴을 찌푸렸다. "어떻게 소유주가 자네의 알을 가졌단 말인가?" 자주의 물음에 파라가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사랑스러운 듯 소유주를 돌아보는 모습에 비월은 마른 침을 삼키며 미소를 지었다. 파라의 옆에 있던 소유주가 비월을 보며 의기양양한 듯 미소짓고 있었던 것이다. 그 눈에 어린 교활한 빛에 비월은 씁쓸한 게 목으로 넘어오려는 걸 느끼고 간신히 삼켰다. "그동안 쭈욱 같이 있었습니다. " "아." 비월은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그를 걱정하고 있었는 가를 생각하니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혹여 잘못되기라도 했을까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있었는 데 그는 그동안 다른 자와 함께 있었다고 한다. 못마땅한 듯이 자주가 뭐라고 하려하자 비월이 자주의 팔을 잡아당겼다. 자주는 자신의 손을 잡아당긴 비월을 돌아보고 눈쌀을 찌푸렸다. 평온해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지만 자주는 비월의 눈에 감취진 씁쓸한 감정을 읽었던 것이다. 항상 밝고 명랑했던 진비월에게서도 그의 숨겨진 아픔을 알아챘던 자주였다. 그러니 비월의 숨겨진 기색을 금방 알아챌 수가 있었다. "파라. 그분을 데리고 쉬도록 하세요."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았지만 파라는 눈치채지 못하고 소유주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비월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소유주를 데리고 자신의 숙소로 가버렸다. 그 뒷모습이 멀어질수록 비월의 얼굴에는 더 짙은 미소가 드리워졌다. 자주는 그런 비월을 건드릴 수가 없어 아픈 눈으로 쳐다보기만 했다. 월궁에서 가장 볼만한 것은 만월이였다. 달에서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는 월궁은 무엇보다도 달을 보기위한 여러가지 행사와 장소가 많았다. 태양궁에서 일광욕실이 있다면 월궁에는 월광욕실이 있을 정도였다. 그중에서도 자주가 가장 좋아하는 곳은 궁전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지붕없는 월광욕실이였다. 가만히 있는 것을 싫어했던 진비월이 가장 좋아하던 곳으로 다른 곳에서 자주와 있을 때는 보이지 않았던 여러가지 감정들을 보이기도 했던 곳이다. 그의 짐작으로는 비월이 생긴 곳도 이곳이였던 같았다. 지금 그곳에서 비월과 자주는 시종들을 물리치고 차를 마시며 만월을 구경하고 있었다. 파라가 돌아온 며칠이 지난 날이였다. "그를 사랑하지?'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 비월이 며칠동안 방안에 꼼짝도 하지않자 자주가 이곳으로 비월을 불러낸 것이다. 자주의 말에 흠칫하던 비월이 찻잔이 어떻게 생겼는 지 무척이나 궁금한 사람처럼 찻잔을 꼼꼼하게 쳐다보았다. 자주는 비월의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한참이 지나자 비월이 어색하게 미소지었다. "그렇게 표가 났나요?" 비월의 긍정에 자주가 찻잔을 내려놓고 비월을 빤히 쳐다보았다. 비월은 그 시선을 더이상 피하지 않고 미소만 짓고 있었다. "그런데 왜 나를 말렸느냐? 왜 소유주를 받아들여 준거지?" 비월이 눈을 감았다가 뜨며 한숨을 내쉬었다. 무언가 가슴속에서 무겁게 내려앉고 있었다. 그리고 소리라도 날까 두려운 것처럼 조심스럽게 찻잔을 내려놓더니 월광욕실이 새삼 어떻게 생겼는 지 궁금한 사람처럼 주위를 주의깊게 쳐다보았다. "제가 무슨 자격으로요. 그가 행복하다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저만을 바라보며 슬퍼하는 것보다 낫다는 생각입니다. " "어찌하여 그를 사랑한다면 훈바를 받아들인거냐? 하기야 대충 짐작은 간다만....." "짐작하신대로에요. 제가 그의 청혼을 거절했다면 흑호족은 그날로 멸족되었을 거에요. 물론 제가 파라와 도망을 쳤다해도 마찬가지 결과였을 테지요. 어차피 뻔한 결과라면 그를 이용하겠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파라를 그의 후계자로 만들어주면 승낙하겠다고 조건을 내걸었지요. 혹여라도 그가 거절하기를 바랬지만 그는 정말 너무도 쉽사리 승낙을 해버리더군요. " "어쩐지 반려의 식에 따른 절차가 과하다 싶었다." "저는 저를 살려준 그들이 더이상 지계인이라 천대받지 않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항상 마음에 걸렸던 파라에게도 좋은 짝이 생겼으니 저역시 마음을 접어야 겠지요. 사실 오래전부터 정리를 해야했지만 이 미련한 것이 쉽게 떨쳐지지가 않더군요." 그게 어찌 쉬운 일일 것인가. 한번 마음에 담은 자를 그렇게 말처럼 쉽게 지울수가 있다면 자주 자신도 아직까지 죽어버린 진비월을 그리워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그걸 물리고 싶다면 내가..." "아니에요. 지금에 와서 그럴 수는 없어요. 훈바님의 청혼이 강제적이긴 했지만 그는 충실하게 약속을 지켰고 저 역시 그 약속을 지키고 싶어요.오히려 제가 아직까지 파라를 마음에 두고 그를 화나게 만들어 버렸는 걸요. 미안한 짓을 더이상 할 수가 없어요." 시간이 지나 차가 바닥을 드러내도 비월과 자주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만월과 서늘한 바람과 공기속에 서로의 생각에 잠겨 밤을 지새고 있었다. 달이 서녘으로 기울어 주위가 어두워질무렵 비월의 얼굴에 뜨거운 비가 흘러내렸다. 자주는 그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그저 조용히 사색을 하는 척했다. "나는 너를 믿을 수가 없다. 진정 아무 속셈없이 파라를 받아들인 것이냐?" 자주의 질문에 소유주는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 "왜 하필 너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가 너를 원하니 이곳에 머물러도 좋다. 다만 정원에는 들어가선 안된다." 방안에만 있으려는 비월에게 차라리 정원에 있으라고 하며 누구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겠다고 했던 것이다. 비월에게 마음을 정리할 시간을 주고 싶었다. 애써 태연한 척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는 모습이 너무 안쓰러웠다. "그리고 파라 당분간 월아를 만나지 말아주게나. 몸이 피곤한 지 아무도 만나지 않고 싶다고 하는 군." 파라가 걱정스러운 듯 자주를 쳐다보았으나 자주가 별일 아니라고 하자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같으면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자주를 귀찮게 했을 파라의 변한 행동에 자주는 쓴 미소를 지었다. 몇십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자신의 마음을 생각하면 파라의 행동은 정말 씁쓸하기만했다. 어찌 그리 쉽게 마음이 변한단 말인가. 그런 그를 완전히 지우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비월이 너무 가슴아팠다. "저에게 천제의 피가 흐르나요?" 비월은 정원에서 자주이외에는 누구도 만나지 않고 있었다. 훈바는 파라가 사라졌던 그날 이후 화룡궁으로 돌아가버린 이후 비월을 보러오지 않았다. 덕분에 비월은 정원에서 마음 편하게 혼자 있을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지금의 천제도 저와 마찬가지 인가요?" "......!!!!!!!" 자주가 화들짝 놀라 비월을 쳐다보았다. 갑자기 비월이 꺼낸 이야기를 들어서야 천제의 피가 흐르는 자가 혜림아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제까지 잊어버리고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아직 대부부의 사람들은 비월이 자신의 아이라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지만 소문이 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사람들이 사실을 알든 말든 자주는 아무 상관이 없었지만 그가 걱정하는 것은 비월이 무슨 생각으로 그 사실을 확인하려 하는 건 지 알 수가 없다는 사실때문이였다. 그역시 결코 나쁜 사람이 아니건만 비월과 지내면서 느낀 것은 비월의 머리속은 범인의 생각으로는 짐작하기 힘들다는 것이였다. 그러니 비월이 갑작스럽게 자신에게 천제의 피가 흐르냐고 물은 것에 다른 뜻이 있음을 어렴풋이 짐작만 할 뿐이였다. "맞나요?" "그래. " 자주가 불안한 듯 비월을 쳐다보았다. 사람들에게 알려진 그의 인상은 차갑고 무표정하다는 것이였지만 오늘에 이른 자주를 본다면 놀라서 믿지 못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였다. 그만큼 그는 비월의 옆에 있으면 표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비월이 한참 정원의 이름모를 잡초를 보고 있더니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들어 불안해하고 있는 자주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태연하게 입을 열어 다시한번 자주를 놀라게 만들었다. "그럼 그를 죽이세요." 순간 자주는 자리에서 벌떡일어났다. 비월에게는 한번도 진비월의 죽음에 대한 일을 이야기 한적도 없었고 행여라도 그사실을 알고 있는 자들에게 입단속을 시켰다. 어렴풋이 그일을 알고 있을 훈바에게조차도 비월에게 내색하지 말아달라고 말했던 것이다. 아무리 생각없고 제멋대로인 훈바이지만 그는 한번 한 약속은 지키는 자이니 비월에게 그일을 이야기 했을 리가 없었다. "누구냐?" 상처투성이의 저아이에게 누가 또다시 그런 가슴아픈일을 이야기 했단 말인가. "진정하세요. 월족이 아니에요. 제가 어렸을 때 저를 거부하셨던 아버지를 이해시키려고 강효랑이 말해준 것이니까요.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알 수 있는 걸요. 저도 제 반려가..... 그런 일을 당했다면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거에요. 그러니 이제 제가 아버지를 도와드릴께요." 자주는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물이 나려는 걸 간신히 참아냈다. 자신을 이해해주어서도 아니고 복수를 도와 주겠다고는 말때문도 아니였다. 언젠가 스치듯 아버지라고 불러달라고 했을 때 거부의 시선을 보내던 비월이 드디어 그를 아버지라고 불러주었기 때문이다. 자주가 떨리는 손을 내밀어 비월을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진비월이 너를 낳아주어서 정말 기쁘다. 소비월!!!!!" 자주의 말에 비월이 미소지었다. 그역시 마음이 달달하게 떨려오며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럴줄 알았다면 진작에 그를 인정해줄 것을. 자주의 감격스런 반응에 비월은 쓴 웃음을 지었다. 어쩌면 또다시 그가 슬퍼할 일을 자신이 저지를지도 모른다는 생각때문이였다. 하지만 몇십년이 지나도록 잊지도 못하고 마음편하게 쉬지도 못하면서도 복수를 미루는 그를 보며 마음을 굳혔다. 아무리 천인계를 멸망시킬 각오를 한 그이지만 역시 천인계를 살아가는 그로서도 자신의 복수때문에 천인계를 위험하게 만드는 일은 망서리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쩌면 천인계를 살아가는 자들이 천제의 혈족에게서 해방될 수 있는 방법이 될지도 모르지 않은가. 이제 새로운 삶을 살아가려는 파라를 위해서도 그가 천제로부터 자유롭게 되기를 바랬다. 수야가 찾아왔다. 그리고 파라의 연인을 보더니 발작하듯 달려들어 소유주를 할퀴려고 했다가 파라에게 밀쳐지자 넋을 잃어버렸다. 비월에게 덤벼들었을 때조차도 보이지 않던 파라의 과격한 행동에 수야는 뻣뻣하게 굳어버려서 억지로 고개를 돌려 자주를 쳐다보았다. 평소라면 차가운 자주의 분위기에 절대로 보이지 못할 행동이였지만 지금은 파라에게 당한 충격으로 이성을 잃은 상태라 가능한 일이였다. "월아는 어디?" 수야의 목소리에 깃든 울음을 본 자주는 그를 정원으로 데려갔다. 비월이 건강해진 뒤로 수야는 처음으로 비월을 만나게 되는 것이였다. 수야는 자신을 정원의 입구까지 데려다 주고 돌아가버리는 자주의 배려에 감사했다. 지금 상태에서는 비월을 보자마자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는데 그런 자신의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정원을 한참 헤메던 수야는 커다란 나무아래 기대어 잠이 들어있는 비월을 발견하였다. 새들이 잠든 비월의 어깨에 종종거리며 뛰어다니고 있었고 작은 동물들이 비월의 몸 주위에 몰려있었다. 너무나 평화스러운 모습인데 수야는 그 모습에 눈물이 났다. 그렇게 밉고 증오스러워서 죽어버렸으면 하던 비월이였는 데 자연에 동화되어 그대로 사라져버릴 것만 같은 비월의 모습에 가슴이 저려왔다. 어서와요. 수야. 수야가 흠칫놀라 급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누군가 바로 자신의 귓가에 속삭이는 말을 걸어오는 기척에 주위를 휙휙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수야는 환청을 들었나하고 고개를 갸웃하며 비월을 다시 쳐다보았다. 비월은 여전히 좀전의 모습 그대로 나무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었다. 놀라지 말아요. 이건 마음의 대화랍니다. 너무 슬퍼보여요. 이리 가까이 오세요. 또다. 수야는 자신이 환청을 들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자 놀라는 시선으로 잠이 든 것처럼 보이는 비월을 쳐다보았다. 아무 변화가 없어 보이던 비월의 입이 호선을 그리며 미소를 담고 있었다. 어째서 그리 슬퍼보이는 거지요? 비월이 입을 열어서 말하는 것은 아니였지만 귓가에 들리는 음성이 비월이 것임을 수야는 그제서야 인정했다. 어떤 방법을 사용하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냥 알 수가 있었다. "왜 파라가 저렇게 변하도록 내버려뒀나요? 그는 마치 다른 사람같아요." 파라의 이야기가 나오자 눈을 감고 있던 비월이 눈을 떴다. 비월이 평정을 잃어버리자 비월의 주위에 몰려있던 작은 동물과 새들이 화들짝 놀라며 달아나 버렸다. 그 모습이 아쉬운듯 쳐다보던 비월이 수야를 돌아보고 환하게 미소지었다. 수야는 그 눈에서 깊고 깊은 심연을 보았다. 너무나 어두워서 모든 것을 삼켜버릴 듯 바닥이 보이지 않는 심연이였다. 그 눈빛이 수야는 너무 슬펐다. 왜 슬픈지는 알 수 없지만 가슴이 저리도록 슬펐다.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하잖아요. 그역시 사랑을 하고 있으니 변하는 것이 당연해요. 그게 슬픈건가요?" "다른 자들은 모두 변해도 그는 변하지 않을 줄 알았어요. 비월이 누구때문에 화룡천으로 가야했는 지 잘 알고 있으니까 그는 변하지 않고 월아를 사랑할 줄 알았어요. 그래서 당신이 미웠는데 당신이 죽어버렸으면 할 정도로 미웠는데 이제는 알 수가 없어졌어요. 오히려 당신을 버린 그가 더 미워요. 이 미움은 당신거였는데 당신보다 파라가 더 미워요. 당신을 미워해야하는데 이 미움을 이제 누구에게 보내지요?" 수야는 엉엉엉 울면서 비월을 끌어안고 통곡을 하였다. 자꾸만 떠오르는 것은 소유주를 감싸며 자신을 밀어버리던 파라의 모습이였다. "미워하지 말아요. 마음 아파하지 말아요." "흐어어엉어어어...나는... 왜 지금 당신을 생각하면 눈물이 나지요? 왜 이렇게 가슴이 천갈래만갈래 찢어지는 건가요?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당신의 모습이 슬퍼보여요." 비월은 자신을 붙잡고 거침없이 울어대는 수야의 등을 끌어안고 어린아기를 달래듯 토닥여주었다. 수야는 어린아이처럼 서럽게 그렇게 울어댔다. 이유도 모르고 감정도 모르고 그저 눈물이 마를때까지 울고 또 울었다. 그래서 비월도 슬펐다. 미련을 버릴려는데 자꾸만 미련이 생기고 있어서 슬펐다. 홀가분하게 떠나려고 마음을 접고 있는 데 수야가 그 접은 마음의 한조각을 다시 펼쳐서 비월은 슬퍼졌다. 간신히 한걸음씩 묻고 있는 애틋한 감정들이 다시 싹을 틔우려고 해서 슬펐다. 수야가 찾아온 그날 파라가 소유주를 반려로 맞고 싶다고 말했다. 굳어버린 자주와 수야대신 비월이 미소지으며 축하를 해주었다. 차마 떨리는 손을 내밀지 못해 자신이 얼굴이 굳어지지않기만을 바라며 최대한 환하게 웃으며 행복을 빌어주었다. 비월이 간신히 감정을 숨기는 동안 수야는 펑펑울면서 소유주와 파라를 노려보았다. 그런 수야를 달래며 비월은 반려의 식을 치루려면 준비할 것이 많으니 자신은 걱정말고 화룡궁으로 돌아가라고 말했다. 천하다고 여겨지는 흑호족의 신분이 아닌 화룡족의 후계자라는 당당한 신분으로 반려의 식을 치루라고 독려했다. 천붕이 두사람을 태우고 높이 솟아오르고 파라와 소유주의 모습이 사라지자 비월이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수야와 자주가 급하게 비월을 부축하였다. 비월의 안색은 시체처럼 창백해져 있었다. "정원으로....." 자주가 의원에게 보이자고 해도 비월은 괜찮다고 정원으로 데려다달라고 했다. 수야가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비월에게 무슨말인가를 하려고 하자 비월이 고개를 젓고 손을 들어 수야의 말을 막았다. 자주에게 안겨 정원으로 들어선 비월이 혼자 있게 해달라고 해서 수야와 자주는 정원입구에서 멈춰섰다. 자주의 걱정어린 표정과 수야의 불만가득한 표정에 미소를 지은 비월은 비틀거리며 정원안으로 깊이 깊이 걸어들어갔다. 그 뒷모습에 수야가 바보라고 투덜거렸다. 자주는 비월의 모습이 완전히 정원속으로 묻힐 때까지 그렇게 쳐다보고 있었다. "뭐라고? 반려의 식?" 훈바는 파라의 갑작스런 부탁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훈바의 옆에는 서너명의 암컷들이 엉켜있었다. 비월을 난폭하게 안아버리고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아 화룡궁으로 돌아오자마자 반려의 식을 치루기 전의 버릇대로 암컷과 수컷들을 불러들여 흥청망청 놀아대고 있다가 파라가 돌아왔다는 말에 그를 자신이 있는 곳으로 불러들였다. 그는 파라의 말을 듣기 전까지만 해도 파라가 비월을 위해 자신에게 빌러온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다가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말을 듣자 술에서 단박에 깨어나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옆에 있던 암컷이 흥이 깨졌는 지 칭얼거렸지만 훈바는 귀찮다는 듯이 그 암컷을 밀어냈다. 그로서는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정리를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월아는 뭐라고 하던가?" 누구보다도 파라를 아끼고 특별하게 생각하던 비월이였다. 이런 일을 그가 쉽사리 허락할리가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였다. "잘되었다며 축하해 주었습니다. 지금은 하고 있는 일이 있어 같이 와주지는 못하지만 반려의 식이 준비되는대로 와서 축복해주겠다고 하였습니다. " 훈바는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그로서는 비월의 반응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간단하게 허락을 하다니...... 도데체 무슨 속셈인걸까. 도무지 비월의 생각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더 마음에 들지 않는 건 비월을 너무 닮은 소유주의 외며였다. 왠지모를 요사한 기운이 느끼져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불쾌감이 들었다. "왜 그렇게 서두르는 거지?" 소유주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훈바가 묻자 소유주가 흠칫 놀랐다. "소유주가 저의 알을 가졌습니다. " "뭐?" 훈바가 놀라서 소유주를 노려보던 시선을 거둬 파라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꿰뚫어볼듯이 소유주를 쳐다보자 소유주는 두려운 듯 파라의 뒤로 숨어들었다. 어찌보면 훈바의 살기에 겁을 먹은 듯 보이지만 훈바가 보기에 저 작은 녀석은 교활하게 자신의 작은 체구를 이용하여 파라를 방패막이로 사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영 석연찮은 느낌에 훈바가 불쾌한 시선을 거두지 못하고 소유주를 노려보았더니 파라가 그 앞을 막아섰다. "압박을 주지 말아주십시요." 자주는 물론 훈바마저도 소유주를 못마땅한 듯 생각하자 파라는 심기가 불편해졌다. 이사람저사람에게 치이는 소유주가 더욱 가엾고 더욱 감싸주고 싶은 보호본능이 생겼다. 훈바는 어이없다는 듯이 그런 파라를 쳐다보았다. 사람이 변해도 저렇게 변할 수가 있는 것일까? "그아이가 선천제의 연인이였던 소유주라는 건 알고 있는거냐?" 소유주는 물론 파라의 안색마저 파랗게 질렸다. 파라가 사실이라도 확인하려는 듯 소유주를 쳐다보았다. 소유주는 애처롭게 자신을 쳐다보는 파라를 마주 쳐다보았다. "정말이야? 왜 내게 그런 말을 하지 않은 거지?" 파라의 떨리는 목소리에 소유주가 고개를 숙이더니 한걸음을 물러섰다. 그모습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약해보여 파라는 가슴이 아팠다. "말할 수가 없었어요. 파라가 나를 버릴것만 같아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어요." 소유주의 울음섞인 말에 파라는 고민을 했고 훈바는 영악하게도 이런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하는 소유주의 능력에 혀를 내둘렀다. 상황을 보아하니 소유주의 행동 하나 말 한마디에도 흔들리는 파라에게 자신이 충고한들 이미 눈에 꽁까지가 씌인 상태라 효과는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어떻게 파라와 소유주가 얽히게 되었는 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아무래도 좋다는데야 자신이 뭐라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들을 내보낸 후 훈바는 다시 다가오는 암컷을 밀어냈다. 비월이 무슨 생각으로 소유주를 파라의 반려로 인정했는 지는 알수가 없었지만 모든 것이 석연치가 않았다. 그동안 자신이 보고 느낀 것으로 봐서 비월이 그렇게 쉽게 소유주를 받아들인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오늘날까지 비월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이해하기 힘든 면을 많이 보여주었지만 오늘 만큼은 아니였다. 시나이라, 너는 도데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더냐? 언제쯤 나는 너를 제대로 알 수 있게 될까? 시간이 얼마지나지 않아 화룡천은 파라의 반려의 식을 치루는 일로 분주해졌다. 무엇보다도 파라의 반려의 식에 안도한 사람들은 흑호족이였다. 그들은 파라의 비월에 대한 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파라가 평생동안 비월만 바라보며 반려를 맞이하지 않을까봐 걱정을 많이 했던 것이다. 다행히 파라가 비월을 잊고 새로이 반려를 맞이하겠다고 하니 노심초사 걱정하던 부족민들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던 것이다. 가장 기뻐한 사람은 호하였다. 다른 부족들처럼 그역시 파라를 무척이나 걱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포기까지 하고 있었던 것이다. 파라가 비월만 바라보고 죽어가도 그는 파라를 말릴 수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비록 비월을 너무 닮아서 언짢기는 했지만 그래도 비월이 아닌 다른 자를 반려로 맞겠다고 하는 것만도 어디인가. 게다가 그 반려가 될 자를 쳐다보는 파라의 따뜻한 시선에 혹시나 하고 불안해하던 마음도 접을 수가 있었다. 활기차게 두달 앞으로 다가온 반려의 식을 준비하고 있을 무렵 갑자기 자신을 찾아온 비월의 거동에 호하는 당황했다. 파라가 마음을 접은 것을 기뻐하느라 비월의 마음을 잊어버리고 있었음을 그제서야 기억해낸 것이다. 어쩔줄을 몰라하는 호하의 태도에도 비월은 그저 오랫만에 찾아와서 미안하다며 여러가지 선물까지 내놓았다. 그리고 차를 마시며 지난 일들을 이야기하며 웃기도 하는 것이였다. 슬펐던 일, 즐거웠던 일, 그리고 힘들었던 일들을 이야기하며 웃고 슬퍼하고 통쾌해 하기도 했다. 차가 거의 떨어져 갈 무렵 비월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쉬어가라는 호하의 말에 미소를 짓던 비월이 호하에게 다가와 그를 끌어안았다. "저는 호하를 저의 아버지라고 생각했어요. 어렸을 때 받아보지 못했던 애정을 호하에게서 느끼고 항상 마음속으로 그걸 감사하게 생각했답니다. 제가 앞으로 무슨일을 하든 어디를 가든 그건 꼭 마음속에 새겨 둘거에요.제가 호하를 정말 정말 좋아했다는 것은 알지요? " "이녀석 새삼스럽긴.... 내가 왜 그걸 모르겠느냐. 사실 나는 파라보다 네가 더 사랑스러웠다. 그 귀여운 구석없이 말썽만 부리고 다니는 녀석은 항상 골치거리였지만 너는 내게 딸이 있었으면 이렇겠구나 싶을 정도로 사랑스럽고 귀엽더구나.자꾸만 아프고 자꾸만 약해져서 걱정스럽더니만 이렇게 건강해져서 얼마나 기쁜지 모를 것이다. 사실 나는 너를 파라의 반려로 보고 있었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어버렸지만 말이다." "정말 감사하고 있어요. 아버지." 비월의 말에 호하의 눈에 눈물이 어렸다. 쑥쓰러운 듯 고개를 돌렸지만 비월은 호하가 기뻐하고 있는 걸 충분히 느끼고 있었다. 정말 좋은 사람. "호하. 제가 자식으로서 한마디 드릴게요. 아버지 아무쪼록 건강하게 오래오래 행복하게 사셔야 해요.아셨죠?" "이녀석이 새삼스럽게.... 그런데 어째 멀리 떠나는 녀석이 하는 말같구나. 찜찜한 걸." "하하하...아버지도 참...." 그날밤 그곳에 나오며 비월은 호하를 다시 끌어안고 감사했다고 말했다. 훈바는 사전 예고도 없이 나타난 비월때문에 놀라고 있었다. 지금 훈바의 옆에는 염마천의 소궁주라며 찾아온 막 성인이 된 매하라는 청년이 발가벗은 모습으로 훈바와 정사를 벌이다 갑자기 들이닥친 비월을 같이 쳐다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당황하던 훈바였으나 곧 자신을 거부했던 자는 비월이였으며 그는 자신을 나무랄 자격이 없다고 단정짓고 당황하던 마음을 정리해버렸다. 비월은 멍하니 얼굴을 붉히고 훈바와 연결되어있는 아름다운 청년을 쳐다보았다. 그는 갑자기 들이닥친 비월이 못마땅한 듯 노려보고 있었다. 훈바의 반려가 없다는 소리를 듣고 기회다 싶어 오늘에서야 찾아왔건만 완전히 회포를 풀기도 전에 방해를 받았으니 기분이 좋을리가 없었던 것이다. "어인 일이신가. 영원히 화룡천에는 발길도 하지 않을 듯 말하더니....." 훈바의 비꼬임이 담긴 말에 비월이 잠시 고개를 숙이더니 다시 고개를 들어 훈바를 쳐다보며 미소지었다. 그미소에 훈바는 자신의 가슴 언저리가 지끈 거리는 걸 느끼고 눈썹을 찌푸렸다. "죄송합니다. 오늘 도착하였길래 인사를 드리러 온 참인데. 이런 상황일 줄은 미처 짐작하지 못했습니다. 그럼 쉬십시요." 이곳은 훈바의 처소이기도 하면서 비월의 처소였다. 반려의 식을 치룬 후 쭈욱 이곳이 비월이 지낸 곳이라 화룡궁에는 비월이 따로 지냈던 곳이 없었다. 그러니 문을 나서면 마땅히 갈만한 곳이 없었다. 비월이 돌아서자 그때까지 노려보고만 있던 훈바가 입을 열었다. "왜 돌아왔는가?" 자신을 건들면 두번다시 보지 않겠다고 윽박지르던 비월이였다. 그런 그가 자존심을 꺽고 이렇게 그를 찾아온것은 꽤 쉬운일은 아니였으리란 것을 알면서도 훈바는 좋은 말이 나오지 않았다. "글쎄요..... 왜 돌아왔을 까요." 자조적인 비월의 말이 한자루의 비수처럼 훈바의 가슴속을 난도질하고 있었다. "이제는 기댈 곳이 없던가? 그리 마음을 두었던 파라가 반려를 맞이하여 갈 곳이 없어 돌아온 것인가?" 그말에 훈바는 비월이 아니라고 부정을 하거나 화를 내며 항의할 줄 알았지만 비월은 그저 미소지었을 뿐이다. 훈바는 오늘처럼 자신의 예상을 벗어나는 행동을 하는 비월이 싫은 적도 없었다. 도무지 알 수가 없는 자라는 생각이 새삼 들고 있었다. 게다가 저 쓸쓸한 미소를 보고 있으면 자신이 그에게 커다란 잘못이라도 한 것만 같은 기분이 들고 있었다. "그리하였나 봅니다. 훈바님께 그게 죄가 될지도 모르고 어리석은 자가 아무 생각없이 그리하였군요. 용서를 비옵니다. 그럼 저는 이만." 비월이 허리숙여 물러서려고 하자 훈바는 급히 그를 불러세웠다. "월아." "오늘 일은 잊어버리시고 가끔 생각나면 그런 자가 있었구나 생각해주십시요. 그동안 저를 사랑해주셔서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었는데 심기만 어지럽혀드렸군요." 비월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훈바가 급히 일어나 그를 붙잡으려하자 지금까지 훈바와 얽혀있던 매하가 훈바의 팔을 잡았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지금 그를 잡으면 훈바님이 지시는 것이에요. 그러니 모른 척 하세요. 아쉬우면 다시 오겠지요." 그 말에 훈바가 일렁이는 가슴을 가라앉히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매하는 갑자기 찾아온 자가 훈바의 반려였다는 사실에 당황하면서도 이 기회에 그를 완전히 떨구어낼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자신이 아닌 다른 자를 반려로 맞이하기는 했지만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는 생각이였다. 언제다시 올지 모르는 이기회를 놓친다면 두번다시 훈바를 잡을 기회는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매하는 필사적이였다. 훈바는 비월이 닫고 가버린 문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자꾸만 비월이 보인 미소가 마음에 걸렸다. 무척 지치고 슬퍼보이던 미소가 자신때문이 아니라 파라때문일거라고 자조했지만 왠지 불안한 마음을 접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미소 자신때문이라면 비월은 다시 자신을 찾아올 것이고 그때에는 반갑게 그를 맞이하여 그를 용서하고 두번다시 자신보다 파라를 먼저 생각하지 못하도록 만들자는 생각에 불안한 생각을 떨쳐내버렸다. 비월은 차마 파라의 처소에 자신이 왔음을 알리지 못하고 서있었다. 안에서 들려오는 신음소리가 무엇을 뜻하는 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참동안이나 문앞에 서서 더이상 다가가지 못하고 서있었다. 비월을 따라왔던 시종이 곤란한 듯 비월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비월은 괜찮다며 불안해하고 있는 시종을 달래주었다. "이름이 무엇이지요?" "수림이옵니다." "수림, 참 예쁜 이름이군요. 수림? 내 부탁 하나만 들어주겠어요?" "하명하시어요. 제 성심성의껏 들어드리겠습니다." 비월이 품에서 작은 보석함을 꺼내었다. 그리고 한참을 쳐다보다 수림에게 그걸 내밀었다. "이걸 반려의 식날 파라와 소유주님께 건네주세요. 원래 한쌍인 보석으로 아무리 멀리 있어도 상대방을 알아볼 수 있게 도와주는 보석이에요. 부탁해요." "왜 월아님이 직접 전해주시지 않나요?" 맑은 눈동자에 서린 의문에 비월이 쓰게 미소지었다. 도저히 자신의 손으로 직접 전해 줄 용기가 나지 않는다고 어떻게 이 어린 청년에게 설명한단 말인가. 비월이 미소짓자 수림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이 어린 청년은 훗날 자신을 기억해줄까? 감상에 젖으려는 자신을 추스리며 비월이 고개를 저었다. "나는 일이 있어 멀리 떠나있어야 할 것 같아요. 직접 축복해주지 못해 미안해 하더라고 부디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아달라고 했다고 전해주겠어요?" "네 월아님? 그런데 어디 멀리가시나요?" "그렇게 될 것 같아요. 수림도 행복하세요." "감사합니다. 월아님도 행복하세요." 비월은 다시 한번 아직까지도 끊이지 않고 신음소리가 흘러나오는 문을 쳐다보았다. "파라... 부디 이제는 행복해지세요." 담담한 음성에 가득배인 비월의 말에 수림은 왠지 자신의 가슴이 저려오는 걸 느꼈다. 그들의 족장의 반려는 왜 저렇게 슬펴보이는 걸까? 왜 두번다시 보지 못할 것처럼 아련해 하는 것일까? 9. 영원 결계주문. "용케도 소유주가 화룡족후계자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군." 가토의 말에 탁제균이고개를 끄덕였다. "비월의 힘을 얻어서인지 머리가 비상합니다. 게다가 교활하기도 해서 상황을 유리하게 만드는 재능도 있구요." "역시 시나이라의 능력이란 말이군. 날개 한쪽의 힘이 그정도라니 ...... 시나이라를 죽여서 없애버리지 말고 수인족에게 먹여볼까? 서너명 정도는 그 능력을 발휘할 것 같은데...." 탁제균은 가토의 말에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지금 있는 진짜 시나이라는 물련이려니와 그나마 가짜인 소유주 역시 통제하기 힘들정도로 교활하고 영리한데 서너명의 시나이라를 더 만들어 내다니....생각만해도 소름이 돋았다. "그보다 어찌하여 다하가 보이지 않습니까? " 가토가 자신의 옆에서 다하를 떼어놓은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잠시도 자신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 보내지 않던 그가 아니던가. "언제부턴가 계속 눈물을 흘리고 울길래 재워두었어." 가토의 어두운 안색에 탁제균은 이게 또 무슨일인가싶어 눈썹을 찌푸렸다. 세상의 근심걱정은 전혀 모르는 것처럼 환하기만 하던 그가 왜 갑자기 운단 말인가. 기억이라도 돌아온 것일까? 그렇지 않고서야 그가 울일이 없지 않은가. "원인을 모르십니까? 혹시 가토님을 밀어내거나 멀리하려는 기색은 없었습니까?" 다하가 기억이 돌아온다면 제일 먼저 가토를 밀어낼 것이라는 것은 두사람 모두 잘 알고 있는 사실이였다. 그래서 탁제균은 확인코자 물었다. "아니 자신도 왜 우는 지를 모르는 눈치였다. 가끔 자신의 가슴을 움켜쥐고 너무 서럽게 우느라 진이 빠질 지경인지라 재워두기는 했지만 자면서도 우니 걱정이야. 도데체가 무슨 일인지...." "혹여 다른 특이한 행동을 하는 적은 없었습니까?" "전혀.... 저러다 탈진할까 걱정이군." "그럼 한가지 이유뿐이군요. 지금 그는 다른 누군가와 동화되어 있는 겁니다. " 탁제균의 말에 가토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기억을 잃은 후 한번도 자신의 옆을 떠난 적이 없었던 다하가 누구와 동화가 된단 말인가. "지금은 정신적인 단계입니다만 아무래도 진척되는 상황을 보니 곧 영혼이 연결되어 상대방에게 위험한 일이 생기면 다하 역시 똑같은 고통을 당하게 될 것 같군요." "그게 무슨 말도 안되는 일인가? 왜 다하가 다른 자와 동화된단 말인가? 게다가 어떻게 한번도 내곁을 벗어난 적이 없는 그가 ......" "그가 천제의 혈족이기 때문인 것 같군요. 천제의 혈족 중에는 자주 있는 경우는 아니지만 가끔 이해하기 힘든 능력을 드러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무래도 지금 다하는 누군가와 동화되는 능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 "하지 말라고 말한다면?" "그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이미 파장이 맞아버린 상태라 스스로 억제를 한다해도 잠을 자거나 마음을 놓는 순간에 다시 동화되어 버릴 테니까요." 가토는 어이가 없기도 하고 동화가 되어도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과 동화가 되어버린 다하에게 화가 났다. 그리고 너무 걱정되었다. 그 누군지 모를 상대가 죽기라도 한다면 아무 증후도 없이 다하 역시 죽게 된다는 데 걱정이 아니될 수가 없었다. "그럼 그 상대방을 알아낼 방법이 없는가?" "다행이라고 한다면 그런 경우가 혈족사이나 연인사이에 잘 일어난다는 거지요. " "지금 혈족이라면 혜림아와 선천제 율파? 설마 시나이라는 아니겠지?" "모르는 일이지요." 가토가 머리를 움켜쥐고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당장 시나이라를 죽이러 보낸 살수들을 불러들이게......다하가 누구와 동화되었는 지 알아내기 전까지 이 세사람을 건드리지 말고 철저하게 보호하도록." "네, 알겠습니다." "빌어먹을.... 내가 천제의 혈족을 보호하게 되다니..... 정말 어이가 없군." 탁제균은 못마땅해하는 가토에게 가장 간단한 방법은 다하를 버리면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절대로 그말만은 할 수 없었다. 다하 하나를 차지하기 위해 가토가 벌인 일이 얼마던가. 쉽사리 다하를 포기할 성격도 아니지만 자신이 다하를 없앨 생각을 하고 있음을 그가 눈치라도 챈다면 비록 천년을 같이 일해온 자신이라도 그의 손에 살아나지 못할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니 다하 스스로 가토를 버리게 만들거나 배신하게 만들어 그 스스로 다하를 치게 만드는 수밖에 없었다. 비월이 다시 자신을 만나러 올거라고 했던 매하의 말을 믿고 그를 기다리던 훈바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자신을 만나러 오지 않는 비월의 행동에 화가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했다. 그리고 자꾸만 떠오르는 건 자신을 보며 슬프게 웃던 얼굴과 이제서야 떠오르는 그동안 사랑해줘서 고마웠다고 하던 이별인사같던 말이였다. 그저 감사함을 표시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라고 단정짓기에는 너무 그 여운이 서글펐다. 처음에는 자신과 비월 사이를 풀어주기 위해 파라가 연극을 하는 것은 아닌가 의심하였으나 시간이 지나자 결코 파라의 행동이 가식이 아님을 알수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훈바는 자신이 지나친 과의식으로 비월과 파라를 의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후회를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 비월의 행동에 견디다 못한 훈바가 직접 비월을 찾아가기로 했다. 이제 다른 자들과 노는 것도 싫증났고 작고 보드라운 비월을 안고 싶었다. 천붕에 올라 월궁으로 찾아온 훈바는 전혀 상상하지도 못했던 상황에 당황했다. 언젠가 비월이 만들어 내었다는 반투명한 결계처럼 월궁은 안이 희미하게 보이는 결계에 갇혀있었다. 게다가 외부의 출입을 막으려는 듯 항상 열려있어야 할 하늘도 닫혀있었다. 몇번인가 월궁을 선회하며 입구를 찾았으나 월궁은 하나의 구슬처럼 전혀 틈이 없이 결계에 싸여있었다. 도데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왜 월궁에 이런 결계가 생긴 것이며 비월은 무사한 건지 걱정이 되었다. 한참동안이나 월궁에 연통을 해보려고 했으나 아무런 응답도 없었다. 결국 포기하고 화룡궁으로 돌아온 훈바는 안절부절을 못하고 여러사람을 괴롭게 만들었다. 차람이 징징 울면서 밉다고 했다가 맞아서 며칠동안 일어나지도 못하는 사태도 있었다. 그래서 화룡족은 그들의 궁주가 보이기만 해도 꼬리를 감추고 숨어버리기 일쑤였다. 며칠동안 온갖 심술을 부리던 훈바는 여기저기 장식되어있는 장식들을 보자 그제서야 진정 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는 알수가 없지만 설마 파라의 반려의 식에도 오지않을 까하는 생각에 그날 오면 이야기를 하든지 해야겠다고 자신을 다독였다. "지금 뭐라고 했는가?" 가토가 여전히 울고 있는 다하를 달래느라 심력을 쏟고 있다가 탁제균이 창백하게 질려서 전해온 소식에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선천제 율파가 사라졌습니다. " "그게 말이 되는 소린가. 어떻게 천인오쇠에 든 자가 사라진단 말인가? 게다가 후궁을 지키는 자들은 선천제가 사라진 것도 모르고 있었다니....눈 뜬 허수아비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잘 걷지도 못하는 선천제가 사라지도록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단 말인가. 당장 그것들을 불러들여 수인족에게 먹여버리게.." "이상한 것은 그것 뿐만이 아닙니다. 지금 월궁이 아무도 출입할 수 없는 결계를 쳤다고 합니다. 무슨 영문인 지 알수가 없지만 그곳에 파견했던 살수들에게 연락도 할수가 없었습니다. " 탁제균은 차갑게 가라앉은 가토의 시선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 어느때보다고 가토의 시선이 차갑게 가라앉아있었다. 바로 화를 내고 으르렁거리면 덜 위험하지만 너무 화가 나서 사색에 잠기고 난 후에는 감당하기 힘들정도로 큰 혈풍이 불고는 했었던 것이다. "아직 다하가 공명하고 있는 자를 알아내지 못했는가?" "그게 아무래도 시나이라 같습니다." 최악의 결과였다. 세사람 중에서 가장 아니길 바란 자가 시나이라였던 것이다. 다하가 마음을 주었던 천제의 혈족인 진비월의 아이에다 외모 또한 진비월과 거의 비슷하여 가토의 증오심을 부추키는 자가 아닌가. 게다가 시나이라는 사사건건 가토의 일에 방해가 되고 있었다. 그래서 죽여야만 하는 자인데 가토의 다하를 향한 마음이 변하지 않는 한 함부로 죽일 수도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내가 알아야 할 것이 더 있는가?" "지금으로서는 그것이 전부입니다." 탁제균은 겉으로는 침착해보였지만 내심으로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언제 숙이고 있는 자신의 머리위로 가토의 분노가 떨어질지 모를 상황임을 잘 알았던 것이다. "선천제가 어디로 사라졌는 지 알아내서 죽여버려. 어차피 천궁을 벗어난 것이라면 더이상 죽을 때까지 기다려줄 필요가 없다. 그리고 어떻게 후궁을 빠져나간 것인지 확인하고 혹시라도 협조자가 있었는 지 그리고 진짜로 그가 천인오쇠증상을 겪었는 지 철저하게 다시 조사해서 며칠 안으로 내 책상위에 올려놓게. 그 빌어먹을 시나이라가 살아있다는 걸 확인한 후로 일이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르는 느낌이다. 각 십이천궁으로 보냈던 천이족들에게 십이천궁의 상징물을 되도록이면 빠른 시간안에 회수하라고 연락해." "네." 가토의 처소를 물러나면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던 탁제균은 밖으로 나오기가 무섭게 문이 닫히는 걸 확인하자 바로 주저앉아버렸다. 오늘에야말로 자신은 죽어나오게 될 줄 알았다. 다행히 다하가 있어서인지 가토가 최대한으로 인내하고 참아낸 것을 알 수 있었다. 당분간 일이 정상궤도를 찾아갈때까지는 다하를 가토 옆에서 떼어낼 생각은 말아야할 것 같았다. 혜림아는 자주의 독대신청에 흥분하였다. 천제위에 오른 뒤로 한번도 자주는 자신을 찾아오지 않았을 뿐아니라 회의에도 참석하지 않았었기 때문에 그와 직접적으로 대화를 해 본 적이 없는 터라 처음으로 그가 신청한 독대에 가슴이 진정되지를 않았다. 자신을 도와주겠다며 그러기 위해서는 비월의 형제같은 파라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 그의 도움을 받아야한다고 했던 소유주를 여러가지로 도와주었지만 꽤 시간이 지나도록 아무런 연락이 없는 소유주에게 자신이 속은 것이 아닌가 의심하던 혜림아는 오늘에 이르러서 자주의 독대신청에 드디어 소유주가 자신에게 도움을 주고 있구나하고 믿어버렸다. 그로서는 자주가 소유주를 마땅치않게 생각하는 것도 절대로 소유주의 부탁을 들어줄 관계가 아니라는 것도 알 수가 없었다. 속으로는 갑자기 그가 그동안 자신을 무시하다가 갑자기 독대를 신청한 것이 마음에 걸리기도 했다. 아무리 소유주의 부탁이라지만 그 냉정한 그가 자신을 이렇게 쉽게 그것도 많은 사람과 있는 자리도 아니고 단 두사람만이 만나기를 바란다니 기쁘면서도 불안했다. 하지만 아무리 마음속에서 솟아오르는 불안에도 그는 망서리고 있을 수가 없었다. 어쩌면 자신이 평생을 기다려온 기회일지도 모를 이기회를 그냥 지나쳐버리기엔 그를 향한 자신의 마음이 너무 컸다. 게다가 자신은 모든 천인족에게 보호 받아야 하고 떠받들려야하는 천제였다. 자신이 살아있음으로해서 천궁이 유지되고 그 천궁을 축으로 하는 십이천궁도 무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자주가 무언가를 눈치채고 자신에게 보복을 하려해도 그는 자신을 해치지 못할 것이라 단정하자 이제는 그를 만날 때 자신이 어떻게 보일지만을 생각하게 되었다. 자신은 지고지상의 천제였다. 천인계 최고의 보석이며 유일의 살아있는 결계석인 것이다. 훈바는 초조하게 방안을 서성였다. 매하가 자꾸 찾아와 자신을 유혹하려고 했지만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고 나중에는 짜증이 날 지경이였다. 몇시간 후면 파라의 반려의 식이 있을 것인데 비월이 오지 않았던 것이다. 더불어 자주도...... 몇번인가 월궁을 찾아갔지만 여전히 월궁은 그 괴상망측한 결계에 싸여 훈바의 입궁을 거부하였다. 차람이 준비한 한쌍의 옷의 나머지 주인은 그림자도 비추지 않았다. 자신에게 용서를 빌러왔을 때 자신이 다른 자와 함께 있어서 충격이라도 받은 것일까? 아니면 두번다시 용서받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고 돌아올 용기를 잃어버린 것일까 지금에 와서야 그날 비월이 찾아왔을 때 용서를 해버릴 걸 하고 후회해보았지만 이미 늦어버린 일이였다. 용기를 내서 오지 못할 정도로 자신이 그에게 가혹했던 것인가싶어 훈바는 자꾸만 마음이 아파졌다. 슬프게 미소지을 때 용서해버릴 걸 되돌아가는 뒷모습이라도 잡을 걸 하루에도 몇번씩 후회를 하지만 이미 소용없는 일이지 않은가. 이대로 영영 돌아오지 않을 까봐 걱정만 될뿐이였다. 설마 파라의 식인데 오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파라의 식이 끝나도 비월이 오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아니 영원히 화룡궁으로 돌아오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비월이 오지 않는다고 훈바는 그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그가 오지 않겠다면 자신이 가서 직접 데려오겠다고 다짐했다. 식이 끝나는 대로 월궁으로 찾아가 아직까지도 들어갈 수 없는 그 결계가 쳐저있다면 그 결계를 깨버리고서라도 안으로 들어가 비월을 데리고 올 각오였다. 그리고 무조건 용서하고 잠시나마 화가나서 한눈을 판것에 대해서도 사과를 할 생각이였다. 그러자 그때까지 초조하던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어서 식이 끝나기만을 바랐다. 파라는 수림이 내미는 보석함을 받고 충격을 받았다. 화룡궁으로 비월이 찾아왔을 거라고는 생각한 적이 없었던 터라 비월이 찾아와 자신도 만나지 않고 수림에게 보석함만 전해주고 갔다는 말에 비월에게 서운한 감정마저 느끼는 파라였다. 방금전까지만 해도 드디어 자신의 반려를 맞아하게 되어 기쁘던 마음은 어디로 사라졌는 지 기분이 가라앉았다. 보석함을 열어보니 붉은 색의 귀걸이와 파란 색의 귀걸이가 똑같은 모양으로 놓여있었다. 정교하면서도 어두운 곳에서 영롱한 빛을 발하는 것이 진귀한 보석인 모양이였다. "상대방이 어디있든 알 수 있는 보석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직접 참석하여 축하드리지 못해 미안하다고 꼭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 파라는 왠지 마음이 무거워져갔다. 소유주가 옆에 있을 때는 그만 있으면 뭐든지 필요없을 것만 같은 기분이였는 데 지금 식을 기다리며 혼자 있으니 비월이 너무 보고 싶어졌다. 왜 소유주가 아니라 비월이 보고싶은 지는 그로서는 알 수 없는 노릇이였다. "다른 말은 없었느냐?" "오래오래 행복하시랍니다." "뭐냐 그말은 마치 영영 못 만날 사람에게 하는 말 같지 않느냐?" 무심결에 내뱉은 자신의 말에 파라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걸 느꼈다. 그의 손에서 보석함이 바닥으로 굴러 떨어지고 있었지만 의식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게 .... 언제쯤의 일이지?" "녜?" "월아님이 오신게 언제쯤 일이냐구?" "두달 정도 되었습니다. 파라님을 뵈러 오신 듯했는 데 그때 파라님이 소유주님과 함께 계셔서 그대로 돌아가시면서 부탁하신 겁니다." 두달이라면 상당히 오래전의 일이 아닌가. "그 후로 한번도 오신 적이 없었느냐?" "네, 훈바님이 월궁으로 월아님을 모시러 가셨지만 만나지도 못했다고 하시던걸요." "만나지 못했다고? 왜?" "그건 저희도 모릅니다.다만 화가 나신 훈바님이 폭주하셔서 한동안 숨도 못쉬고 있었지요." 지금도 그때 일을 떠올리면 치가 떨린다는 듯이 수림이 몸부림을 쳤다. 그때 문이 열리고 호하가 들어왔다. 호하는 안색이 어두운 파라를 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멋있구나.. 사실 그동안 네가 혹시라도 마음을 바꿀가봐 노심초사했는 데 오늘까지 이렇게 온 걸 보니 마음이 편하다. 자 가자. 그보다 월아가 아직 오지 않았다니 아직까지도 훈바님과 화해하지 않은 것이냐?" "......." "사실 월아를 반려를 맞겠다고 날마다 나를 괴롭히던 너때문에 나는 그 녀석을 네 반려로 찍고 있었지. 일이 이렇게 변할 줄은 그때는 정말 몰랐다. 이런 일만 없었다면 지금쯤이면 너와 월아는 내자식이 되었을 텐데..... 월아가 너와 우리 부족을 위해 훈바님께 갈때만 해도 나는 평생 네가 월아를 잊지못할까봐 걱정이였다. 그런데 네가 다른 반려를 맞겠다고 하자 이번엔 월아가 걱정되더라 ..하하하... 미안한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는데 저번에 찾아와서 자신은 나를 아버지라고 생각한다더구나... 오래오래 살라고 하는데 눈물이 나더라..." 파라의 안색이 더 굳었다. 비월이 자신뿐만 아니라 호하에게도 작별인사같은 말을 했다면 그건 확실했다. 비월은 이제 두번다시 자신들을 만나지 않을 생각인 것이다. 그 순간 머리속과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갉아먹는 듯 통증이 몰려왔다. 이를 악물고 증을 참아보려 했지만 좀처럼 통증이 가라앉지 않고 머리속이 텅비어버릴 정도가 되어서야 언제 그랬냐는 듯이 통증이 가라앉았다. "그게 두달전 쯤의 일인가요?" "그쯤 되었겠구나.." 파라가 휙 돌아서더니 거칠게 문을 열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호하가 무슨일인가하며 급히 파라를 붙잡으려 했지만 파라가 그 손을 뿌리치고 훈바의 처소로 달려갔다. 호하가 계속 따라오며 무슨일이냐고 물었지만 파라는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고 평소라면 어림도 없을 짓이지만 이성을 잃어버린 지금은 앞으로 일어날 일은 걱정도 하지 않은 채 훈바의 처소의 문을 거침없이 밀어젖히고 안으로 달려들어갔다. 훈바가 갑자기 찾아온 파라를 보더니 눈썹을 찌푸렸다. "아니 식장으로 가야할 자네가 여긴 어인 일인가?" "두달 전쯤에 월아가 찾아왔었습니까?" "그걸 왜 묻는 건가? 찾아오기야 했지만 돌아가 버렸지" "그가 훈바님께 뭐라고 했습니까?" "도데체 왜 이러는 건가? 그게 왜 알고 싶은 건데?" 훈바는 자신들의 일에 파고드는 파라가 못마땅했다. 따지고 보면 비월과 자신이 다투게 된 것도 그가 갑자기 사라져버린 일때문이 아니였던가. 반려의 식만 끝나면 비월을 찾아가 조용히 해결하려고 생각하여 겨우 마음을 가라앉혀놓았더니 파라가 그걸 들쑤시고 있었다. "아버지와 저도 찾아왔습니다. 그동안 고마웠다며 행복하라고 했답니다. 훈바님께도 그 비슷한 말을 하였나요?" 훈바는 들고 있던 비월의 옷을 떨어뜨렸다. 뒤따라온 호하도 그제서야 일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걸 눈치채고 창백하게 질렸다. "그 뒤로 비월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아니 없네. 월궁으로 몇번인가 찾아갔는 데 월궁이 이상한 결계에 싸여있어서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돌아왔지." 순간 파라와 훈바가 동시에 천붕을 불렀다. 호하도 반려의 식에 늦는다고 파라를 재촉하지 못했다. 오히려 비월이 찾아와 오래오래 행복하라고 했을 때 이상한 것을 눈치채지 못한 자신을 나무라고 있었다. 혜림아는 애절한 시선으로 자주를 쳐다보았다. 드디어 그가 자신의 앞에 서서 자신을 똑바로 바라봐 주고 있었다. 오직 자신만을..... 혜림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주에게 다가갔다. 지금 그에겐 자주 옆에 서있는 비월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언제나 자신을 빗겨가 다른 사람을 보던 눈! 언제나 자신을 지나쳐 다른 자를 만지던 손! 언제나 자신을 돌아서 다른 자에게 향하던 그의 발이 지금 자신에게 오고 있었다. 혜림아는 꿈만같은 상황에 손을 뻗어 자주의 얼굴을 만져보았다. 꿈인가 싶어 더듬는 손끝에 서늘하면서도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이런 날이 오기만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이런 날이 오기는 할까 얼마나 안타까워했던가. "왜 그러셨습니까?" 자주가 입을 열었다. 처음에는 그가 무슨소리를 하는 건가 알아채지 못하고 감동에 젖어있던 혜림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곧 자주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눈치채고 한걸음 물러섰다. "무...무슨 소리입니까? 왜 그러했냐니?" 애써 부정을 하지만 혜림아는 무척 떨고 있었다. 말로 부정하고 있었지만 몸이 그에 따라주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자주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시선을 돌려버려서 자주의 말이 무엇인지 알고 있음을 자인하고 있었다. "숙하 장군이 저를 찾아와 모든 것을 이야기 해주더군요. 당신이 저지른 일을 감추기 위해 자신을 죽이려했다고...." "아니 그런 자의 말을 믿고 나를 의심하는 것이요?" 혜림아의 발뺌에도 자주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자주의 표정을 보며 자신이 무슨 말을 하더라도 그가 자신을 믿지않을 거라는 걸 확인하자 그동안 억눌러왔던 분노가 터져나왔다. 어떻게 지켜온 비밀인데 이렇게 쉽게 들통이 난단 말인가. 어떻게 만들어낸 비밀인데....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져야 한단 말인가. 그걸 위해 자신이 어떤 댓가를 치뤄야 했는데....... "그래요. 내가 시켰어요. 자주 당신을 내게서 빼앗은 그자가 너무 미워서 가장 처참한 꼴로 만들어버렸지요. 내손으로 갈가리 찢고 싶은 걸 간신히 참으며 몸부림치는 그를 지켜보았지요. 다른 수컷을 받아들이며 고통에 겨워 발버둥 치면서 저를 쳐다보는 그 눈알을 뽑아버리고 싶은 것도 참으며 자신의 꼴을 보라고 남겨두었지요. 자신이 누구를 받아들이고 있는 지를 보라고.... 자신이 얼마나 더럽고 추잡한지 확인하라고 눈동자만은 남겨두었어요. 내게서 !!!!! 당신을 빼앗아가버리고도 멀쩡히 살다니..... 용서할 수가 없었어요." 혜림아의 눈에서는 독기와 눈물이 쏟아지고 있었다. 어찌보면 천인계 제일의 미인의 눈물이 아름다워보일 수도 있을 테지만 자주에게 혜림아의 눈물은 증오스럽고 저주스럽기만 했다. 당장에라도 그를 죽여 그 피를 마시고 그 몸을 산산조각 내버리고 싶어 온 몸이 전율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너무 쉬운 방법이였다. 그 고통을 당하며 죽어갔을 진비월에 비해 그저 죽이고 고문하는 것은 너무 가벼운 처벌이였다. "착각하고 있구려. 혜림아!!!! 내가 언제 당신의 것이였단 말이요? 난 단 한번도 당신의 것이였던 적이 없었오. 난 진비월이 나를 쳐다보며 웃어준 순간부터 아니 그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그를 위해 존재하는 그의 것이였오. 나의 사랑. 나의 마음. 나의 미래와 행복이 모두 그의 것이였오. 그의 눈빛, 그의 웃음, 그의 눈물 하나하나가 내게는 기쁨이요, 행복이며 슬픔이고 낙이였오. 난 당신이란 자를 단 한번도 마음에 품어본 적도 없오." 자주의 독백이 계속될수록 혜림아의 안색은 썩은 과일처럼 일그러지고 나중에는 자주를 노려보기까지 하였다. 자주가 한말을 믿을 수가 없다는 듯 아니 믿고 싶지 않다는 듯 부정의 빛을 가득 띄우고 자주를 쳐다보았다. 애원하듯 제발 아니라고 말해달라는 듯이 자주를 향해 눈물어린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그대의 바다같은 애정보다 내겐 진비월의 눈물 한방울이 더 소중하고 그대의 하늘 같은 집념보다 내겐 진비월의 웃음 한 조각이 더 중요하오. 다른 자에게는 소중하고 아름다워보일 당신의 몸일지언정 내게는 진비월의 손톱보다도 하찮은 존재요." "아니야!!!!!!!!!!!절대 그럴리 없어!!!!!!" 혜림아가 절규하며 정청을 장식하고 있는 장식품을 집어 자주에게 던졌다. 자주의 몸을 비껴가 바닥에 떨어진 유리잔이 산산조각이 나며 깨어졌다. 그를 기다리며 준비한 모든 것이 너무나 허무하고 허망하여 당장에라도 몸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나는 내 사랑을 빼앗아가버린 당신을 증오하오. 나는 내 마음의 주인을 빼앗아가버린 당신을 저주하오. 나는 내 영혼의 반려를 내게서 빼앗아버린 당신을!!!!!죽일 것이요." 자주의 손에 투명하면서도 날카로운 월궁의 상징인 월검이 나타났다. 혜림아는 그 모습에 겁을 먹으면서도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자신은 천제였다. 자신이 있음으로서 천궁이 유지되는 살아있는 커다란 보석인 것이다. 자신을 죽이면 천궁이 무너지는 것을 그가 모를리 없다는 것을 믿었다. 그래서 그토록 냉정하고 차갑다고 알려진 자주가 열혈지옥에라도 온듯 분노하고 있는 모습에도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나를 찌르면 천궁이 무너지는 것을 모르진 않을 텐데요. 그 천한 천이족때문에 나를 거절했지만 난 천제가 되었어요. 당신이 선택만 잘했다면 지금은 천제의 반려가 되었을 거라구요. " 요염하게 웃으며 자주의 약을 올리던 혜림아는 이상하리만치 담담한 자주의 반응이 맘에 들지 않았다. "나를 찌를 건가요?" 유혹하듯 자주에게 다가오는 혜림아의 배에 자주의 칼이 파고 들어갔다. 얼음처럼 차갑고 데일 듯 뜨거운 감각에 혜림아가 진저리 치며 자신의 지금의 처지를 믿지 못하는 듯 경악에 찬 시선으로 자주를 쳐다보았다. "당신은 그런 가치밖에 없군요. 하지만 당신이 없다해도 천궁이 무너지는 일은 없을 거랍니다. 당신은 그저 쓸모없는 보석에 불과해요." 처음으로 혜림아의 시선이 비월에게 향했다. 그곳에는 진비월과 너무나 닮은 비월이 담담한 시선으로 경악으로 물든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 ....천.한. 천이족..따위가. 감히... " "잊으셨나보군요. 당신이 천이족이라고 여기고 있는 그분은 천제의 피가 당신보다 배나 진한 혈족이라는 사실을요. 그를 죽인 순간 부터 당신은 죽어마땅한 죄를 지은 죄인이라는 사실을요.그러하니 당신은 정당한 죄의 댓가를 받은 거랍니다. 그리고 죽기전에 한마디 더 하지요. 제 아버지는 비록 제 어머니인 진.비.월이 한낱 수인족이였다 하더라도 당신을 선택하지 않았을 거랍니다. 아버지에게는 당신이 모든 이에게 아름답고 고귀하다 칭송받는 자 일지라도 한낱 길거리의 돌멩이보다 못한 존재라는 거지요." "으아아아악...이이이 못된 것... 내가 이대로 너를 용서할 것 같으냐? 내 기여코 돌아와 너희 부자를 처참하게 죽일 것이다. " 혜림아의 눈에 광기가 어리고 핏기가 돌았다. 차츰 무너져 내리는 몸과는 달리 그 눈에 어린 독기는 사그러 들지를 않았다. 마지막 숨이 넘어가면서도 자주를 향해 손을 뻗어왔지만 자주는 냉정하게 그손이 떨리고 있다가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는 걸 지켜보았을 뿐이다. 더이상 그로 인해 신경을 쓰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다. 아니 그럴 가치가 없는 자라고 단정지어버렸다. 온갖 저주란 저주는 다 내뱉으며 몸부림치는 혜림아를 보면서도 일말의 동정심도 들지않았다. 아니 혐오감마저 들지 않았다 자주는 고통에 겨워 무너져 내리는 혜림아에게서 자신의 검을 빼내고 돌아섰다. . "아버지, 저를 대신하여 화룡궁에 가 주세요. 저는 도저히 발이 떨어지지 않는군요. 저 대신 가셔서 파라를 축복해주세요." 비월의 말에 자주의 눈빛이 흔들렸다. 무언가 말하려는 듯 했지만 비월이 고개를 저어 아무런 말도 듣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그는 나의 가족이며 은인이며 정인이였어요. 그가 행복해지지 않으면 저는 영원히 후회하게 될 것 같아요.혹여 제가 그곳에 가면 저는 울게되겠지요. 그 축복스런 날에 저때문에 그가 걱정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 "너는 어쩌려는 것이냐?" "우선 천궁이 무너지지 않도록 결계를 단단하게 만들어 둘거에요. " "너혼자 가능하겠느냐?" "네, 아버지도 아시다시피 저는 비정상적일 정도로 머리가 좋잖아요. 이미 천제가 사라진 후에 대비하여 여러가지 실험을 해 보았으니 이번에도 틀림없이 천궁을 유지하는 데 성공할거에요. 지금은 아무런 걱정마시고 다녀오세요. 저 역시 아버지가 저 대신하여 파라를 축복해 주신다면 마음편하게 일을 마무리 할 것 같아요. " 자주가 슬픈듯한 눈으로 비월을 쳐다보았다.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환하게 웃고 있는 비월의 모습이 어쩐지 너무 아련하여 자꾸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흔들림없이 웃고 있는 비월의 모습에 떨어지지않는 발을 떼어 걸음을 옮겼다. 한참을 걷다 돌아보니 비월이 여전히 그자리에 서서 자주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멀어져가는 자주의 뒷모습을 보며 그의 모습이 멀어질수록 비월의 얼굴에 씌어진 가면이 부서져갔다. 자꾸만 뿌옇게 수막이 형성되며 자주의 모습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하지만 자주의 모습이 완전히 보이기 전에는 절대로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줘서는 안된다는 걸 알기에 꼿꼿하게 서서 자주의 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렇게 서 있었다. 소매속에 감추고 둔 호박석을 만지작거리며 비월은 목구멍까지 솟구친 울음을 삼켰다. 이제는 마무리를 해야한다. 더 시간을 지체하면 언제 천궁의 병사들이 들이닥칠지 모르는 일인데다 이곳에는 천제의 시체마저 있지않은가. 바닥에 봉인을 그린 비월이 그 가운데에 섰다. 손에 들고 있던 호박석이 '지이이잉'소리를 내며 빛을 뿜기 시작했다. 얼마지나지않아 호박석이 비월의 손을 벗어나 공중에 부양되었다. 사람의 영혼을 봉인하는 효능이 가장 뛰어난 보석이 호박석이였다. 사람들은 별로 빛나지않고 다른 보석에 비해 화려하지 않은 보석이라 하찮게 생각하지만 비월은 진작부터 호박석의 가장 뛰어난 효능을 알아보았다. 그래서 오늘 사용하기 위해 여러가지 힘을 같이 이 호박석안에 첨가시켰다. 아마 자신의 혼과 백과 생기가 이 호박석에 봉인되고 나면 천인계의 중심인 천궁은 영원히공중에 자유롭게 부양되어있을 것이다. [천상을 유지하는 궁극의 보석 천제의 피를 이어받은 육체와 영혼이여. 천상을 지배하는 최고의 보석 천제의 힘과 능력으로 명한다. 천제의 혈족 시나이라의 존재를 제물로 삼아 그 존재의 이곳에 봉인하여 영원토록 천궁을 유지하는 영원결계주문을 완성하라.그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이곳에 봉인한다.] 비월의 몸은 호박석이 울면서 내는 기이한 음향에 쌓이더니 입과 눈과 귀와 코에서 하얗고 빨갛고 파란 빛의 반투명한 기운을 호박석으로 보내고 있었다. 발밑에서 부터 싸하게 올라오는 한기에 비월은 '헉'하고 숨을 들이켰다. 얼마후면 자신은 영원히 단단한 봉인속에 영생토록 갇혀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나 그 존재를 이세상에서 지우게 된다. 하지만 너무 지치고 아파서 더이상 뒤돌아보고 싶지 않았다. 그들을 포기하고 자신의 마음을 접고 이제는 쉬고 싶었다. 오직 천제의 피가 흐르는 자만이 알고 있는 영원결계주문! 막 태어난 아기가 숨을 쉬는 법을 알고 있듯이 천제의 혈육은 태어나면서부터 영원결계주문에 대해 인식하고 있는다. 하지만 누가 있어 영원히 그 혼마저 소멸당하게 되는 이 주문을 시도하려 하겠는가. 살아있는 자체만으로 가치있는 보석인 천제의 혈족이 무엇이 아쉬워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소멸시키려 하겠는가. 제일 먼저 느껴진 것은 흐릿해진 시야가 점점 어두워지더니 완전히 암흑속에 갇힌 것처럼 된 것이 첫증상이였다. 천궁에 급히 내려선 훈바와 파라는 피를 뒤집어 쓰고 있었다. 월궁의 결계를 억지로 깨고 안으로 쳐들어가 월궁재사를 반 죽여 자주와 비월의 행선지를 듣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천궁으로 달려왔다. 천궁에 내려선 순간 몇걸음 걷지도 않았는 데 갑자기 파라가 몸부림을 치더니 핏덩어리를 토해냈다. 그런데 그 핏덩어리가 '끼이이이잉....' 거리는 소리를 내며 기어가는 게 아닌가. 훈바가 기겁을 하며 화룡검을 꺼내어 기어가는 핏덩어리를 찔렀다. 그러자 소름끼치는 비명소리를 내며 타올라 잿더미로 변했다. "맙소사, 이게 뭔가? 왜 자네가 기생벌레를 키우고 있는 거지?" 훈바의 경악에 찬 말이 끝나기도 전에 파라가 또 한번 토해냈고 그 핏덩어리 역시 '끼이이이잉..' 거리는 소리를 내며 기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한번.... 자그마치 다섯개의 핏덩어리를 토해낸 파라가 그대로 쓰러졌다. 훈바 역시 역겨운 냄새를 풍기며 잿더미가 되어버린 기생벌레의 모습에 간신히 구역질을 참아냈다. "다섯마리라니..... 정말 대단하다고 밖에 말할 수가 없군. 보통 한마리만 몸속에 있어도 허수아비가 되어 주술자의 뜻대로 움직이고 말텐데 ....도데체 누군가?" 간신히 숨만 몰아쉬고 있는 파라를 부축하여 훈바가 존경스런 눈으로 파라를 쳐다보았다. "소유주..." 파라의 기억은 자신이 비월인 줄 알고 소유주를 따라갔던 그날로 향하고 있었다. 저택에 들어서면서 어디론가 강제 이동당하면서 의식을 잃었다가 정신을 차렸을 때 본 사람이 비월과 너무나 닮은 소유주였다. 자신은 그가 누구인지 모르는 데 그는 자신을 알고 있는 듯 했다. 매혹적으로 웃으며 다가와 자신을 유혹해왔다. 너무나 비월을 닮은 모습에 차갑게 뿌리치지도 못하고 머뭇거리는 사이 무언가를 자신에게 먹였다. 좀전에 자신이 토해낸 그 기생벌레라는 끔찍한 것이였다. 자꾸만 흔들리는 자신을 느끼면서도 비월을 떠올려 그를 물리치자 그가 네번인가 더 그에게 그 비릿하고 물컹거리는 것을 먹였다. 그렇지 않아도 방안에 뿌옇게 깔려있는 연기에 온몸이 타오를 듯 뜨거워 견딜수가 없을 지경이였는데 그 비릿한 것을 먹고 나자 의식이 멀어졌다가 돌아왔을 때는 그를 거칠게 안고 있었다. 그저 그가 자신과 함께 있는 것이 기쁘고 행복해서 안고 또 안았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안타깝고 가련해서 자꾸만 안았다. '내가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에요. 당신의 마음속에 있는 자가 바로 나에요.이제 당신을 내가 받아들여줄테니 나를 사랑해주어요.' 어느사이에 비월이 차지하고 있던 공간에 소유주가 들어차 있었다. 그를 떼어놓으면 안될 것같은 생각에 파라는 잠시도 그를 옆에서 떼어놓지 못했다. 무언가가 머리속에서 가슴속에서 떠올를라치면 머리가 쪼개질 것처럼 아파와 머리속이 텅비어버리고 소유주가 떠오르면 통증이 사라지곤 하였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소유주에게 당해 비월을 상처입혔다는 생각에 가슴이 조각조각 뜯겨나가는 기분이였다. 훈바는 기생벌레에 당해본 적이 없어 그 후유증 어떤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파라의 모습을 보니 심각하긴 하나보다고 생각했다. 수컷이 눈물을 보일 정도로 괴로워하다니 훈바에게는 어림도 없는 일이였다.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다. 호흡이 가파오고 심장이 조금씩 멎어가고 있었다. 서있는 것이 너무나 힘들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에 이르러서 마무리를 소홀히 할 수 없었다. 그토록 이제는 접었다고 생각했는데 파라의 얼굴이 떠올랐다. 날개를 잃은 후 처음으로 제정신으로 돌아와 그를 보았을 때 그가 보이던 환희에 표정과 참지 못하고 자신을 끌어안았다가 호하에게 두들겨 맞았던 것도. 다음날 아침 자신이 깨어나자 바로 자신의 몸 위로 기어올라와 입을 맞추고 맛있다고 이대로 잡아먹을까하고 말하던 모습도. 그뒤에 나타난 호하가 호통을 치자 울먹이며 자신을 돌아보며 호하를 말려달라는 것만 같은 어린아이같은 표정도. 덩치는 산만해서 그 표정이 너무나 안어울려 그만 웃어버렸더니 넋을 잃고 있다가 곧 자신이 어색하게 머뭇거리자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어 다시 웃어달라고 떼를 쓰던 모습도. 그 눈빛에 너무나 따뜻하고 포근하여 비월은 그를 무서워할 수가 없었다. 아침마다 자신을 덮치면서 가끔 미치겠다고 신음을 터트리몀서 호하가 올 시간까지 일정한 선을 넘지않던 파라였다. 자신이 곤란해하는 모습에 짖궃게 웃으며 심술을 부리던 그가 밉지않았다. 그는 처음보았을 때부터 낯을 무척이나 가리는 자신에게 이상하리만치 익숙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는 듯 오래전부터 아주 가까운 사이처럼 너무나 편안하여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자신이 그를 위해 태어난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였다.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이미 포기했던 그를 떠올리고 비월은 자조적으로 웃었다. 마지막 기운이 빠져나가려는 순간 무언가 자신의 몸을 끌어안았다. "너는 여전히 자신을 돌보지 않고 남을 위해 살려고 하는구나." 귀에 박히는 듯 새겨진 말에 흔들려 마지막 기운을 밀어내는 걸 잠깐 잊고 아차해서 다시 그 기운을 밀어내려는 데 억지로 막아 놓은 둑이 무너지듯 힘이 역류하기 시작했다. "안돼!!!!!!!" 한번 터진 둑은 다시 막기가 힘들었다. 좁은 공간에 밀려들어가던 기운들이 넓고 빈 원래의 공간을 찾아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소용이 없었다. 아무리 절규하며 죽을 힘을 다해도 막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포기할 수가 없어 계속 밀어내 보내려던 힘은 호박석이 견디지못하고 파괴됨으로써 끝장나고 말았다. 비월은 너무나 허무한 감정에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암흑속에 갇혀버린 시야가 밝아져 오는 것이 멀어져가는 생기와 더불어 느껴졌다. 이제는 어쩔수가 없구나. 이대로 아무것도 해주지 못하고 이대로 이렇게 끝나는 구나 하고 마지막 호흡을 놓았다. 천수천인전 2부 정청에 들어선 훈바와 파라가 본 것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혜림아뿐이였다. "월아.' "월궁주." 아무리 소리쳐 불러보았으나 대답은 없었다. 혜림아에게 다가가 맥박과 호흡을 확인한 훈바와 파라는 그가 완전히 죽었음을 알 수 있었다. 천제위에 오른 지 얼마지나지 않아 저승의 문턱을 넘어가버린 그는 진정 불쌍한 자일 수도 있었지만 두사람 중 누구의 동정도 받지 못했다. 그가 자주나 혹은 비월의 손에 죽지않았다면 자신들의 손에 죽게 되었을 지도 몰랐으니까. "이곳에는 없나보군요." "그보다 괜찮은가? 아직도 안색이 창백하군." "괜찮습니다. " 파라가 이를 악물며 몰려오는 현기증과 구역질을 참아냈다. 세상이 온통 일그러져 보이고 있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시야가 흔들려고 속이 울렁거려 금방이라도 속의 것이 넘어오려고 했다. 무엇보다도 파라를 괴롭히는 것은 현기증이나 구역질이 아닌 비월을 상처입혔을 자신의 과거의 행동이였다. 아무리 기생벌레에 당했다지만 그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욱씬욱씬 쑤셔왔다. 자꾸만 떠오르는 건 슬프게 웃던 비월의 얼굴! 그 얼굴을 보면서도 왜 제정신을 차리지 못한 것일까. 그 얼굴이 떠오를 때마다 화룡궁으로 당장 달려가 소유주를 잔인하게 죽여버리고 싶은 기분이였다. 훈바는 기생벌레에 당하면 누구나 어쩔수 없다고 하지만 파라는 그래도 스스로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세뇌당했다지만 자신이 어찌 비월과 소유주를 바꿔서 생각할 수 있단 말인가. "돌아가는 것이 좋겠네. 월아와 월궁주도 진작에 떠난 듯하니 월궁으로 가보세." 파라는 훈바의 부축을 받으며 천궁을 빠져나왔다. 두사람 모두 천제가 죽었음에도 흔들림없는 천궁의 상태에 의문을 품을 여력이 없었다. 그저 월궁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를 비월과 자주를 만나야겠다는 일념뿐이였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진행되지 않는 화룡궁 후계자의 반려의 식에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소유주는 나타나지 않는 파라와 훈바의 모습에 불길함을 느꼈다. 무슨일이 일어난 거라면 사람을 보내 미리 연통이라도 주련만 아무런 기척이 없는 걸로 보아 그냥 넘길 일이 아닌것 같았다. 월천에서도 그를 유혹해냈을 때도 보통이면 최음제연기에 취하면 상대가 누구이든 가까이 있는 자를 덮치게 될터인데도 파라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스스로의 몸을 상처입혀 그 열기를 몰아내려 발버둥을 쳐댔다. 그래서 일을 치루기 전에 기생벌레를 먹이는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를 만들기 전에 그 스스로 자신을 탐하게 만들고 싶었지만 여의치않았던 것이다. 탁제균에게서 받은 기생벌레는 일곱마리였다. 그중 두마리는 율파에게 사용해서 빙해족의 멸족명령을 내리게 한후 스스로 천인오쇠에 들도록 세뇌시켰다. 모든 것이 마음 먹기에 달렸다는 말처럼 율파는 스스로 천인오쇠를 일으켜 쓰러졌고. 소유주는 기회를 노려 천궁을 빠져나오려다 혜림아에게 잡혔으나 기지를 발휘하여 혜림아의 손아귀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다. 화룡궁주의 반려의 식에서 느꼈던 것처럼 파라는 여러가지로 소유주를 흡족하게 만들었다. 오직 한사람만을 보는 그 열정이 자신의 것이 아님이 아쉬웠지만 . 기생벌레를 이용하여 그가 사랑하는 자가 자신임을 세뇌시켰다. 처음에는 너무 많은 수의 기생벌레의 사용에 걱정도 되었지만 그의 인식을 완전히 바꾼 후에는 정말 대단히 만족스런 결과를 가져왔다. 율파에게 소중한 보석처럼 보호받고 사랑받을 때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였다. 이용하고 이용당하는 것이 전부였던 소유주에게 파라는 진정 가슴이 떨리도록 환희에 젖게 만들어주었다. 마음이 가득 차오르게 만들어 주는 그 따뜻한 시선과 미소..... 사랑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가슴떨리도록 기쁜 일인지 그를 통해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와 반려의 식을 치루기로 했을 때는 온세상을 얻은 것처럼 기뻤다. 잠시도 자신을 떼어놓지 않고 오직 자신만을 바라보며 자신을 위해주는 그에게 진심으로 자신의 마음을 열었다. 어제밤부터 잠도 이루지 못하고 오늘을 기다리며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켜야했다. 그만 차지할 수 있다면 세상 그 어떤것도 두려울 것이 없을 것 같았지만 식이 끝날 시간이 되도록 나타나지 않는 파라의 행동이 그만큼 자신을 두렵게 만들고 있었다. 그 어느날이였던가. 생선한마리를 훔쳤다고 자신을 죽이려 했던 시장상인의 발길질에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도 이렇게 두렵지는 않았다. 커다란 보석으로 자신을 사들여 보살펴준 그 시나이라를 닮은 자가 그 커다랗고 넓은 정원에서 수많은 수컷들에게 능욕당해 죽어가며 나무위에 숨어있는 자신에게 간절히 도움을 청하는 시선을 보내며 결국에는 죽어가는 보았을 때도 이렇게 까지 두렵지는 않았다. 죽은 그가 도와주지 않은 자신을 원망하는 것만 같아 그곳에서 도망치려다 탁제균의 손에 잡혀 그래서 일천의 지하에 갇혀 해도 달도 보지 못하고 죽는 날만 기다리며 많은 시간이 지났을 때도 그리고 어느날 탁제균이 피에 젖은 하얀 날개 한쪽을 가져와 그것을 먹고 자신이 시키는 대로 하면 살려주겠다고 하며 웃었을 때도 ..... 천제율파와 월궁주 자주의 차갑고 싸늘한 시선을 처음 마주했을 때도 소유주는 얼마든지 견딜 수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 소유주는 견디기가 힘들었다. 굳게 닫힌 문이 영원히 열리지 않을 것만 같아 그래서 파라가 자신을 데리러 오지 않을 까봐 소유주는 두렵고 무서웠다. 그때 문이 열렸다. 환희에 차 고개를 들었던 소유주는 자신이 기다린 인물이 아닌 화룡궁의 재사 차람의 모습에 너무 실망하여 주저앉을 뻔 했다. 차람이 차가운 눈으로 반려의 식의 복장을 하고 있는 소유주를 쓰윽 훓어보더니 입을 열었다. "화룡궁주와 파라가 네 정체를 의심하고 있다. 일천궁으로 돌아오라는 전갈이다." 차람의 말에 소유주가 설마하는 제발 아니기를 바라는 시선으로 차람을 쳐다보았다. 차람의 시선은 담담하고 차갑기만했다. 10 율파의 각성. 천인계가 발칵 뒤집혔다. 천제 혜림아가 영면에 들었다는 소식에 금방이라도 천궁이 무너질 걸 걱정하며 소란을 떨어댔지만 전혀 흔들릴 기미가 없는 천궁의 상태에 영문을 알 수 없어 갈팡질팡하며 원인을 알아내려고 했지만 밝혀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혼란만 가중되었다. 그 와중에 천인오쇠에 들었던 선천제율파가 후궁을 빠져나가 사라졌다는 말에 사람들은 그제서야 천궁이 무너지지 않은 이유가 아직 선천제가 죽지않아서일거라고 추측할 뿐이였다. 그렇다면 천인오쇠에 들었다던 선천제가 어떻게 무슨수로 후궁을 빠져나간 것일까. 왜 천제는 죽게되었을까 그리고 후궁을 빠져나간 선천제는 지금 어디로 사라져버린 것일까. 천궁이 사라져버린 선천제율파와 누군가에게 피습당하여 영면에 든 천제혜림아의 일로 소란스러운 반면 월궁과 화룡궁은 다른일로 혼란스러워했다. 천궁을 나와 비월의 부탁대로 파라를 축하해주러 왔던 자주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는 당사자들의 모습에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모습을 보고있다가 차람이 다가와 훈바와 파라가 천붕을 타고 사라졌다는 말을 전해듣고 벌떡 일어나 월궁으로 향했다. 그의 예상대로 파라와 훈바는 월궁으로 찾아왔었던 것을 알 수 있었다. 굳게 닫혀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할 목적으로 만들어놓은 결계를 억지로 열고 들어와 그 결과 월천의 한쪽이 그 회오리에 휩쓸려 엉망진창으로 파괴되어있었다. 게다가 성질 급한 훈바가 자신을 무시하고 자주와 비월이 어디고 갔는 지 말해 주지 않는다고 월궁의 재사와 수신호위 서너명을 작신나게 두들겨 패놓아서 자리보전하고 누워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 모습이 처절하여 자주는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움켜쥐었다. 재사는 훈바의 난투질에 견디다 못해 견디지 못하고 사실대로 말할 수 밖에 없었다며 자신을 죽여달라고 해서 자주의 골치를 더 아프게 만들고 있엇다. 뒷수습을 하며 진정을 하고 있으려니 곧 또다시 결계가 억지로 열리려 하고 있었다. 자주는 더이상 그들을 막을 수가 없음을 깨닫고 직접 결계를 열어주었다. 자주 앞에 모습을 드러낸 훈바와 파라는 상상을 초월한 모습을 하고 있어서 자주를 놀라게 만들고 있었다. 파라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비틀거리는 모습이였고 훈바는 불씨만 당겨도 화르륵 타오를 듯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자주는 뜻밖의 모습을 하고 있는 파라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반려의 식에 나타나지않은 그에게 도데체 무슨일이 일어났기에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초췌하고 병약해 보이는 것일까? "월아는?" 자기 분을 이기지 못해 씩씩거리며 훈바가 숨을 몰아쉬며 월궁에 와서도 모습이 보이지않은 비월의 모습에 눈을 부릅뜨고 자주를 쳐다보았다. "그것이 왜 궁금한가?" 비월이 그들때문에 울었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자주로서는 너무 당당하게 비월의 행방을 묻는 그에게 감정이 좋지 않아 말이 곱게 나와주지 않았다. 훈바 뿐 아니라 파라가 물어보았어도 마찬가지 였으리라. 그 연약하고 상처많은 아이가 그들로 인해 또다시 상처받는 모습을 보였으니 그들에 대한 자주의 심사가 고을리가 없었다. 파라는 그저 고개를 숙이고 자주의 처분만 기다리는 사람처럼 조용히 기다렸다. 어디에 그 많은 피가 있었을 까싶을 정도로 계속 피를 토해내던 다하가 갑자기 피를 토하던 것처럼 피를 토하는 것을 갑자기 멈추었지만 너무 많은 피를 토해낸 결과로 그대로 넘어가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 어떻게든 더이상 피를 토하던 걸 멈춰보려했던 가토가 피가 멎자 안도의 숨을 내쉬기도 전에 호흡이 멎어버린 다하의 모습에 절규하며 자신의 생기를 다하에게 불어넣었다. 맞닿은 입술에서 비릿한 피맛이 났지만 가토는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자신의 호흡을 불어넣었다. 그래도 효과가 없자 자신의 손목을 그어 그곳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다하의 입안으로 떨구기 시작했다. 자기 방어가 강한 몸이 상처낸 자리를 빠르게 회복시키면 또다시 상처를 내어 피를 흘리게 만들어 다하의 입술을 적셨다. "제발 다하. 제발 받아들여! 또다시 나를 그 절망에 빠뜨리지 말고 제발...." 가토는 몇번이고 자신의 손목에 상처를 내었고 다하의 입은 물론 얼굴 그리고 목덜미가 피에 젖도록 상처내는 걸 멈추지 않았다. "그만하십시요." 언제 나타났는 지 탁제균이 다가와 상처를 내려는 가토의 손을 잡았다. "비켜라." 가토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탁제균의 손을 밀쳐냈으나 탁제균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만하셔도 됩니다. 호흡이 돌아온 걸 느끼지 못하시겠습니까?" 그제서야 가토가 탁제균을 밀어내려하던걸 멈추고 다하를 제대로 쳐다보았다. 희미하지만 다하의 가슴이 들썩이고 있었다. 그모습이 눈에 들어와서야 가토는 심한 현기증을 느꼈고 긴장이 풀려 비틀거리자 급히 탁제균이 그런 가토를 부축했다. "시나이라에게 무슨일이 있었는가?" "방금 들어온 보고에 의하면 천제혜림아를 죽이고 곧 행방불명되었답니다.지금 천궁은 천제혜림아의 영면으로 큰 혼란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금방이라도 천궁이 무너지지않을까 난리법썩을 피우고 있지요." "좋지 않은 시기에 일을 저질렀군. 자네는 곧 가서 천궁의 문지기를 없애고 시나이라가 천궁에 찾아온 일을 숨기도록 조취하게.그리고 사람들에게 선천제 율파가 살아있으며 후궁에서 사라졌다는 사실을 흘려 좀 진정시켜보게. 지금 상황이 너무 급변하고 있어 통제가 안되는 군. 모든 것을 정리하고 계획할 필요성이 있겠어. 서둘게." "네." "그리고 시나이라의 행방을 찾아. 다하의 상태로 보아 큰 위험에 처했을 수가 있으니 찾아서 응급처지를 하고 기여코 살려내서 영원히 죽지못하게 생명수에라도 봉인해버려." "녜 알겠습니다." "월궁주나 화룡궁주가 알기전에 .... " 탁제균이 물러간후 가토는 여기저기 자신의 피를 뒤집어 쓰고 있는 다하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희미하기만 호흡이 너무나 안타까워서 마음이 저려오고 있었다. 소유주는 어찌하여 천인오쇠에 들면 선천제들이 죽을 날만 기다린다는 후궁에 있어야 할 율파가 멀쩡하게 그것도 건강한 모습으로 일천궁에 있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어 넋을 잃고 그를 쳐다보았다. 무엇보다도 소유주를 당황하게 만드는 것은 이제까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율파의 차가운 시선이였다.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하고 사랑스러워 견딜수가 없다는 듯이 미소짓던 그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수가 없었다. 금방이라도 깨어질 것처럼 조심스럽게 애지중지하며 어쩔줄 몰라하던 그 따뜻한 시선은 흔적조차 없었다. "어떻게...." 어떻게 기생벌레의 영향에서 벗어났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놀라고 당황하고 있는 소유주를 보는 율파의 시선은 차갑기만 했다. "덕분에..." 율파의 입이 열리고 그의 입가에 미소가 어리자 소유주는 알수 없는 한기를 느꼈다. 그는 지금 이때까지 소유주가 알고 있는 율파가 아닌 듯한 느낌이였다. "덕분에 기억해서는 안되는 것까지 기억해내버렸지." 소유주는 떨고 있었다. 그의 미소에 숨이 막혀오고 있었다. 아무리 그가 자신을 사랑해주었던 기억을 떠올려보아도 그가 무서워서 견딜수가 없었다. 자신을 위협하는 내색을 전혀 하고 있지도 않은 데 소유주는 그에게서 살기를 느끼고 있었다. 심약하고 우유부단한 것으로 유명한 율파가 아니였던가. 그런 그에게서 공포를 느끼는 것을 이해할수가 없었지만 소유주는 떨고 있었다. "천인오쇠증상에서 어떻게 벗어...크아아아악..허억...허..쿨럭..." 핏물을 토해낸 소유주가 믿을 수가 없다는 시선으로 자신의 심장을 파고든 율파의 손과 방금 살인을 한 사람이라고 도저히 볼수 없을 정도로 담담한 율파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자신의 심장을 움켜쥐는 것을 생생히 느끼며 경악에 차서 율파를 쳐다보았다. "기생벌레에 의해 모든 이성과 감정이 지배되자 핏속에 새겨진 기억들이 비어버린 그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되살아나버렸지.스스로 봉인해버린 기억마저 동시에 되살아나버려서 감사를 해야하는건가? 처음에는 이리 쉽게 죽여줄 생각은 없었지만 선의는 아니였지만 그래도 영원히 과거속에 묻힐뻔한 기억을 되살려준 댓가로 단 한번에 보내주는 걸 감사히 여기라구. 과거의 나라면 어림도 없는 일이였을 테니까." 율파는 점점 생기를 잃어가는 소유주의 눈을 보며 즐겁다는 듯이 웃었다. 급격하게 뛰던 심장이 터지며 손끝에 그 따뜻한 느낌과 비릿한 혈향이 그대로 느껴졌다. 소유주의 몸이 점점 차가워지자 아쉬운 듯 그 몸을 던져버리고 붉게 물들어 있는 자신의 손을 혀로 핧았다. 하지만 자신이 기억하는 피맛이 아니라 곧 눈썹을 찌푸리는 율파였다. 마지막 순간에 역류해버린 힘에 비월은 견디지 못하고 마지막 호흡을 놓아버렸다. 막연하게나마 이대로 호흡을 놓는다면 천인계는 어떻게 될 것인가를 염려했었다. 그리고 파라의 웃는 얼굴이 떠올랐다. 하지만 너무 힘이 들어서 더이상 버티기가 쉽지않았다. 어떻게든 살아야 겠다는 생각보다 이제는 쉬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다. 암흑처럼 어두어졌던 시야가 흐릿하게 밝아지면서 곧 선명하게 되돌아오자 더이상 어쩔수 없음을 알고 모든것을 포기했다. 역류한 힘이 되돌아오고 있었지만 이미 한번 몸을 떠났던 그 기운에는 생기가 없었다. 흔적마저 사라져버리는 영원결계주문의 역류는 온전한 몸을 유지하려는 죽음의 서곡이었다. 꿈인지 생시인지 분명하지는 않았지만 비월이 마지막에 본 사람은 파라도 훈바도 아닌 선천제 율파였다. 아니 그는 선천제율파이면서도 아닌 그런 자의 모습이였다. 어두웠다. 하지만 두렵다는 생각보다는 포근하고 따뜻하다는 느낌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마음이 따뜻해지고 너무나 편안해져서 영원히 머물러 있고 싶은 그런 느낌이였다. 상처받고 가슴아프던 과거가 꿈인양 오래된 추억처럼 희미하고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모든 것이 다른 사람의 한순간의 꿈을 훔쳐본 것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한편의 슬프고 애절한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이제는 모든 이야기가 끝나서 만족스런 그런 느낌이였다.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다. 하늘을 날고 있는 듯한 가벼움도. 자신을 감싸고 있지만 답답하지 않은 포근함도. 그리고 주변과 동화되어 모든것이 친숙하게 느껴지는 일체감도. 그런데 언제부턴가 희미하게 자신의 신경을 자극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고요하게 주위와 동화되어 뛰는 걸 멈추었던 심장이 그 소리에 반응하여 시나브로 뛰기 시작했다. 그 신경을 자극하는 소리가 커질수록 자신의 심장소리도 그소리에 반응하여 커져갔다. 일체감이 깨어지는 것이 싫어 외면하면 할수록 심장은 예민하게 반응하였다. 너무 커지고 너무 예민해져서 심장의 고동이 고통스러워질 무렵. 무언가 자신의 감각을 깨우며 다가와 자신을 위로위로 끌어올리고 있었다. 자신의 얼굴과 몸을 감싸고 있었던 것이 자신의 체온과 비슷한 물이였음을 그제서야 깨달았다. 자신이 포근하다고 생각했던 곳이 물속이였음을 그제서야 알 수 있었다. 다시 뛰기 시작한 심장이 물이 아닌 공기를 원하자 심장이 통증을 일으켜 수중에 잠겨있던 자신의 의식과 감각을 깨운 것도 깨달았다. 허억!!!!! 처음 마시는 공기가 폐를 찌르듯이 자극하였다. 피맛이 날 정도로 목구멍이 시리게 느껴질때마다 부드럽고 촉촉한 것이 자신의 입술에 닿았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하였고 금방이라도 터질것만 같던 목울대의 통증이 차츰 완화되었다. 무섭도록 뛰며 공기를 한도껏 흡수하던 심장도 차츰 잠잠해졌다. 다하가 의식을 차린 후 처음으로 본 자는 탁제균이였다. 가토도 무서웠지만 다하는 탁제균이 더 무서웠다. 감정이라고는 전혀 내비치지않는 무기질의 눈동자와 자신의 내면을 꿰뚫을 듯이 쳐다보고 있는 시선에 온몸이 떨리고 숨이 막혀와 감정이 폭발하여 울음이 텨져나왔다. 흐윽흐윽... 억눌린듯한 소리로 눈물을 뚝뚝 흘려대며 울어대는 다하의 모습에 탁제균이 눈썹을 찌푸렸다. 다하에게 생기를 나눠준 후 휴식에 들어간 가토가 언제 깨어나 돌아올지 모를 이상황에서 자신앞에서 다하가 울고 있는 모습이라도 그가 본다면 자신은 죽은 목숨이였다. "그만 그치지 그래. 언제까지 울 참이지?" 탁제균의 말에 움찔 놀라더니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서 그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콧물도 나오고 있었다. 훌쩍훌쩍하는 소리에 탁제균의 이마에 내천(川)자가 그려졌다. "그만!!!!" 탁제균의 고함소리에 다하가 눈을 커다랗게 뜨고 울음을 뚝 멈췄으나 그와 동시에 숨도 멈췄는 지 숨을 쉬지못해 얼굴이 시뻘개지고 있었다. 탁제균의 눈치를 보며 숨을 참느라 부들부들 떠는 모습에 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휘유우우..차라리 울어버려.." 그제서야 다하가 급히 숨을 들이쉬며 크윽크흑..울어댔다. 탁제균은 기가막힌 지 한참동안 정신없이 울어대는 다하를 쳐다보았다. 다하는 자신이 왜 울기 시작했는 지는 까맣게 잊어버린 듯 우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는 다하의 모습에 또 한번 한숨을 내쉬는 탁제균이였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무언가를 찾는 듯한 모습에 탁제균은 다하가 가토를 찾는거라고 짐작했지만 다하는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을 납득할 수가 없어 당황하고 있었다. 그 어둡고 이상한 향이나는 방도 아니고 항상 발목에 채워져있어 그 방을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던 봉인구도 사라져버린 이상황이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알수가 없어 두려워하고 있었다. 자신이 의식을 잃은 동안 무슨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 수가 없어 답답해 미칠지경이였다. 탁제균은 자신이 말을 할 기미만 보여도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설 정도로 두려워하는 다하의 모습에 단순히 가토가 옆에 없어서보이는 반응이라고 가볍게 생각했다. 그로서는 다하가 가사상태의 이전의 기억은 물론 오래전 핏속에 각인된 태어나기 전의 기억까지 되찾았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월궁에 비월이 없음을 확인한 두사람은 서둘러 화룡궁으로 향했다. 천붕이 내려앉자마자 훈바는 갑자기 의식을 잃어버리는 파라를 급히 붙들었다. 얼굴에 핏기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입술마저 하얗게 변해서 얼려놓은 시체같았다. 몸을 흔들어 보았지만 기절을 한건지 머리가 덜렁거릴 뿐 허수아비마냥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훈바는 귀찮은 생각이 없지않아 들었지만 어깨에 보릿자루마냥 들쳐메고 내전으로 걸어가고 있으려니 차람과 전사들이 달려나오고 있었다. "어찌된 일입니까? 파라님은 왜 이러지요? 게다가 반려의 식에는 왜 나타나지 않으신겁니까? 궁주들이 화를 내고 돌아가버렸습니다. 도데체가 정상적인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무슨일 생겼으면 생겼다고 전해서 기다리게 하지 말아야지요. 저희뿐만아니라 기다리는 타천의 궁주들이 얼마나 황당하게 생각하셨겠습니까? ... 저 그게 .. 그러니까.. 제말은 ... 훈바님과 파라님이 오시지 ...않아서 ..걱정..." 한참을 열나게 나무라던 차람은 점점 험악하게 굳어져가는 훈바의 얼굴을 보더니 말끝을 흐리며 꼬리를 감추었다. "소유주새끼 이리 잡아와." 훈바가 파라를 다른 자들에게 던져주고 어깨를 풀면서 파라를 받아든 자들를 뺀 나머지 전사들에게 말했다. 그런데 다른 때 같으면 인내심없는 훈바의 성질을 건드리지 않기위해 재빨리 달려갔을 전사들이 머뭇거리며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자 훈바가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못들었어. 그새끼 잡아오라고 했잖아.!!!!" "저...그게...." "그 새끼 어딨어?" 전사들이 힐끔힐끔 훈바의 눈치를 보며 뒷걸음질 쳤다. 그나마 파라를 부축한 전사들은 안도의 숨을 내쉴 틈도 없이 파라를 부축하고 재빨리 내빼었고 나머지 전사들은 그런 전사들을 부러운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전사들의 예감대로 소유주가 사라진 것을 알게된 훈바는 길길이 날뛰며 소유주가 도망치도록 내버려뒀다고 전사들을 잡아족치기 시작했다. 사실 그들로서는 억울하기 그지 없었다. 반려의식이 코앞에 닥친 소유주가 사라질거라고 누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말이다. 게다가 그가 사라질 이유는 더더욱 없었고. 하지만 차마 그 억울함을 훈바에게 호소할 수가 없었다. 한번 눈이 뒤집힌 훈바에게 대드는 것은 바로 골로가는 지름길임을 그동안 맞아가면서 터득했던 것이다. 결국 모두가 설설기면서 바닥을 뒹굴어서야 훈바가 숨을 몰아쉬며 무차별적인 폭력을 멈추었다. 전사들이나 차람이나 요령껏 되오록이면 덜 치명적이고 덜 고통스럽게 견디는 밤법을 체득한 지라 한참을 날뛰던 훈바가 지칠무렵까지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도데체 비월은 어디로 사라져버린 것일까. 아직까지 천궁에서 범인이 자주와 비월임을 확신하지 못하는 사실로 보아 잡히지는 않은 것 같은데 천궁에도 없고 월궁으로 돌아오지 않았으며 더더구나 화룡궁으로 찾아오지도 않았으니 하늘로 올라갔는 지 땅으로 꺼졌는 지 알수가 없는 상황이였다. 훈바는 끝끝내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는 비월의 행동에 이를 악물었다. "빌어먹을... 어디 실컷 도망쳐보아라. 이 모과(천수천인전의 모태가 되는 별입니다.)를 전부 뒤져서라도 반드시 찾아내고 말테니..." 훈바는 버럭 소리를 지른 후 파라가 요양하고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의원들의 말로는 빈사상태라고 한다. 원인은 알수 없으나 피가 고갈된 상태인데 죽지않은 것이 신기할 따름이라나.. 훈바 역시 기생벌레에 대해서는 잘알지 못했다. 다만 기생벌레의 사용은 금지된 주술로 다른 사람을 허수아비처럼 세뇌를 시켜 이용할 수 있는 효과를 가진 방법으로 그 부작용이 심상치않다는 이야기는 대충 알고 있었다. 원래가 생피를 먹고 사는 벌레인지라 당한자는 갈수록 피가 고갈되어 결국에는 생기를 잃어버려 나무처럼 딱딱하게 굳어간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자의든 타의든 자신의 몸을 유지하기 위해 다른자의 생피를 빨게되는 흡혈욕구에 시달리게 되다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확실한 건 없었다. 하지만 좀처럼 음식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창백하게 질려서 흡혈이라도 해야 혈색이 돌아올 듯한 모습의 파라를 보니 그것이 그저 떠도는 이야기만은 아닌 것같다고 생각하는 훈바였다. 그리고 혹시나하는 심정으로 죄수 한명을 끌고오게 하여 상처를 낸후 파라앞에 데려다 놓았으나 파라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차람은 생각없이 저지르는 훈바의 행동에 고개를 저었을 뿐이였다. "기억이 돌아왔군." 자신을 보자마자 구석으로 도망쳐버리는 다하를 보며 착잡한 심정으로 가토가 입을 열었다. 그동안 자신에게 의지하고 모든 것을 맡기던 다하의 모습은 흔적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것이 일견 슬프기도 하고 안타갑기도 했다. 그런데 다하의 변한 모습에 조금씩 적응을 해가고 있을 무렵 가토는 이상한 점을 발견하였다. 그동안 자신에게 유린당하면서도 한번도 두려움을 나타낸적이 없던 다하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다하?" 기억을 잃기 전에도 증오와 분노를 가장한 무시를. 기억을 잃은 후에는 신뢰와 의지를 나타내던 시선을 보내왔지만 한번도 자신을 무서워하거나 두려워하며 숨도 몰 쉴 정도로 괴로워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 다하는 자신의 기척이나 숨소리하나에도 움찔 놀라고 떨면서 어쩔줄 몰라하고 있었다. 마치 천년전 그때처럼... "율연!!!!!!!" 혹시나 해서 불러본 이름에 다하가 석상처럼 굳어버리는 모습에 저절로 신음을 터트리는 가토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진단 말인가. 다하를 발견하고 나서 가라앉았던 가슴의 통증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가해자인 자신조차도 고통스러울 지경인데 그 당사자는 오죽하겠는가. 환생한 다하를 보고 가토가 가장 다행스럽게 생각한 것은 다시 태어나 전생의 기억이 없다는 것이였는데...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전생의 기억을 완전히 지워버리지 못한 것일까.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환생한 영혼이 그 기억을 각인하고 있었을까. 그시절의 피를 가지고 있는 자신의 피가 그의 전생의 기억을 되돌린 건 아닐까? 수많은 생각들과 염려들이 머리속과 가슴속에서 우후죽순처럼 자라나고 있었다. 성급한 마음으로 억지로 취하기는 하였지만 과거를 되풀이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자신의 감정을 눈치채지 못하고 자신이 그를 죽이게 만들었지만 그후에 찾아온 절망과 후회와 자책으로 미쳐가던 시절은 두번다시 되풀이할 생각은 없었다. 쉽게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에 화가 나 함부로 하였지만 한번도 직접적인 폭력은 가한 적이 없었다. 소중하고 소중하게 다뤄서 언젠가는 자신을 받아들여줄거라는 믿음을 저버린 적이 없었는데... 과거의 죄가 사라지지 않고 되살아나 가토의 심장을 조여오고 있었다. 자주는 월광욕실에 홀연히 나타난 율파의 모습에 너무 놀라 들고 있던 찻잔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는 데 율파는 육체가 없는 사람처럼 공기중에 그 모습을 갑자기 드러냈던 것이다. 율파가 놀라는 자주의 모습에 미소를 지었다. 냉정하고 차분한 그를 왠만한 일로는 동요시킬 수 없다고 알려져있었는데 자주는 보는 사람이 뚜렷이 인식할 정도로 놀라고 있었다. 자주는 율파의 미소에 자신이 놀랐다는 사실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여전히 차를 좋아하는 구려." 말을 하는 율파가 어쩐지 너무 낯설게 느껴지는 자주였다. 분명 자신이 알고 있는 율파가 분명한데도 자주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고 있었다. 이성적으로는 그가 율파임을 확신하면서도 감정적으로 왠지 그는 모르는 자라고 느끼고 있었다. 그 유약했던 율파가 자신을 보고 미소 짓다니... "후궁에서 사라지셨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천인오쇠에 들었다는 소문이 틀렸던 겁입니까?" "역시 월궁주로군. 그다지 많이 놀라지도 않으니..... 다른 궁주라면 어떠했을까? 기절하지 않으면 다행이였을까? " 자주는 그가 율파가 보이는 것과는 달리 율파가 아님을 확신했다. 빈정거리는 율파라니....... "당신은 누구입니까?" 자주가 굳어서 물어보는 말에 율파가 빙그레 웃었다. 매우 만족스러운 듯이. "내가 누구인 것같오? 당신이 보기에 내가 율파가 아닌 것 같은 모양이구려." "......" "속아주면 좋으련만. 나는 율파이면서도 다른 자라오. 핏속에 봉인되었던 기억이 살아났으니 육체는 율파이지만 몸은 다른 자라고 할수 있겠지..... 당신도 경악을 하는 구려 ... 내가 누구인지 다른 사람이라면 모르지만 당신은 잘 알것이라 믿오." 자주가 사시나무 떨듯 떨기 시작했다. 다른 자들이 보았다면 떨고 있는 자주의 모습을 보고 경악하겠지만 자주는 자신이 떨고 있는 것도 식은 땀을 흘리고 있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나를 본 적이 있는 사람은 당신이 유일할 것이오. "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자주는 멍하니 넋을 잃고 율파를 쳐다보고 있었다.어떻게 이런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나를 안 듯하니 내가 무슨 이유로 그대를 찾아왔는 지도 짐작 하겠구려." "!!!!!!" 자주는 너무 두려워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자주가 자신의 심장이 있는 부분을 보호하려는 듯 손을 들어올리자 율파가 역시라는 표정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자주는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에 또다시 그의 존재를 보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해 본적도 의심해 본적도 없었다. 어떻게 봉인을 시킨 자이던가. 이제 그를 기억하는 자들도 모두 사라진 지금 누가 있어 그를 막을 것이며 다시 봉인시킬수 있을 것인가. "진정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옵니까?" "월검과 비월..." 파라는 자신의 손에 느껴지는 생기에 뼈가 저리는 허기를 느꼈다. 두근거리는 심장의 생기를 쥐어짜 그 생기를 마시자 허기와 타들어갈것만 같았던 갈증이 가라앉았다. 지금 그에게는 자신에게 생기를 빼앗겨 나무토막처럼 굳어버리는 자의 공포어린 눈빛은 보이지도 않았다. 오직 온 몸을 태울듯이 달아오르게 만드는 갈증을 해소하고 싶은 욕망만 가득했다. 끝내는 자신에게 모든 생기를 빼앗겨 그 육체마저 공기중으로 잘게 부서진 곡식가루마냥 산산히 흩어져버린 자를 느끼고 나서야 파라는 포만감을 느꼈다. 그리고 방금전 자신으로 인해 벌어진 일을 전혀 모른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잠에 빠졌다. 다음날 깨어난 파라는 예전처럼 생기에 넘쳐나고 있었다. 걱정을 하던 주위사람들은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시들했던 그가 하루만에 생생해지자 놀라면서도 기뻐하였다. 하지만 차람의 표정만은 그리 밝지 않았다. 그는 엊저녘 보초를 섰던 호휘 한명의 행방불명과 파라의 회복이 전혀 관계없는 일이 아님을 짐작했던 것이다. 훈바는 그저 파라의 회복에 소유주를 놓친것에 대한 분노를 조금 삭혔을 뿐 갑작스런 파라의 회복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파라의 회복과 더불어 밝혀진 진실에 가장 분노한 사람은 수야였다. 파라에게 달려들어 칠칠치 못하게 그런 자에게 홀렸냐고 마구 주먹질을 해대는 걸 호하와 해조가 간신히 말렸다. 하지만 그동안 쌓인 것이 많았는지 수야는 좀처럼 달려드는 기세를 늦추지 않고 기여코 파라의 눈두덩이에 시퍼런 멍을 만들고 나서야 씩씩거리면서 주먹직하던 걸 멈추었다. "월아는 어디있지요? 왜 월아는 데려오지 않았나요?" 그제서야 파라와 훈바는 무엇을 잊어버리고 있었는 지 기억해내었다. 하지만 대놓고 다른자들이 있는 곳에서 비월의 행적에 대해서 말할 수 없는 입장인지라 훈바는 다른 자들을 모두 내보내었다. 수야는 차마 불만스러움을 드러내지 못하고 입술을 댓발이나 내밀고 파라를 노려보면서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고 한참이나 닫힌 문에서 시선을 떼지못하던 훈바와 파라가 깊은 한숨을 내쉬고 서로를 쳐다보았다. "제 생각으로는 천제위가 비어있는데도 천궁이 흔들리지 않는 것이 아무래도 월아가 천제위에 올랐거나 그 행방불명되었다던 선천제율파가 나타났거나 둘 중에 하나인 것 같습니다. 월아가 천제위에 오른 경우 월아가 자의로 행방을 감춘거라면 스스로 나타날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고 선천제 율파가 그 현장에 나타난 경우 그가 월아를 데려간 것이라면 일은 더욱 복잡해지는 것이겠지요. 아무리 복수라지만 월아는 천제를 죽인 죄인이고 선천제 율파가 그걸 약점으로 월아를 구속 하려한다면 저희는 손을 놓고 있는 수밖에 없습니다. " 두번째의 경우는 훈바도 파라도 가장 원하지 않는 경우였다. 자주에게서 들은 바로 선천제율파는 비월을 잊지못해 그와 비슷하게 생긴 소유주에게 집착했을 정도였다지 않은가. 그런 그의 손에 비월이 들어간 경우 비월이 훈바의 반려이기는 하지만 돌려보내지 않고 어디론가 숨겨버릴 것이 거의 확실해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건 가장 가능성이 없지만 어쩌면 가장 두려운 경우입니다. 소유주를 이용하여 저를 유혹하게 한 자가 월아을 데려간 경우 월아를 두번다시 보지 못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가 월아를 살려두고 위험을 무릅쓸 이유가 없으니까요." 그말을 하는 파라나 훈바나 다른 어떤 경우보다도 마지막 경우만 아니길 빌고 있었다. 비월은 손을 뻗어 둥둥 떠다니고 있는 물고기를 만져보았다. 물고기는 퍼득거리며 비월의 손을 피해 다른 곳으로 헤엄쳐갔다. 손끝에 닿는 감촉으로 공중에 떠다니는 물고기들이 눈의 착시가 아님을 확인하고 나자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게 도데체 어떻게 된 노릇일까. 분명히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은 물속이 아님이 분명하였고 그렇게 때문에 공중에 물고기가 떠다니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공중에는 수많은 종류들의 물고기들이 유유히 헤엄쳐다니고 있었다. 비월은 끙끙거리며 원인을 알아내려 머리를 굴려보았지만 머리속만 복잡해졌을 뿐이다. 자신이 죽어서 물고기가 되어버린 것일까? 하지만 처음으로 일어나서 제일 먼저 본것이 예전과 별다를바없는 팔다리를 가진 자신의 육체였지않은가. "이곳에 계셨습니까?" 무엇보다도 비월을 당황시키는 것은 바로 이자였다. 자신처럼 길고 검은 머리를 가진 그는 마치 비월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는것처럼 구는데 비월로서는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그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오죽하면 자신이 기억상실에 걸린적이 있는건가 고심을 할 정도였다. 도데체 누구냐고 선뜻 물어보지 못하는 건 그가 자신의 버릇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점 때문이였다. 하여간 비월은 답답해 미칠지경이였다. 물고기가 헤엄쳐다니는 이상한 곳에 자신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생전처음 보는 자에 분명 처음 와 보는 곳이 분명한데도 너무나 친숙한 느낌의 정원. 자신이 전생에 물고기였을까싶었다. "너무 고심하지 마십시오 . 아직은 완전히 회복하시지 못하였으니 건강해지는 것이 최우선입니다. 그러니 너무 서두르지 마시고 차근차근 기억해내시면 됩니다. " 비월은 고민하고 있는 자신을 위로하는 듯한 그의 말에도 마음이 무겁기만 했다. 잃어버린 기억도 없는 것같은데 뭐를 기억해내라는 것일까. 차라리 그는 누구이며 그가 알고 있는 자신은 또 누구인지 속시원하게 묻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다. 비월의 궁금증이 담긴 시선에 그는 아직 이르다며 고개만 저어 비월의 복장을 터지게 만들고 있었다. 11.천수천인전. 모든 천인족의 왕이라 불리는 자가 있었다. 모두 그를 태천제라 불렀다. 강하고 잔인하며 지혜롭던 그는 모든 종족의 아버지이며 스승이였다. 모든 사람들이 그의 시선을 똑바로 쳐다보는 것이 불경하다고 여길정도로 그는 공경받고 경애받는 자였다. 또한 용서없는 그의 손속에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했다. 오직 그의 반려이자 후계자의 어미인 율희와 그의 형제이자 소천제인 율허만이 그를 만질수도 있었고 쳐다보고 이야기할수도 있었다. 그때당시만 해도 천인계라는 말자체가 없었다. 지계족이며 수인족이며 모두 십이지천에 어우러져 살아가고 있었다. 오직 천인족만이 살고 있는 곳은 태천제가 살고 있는 태천궁뿐이였다. 태천제가 가장 신임하는 자는 지계족의 왕인 홍해였고 가장 의지한 자는 소천제 율허였다. 태천제가 율희를 맞이하여 반려의 식을 치룬 후 율경이 태어나고 얼마후에 율허는 소천제위를 내놓고 칩거에 들어가버렸다. 태천제가 변하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인지는 확실하게 알수가 없었지만 사람들은 아마도 율허가 소천제위를 내놓고 칩거에 들어간 후부터가 아닌가 짐작했다. 율경이 비어버린 소천제위에 오른 후부터 태천제는 속을 알수 없는 짓을 저지르기 시작했다. 어느날은 태천궁에 잘못날아든 익수족의 어린아이를 살아있는 체고 자신의 애완동물인 교룡의 먹이로 던져주고 비명을 지르며 죽어가는 아이를 지켜보는가 하면 이유없이 십이천궁의 작은 위성들을 파괴하기도 했다. 그리고 어느날은 태천궁의 한쪽에 만화궁이라는 궁전을 세우더니 세상의 모든 꽃과 향기로운 풀들을 심으라고 명령하기도 했다. 율희는 그 아름다운 궁전을 자신에게 달라고 졸랐으나 태천제는 그 청을 거절했을 뿐아니라 그 어떤 누구도 출입해서는 안된다는 명령을 내렸다. 화가난 율희가 왜 자신도 안되냐며 항의를 하자 태천제는 율희가 얼마전에 낳은 두번째 알을 교룡에게 던져버렸다. 알이 깨어져 내용물이 쏟아지자 교룡이 그 내용물을 먹어버렸고 율희는 공포에 질려서 더이상 만화궁을 욕심내지도 태천제에게 대들지도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태천제는 감당할 수 없는 정도로 난폭해져갔고 친우인 홍해도 더이상 그를 간섭할 수가 없을 정도로 그는 독재자가 되어갔다. 그무렵 율허가 나타났다. 칩거에 들어 있던 율허를 찾아온 사람은 홍해였다. 자신은 더이상 그를 보조할 수 없으니 당분간이라도 돌아와 주지 않으면 죽어버리겠다면 율허를 협박한 것이다. 그리고 그동안 태천제가 벌린 일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낱낱이 고해바쳤다. 그는 태천궁에 들어서자마자 태천제를 찾더니 심통맞은 표정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그에게 다가가 사정없이 그의 머리를 쥐어박아버렸다. 율허가 나타났을 때부터 잔뜩 긴장한 채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던 다른 자들은 너무 경악하여 숨도 쉬지 못할 지경이였다. "말썽부리지 말랬지? 도데체가 뭐가 불만인데? 앙? 내가 좀 쉬겠다는 데 네가 한짓에 대한 소문이 내게까지 오도록 만들어? 죽고 싶냐? 게다가 율경의 동생이 될 뻔한 알을 왜 깨? 다른 건 몰라도 그건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당장 심처로 가서 반성하지 못해?" 사람들은 꽁꽁 얼어서 당장이라도 심장이 터지는 것 아닌가 싶은지 가슴을 움켜쥐고 태천제의 반응을 기다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태천제가 율허를 죽일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다만 그 정도가 얼마나 잔인할 것인가에 대한 걱정뿐이였다. "당장 가지 못해? 부를 때까지 꼼짝말고 기다리면서 반성해." 묵묵히 율허를 노려보던 태천제가 울상을 지으면서 심처로 향했을 때는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너무 놀라 얼어붙어버리거나 실신을 할 정도였다. 그리고 몇시간이 지나도록 움직이지 못하고 그자리에 붙박혀 있었다. 사람들은 소천제였던 율허의 말에 태천제가 꼼짝도 못하자 결코 외모나 인상으로 사람을 평가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통제불능의 태천제를 통제가능하게 만든 율허는 모든 사람들에게 구세주같은 사람이였던 반면 율희에게 있어 율허는 증오의 대상이였다. 태천제의 반려로 간택되어 모든 사람들의 부러움의 대상이였던 그는 태천궁에 입궁한 후 자신은 그저 허수아비일 뿐이라는 걸 오래지 않아 깨달았다. 당연히 태천제 다음으로 우러름을 받아야했지만 자신은 언제나 소천제인 율허의 다음이였다. 사람들도 그보다 율허가 우선이였고 율허를 더 따랐다. 사람들뿐아니라 태천제 역시 반려인 자신보다 태천제의 형이면서도 약한 체력으로 천제위에 오르지 못하였지만 자신이 태천제가 되자마자 자신의 자식이 올라야할 후계위를 율허에게 줄 정도로 율허를 소중히 여겼다. 자신을 쳐다볼때의 시선과 율허를 쳐다볼 때의 그의 시선은 천지차이였다.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은 모든 사람중에 한명을 쳐다보는 시선이였지만 율허를 쳐다보는 태천제의 시선은 오직 한사람만을 쳐다보는 그런 시선이였다. 그는 자신의 반려였지만 율허의 사람인것만 같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태천제는 반려의 식을 치를 생각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십이궁주들이 율허에게 간청하였고 율허는 그 간청을 받아들여 태천제에게 반려를 맞이할 것을 주청하였다고 한다. 다른 자들의 말이였다면 듣지 않았을 태천제였지만 율허의 말은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어 수많은 후보중에 한명이였던 율희를 맞이하기에 이르렀고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율허에게 간청을 드렸던 십이궁주들은 그 후 차츰 병이 걸리거나 타살되거나 독살되기도 하여 세대교체에 들어갔다고 한다. 반려의 식이 끝난후 태천제는 잔뜩 취해서 나타나 율희를 겁탈하듯 안았고 율희는 그 날밤의 관계로 알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율경이 태어난 후 명실공히 율희는 태천제의 반려의 자리를 굳혔다. 하지만 그렇게 태어난 율경은 태천제의 관심밖이었다. 그래서 율희는 율허가 미웠다. 아니 증오스러웠다. 그때문에 태천제가 율경과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것만 같아 그의 모든 것이 못마땅하였다. 율허가 율경을 귀여워하는 것도 진저리치도록 싫었고 자신을 배려해주는 것도 가증스럽기만 했다. 그가 율경을 안아줄려고 할때마다 달려들어 율경을 빼앗아들었고 그가 보내는 보석이나 음식같은 것은 버리거나 다른 자에게 주어버렸다. 이런 저런 배려도 모두 거부하였다. 어느날은 여유로와 보이는 그가 너무 얄미워 당신이 진정 자신과 율경을 위한다면 태천궁에서 사라져달라고 했다. 그리고 왜 당신이 율경이 물려받아야할 소천제위에 있는거냐고 따져들었다. 격분하여 비난을 퍼붓는 율희를 쳐다보던 율허가 어색하게 웃더니 자신이 떠나주면 행복하겠냐고 물었고 율희는 생색내며 가증 떨지말고 사라질거라면 소리없이 사라지라고 소리쳤다. 율희로서는 그동안 쌓인 원한과 울분을 율허에게 터트렸지만 진짜로 그가 사라져줄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게다가 소천제위를 율경에게 주는 것이 당연하다는 서신마저 남겨두고 ...... 율희로서는 세상을 모두 얻은 것처럼 기뻤다. 율경이 소천제위에 오른 후 이제 율희는 명실공히 태천궁의 두번째로 높은 자리에 올라선것을 실감했다. 율허를 우선시하던 다른 자들도 자신의 말에 고분고분 따랐고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그 만족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어느날인가부터 태천제의 기행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자신을 쳐다보는 눈에는 냉기가 흘렀고 사람들의 기가 막히게 하는 기행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질렀다. 태천제의 기행은 멎을 줄을 몰랐고 사람들의 우려의 소리가 높아갈수록 율희는 두려워졌다. 그래서 방황하는 듯한 태천제를 잡기위해 취해서 잠든 그를 유혹하여 두번째 알을 가졌다. 천번째 아이는 율허가 있어 관심을 받지 못했지만 그가 사라져버린 지금은 두번째아이가 그를 바로 잡아주리라 믿었다. 그리고 두번째알이 태어난 후 얼마지나지 않아 완공된 만화궁의 주인은 바로 자신이라고 의심하지 않았다. 세상 가장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과 나무와 향초가 가득한 만화궁! 그아름다움에 만족한 율희는 만화궁이 완공된 날 그 만화궁을 자신에게 달라고 말했다. 그런데 태천제가 이 궁전은 당신의 것이 아니라고 처음부터 임자는 따로 있는 곳이라고 하자 질투에 눈이 먼 율희는 해서는 안될말을 하고 말았다. 율허는 당신의 반려가 아니라고, 당신이 아무리 발버둥쳐보아야 당신의 반려는 자신이라고.... 그저 화가나서 평소에 그런게 아닌건가하던 생각을 내뱉었지만 그말이 정말 그의 아픈곳을 찌르는 말이였다는 것은 모르고 있었다. 태천제는 낮은 목소리로 율희에게 만화궁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말라고 명령했고 율희는 아무리 그래봐야 자신의 아이가 천제위에 오르면 만화궁같은 건 없애버리겠다고 말했다. 율희는 그 때 본 태천제의 표정을 죽을때까지 잊지못했다. 그 어둡고 차가우며 증오에 찬 시선이라니...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다고 그렇게 노려본단 말인가. 그 시선으로 자신을 쳐다보던 태천제가 빙그레 미소짓더니 율희가 낳아놓은 두번째알을 가져오게 하더니 어리둥절해하는 율희의 앞에서 그 알을 교룡의 앞에 던져버렸다. 그리고 경악으로 얼어붙어 있는 율희에게 나즈막하게 속삭였다. 만일 만화궁에 손가락하나라도 까딱하면 그 알처럼 소천제위에 오른 율경을 교룡의 먹이로 던져버리겠다고..... 율희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현실에 절규하였다. 어떻게 자신의 핏줄이 될지도 모르는 알을 깨뜨릴수가 있단 말인가. 용서할 수가 없었다. 태천제이며 자신의 반려인 그도. 그의 마음을 빼앗아버리고 있는 율허도.... 돌아온 율허는 그동안 태천제가 벌려놓은 사건 사고에 기가 질려버렸다. 그중에서 가장 끔찍한 것은 율경의 동생이 될뻔한 알을 파괴한 만행이였다. 그동안 태천제의 공포에 질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던 사람들이 율허에게 몰려들어 그동안 일을 하소연하기에 바빴다. 반려인 율희로서는 통제가 안되는 태천제가 형인 율허에게 꼼짝못하는 모습을 보인 후 사람들은 율허를 태천제처럼 떠받들었다. 율희는 끓어오르는 증오를 속으로 삭히고 율허에게 살랑거리는 사람들을 노려보며 자신역시 율허가 돌아오기만을 바란 사람처럼 하소연하기에 전력을 다했다. 언젠가는 태천제와 율허를 동시에 상처입힐 궁리를 속에 감추고. 율허가 돌아온 것을 가장 기뻐한 사람은 홍해였다. 어린 시절부터 친구인 홍해는 말없이 사람들에게 시달리고 있는 율허를 보더니 미소지으며 그저 조심스럽게 율허를 끌어안는 것으로 반가움을 표시했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지쳐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율허의 상태를 발견하고 미안해하며 물러갔다. "한번만 더 말없이 사라졌단 봐라. 엉덩이에 불이 나도록 때려줄테니까." "하하하... 홍해야... 그전에 넌 율가에게 맞아죽을 걸." "하긴 그래, 너라면 사죽을 못쓰는 그가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겠지.그래 한다던 연구는 ?" "지지부진이지 뭐... " "그러길래 왜 쓸데없는 것을 연구하느냐고....... 네가 연구를 한다고 내버려둔 태천궁의 일이 얼마나 쌓인 건지 알기나 하냐? 그냥 돌아와서 업무처리나 제대로 해다오." "언젠가는 내가 없어도 일을 계속해나가야 할 테니까 미리부터 적응을 해나가야지 언제까지 내게 의지할 건데? 그리고 이제 나는 소천제도 아니라고.." "네가 다시 소천제하면 안될까? " "어허.. 우리 율경이 있는데 어떻게 그런 소리를 서슴없이 하는 거냐?" "우리 율경? 그 싸가지 없고 제멋대로인 꼬마? 관둬라 그녀석이 천제위에 오르면 난 천인계를 미련없이 버릴련다. 어떻게 저 제멋대로이기는 하지만 강하고 지혜로운 태천제의 자식이 그렇게 엉망인지...." 홍해의 말에 율허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사실 그가 보기에도 율경은 썩 맘에 드는 재목감은 아니였다. 너무 편협하고 작은 일에 집착하여 앙심을 품기 일쑤이며 조금도 양보하거나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배려가 없었다. 그리고 그 성격만큼이나 잔인한 일면도 있었다. 아직은 어리다고 단정하기에 그의 천성이 제왕감은 아니였다. "차차 나아지겠지." 자조하듯 말하는 율허의 말에도 별 기대감은 없어보였다. "행여나.. 진짜 태천제의 자식이 맞는 지 의심스럽다니까." 홍해와 율허의 대화는 문앞에 서있는 율희에게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었다. 율희는 율허에게 잘보이기 위해 준비한 다기세트를 들고 문밖에 서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감히 자신의 아이인 율경을 그따위로 무시하다니... 태천궁은 율허가 사라진 후 암흑시대처럼 앞이 보이지 않는 공포에 질려 숨도 쉬지 못하던 시절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활기차고 밝아졌다. 율허는 태천제의 기행으로 흔들려버린 태천궁의 운영방식에 문제점이 있음을 깨달은 후 여러 인재들을 등용하기에 이르렀다. 또다시 태천제가 기행을 일쌈더라도 태천궁이 정상적으로 굴러갈 수 있는 최소한의 운영체계를 만들어 두자는 생각에서였다. 그 인재들 중에 단연 율허의 마음에 든 자는 탁비였다. 탁비는 자신의 소문을 듣고 찾아온 율허를 보더니 약골이라느니 전형암컷이라느니 놀리면서 시비를 걸어왔다. 한바탕 설전을 벌인후 율허가 태천궁에서 일해달라고 했더니 두번 생각도 해보지 않고 싫다고 했다. 태천제의 명령이라도 하기싫은 건 죽어도 하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승낙을 하겠느냐고 했더니 율허에게 자신의 반려가 되어달라고 했다가 홍해에게 죽도록 맞았다. 결국 반항하는 그를 홍해가 질질 끌고서 태천궁으로 돌아왔고 율허는 그에게 그의 동생인 탁제균을 평생 보호해주고 교육시켜주고 먹여살려주겠다는 조건으로 그의 승낙을 받아냈다. 탁제균은 일천궁주의 양자로 받아들여졌고 탁비는 그제서야 율허에게 성심성의를 다하겠다고 맹세했다. 태천제는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아닌 율허에게 주군의 맹세를 하는 탁비를 기꺼워하였다. 누군가 율허를 보호하고 따르겠다는 말이 그를 안도시키고 만족시켰던 것이다. 혹여 다른자들은 율허에게 주군의 맹세를 하면 역모를 꾸미는게 아닌가하고 의심을 받을 까봐 한번도 율허를 주군으로 모시겠다고 맹세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이 죽을 때까지 모셔야할자는 오직 한사람, 태천제였던 것이다. 탁비는 그런 것은 전혀 신경쓰지 않았고 더불어 율허의 연구에 강한 호기심을 드러내며 동참하기에 이르렀다. 율허는 다른 무엇보다도 자신의 연구를 무시하지 않는 탁비의 행동에 기뻐했다. 혼자서 끙끙거리며 자신의 생각이 맞는 지 틀리는 지 고민하던 때 느낀 외로움을 탁비가 덜어주었던 것이다. 율허와는 뭐든지 잘 맞는 탁비는 유독 홍해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평소에는 담담하다싶을 정도로 율허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다가도 홍해만 나타나면 끈적끈적한 애정공세를 펼쳐내어 홍해의 신경을 건드리기 일쑤였다. 율허는 그가 본심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기에 허허.. 웃고 말았지만 홍해는 자신의 오랜 친구를 독차지하고 있는 것도 모자라 빼앗으려든다고 생각했는지 탁비의 조그만한 시비에도 화르륵 타오르기 일쑤였다. 태천제 역시 처음과는 달리 유난히 탁비를 싫어하엿다. 하루의 대부분의 시간을 탁비와 보내는 율허의 행동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홍해처럼 펄쩍펄쩍 날뛰는 것은 아니였지만 자신을 볼때면 마치 얼음조각이 날아올것같다며 약한 척을 해서 율허를 웃게 만들었다. 율허로서는 태천제의 얼음같은 시선이라는 말을 전혀 믿지도 의심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홍해에게 있어 율허는 넘볼 수 없는 높은 곳의 사람이였다. 사람들은 태천제를 통제할 수 있는 그런 자로서만 율허를 대단하게 생각하지만 솔찍히 율허를 어린 시절부터 알고 있는 홍해는 율허의 대단함을 너무나 잘알고 있었다. 혼돈의 아버지로 부터 태어난 진짜 아들은 율허 바로 그였다. 나중에 태천제인 율가가 태어나기는 하였지만 첫아이는 율허였고 가장 많은 능력을 물려받은 자도 율허였다. 하지만 힘을 물려받지 못할 정도로 약한 체력으로 인해 천제위에 올라도 오래버티지 못할 것을 알고 다시 태어난 아이가 율가였다는 것은 홍해와 율가만이 알고 있는 사실이였다. 어느날 부턴가 세상에 어려운 것이 없고 무서운 것이 없어보이던 율허의 얼굴에 수심이 어리기 시작했다. 어지간한 일로는 그의 얼굴에 수심이 어리게 만들지 못한 사실을 알기에 홍해도 불안해졌다. 모든 것을 혼자 짊어지고 가려는 자처럼 그는 혼자서 감당하려는 듯 혼자서 괴로워하고 있는 게 보일 정도였다. 무슨 일이 있냐고 자신에게 의논해보라고 해도 그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을 뿐이다. 장난스럽고 자신만 보면 시비를 걸던 탁비도 율허 못지 않게 조용해지고 근심어린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두사람이 연구하던 것이 무엇이였는 지 모르지만 홍해는 그 연구로 인하여 두사람이 괴로워한다는 것을 짐작할 뿐이였다. 한동안 한숨만 내쉬던 두사람이 종종 같이 종적을 감추는 일이 잦아졌다. 홍해가 무슨일이냐고 물어도 고개만 저였고 홍해는 갈수록 사나워지는 태천제의 심기에 알수없는 불안감을 느껴야했다. 태천궁에서 비가 내렸다. 언제나 맑은 날을 유지하는 태천궁의 비는 태천제의 심기가 매우 나쁘다는 징조였다. 율허가 돌아와 밝아졌던 태천궁의 하늘이 다시 어두워지고 이제는 비까지 내리자 율희가 것보라는 듯이 율허를 비난하고 돌아다녔다. "??" 비에 젖은 율허는 금방이라도 쓰러져 울듯한 표정으로 홍해를 쳐다보았다. 홍해가 급히 손을 내밀어 율허를 안으로 끌어들이고 시종들에게 마른 천을 가져오게 명령한 후 율허의 옷을 벗겼다. 시종들이 천을 가져오자 멍하니 서있는 율허의 몸을 닦아주며 홍해는 왜 율허가 비를 흠뻑 맞으면서 울것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건지 궁금해 입이 간질거렸다. 율허의 몸이 말라갈 무렵 율허의 얼굴은 눈물로 젖어가고 있었다. 걱정하는 듯한 홍해의 기색에도 그저 소리없이 눈물만 주륵주륵 흘려대고 있었다. "울지마, 도데체 무슨일인데 그러는 거야? 왜 혼자서 괴로워하는 데? " 홍해의 재촉에 율허가 울어서 퉁퉁 부은 얼굴로 홍해를 쳐다보았다. 무언가 말을 하려는 듯 입을 벙긋거리다가도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다시 흐느껴 울기를 반복했다. "답답해 미치겠네 어서 말하지 못해? 율가 불러다줘?" 홍해의 말에 율허가 흠칫놀라면서 홍해의 옷자락을 와락 움켜쥐었다. "율허!!!!!!" "운명은 바꿀 수 없는 걸까?" "갑자기 무슨 뚱단지 같은 소리야? 내일 앞도 모르면서 운명을 바꿀수 없냐니? 미래를 보기라도 한거냐?" 홍해의 말에 율허가 흠칫 놀랐다. 마치 커다란 잘못을 해놓고 차마 말하지 못하다가 들킨 어린아이같은 반응을 보이는 율허의 모습에 홍해는 소름이 쫘악 돋는 걸 느껴야했다. "에이 설마 아니겠지? "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율허의 안색을 살피는 데 율허의 안색이 참혹하게 일그러지는 게 아닌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실감하며 홍해가 사납게 율허를 노려보았다. "너 도데체 무슨 짓을 한거야?" "흐윽흑흑... 미래를 보는 주문을 만들어 냈거든? 그래서 실험삼아 가장 큰 사건이 무엇일까 궁금하여 주문을 발동시켰더니..." "뭐...뭔데? 응? 무얼 보았길래 그러는 건데?" "으아아앙... 율가가 웃으면서 많은 사람들을 죽였어. 그리고 율희도 죽였어...허어어엉 ... 어쩌면 좋아.... 너무 많은 자들이 죽어갔어... 율가가 율희의 목을 꺽어서 죽이고 수많은 시체들위에 서있었어. 나는 너무 무서워!!!!내가 본 것이 무얼까? 진짜로 이게 앞으로 일어날 미래라면 너무 끔찍하잖아. 응? 난 어쩌면 좋지?" 왜 쓸데없는 연구를 해서 그런 것을 보느냐고 율허를 나무라고 싶은 홍해였다. 하지만 정말 율허가 본 것이 미래에 일어날 일인지는 홍해도 확신할 수 없었다. 우선 중요한 것은 너무 울어서 탈수되기 전에 우선 율허를 안정시켜야 한다는 것이였다. "바보냐? 그게 현실일리가 없잖아 . 율희는 율가의 반려야 율가가 그를 죽일 이유도 없고 왜 사람들을 죽이겠냐구.. 어차피 그의 명령이라면 끓는 물속에라도 뛰어들 사람들이잖아. 굳이 그가 죽이지 않더라도 그의 명령하나로 스스로 죽어갈텐데 말야." "너무 끔찍했어. 죽어버린 자들의 사체가 땅위를 뒤덮고 있었어, 완전히 죽어버리지 않는 자들이 살려달라고 소리치고 ... 그런데도 율가는 웃으면서 그런 그들의 목을 완전히 끊어버리는 거야. 아무도 아무도 그를 말릴수가 없었어. 어떻하면 좋지? 왜 그런 미래를 보게 된걸까?" 율허는 넋을 잃어 버린 사람처럼 중얼중얼거렸다. 그내용이 갈수록 잔인해져서 듣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는 기분에 홍해는 급히 율허를 꼭 끌어안아 더이상 중얼거리지 못하게 만들었다. "정신차려 .. 네가 본것이 진짜 미래인지 아니면 그저 환상일뿐인지 알 수 없는 거잖아. 그래 다른 거. 다른 건 본 적이 없어. 율허가 사람을 죽이는 거 말고 다른 거는..." "율가가 내가 같이 있었어. 생전처음보는 곳이였는 데 율가가 내 팔목을 잡고 소리쳤어. 내가 영원히 자신의 것이래. 그래서 나와 자신의 영혼을 묶어서 내가 태어나면 그도 태어나고 그가 태어나면 나도 태어나서 항상 같이 있도록 만들겠대." 말도 안되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한 율허의 안색과는 달리 홍해의 안색은 더이상 창백해질수 없을 정도로 창백하게 질렸다. 율허는 아직 모르고 있었지만 태천제가 율허를 쳐다보는 시선에 가득한 독점욕과 소유욕을 진작부터 홍해는 눈치채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자들이 보기에 율가의 시선은 그저 형제를 바라보는 애틋한 시선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가끔씩 드러났다가 사라지는 그시선에는 소름끼칠것만 같은 집착이 보였다. 그래서 홍해는 십이궁주들에게 그에게 반려를 정해주어야 하지 않냐고 운을 떼었고, 직접적으로 율가에게 운을 띠우면 단번에 거절할테니까 율허를 통해 전하게 만들라는 충고도 더불어 했다. 홍해의 예상대로 율가는 십이궁주를 잡아먹을 듯히 노려보면서 율허의 말을 받아들였다. 고르고 골라 가장 아름답고 가장 큰세력을 뒤배경으로 가진 율희를 반려로 간택하였다. 혹여라도 율가가 마음이 바뀌어 함부로 죽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였다. 걱정과는 달리 순순히 반려의 식을 치루고 율경이 태어났을 때에야 홍해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차례대로 죽어나가는 십이궁주들의 모습에 두려움에 떨었지만 한차례 폭풍이 지나간후 잠잠해지자 이제는 괜찮겠구나 안심하였었다. 율허가 율경에게 소천제위를 넘겨주라는 서신을 남기고 사라지지만 않았다면 어쩌면 그 일상같은 날들은 계속되었을 지도 모른다고 지금도 생각하는 홍해였다. 율허가 칩거에 든 이후 서서히 율가의 내면에 잠재되어있던 잔인성이 모습을 드러내자 홍해는 걱정이 태산같았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이대로 지나면 율가가 율허를 잊지는 못해도 포기하지 않을까해서 기다렸다. 그런데 자신의 핏줄이 될지도 모르는 두번째알을 아무런 망서림없이 파기시켜버렸을 때 역시나 해서 율허를 찾으러 가야했다. 율허의 말에 어린아이처럼 울상을 지으며 심처로 들어가는 율가의 모습에 안도하면서도 걱정되는 복작한 심정을 느끼던 홍해였다. 다행히 아직까지 율가에게 있어 율허는 가장 무섭고 영향력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수 있었다. 율허가 자신의 감정을 눈치채면 달아날까봐 겁이 나서 함부로 내색하지도 못하고 율허와 시선이 마주칠때면 어린아이처럼 굴어서 자신의 감정을 숨겼지만 율허가 시선을 돌리기 무섭게 드러내는 그 집요한 시선과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홍해는 그런 율가의 마음을 차마 율허에게 말해줄 수 없었다. 그런데 율허가 보았다던 미래에 율가가 했다는 말을 듣자 온몸을 짓누르는 절망에 무너져 내릴것만 같았다. 어쩌면 율허가 본 것은 환상이 아니라 현실일거라는 갈 알 수 있었다. "바보냐? 그게 가능하기나 하냐고. 그에게는 반려가 있어. 게다가 네가 다른 반려를 맞이한다면 아무리 태천제라고 해도 어쩔수 없는거잖아." 순간 한없이 가라앉아가던 율허가 퍼뜩 고개를 들더니 환호성을 지르며 홍해의 목을 끌어안고 방방 뛰었다. 이럴때보면 영락없이 어린애였다. "역시 홍해야... 진작 너에게 의논할 걸 그랬다. ... 역시 운명은 바꿀 수 있었어. 내게 그런 미래를 보여준것도 너무 잔인하니까 바꿔보라는 계시가 분명해." 여전히 자신이 본 것이 미래라는 건 의심하지 않는 율허였다. 그리고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고 자기 방식대로 해결하려는 모습에 홍해는 웃을 수만은 없었다. 율허가 기뻐하는 것처럼 같이 기뻐할 수도 없었다. 태천제가 율허가 반려를 맞이하도록 가만히 있지 않을 것 같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율허는 자신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굴지만 실상은 자신이 연구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같다는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는 홍해였다. 한가지만에 전념을 하는 단순하기 그지없는 율허가 답답하기만 했다. 오직 운명을 바꾸겠다는 의지하나로 저리 의욕에 불타오르다니... 설혹 율허가 반려를 맞이한다해도 쉽게 포기할 율가가 아닌것을 율허는 몰랐다. 홍해는 기뻐서 날뛰는 율허를 보면서도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것이 운명이라면 정해진 미래라면 걱정한다고 무엇이 달라질 것인가. 그걸 걱정하며 하루종일 울어서 눈이 퉁퉁 붓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에서였다. 그 뒤로 율허의 노력은 정말 가상하였다. 하지만 율허가 반려를 찾는다는 사실이 율가에게 알려진 후 반려가 없는 십이궁주는 물론이려니와 왠만한 장군이나 전사들은 율가의 은근한 협박을 받아야 했다. 직접적인 것은 아니였지만 누구나 율가의 협박을 눈치챌 수 있었다. 율허의 반려의 청을 받아들인 자는 자신을 조종하고 싶어서라고 생각하겠다는데 누가 있어 태천제를 조종하고싶다는 오해를 받고 싶어하겠는가. 율허는 쉬우리라 보았던 반려찾기가 전혀 쉽지않자 근심스러워했고 홍해는 사실을 말할 수 없어 율허를 피해다녀야 했다. 혹여라도 반려를 찾지못한 율허가 자신에게 반려의 청을 한다면 곤란했던 것이다. 솔찍히 율가의 마음을 몰랐다면 율허가 반려를 찾는 순간에 자신이 먼저 율허에게 청을 하였을 테지만 율가의 본심을 알고 있는 지금은 너무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부족의 미래와 목숨을 위해서도... 한동안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니던 율허는 원하는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시무룩해져서 주위의 동정을 사더니 어느날 태천궁을 떠나버렸다. 다른 때였다면 암울한 분위기를 조성했을 태천제가 이번 율허의 가출에는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로서는 율허가 반려찾기를 포기하고 마음을 달래러 간 것이라 생각한 것 같았다. 그리고 평소에 율허가 아끼던 탁비가 태천궁에 남아있는 걸로 보아 학구열에 불타는 율허가 오래동안의 외유는 하지 않을 것을 믿었던 것이다. 율허는 잔잔한 호숫가에 주저앉아 호수면에 자신의 얼굴을 비춰보았다. 검고 긴머리는 윤기가 흘렀고 얼굴은 깨끗하고 단정한 편이며 잡티하나 없었다. 그리 못난 얼굴이 아니라고 믿고 있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반려의 청을 수락하는 자가 하나도 없자 자신의 외모에 의문을 품기에 이르렀다. 그래도 태천제의 형인데 자신이 그렇게까지 인기가 없을 줄을 미처 몰랐다고 슬퍼하는 율허였다. 평소에는 자신의 외모에 별 관심이 없었지만 이번일을 겪고 나니 신경쓰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자신을 율희와 비교해보자 더욱 절망하는 율허였다. 그리고 다른자들의 반려의 모습을 비교해보니 저절로 어깨에 힘이 빠져나가는 기분이였다. 모두들 요염하고 건강해보이고 개성이 뚜렷해보이는 자들이 아닌가. 그에 비하면 자신은 특징없는 어린아이같은 외모에 눈에 띄는 것이라고는 길고 검은 머리뿐.... 운명을 바꾸어 보겠다는 자신의 의지가 이렇게 쉽게 좌절되다니 .... 반려를 맞이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 걸까? 율허는 여전히 자신이 반려만 맞이하면 미래를 바꿀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방법으로는 근복적인 문제가 해결되지않는다는 것을 전혀 모르는 율허였다. 아니 지금은 다른 무엇보다도 가장 절망적인 것은 내가 어디가 어때서라고 소리를 친후 지상계로 내려온 후 숲속에 뚝 떨어져 몇시간을 길을 찾아헤메다 여기저기 긁히고 넘어져 간신히 호숫가까지 찾아왔으나 먹을 것을 전혀 얻지못했다는 것이였다. 배는 고파죽겠고 그렇다고 물고기를 잡는 방법을 아는 것도 아니고 숲으로 돌아가자니 틀림없이 길을 잃어버릴 것은 분명했고 이래저래 미래를 걱정하기 전에 지금 당장에 굶어죽지 않으면 다행인 상황이 아닌가. 탁비라도 데려올 걸 후회해보아야 다시 태천궁으로 돌아가기가 무서운 율허였다. 뱃속에서 소리가 날때마다 물로 배를 채우며 한참동안 신세한탄을 하고 있는 율허의 코에 어디선가 구수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굽는 듯한 냄새에 홀려 이끌려 가보니 모닥불이 지펴져 있고 네마리정도의 물고기가 맛있는 냄새를 풍기며 익어가고 있었다. 율허는 침을 꿀꺽 삼키며 주위를 둘러보며 물고기의 주인을 찾아보았으나 이 주인은 물고기를 내버려두고 어디로 사라진 건지 코빼기도 보이지않았다. 물고기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침을 삼키며 주인을 기다렸으나 주인은 돌아올 생각을 하지않았다. 물고기에서 기름이 툭 떨어져 지글거릴때마다 율허의 뱃속에서는 더 요란한 소리가 나기 시작했고 견디다 못한 율허는 주인이 오면 사과하자는 단순한 생각을 하고 그래도 양심상 가장 작은 물고기를 잡고 조심스럽게 입으로 가져갔다. 그런데 간에 제법 커보이던 물고기는 금방 뼈가 드러났고 여전히 간에 기별도 못한 율허는 뼈를 할짝이며 다른 물고기에 눈독을 들였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다시 한마리를 집어들고 맛있게 먹어버렸다. 나중에는 한마리를 먹고 사과하나 네마리를 먹고 사과하나 사과해야할것은 변함이 없으니 배라도 채우자는 뻔뻔한 생각을 하고 나머지까지 깨끗이 먹어치워버린 율허였다. 더불어 배가 든든해지자 졸음이 몰려와 모닥불옆에 다른 사람이 준비해둔 듯한 잠자리에 자리를 잡고 누워 하품을 멋들어지게 한 후 누워 잠이들었다. 규하는 너무 어이가 없어 화도 나지 않았다. 점심식사용으로 구워놓으려고 불옆에 세워두었던 물고기는 머리만 남기고 사라져 있었고 범인인 듯한 자는 자신의 잠자리위에서 새근새근 세상 모르게 자고 있었다. 길고 고운 검은 머리와 보석이 박힌 웃차림으로 보아 평범한 자는 아닌듯했다. 귀도 뽁족하지 않았고 꼬리가 있지도 않았으며 손톱이 납카롭지도 않았다. 그야말로 사냥하기에는 너무나도 부적절한 외모를 가진 자로 오히려 산것이라도 배가 고프면 가리지않는 백택족이나 흑랑족이보면 한입거리가 될 것같은 작은 체구의 사람이였다. 어걸 어쩔까하며 함참을 쳐다보며 고민하는 규하의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몸을 뒤척이며 뭐라고 중얼거린다. 손톱사이의 검댕으로보아 물고기를 훔처먹은 것이 거의 확실해보였다. 숲으로 끌고가 아무데나 버려버릴까 아니면 호수에 던져버려? 온갖 심술 궂은 생각을 하면서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던 규하는 어쩔수 없다는듯이 한숨을 내쉬더니 다시 물고기를 잡기위해 호숫가로 갔다. 그리고 물고기를 잡으면서도 물고기를 훔쳐먹었으면 잡히지 않기위해 도망이라도칠것이지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자고 있는 작은 사람을 떠올리고 피식 웃었다. 모닥불로 돌아와 물고기를 나뭇가지에 꽂아 다시 불위에 올려놓고 젖은 옷을 벗어 그옆에 걸어두었다. 불옆에 앉아 젖은 몸을 말리고 물고기가 익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뻔뻔하기 그지없는 범인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살펴보니 흐리멍텅한 눈빛에 완전히 잠에서 깨어난 것이 아니란걸 알 수 있었다. 한참을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더니 규하를 발견하고는 놀라기는 켜녕 히죽웃으며 다가와 규하의 다리를 베고 눕는 것이 아닌가. 규하는 너무나 태연하고 당당하게 당연한 듯 자신의 다리위에 머리를 얹고 눕는 율허의 행동에 헛웃음을 칠수 밖에 없었다. 뻔뻔해도 너무 뻔뻔했다. 그리고 그런 율허를 집어들어 던져버리거나 흔들어깨워 다그치지 않는 자신이 이상했다. 자신의 다리를 차지하는 율허가 당현한 듯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결국 다음날 아침 두사람은 한 잠자리위에서 율허는 규하의 팔을 베고 규하는 율허를 끌어안고 있는 상황에서 눈을 떴다. 율허는 한참동안 무겁게 자신의 허리를가로질러 있는 수컷의 팔을 보고 심각하게 무슨상황인지를 고민하였고 규하는 멍하니 눈썹을 찌푸리고 고민하고 있는 듯한 울허를 쳐다보고 있었다. 꼬물거리면서 이상황을 어떻게 빠져나갈까 고민하는 것이 뻔히 보여 웃음이 새어나왔다. 힐끔힐끔 안보는척하면서 눈치를 살피는 기색이 어린아이같았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거지? 팔이 저린데?" 규하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화다닥 일어나더니 저만치 도망쳐 쭈그리고 앉아 규하를 살펴보는 표정이 규하가 위협하는 기색이라도 보이면 당장이라도 도망칠 궁리를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규하의 안색이 전혀 변화가 없고 그닥 화가 난 기색도 보이지 않자 이제는 조심스럽게 얼굴이며 몸이며 샅샅히 살피더니 규하의 귀에 시선을 돌리지 못하고 있었다. "수인족?" 십이지천궁에 수인족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었지만 태천궁에는 천인족이외의 사람은 드물기에 언제나 구석에 처박혀 연구랍시고 움직이지않는 율허는 수인족을 본적이 없었다. 하지만 들은 말은 있어 수인족이 자신들과는 다른 외모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호기심이 발동하면 참지못하고 기여코 사고를 내고 마는 율허가 처음보는 수인족을 보았으니 무엇을 망서리겠는가. 어느새 율허는 규하에게 다가가 그의 뾰족한 귀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한참을 만지며 그부드러운 감촉을 만끽하던 율허는 순간 지금 자신의 입장을 떠올리고 화들짝 놀라서 후다닥 다시 저만치 달아났다. 가만히 율허가 하는 양을 지켜보던 규하는 너무 어이가 없어 그저 웃음만 나왔다. 작고 보드라운 손이 자신의 귀를 조물락 거렸을 때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간지러움을 느꼈다. 자신이 화를 내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자 율허는 다시 다가와 또다시 규하의 귀를 만지작 거렸다. "굉장히 부드러워....." 혼자서 중얼거리며 이제는 허락이라도 받은 듯이 마음대로 주물럭거리고 있었고 규하는 율허가 싫증을 낼때까지 그대로 있어주었다. 분명 지상계의 사람은 아닌데 수인족을 처음본듯한 율허의 행동에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곧 그 생각은 머리속에서 지워버렸다. "이름이 뭐냐?" "율허에요.. 당신은?" 이름을 말하며 율허는 그의 눈치를 살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처음에 자신을 만나서는 친근하게 굴다가도 자신이 이름만 밝히면 태도를 바꿔서 거리를 두고 어색해하기 일쑤였다. 행여라도 지금 지상계에서 만난 그 역시 그들처럼 자신을 멀리할까봐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규하.. 그런데 이곳에서 뭐하고 있는 거지? 원래 지상계의 사람은 아닌것같은데?" 자신의 이름을 듣고도 변하지 않는 규하의 태도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율허는 빙그레 웃었다. 그러나 곧 자신이 왜 지상계에 내려오게 된 원인을 생각하니 눈물이 흘러나왔다. "..흑흑흐... 내가 그렇게 매력이 없는 지는 ...훌쩍... 정말 몰랐다니까요... 이대로 평생 반려를 찾지 못하면 어쩌지요? 흑흑흐아아앙..." 규하는 고개를 갸웃할 수 밖에 없었다. 그가 십이지천을 떠나있었던 시간이 오래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율허정도라면 결코 인기없는 반려감은 아니였던 것이다. 그동안 십이지천의 유행이 많이 바뀐건가를 의심해야 할 지경이였다. 하도 서럽게 울길래 달래줄 요량으로 몇마디했더니 그동안 쌓인 것이 많았는 지 더욱 대성통곡을 하는 율허였다. 규하는 율허가 울다가 지칠때까지 그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12.계속되는 변괴 남천궁주는 자신의 의지가 아니면 나타나지 않는 남화검이 다른자의 부름에 모습을 드러내자 경악했다. 상재방은 억지로 남천궁주의 몸에 나타나고 있는 검의 자루를 잡더니 쑥 뽑아내었다. 십이궁주의 상징인 검은 현 궁주만이 가질 수 있는 검으로 그것은 십이궁주라는 증거이며 상징이였다. 오직 후계자만이 궁주위를 물러받을 때 문장을 그리는 자와 궁주 그리고 후계만이 있는 방에서 검을 몸안에 봉인할 수 있는 문장을 그대로 후계의 가슴위에 새긴다. 그리고 문장이 완성되면 후계위를 물려받은 자가 궁주의 상징검을 몸안에 봉인해보는 실험을 하고 그 실험이 합격하면 문장을 그리는 자는 그자리에서 죽이기 때문에 그 문장의 모양이나 그이외의 것은 영원히 비밀에 부쳐지기 때문에 다른 자가 알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일주일간의 그 의식을 궁주양위식이라 부르며 그방에서 걸어나오는 자는 새로이 궁주가 된 후계자뿐이였다. 게다가 그 문장은 십이궁주마다 달랐다. 그러니 다른 궁주의 문장을 알고 있는 자라해도 자신들의 문장은 알 수 없는 것이 정석이였다. "당신은 누구인가?" 분명 선천제 율파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에게는 궁주의 몸안에 봉인되어 있는 검을 부를 능력이 없었다. 아니 역대 어느 천제라도 그런 능력을 가진자는 없었다. "나를 의심하는 건가?" "당신이 율파님이라면 내몸안에 봉인된 궁주의 검을 불러낼 수는 없는 일이오." "아무리 무식하다는 남천궁주지만 그정도는 안다는 건가? 확실히 전의 율파라면 어림도 없었을 테지만 나는 아니거든 .. 이제 이 검도 없으니 그 문장은 필요없겠지?" 하며 검을 빼앗은 율파는 손을 뻗어 검을 몸에 봉인시키도록 해주는 문장을 쥐어뜯었다. "크아아악..." 율파가 뻔히 손을 뻗는 것을 보면서도 굳어버린 듯 도망치지 못한 남천궁주는 문장이 뜯기자 온몸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에 비명을 토해냈다. 피부의 겉만 상하고 문장만 파괴되었을 뿐인데도 그 통증은 상상을 초월했다. 게다가 겉피부가 찢어진 것 뿐인데도 온몸이 울리더니 핏물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냥 핏물이 아니라 생기였다. "다..당신...당신은 누구인가...?" "글쎄 내가 말해준다해도 그대들은 알지 못할 거야. 그리고 알아보았자 근심만 늘 뿐이니 모르게 가게나..." 남천궁주는 담담하게 말하며 스스로의 몸에 남화검을 꽂아 넣는 그의 모습에 더이상 놀랄것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 틀렸음을 확인했다. 남천궁주는 남화검이 마치 남천궁주가 봉인할때처럼 자연스럽게 그의 몸속으로 스며들듯 사라지더니 방금전까지 남천궁주의 가슴부위에 새겨져있던 문장과 똑같은 문장이 그 검이 스며든 자리위에 새겨지는 걸 보았다. "말도 안돼..." 남천궁주는 또다시 대량을 피를 토해내며 흐릿해지는 시야를 들어 비웃듯 웃고 있는 그를 쳐다보았다. 화룡궁은 계속 사라져가는 사람들때문에 술렁거리고 있었다. 어느날은 궁전에서 일하는 시종이 사라지기도 하고 어느날은 시장통의 과일장수나 문지기 그리고 보초병에서 어린아이까지... 문제는 그들이 어디로 사라졌으며 죽었는지 살아있는지 전혀 알수도 없고 흔적도 없다는 것이였다. 연이어 터지는 실종사건으로 화룡궁은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아슬아슬한 상황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었다. 훈바는 조금만 눈에 거슬려도 사람들을 족치기 일쑤였고 사람들은 훈바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최대한 조심하거나 숨어다니고 있었다. 차람도 훈바의 신경질을 견디다못해 비월의 소식을 알아보러간다는 핑계를 대고 다른 천궁으로 도망가버렸다. 그런 그때 전해진 남천궁주의 피살사건은 사람들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월궁에 다녀온 차람이 월궁주가 가사상태에 빠져들었다는 소식을 가져와 훈바를 놀라게 만들었다.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사실입니다. 누군가 월궁주의 몸에 있는 문장을 파괴하고 월검을 빼앗아갔답니다. " "말도 안되는 소리다. 월궁주의 몸에 있는 검을 누가 있어 빼앗갈 수 있단 말이냐?" "재사의 말로는 월궁주의 가슴위의 문장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찢겨졌다고 합니다. 문장이 파괴되어 더이상 월검을 봉인하지 못하고 몸밖으로 나온 검을 누군가 가져간것은 아닌가하고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 차람의 말에 훈바는 소름이 돋는 기분이였다. 궁주의 상징인 검과 문장의 상관관계는 뗄레야 뗄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보이지 않다가 검을 드러내게 할때면 가슴위에 선명하게 그 문장이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에 평소에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것이 문장이였다. 궁주들이 마음대로 옷을 벗고 교미해도 되는 것은 그런 이유였다. 검을 모습을 드러낼때만 모습을 드러냈다가 검이 봉인되면 다시 사라져 보이지 않는 일종의 문과 같은 역활을 하는 것이 문장이였다. 각 궁주마다 구 문장의 모양이 달라서 다른 검을 빼앗는다해도 자신의 몸에는 봉인할 수 없는 것이 검과 문장의 상호작용이였다. 한마디로 검과 문장은 열쇠와 자물쇠같은 기능을 하는 것이다. 선대 화룡궁주가 너무 잔혹하고 난폭하여도 함부로 그를 제거하지 못한 것은 그런 이유때문이였다. 그를 죽여버린다면 그 문장은 물론 그 화룡검도 영원히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상징이 없는 궁주는 궁주가 아닌 것이다. 차람은 선대궁주의 손으로부터 훈바를 숨기고 다른 사체를 그에게 보여 자식마저 죽이고 자리보존을 하려는 그의 눈을 속인후 그를 유혹하여 몸을 섞고 그의 문장을 훔쳐볼 기회만 노렸다. 그리고 선대궁주가 검을 발현시킬때마다 나타나는 문장을 세심하게 살핀 후 그 문장을 훈바의 가슴에 새겨넣었다. 차람이 선대궁주와 몸을 섞을 때마다 자객을 몰래 들이게 해서 선대궁주가 대응하도록 유도했기에 가능한 일이였다. 처음에는 차람과 몸을 섞을 때마다 자객이 나타나자 의심을 가졌던 선대궁주는 차람이 울면서 자신이 선대궁주의 총애를 받는 것을 시기하는 자들이 자신을 죽이려하는 거라고 말해서 선대궁주의 의심을 없앨수 있었고 선대궁주의 배경을 짊어지고 만행을 저지르는 자들과 그 자객을 엮어서 사이가 벌어지도록 만들수 있었다. 그리하여 장성한 훈바가 선대궁주와 자객이 싸우는 사이 숨어있던 곳에서 나와 그의 목을 베고 검을 빼앗았다. 그래서 월궁주에게서 검을 빼앗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일이 아니란걸 잘 알았다. 문제는 적수를 찾아볼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는 월궁주에게서 누가 검을 빼앗고 문장까지 파괴하였느냐는 것이다. "그 누구인 알 수 없는 검 강탈자는 분명 여기에서 멈추지 않으리란 것은 확실합니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그가 원하는 것은 십이궁주의 십이검이 확실합니다." 다하의 결렬한 거부반응으로 지쳐가고 있던 가토에게 전해진 남천궁주와 월궁주의 사건은 커다란 타격으로 다가왔다. 다른 궁주들은 어떠할 지 모르지만 가토는 월궁주와 남천궁주의 검이 강탈되었다는 소식을 전해듣자마자 그 이유를 대번에 알아챌수 있었다. 탁제균의 얼굴은 더이상 창백해질수 없을 정도로 창백하게 굳어있었다. "누군가 십이천이족을 부활시켜려 하는 군." 알 수 없는 누군가의 그림자가 가토와 탁제균의 계획에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누구보다도 먼저 월궁주를 공격한 것으로 보아 그는 천년전의 일을 잘 알고 있는 자이며 유일하게 그 때의 일을 알고 있는 자주의 입을 막고자 제일 먼저 공격한 것이 분명해. " 식은땀이 났다. 자신들도 천년전 천수천인전을 주도한 열두명의 천이족을 봉인한 주문을 풀수 있는 방법이 십이궁주의 상징인 십이검이라는 사실을 안것은 최근이였다. 그래서 각 십이궁에 잠입한 첩자들에게 검을 회수할 방법을 가르쳐주고 조사를 시키지 않았던가. 그런데 미처 실행에 옮기기도 전에 자신들보다 먼저 실행을 하고 있는 자가 나타난 것이다. "누구일까. 누가 있어 그 것을 알아내 일을 벌이는 것일까. 그는 무슨 이유로 검을 회수하여 천인족을 부활시키려는 걸까." 탁제균에게 묻는다기보다는 스스로에게 의문을 던지는 가토였다. "사라져버린 선천제 율파와 그리고 시나이라... 아무래도 이일과 전혀 무관하지 않을 것같은 예감이 드는 군." 가토가 창밖을 내다보았다. 처음에는 신경쓰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일이 시간이 갈수록 점점 그 사이를 벌리고 사건에 사건을 연결시켜 틈을 키워나가는 것이 선명하게 인식되었다. 무엇부터가 잘못되었고 어떻게 잘못되어가고 있는 건지 알 수 가 없었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이제는 아무것도 확실한 것은 없다는 것이다. 그때 시종 한명이 소란을 떨며 뛰어들어왔다. 그의 안색은 초췌했고 지쳐보였다. 그리고 가토와 탁제균이 노려보는 시선에도 그는 눈치채지 못하고 있을 정도로 이미 놀란 눈치였다. "무슨 일인가?" "다하님이..." 그를 무섭게 노려보며 혼내려던 가토의 안색이 대번에 변했다. "다하가 왜?" "자진을 하셨습니다." 가토는 머리속이 텅비는 것을 느꼈다. "제가 궁금한 것은 왜 영원결계주문이 완성되지 않았는데 천궁이 무너지지 않았는 지와 영원결계주문의 실패로 죽었어야할 제가 어떻게 살아났느냐하는 것입니다. " 비월은 물고기가 궁중에 헤엄쳐다니는 이 이상한 곳에는 자신과 그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안것은 며칠동안 열심히 돌아다니고 난 후였다. 그래서 여전히 스스로의 정체를 밝히기를 꺼리고 있는 그가 누구인지 자신이 죽지않고 살아있는 이유를 알아낼 방법은 그와의 대화뿐임을 깨닫자 주저없이 그를 불러다 놓고 입을 열었다. 그는 며칠동안 한마디도 않고 여기저기를 쏘다니는 비월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비월이 처음으로 입을 열자 그를 데리고 어디론가 가기 시작했다. 일렁거리는 느낌에 다가가지 못하고 돌아섰던 곳으로 오더니 손을 저으며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그러자 닫혀있던 공간이 열리며 일렁거리던 느낌이 눈으로 보기에도 확연하게 둘로 갈라지면 길을 내주었다. 그는 비월을 데리고 그 길을 지나 한참을 걸어갔다. 그곳은 무척이나 오래되어보이지만 그에 비해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는 건물이였다. 그리고 굉장히 낯이 익은 모습의 궁전이였다. "이곳은 ..." "흑천궁이라 불리기도 하고 물속의 궁전이라고도 불리는 곳입니다. " "흑천궁?" "이 궁전은 하늘의 천궁을 그대로 반사하는 물속에 위치하여 있어서 그리 명명하였지요. 사람들은 이곳이 천궁이 물위에 비친 모습일 뿐이라고 믿지만 사실은 마주보고 있는 전혀 다른 세계의 궁전인것이지요. 물론 입구는 다른 곳에 있구요." "첫번째는 저도 깨어난 지 얼마지나지 않아 알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위급해보이는 당신을 데리고 그곳을 빠져나오는 것에만 급했으니 다른 것에는 신경쓸 여유가 없었지요 . 두번째 질문의 답은 이곳에 있습니다. " 그가 가르킨 곳에는 거대한 문이 눈앞에 놓여있었다. 문에는 거대한 나무가 조각되어 있었고 그 나무의 뿌리부분에는 또한 묘한 향기가 나는 물웅덩이가 있었다. 나무의 뿌리가 그 웅덩이를 감싸고 있는 모습이 비월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이게 왜 여기에..." "아시는 군요. 생명수입니다. 지상의 생명수와는 달리 순수하고 농도가 짙은 물이지요. " "아...!!" 그제서야 자신이 어둠속에서 포근함을 느끼고 있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정말 질기게도 긴 목숨이였다. 이것이 몇번째의 회생이던가. 음령족의 멸족때도 없어진 날개의 부작용으로 수명이 다했을 때도. 그리고 이제는 정말 성공하든 실패하든 마지막이라고 믿었던 영원결계주문의 영창때도... 또다시 살아났다. 도데체 자신의 생명의 끝은 어디인가. 왜 이렇게 몇번이고 되살아나고 있는 걸까 운명은 자신에게 무엇을 바라는 것일까. 몇번이고 되살려내서 자신에게 주려는 미래는 무엇인가. "그만 두십시요." 파라는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고개를 돌려 소리의 주인공을 찾았다. 차람이 파라가 한사람을 잔인하게 죽이는 모습을 보면서도 조금도 놀란기색없이 차분하게 파라를 쳐다보고 있었다 파라는 그런 차람을 발견하더니 자신의 손에 이미 죽어버린 사람을 던져버리고 차람에게 다가왔다. 차람은 이제까지와는 너무나 다른 파라에게서 뿜어져나오는 요기에 눈살을 찌푸렸다. 기생벌레에 당한다해도 저정도로 심한 후유증이 생긴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기생벌레에 당해서 자의로 그 영향에서 벗어난 것도 처음보았고 지금처럼 강한 요기를 드러낼 정도의 후유증이 생기는 것도 처음 보았다. 그동안 수많은 돌연변이의 실험을 통해 기생벌레로 실험을 했으나 파라처럼 강한 요기를 드러내는 자는 없었다. 처음 과거에 멸종되어버린 기생벌레를 부활시킨 후 수많은 돌연변이 천이족을 통제하기 위해 사용하였다. 과거로부터 돌연변이 천이족은 통제가 불가능하여 여러가지 방법으로 실험을 하다 효과를 본 것이 기생벌레였다. 막 태어난 천이족의 몸에 기생벌레를 심어 키워서 오직 한사람만을 따르도록 교육시켰고 그 효과는 대단히 만족스러웠다. 억눌러진 본능적인 힘으로 본연의 힘은 다 발휘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일반전사들을 훨씬 웃도는 능력을 발휘하였다. 도중에 몸의 이상으로 기생벌레가 죽어버리는 경우는 자동적으로 자진하도록 세뇌를 시켜놓은 터라 통제를 벗어나 사고를 일으키는 경우가 없었다. 가끔 태어날때부터 커다란 힘을 가진 아이들은 두세마리정도의 기생벌레를 사용하였다. 그런 경우라도 스스로 그 통제에서 벗어나는 경우는 없었다. 파라가 기생벌레의 통제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 그가 다 장성한 전사라고 결론내리기에는 무언가 석연치가 않았다. 그러기에는 그에게 사용한 기생벌레의 수가 너무 많았던 것이다. 어쩌면 파라의 부작용이 너무 많은 수의 기생벌레를 사용한 탓은 아닌지 하는 조심스런 의문이 제기되었다. 다른 자들이 의심을 품기전에 그를 제거하라는 명령을 받은 차람이였지만 지금 파라를 지켜보며 그것이 결코 쉽지않은 일임을 느꼈다. 전에도 참 강한 자구나 하는 감탄이 나올정도로 뛰어난 전사였지만 지금은 그것에 요사함까지 더해서 마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이 일었다. "당신이 이런 모습을 월아님이 보신다면 매우 실망하실 겁니다. " 그를 보자마자 느낀 것은 힘으로는 안되겠구나 하는 느낌이였다. 그렇다면 심리적인 방법밖에 없는데 그에게 가장 크게 작용할 만한 심리적인 일은 비월에 관한 것이라는 보고를 받은 터라 그점을 걸고 넘어지면서도 진정 이게 효과가 있을까하는 의심을 버리지 못하던 차람이였다. 그런데 그런 차람의 불안을 말끔히 날려버리기라도 하려는 듯 점점 짙어져가던 파라의 요기가 그 소리가 나오자 마자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려 차람은 오히려 놀라버렸다. 게다가 마치 꿈에서라도 깨어난 듯이 퍼뜩 놀라더니 '엇'하는 소리를 지르며 주위를 둘러보고 차람과 바닥에 쓰러져있는 사체를 발견하더니 놀라는 것이 아닌가. "이게 도데체 뭡니까? 제가 왜 여기에 있지요?" 차람은 급변한 상황에 정신을 차릴수가 없어 미처 대답을 해주지 못했다. "설마 차람님이..." "내가 아니예요.!!!!" 자신에게 덤태기를 씌우는 파라의 말에 울컥 소리를 지르고 나서 아차하고 입을 막았다. 지금 파라의 상태로 보아 그동안 자신이 저지르고 다닌 만행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는 걱 같지 않은가. 섣불리 그의 상태를 인식시켜 좀전의 두렵던 분위기의 그를 되돌릴 필요가 없다는 결론에 다다른 차람은 범인이 굳이 그라는 사실을 알려줄 필요가없음을 깨달았다. "그럼 누가?" "그걸 제가 어떻게 압니까? 이런 혼란스런 와중에 이런 사건까지 보태져 좋은 일은 없을 테니 이걸 없애도록 하지요." "그래도 범인은..." ''안된다니까요. 지금 월궁주와 남천궁주의 피습사건으로 온 천인계가 비상상태인데 이런 사소한 일로 더 복잡하게 만들 필요는 없어요." 이게 사소한 일이냐는 듯한 파라의 표정에 차람은 기가 막히고 열이 뻗치는 기분이였다. 이게 다 누구때문인데 자신을 범인쳐다보듯 한단 말인가. 그런 파라가 갑자기 화들짝 놀라며 차람을 다그쳤다. "월궁주라고 했습니까? 방금?'' "그래요. 지금 가사상태에 빠지셨답니다. " "엑? 누가 그분을... 이세상에 그분을 당할 자가 있단 말인가요?" "그렇게 되었으니 어서 도와줘요. 이 사체를 화룡계곡에 버려야 하니까." 차람이 끙끙거리며 사체를 들어올리자 파라가 달려들어 도와주었다. 두사람은 주위를 살펴가며 내궁을 빠져나와 사체를 화룡계곡에 던져넣었다. 사체는 용암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갔다. "월궁주님은 괜찮으실까요?" "모르겠습니다만 그라면 곧 깨어나지 않을까요?" 월족은 불멸의 존재이니까라는말은 속으로 삼키는 차람이였다. 수인족이 월족을 먹으면 역시 불멸의 존재가 된다는 소문이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워낙 오래사는 월족을 보고 생겨난 헛소문이라고 믿었지만 차람은 그런 예를 직접 본 적이 있어 그 소문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더이상 세상에 더 강한자가 나타나는 것은 원하지 않았기에 입을 다무는 것이다. 가토는 의식이 없는 다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창백한 안색과 요사이 부쩍 마른 몸이 그르 안타깝게 만들었다. 자신을 볼때마다 두려워하며 공포에 떨어도 가토는 그를 놓아줄수가 없었다. 처음 천궁에서 그를 보았을 때 차갑게 얼어붙었던 그의 심장이 다시 뛰고 그가 태어날때부터 말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천년전 자신이 그의 혀를 잘라버렸었다. 다시 태어나서도 멀쩡한 혀를 가지고도 말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가토는 그것이 자신탓인것만 같아 한동안 다하를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었다. 천인족들의 경멸과 멸시속에서도 꿋꿋하게 자라나던 착하기만 한 다하를 지켜보며 가토는 두번다시 그를 잃는 행동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몰라 알수가 없어 망서리기만 했었다. 그런데 노망난 율파의 아버지가 천수족을 강간하여 진비월이 태어나면서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진비월이 돌연변이라는 사실때문에 많은 천이족에게 천대를 받고 멸시를 받자 다하가 그모습이 자신의 모습과 겹쳐보였는 지 진비월의 보호자로 자처하고 나섰던 것이다. 마치 자신이 낳은 알처럼 진비월을 감싸고 돌았다. 진비월이 갖가지 천대와 멸시로 비뚤어지고 어긋나지 않은 건 다하의 보살핌덕분이였다. 누구도 진비월을 통제할 수 없었지만 다하의 시선과 걱정은 꼭 들어주었던 것이다. 자신이 부린 말썽과 잘못으로 다하가 괴로워하거나 슬퍼하는 기색만 보여도 두번다시 같은 짓을 하지 않던 진비월이였다. 무엇이든지 다하의 슬픈 얼굴을 보면 멈추던 진비월은 단한가지에서만은 다하의 걱정어린 시선을 무시했다. 바로 누군가 다하를 욕하거나 무시하는 말을 하면 죽자살자 달려들어 기여코 사단을 내고 끝장을 보고야 말았다. 그때만큼은 다하의 만류도 소용없었다. 가토는 초조한 마음으로 그것을 지켜보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진비월을 쳐다보는 시선이 더 깊어지고 애뜻해질수록 다하를 두번다시 상처입히지 않겠다던 가토의 결심도 조금씩 무너져갔다. 그래서 진비월을 천궁에 출입이 가장 없는 월궁으로 보내도록 유도했다. 가지않으려는 진비월에게 거절하면 다하를 쥐도새도 모르게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해서.....그 맹랑한 진비월은 탁제균을 노려보며 만일 다하의 신변에 손끝하나라도 댄다면 죽어서라도 저주하겠다고 했단다. 다하가 자신 혼자만의 마음이라고 믿었던 진비월을 향한 마음이 사실 서로에게 보내지고 있었던 것이다. 서로가 너무 소중해서 그저 보호하고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기에 내색하지 않았을 뿐이라는 사실은 여전히 모르고 있는 다하였고 가토는 영원토록 그사실을 알려줄 생각이 없었다. 다하를 강제로 안으며 가장 걱정한 것이 혹여 전생처럼 자신을 두려워하거나 죽도록 슬퍼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것이였지만 천만다행인지 다하의 반응은 분노와 증오였다. 그것만으로도 만족했던 가토였다. 그런데 지금 다하는 자신을 보며 슬퍼하고 아파했다. 천년전 그때처럼 자신을 볼때마다 너무 슬퍼서 죽고 싶어할 정도로 슬퍼하는 다하를 보면서도 결코 그를 놓아줄 수 없는 가토였다. 월궁은 외부인의 출입이 완전히 봉쇄되었지만 사전에 파라의 방문은 이야기가 되어 있었는 지 파라의 입궁은 별무리없이 이루어졌다. 게다가 어두운 안색을 한 재사가 파라가 도착하자 마자 어디론가 안내하였다. 그동안 여러번 월궁을 드나들기도하고 살기도 했지만 한번도 가본적이 없는 곳이였다. 파라를 안내하는 재사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있어서 파라는 쉽사리 지금 자신을 어디로 데리고 가는 거냐고 물어볼 수가 없었다. 거대한 문앞에 도착한 재사가 두손을 내밀어 문을 밀었다. 거대한 문은 힘겨운 소리를내며 안으로 밀려들어갔다. 재사는 문은 열었지만 안으로 들어서지 않고 파라를 들여보내기만 했다.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안에서 무슨일이 일어나더라도 파라님 이외에는 들어와서는 안된다는 전언이 있었습니다. " 파라가 머뭇거리며 안으로 들어서자 재사가 파라의 등뒤로 그 육중한 문을 닫았다. 방안은 새벽녘같은 어스름한 어둠과 희미한 밝음에 잠겨있었다. 가사상태에 빠져있다던 자주가 안으로 들어서는 파라를 쳐다보고 있엇다. 그에게 다가가는 파라의 심장이 거칠게 뛰고 있었고 그에 반해 발걸음은 차츰 무거워져갔다. 자주는 점점 느려지는 파라의 발걸음에도 눈하나 깜박이지않고 가만히 다가오는 파라를 지켜보고 있었다. 파라도 자주도 한마디도 하지 않고 서로를 응시했다. 무언가를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이. 오랜 침묵이 자주의 그림같은 손짓하나로 깨어졌다. 파라는 소리없이 내뻗어진 자주의 손에 이끌리듯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살아있는 자의 체온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자주의 손은 냉기가 돌고 있었다. "이제부터 내게서 듣는 이야기는 잊어서도 아니되고 다른자에게 말해서도 아니되네. 자네의 영혼을 걸고 맹세하겠는가." 파라는 도데체가 자주가 무슨 내용을 말하려하는 건지 알수가 없어 망서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영혼을 걸고 맹세하라니....결코 가벼운 내용은 아닐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쉽사리 그에 응할 수가 없었다. "부탁이네. 맹세해주게." 좀처럼 승낙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자주가 부탁이라는 형태로 파라를 재촉했다. 누가 있어 자주에게 부탁을 하도록 만들 수가 있겠는가.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경악스런 일이였지만 그를 잘 모르는 파라는 여전히 망서렸다. "자네의 맹세에 따라 월아의 운명이 좌우될 수도 있다고 해도 망서릴텐가?" 여전히 망서리고 있던 파라가 비월의 말이 나오자 마자 언제 망서렸냐싶게 자주에게 영혼을 걸고 맹세하겠다고 말했다. 그런 파라의 모습에 자주는 그저 만족스럽게 웃었을 따름이였다. "우리 월족에게는 한가지 비밀이 있네." "?" "순수한 피를 가진 월족은 스스로 죽기를 원하지 않는 한 영원을 산다네." 파라는 사람의 수명이 영원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 멍하니 자주를 쳐다보았다. "그런 만큼 순수혈족의 월족에게는 환생이라는 건 없지. 그래서 나는 진비월이 다시 태어날때가지 영원이라도 기다릴 생각이였다네. 하지만 이제 그게 불가능하게 되었구만. 한번쯤 소문은 들었을 것이네. 수인족이 순수 월족의 사체를 먹으면 그 역시 영원을 살게 되지. 이제까지 그런 경우는 두번인가 있었네. 한번은 우리 스스로 그아이를 살리고자 한 일이고 두번째는 강탈당하듯이 당한 일이었지. 덕분에 순수월족은 이제는 나를 빼고는 없네. 첫번째 경우는 상실의 아픔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죽어버린 동생의 시체를 어떤이가 데려온 다 죽어가는 어린아이에게 먹였네. 누군지 모르지만 그 어린아이에게 빙해족의 피를 먹인 것이 너무 잔인하여 그리고 그 피에 녹아가는 아이가 너무 불쌍하여 장로들과 의논하여 어차피 없애버릴 사체이니 생명하나 살리자는 결론이 나서 그리된것이지. 어쩌면 그아이가 아직 살아있으면 천년전의 일을 기억하고 있을 지도 모르지만 사람일은 모르는지라 확실하게 진실을 아는 자를 남겨두자는 생각으로 자네에게 이 비밀을 말하는 것이네." "!!!!" 파라에게 있어 자주의 이야기는 먼 나라의 이야기처럼 실감이 나지 않았다. "자네는 지계족이지 ... 자네의 피속에는 수인족의 피가 섞여있을 가능성이 많다는 이야기이네. 자네의 먼 조상 중 한명은 수인족이였을 것이네. 그래서 다른 궁주들이 아닌 자네를 선택하였네. 무엇보다도 이일이 월아와 무관하지 않으니 자네가 적임이라는 생각도 들었지. 자네도 알고 있는 천수천인전에는 숨겨진 비사가 있네. 모두가 알고 있는 천수천인전은 처음 수인족이 천인족을 공격하여 시작된 전쟁이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양상 바뀌어 그 사이에 태어난 천수족과 지계족이 합세하여 전쟁은 갈길을 잃고 우와좌왕하고 있었는데 천이족이 나타났지. 처음에는 그들이 어디에서 어떻게 나타났는 지 아무도 몰랐고 누구편인지도 몰랐지. 누구도 그들을 이길 수가 없고 죽일 수도 없었네. 그들의 출현이 태천제의 의도였다는 사실은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지. " 파라가 주르륵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지금 자신이 들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제대로 들은 건지 혼란스럽기 그지 없었다. 말도 안되는 소리다. 왜 태천제가 모든 종족의 왕이였던 그가 천이족을 이용하여 수인족은 물론 천수족 그리고 지계족은 물론 자신의 피가 섞인 천인족까지 공격하게 만든단 말인가. 그의 백성이며 그의 기반이 아닌가. 믿을 수 없어 의심이 가득한 시선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파라의 시선에도 자주는 불쾌해하지 않았다. 이미 파라의 반응은 예상했고 그의 혼란도 짐작했었다. 오히려 진실앞에 혼란스러워할 그를 동정하는 기분을 느끼는 자주였다. 그 역시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파라와 똑같은 반응을 보였었다. 누가 있어 태천제를 의심하겠는가. 파라의 극심한 혼란을 자주는 침묵으로 대답해주었다. 변명이나 말이 필요없는 진실임을 확신시켜주었다. 시간이 흐르자 파라가 덜덜덜 떨기 시작했다. "수많은 아니 전 모과의 절반이 그들의손에 속수무책으로 죽어갔네. 전쟁을 시작한 수인족도 그 사이에 끼어들었던 지계족이나 천수족이나 천인족 어느 누구도 무사할 수 없었지. 잘잘못을 따지고 있을 틈도 없었고 원망할 시간도 없었네. 그들은 천인족과도 비슷하고 천수족은 물론 지계족 그리고 수인족과는 비슷해서 옆에 있어도 구분이 되지않아서 어느날 옆에 있던 자가 자신을 찔러도 그저 당할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네. 누구도 믿을 수가 없었고 자기 가족마저도 믿지못하는 사태에 이르렀지. 어제는 다정한 이웃이 오늘은 경계의 대상이 되어서 공포에 미쳐버린 사람들이 멀쩡한 자신의 이웃을 도륙내고 불을 지르는 일이 다반사였네. 그것은 지옥이였지. 종족간의 전쟁이 자기자신과의 싸움으로 번져갔고 나중에는 스스로도 믿지못하게 되어버리고 말았네. 길거리 가다가 칼을 맞기 일쑤여서 돌아다니지도 못하여 굶어죽는 자들도 속출했네. 그때 십이궁주에게 전해진 것이 십이검이라는 검이였지. 그리고 그 검을 봉인할 수 있는 문장이였지. 누가 보내온 건지 몰랐지만 우리는 물러설데가 없었기에 우리는 그 문장을 각자의 가슴위에 새겨넣었네. 검이 몸안에 들어갈 때의 느낌은 모두 달랐다고 하더군. 내 검은 차갑고 서늘했지만 화룡궁주는 데일정도로 뜨거웠다고 하고 북해궁주의 느낌은 얼어붙을 정도로 차가웠다고 하더군. 각 십이지천에 비슷한 검이 만들어진 것 같았지. 누구도 죽일 수 없고 누구도 구분할 수 없었던 천이족을 십이검은 알아보았고 죽일 수도 있었네. 천이족이 가까이 있으면 검이 울렸으니까. 하지만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열두명만은 십이검도 어쩔수가 없더군. 그래서 가까스로 그들을 각자의 검에 봉인하는 것으로 전쟁은 종결되었다고 믿었네. 우리는 태천궁의 승리연에 참석하기 위해 그곳으로 갔었네. 그때까지만해도 누구도 이번 전쟁의 실제적인 주재자가 태천제라고는 손톱만큼도 의심하지 않았지. 우리는 십이검을 보내온 자가 태천제라고 생각할 정도로 그를 믿었네. 그런데 태천궁의 연회장에 도착해 우리가 본 것이 무엇이였는 줄 아는가? 피바다 였지. 태천궁에 살고 있는 천인족이 모두 그자리에 죽어있었네. 그리고 태천제는 자신의 반려인 율희님의 목을 꺽고 있더군. 그는 우리가 보는 와중에도 태연하게 율희님의 목을 비틀어 죽인 후 던져버리고 술잔을 기울여 승리를 자축하더군. 그때의 우리의 심정은 그래도 여전히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태천제가 그들을 죽였을 것이다라고 믿고 있었다네.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어이가 없었지만 우리 모두 그렇게 믿고 싶어했고 그렇게 믿었지. 태천제는 그런 우리들의 눈빛에 비웃기라도 하듯이 주문을 외웠고 우리가 봉인하였다고 믿었던 십이천이족이 십이검에서 풀려나오더군. 그때의 절망을 자네는 상상이나 하겠는가? 태천제는 웃으며 그까짓 검으로는 자신을 막을 수가 없다며 이 모과를 완전히 파괴하기 전에는 끝은 없다고 말하더군. 왜 그가 그토록 모과를 파괴하고 싶어하는 지 우리는 알수가 없었지만 그자리에 있던 누구도 이 모과가 끝났음을 의심하지 않았네. 십이궁주는 이것이 마지막이라면 할수 있는 데까지는 해보자는 심정으로 십이검을 소환했네. 우리의 힘으 모두 합친다해도 그들을 어쩔수가 없음을 알았지만 어쩔수 없었네. 그런데 이변이 생겼지. 십이검이 한자리에 소환되자 하나의 거대한 진이 발동하였는데 십이천이족과 태천제가 그 봉인의 중앙에 갇히더군. 우리는 영문도 모르고 그저 지켜볼 수 밖에 없었네. 발버둥치며 그 진에서 빠져나오려는 천이족과는 달리 태천제는 넋을 잃은 모습이였지. 그러더니 이게 네뜻이냐며 허공을 향해 씁쓸하게 미소짓더니 조용히 봉인을 받아들였고 얼마후 그들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져버렸네. 그것이 천수천인족의 결말이였네. 그날이후 십이궁주는 대부분의 궁주의 힘을 잃었고 각자 십이지천으로 돌아가 후계위를 물려주었지. 하지만 십이궁주들은 침묵할 수 밖에 없었네. 그건 십이검이 악용되는 것을 두려워해서였고 또한 수인족이 시작한 천수천인전의 진짜 원흉이 태천제였음을 밝힐수가 없었기 때문이였네. 지금 그 진실을 알고 있는 자는 나밖에 남지 않았지." 자주는 측은한 듯이 충격과 경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파라를 쳐다보았다. 직접 겪고 직접 본 자신도 믿기어려운 일일진대 파라가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거라는 건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였다. 그날을 겪은 십이궁주는 자주를 빼놓고 얼마지나지 않아 영면에 들었다. 힘이 약해진 틈을 타 지계족이 발호하였으나 새로운 궁주들이 들이댄 십이검에는 당해내지 못하고 지상으로 쫓겨났다. 그리하여 전쟁의 원흉으로 몰린 수인족은 천인족을 피해 지상으로 도망쳤고 지계족 역시 쫓겨나 천상계라 불리던 십이지천을 천인족의 세계라는 뜻으로 천인계라 부르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월궁은 그 사건이후 백년의 잠에 빠졌고 그들이 다시 깨어났을 때는 태천제의 아들 율경이 물러나고 그의 아들인 율고가 천제가 되어있었다. 그리고 서서히 모과는 천수천인전의 영향에서 벗어나 날개를 펴고 있었지만 누구도 천이족의 무서움은 잊지못했다. 천년이 지난 지금도 천이족이라면 종족을 막론하고 우선 두려워하고 꺼려하는 본능이 남아 있을 정도로.말이다. 파라가 울면서 자주를 쳐다보았다. 차라리 몰랐다면 마음이라도 편했을 텐데 진실은 너무나 두렵고 공포스러워 그 진실을 자신에게 말한 자주가 원망스럽기만 했다. "왜? 저에게.... 영원히 묻어버리지 않으시고 왜 저에게 그 진실을 밝히시는 겁니까?" 자주가 겉옷을 벗었다. 그리고 가슴에 감겨있는 천을 벗겨냈다. 파라는 찢겨져나간 듯한 자주의 가슴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 문장이 파괴되고 느낀 것이지만 문장은 검을 봉인할 수 있는 열쇠의 역활만 있는 것이 아니더군. 문장이 파괴되면 그 문장을 가진 당사자의 영혼도 두번다시 부활하지 못하도록 소멸시키는 저주같은 역활도 있더군. 나야 어차피 죽으면 두번다시 환생할 수 없어 아쉬울 것은 없지만 진실을 덮어버리기엔 이 모과가 너무 위험해질 것 같더군. " "????" "태천제가 부활했네." 13. 천수천인전.2 규하가 비명을 지르며 율허의 행동을 저지하려 했을 때는 이미 늦어서 율허는 먹음직스러워보이는 열매를 삼켜버린 후였다. 신맛이 너무 강해서 입안이 짜르르 떨리며 침이 주르륵 새어나왔다. 온몸을 진저리치는 율허를 보며 규하는 웃을 수도 울 수도 없었다. 특별히 율허가 먹은 열매가 몸에 해로운 것이 아니였지만 그 열매의 맛이 너무 자극적이라 혀가 마비되는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어? 어?아아..." 율허가 울상을 지으며 규하를 돌아보았다. "마비열매야. 생각없이 아무거나 먹으니까 이런일을 당하잖아. 걱정마. 특별히 몸에 이상이 오거나 하지는 않으니까. 이삼일 지나면 혀도 정상으로 돌아올거야. " 율허가 왜 진작 말하지 않았느냐는 듯한 시선으로 자신을 쳐다보자 규하의 눈썹이 치켜올라갔다. "말할 틈도 없이 입안에 넣은 게 누군데 그시선은 뭐냐?" 그래도 율허는 규하를 노려보는 걸 멈추지 않았다가 규하에게 귀를 비틀렸다. 율허는 잉잉잉 거리면서 끝까지 규하에게 원망하는 시선을 보내다가 볼까지 꼬집히고 낑낑거렸다. 율허가 규하의 생선을 맛있게 먹어버린 이후 두사람은 처음부터 그렇게 살아온 사람처럼 같이 살았다. 솔찍히 율허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서 모든 것을 규하가 처리해야 했다. 먹을 것을 찾는 것부터 맹수의 습격을 막는 일. 잠자리를 구하는 것까지 그저 율허는 열심히 규하를 따라다니며 오늘처럼 한두번씩 사고를 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도 율허는 미안한 기색도 없이 당연한 듯이 규하를 부려먹고 있었다. 더불어 사고로 다치거나 이상을 겪을 때마다 미리 알려주지 않았다고 타박까지 하는 것이다. 처음에 규하는 이렇게 뻔뻔할수가.... 주인 허락도 없이 생선을 먹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하고 궁시렁 거렸지만 며칠 지나지않아 적응해버린 자신을 발견하고 좌절하는 규하였다. 자신의 천성이 율허의 시종이 아니였을까도 심각하게 생각해보기도 했다. 율허는 아무리 네 실수로 그리된것이니 나를 원망하지 말라는 규하의 말과 시선을 완전히 무시해버렸다. 큰소리로 야단이라도 칠라치면 입을 삐죽삐죽 내밀고 삐지기 일쑤였다. 가만히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 표정의 다양한 변화에 그만 웃음이 터질것만 같아 규하는 고개만 휙 돌리고 율허에게서 자신의 표정을 숨겼다. 전에 한번은 웃는 걸 숨기지 못하고 들켰는데 율허는 사납게 규하를 노려보더니 아무곳으로나 뛰어들어가 버렸다. 처음에는 별걱정하지 않던 규하였으나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않자 슬슬 걱정이 되어 찾으러 갔었다. 하지만 어디로 간건지 아무리 찾아보아도 찾을 수가 없었다. 길도 모른 게 이디로 간것일까 하는 걱정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않자 무슨일이 있는건가하는 걱정으로 시간이 지나자 이제는 찾기만 하면 울던말던 볼기짝을 때려서 두번다시 이런 짓 못하게 하겠다는 생각도 잠시 곧 아무래도 좋으니 무사하기만 하라고 빌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또한번 좌절하는 규하였다. 그런데 율허가 사라졌던 정반대방향에서 우렁찬 울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고 생각할 무렵 수풀을 헤치고 율허의 모습이 나타났다. 수풀속에서 뛰어나오는 율허의 모습이 정말 가관이 아닐 수 없었다. 눈물에 콧물로 얼굴이 범벅이였고 어디서 굴렀는지 흙투성이에 긁히고 멍든 상처들 그리고 옷은 여기저기가 튿어져 있었고 죽어라고 뛰고 있는 율허의 뒤로는 흑랑한마리가 사납게 으르렁거리며 달려오고 있었다. 그순간 규하가 한생각은 용케도 안잡히고 도망쳤네하는 한가한 생각이였다. 그리고 왜 등뒤 방향으로 뛰어들어간 율허가 앞에서 나타나는 걸까하는 어이없는 생각이였다. 율허는 규하를 발견하더니 십년만에 만난 혈육이라도 만난듯 환호성을 지르며 규하의 등뒤로 숨어들었고 규하는 가만히 서있다가 있는 대로 화가나서 달려드는 흑랑을 처리해야하는 상황에 처했다. 흑랑이 비명에 간후 율허는 규하에게 잔인하다느니 인정도 없다느니 떠들다가 칼자루에 정수리를 맞고 죽어라고 울어댔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율허는 반성이라는 것을 전혀 하지 않았다. 우기고 보자는 것이 신조라도 되는 듯 우기다 안되면 떼를 쓰기 일쑤였다. 그러면서 자신의 잘못은 구렁이 담넘어가듯 스리슬쩍 모르는 척 넘어가서 규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밤이면 당연한 듯 규하의 팔을 베고 눕는 율허의 행동에 규하는 이미 이의를 제기하는 걸 포기한 상태였다. 언젠가 왜 돌아가지 않느냐고 물었다가 돌아갈 수 없다고 말하며 우울해하는 모습을 본 이후 더이상 그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자신 역시 사람들이 시선이 싫어서 도망치지 않았던가. 천인족이나 지계족이나 만월의 축제에 이르러서 대부분의 알을 가지지만 수인족은 그런 개념이 약했다. 인간형을 유지할때야 만월의 축제를 따르지만 짐승형으로 변이한 후에는 일정하게 정해진 것 없이 시시때때로 발정하면 그대로 교미를 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이성과 감정 조절이 잘 안되는 것이다. 달리 이성을 잃고 달려드는 자를 짐승같은 자라 하겠는 가. 규하도 역시 수인족이기는 하지만 그는 수인족 중에서도 이단아로 불리는 자였다. 덕분에 다른 자들에게 흔히 찾아보기 힘든 온화한 성격과 끈기라는 것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라도 성인인지라 자연적인 욕구는 있었다. 율허가 없었을 당시야 보름달이 뜨는 달밤이면 변이하여 다른 짐승을 찾아 교미를 하였지만 왠지 율허가 그의 옆구리를 차지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욕구가 생겨도 쉽사리 변이하여 다른 짐승을 찾는 다는 것이 꺼려져 참고 있었다. 보름에 가까워지자 규하는 율허에게서 달콤한 향기가 나는 것만 같아 식은땀이 흘렀다. 규하가 보기에 율허는 반려를 찾기에 온힘과 정성을 쏟았지만 사실상 지켜본 바로는 교미에는 생초짜에다 별관심도 없어보였다. 그저 둥그스럼하게 밝아오는 달을 보며 한가하게 노래나 부르고 있을 따름이였다. "교미해보고 싶지 않아?" "응?" "반려를 찾는다면서... 교미하고 싶어서 그러는 것 아니냐.'' "반려를 찾는 것하고 교미를 하는 것하고 뭔 상관이 있는 데요?" 율허의 대답에 황당해진건 규하였다. 너무 황당해서 기가막힐 지젹이였다. "교미를 하지 않으려면 뭐하러 반려를 찾는 건데?" "성인이 되면 다들 반려를 찾잖아요. 그래서 내게도 그런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요." 규하는 율허가 참으로 특이한 녀석이라는 걸 다시한번 느껴야했다. "그게 뭐야? 다른 사람들이 해서 너도 그러는 거라니.... 네 반려될 사람이 들으면 서운해 할걸." "흐음.... 반려를 맞으면 그 교미라는 걸 해야하는 건가요?" 심각해보이는 율허만큼이나 규하도 심각함을 느꼈다. "그걸 말이라고 하냐? 도데체 그 나이되도록 그런 것도 모르고 뭘하고 산거냐?" "그건 한번도 ...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 "생각해 본적이 없다고? 그럼 네가 생각하는 반려들은 뭘하고 산다고 생각했는데?" "심심하면 말동무하고 추우면 안고 자고 같이 밥도 먹고 .. 알도 낳잖아요." "장난치냐? 네 말마따나 알은 어떻게 생기는 줄은 아냐?" "누굴 무시하는 거에요? 손잡고 같은 침상에서 자고 나면 생기잖아요." 규하는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혹시나가 역시나였다. 하도 자신만만하게 대답하길래 약간의 기대를 했건만 ... "너 바보지?" "뭐라구요? 사람을 무시해도 분수가 있지 이래뵈도 학자라 불리고 모르는 게 없다는 소리 듣고 살았다구요. 그까짓 알이야 낳아보지 않았으니까 모를 수도 있잖아요." " 그럼 왜 다른 자들은 낳아보지 않아도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을 모르는 건데?' 할말을 찾지못한 율허가 자신을 바보라고 단정짓는 규하에게 반박하지 못하자 분해서 숨을 몰아쉬었다. 지식에 관한한 남들보다 뛰어나다고 자부하고 있었는 데 규하의 말을 듣고 있자니 세상에 자신같은 바보는 없다는 듯이 말하고 있질않은가. "그 ,..그런 쪽으로는 들은 것이 없어서 모를 수도 있는 거에요." "듣는다고 알수 있을 까?" "알수 있어요." "그래 그럼 입맞춤은 ? 입맞춤 해본 적 있어?" "없지만 어떻게 하는 줄은 알아요." "정말? 모르면서 아는 척 하는 거 아니야? 무시하지 않을 테니까 솔찍히 말하지 그래" 율허가 벌떡 일어나더니 규하게게 성큼 다가와 규하의 얼굴을 두손으로 감싸고 입을 맞추었다. 규하의 예상대로 율허는 그저 입술과 입술을 살짝 대었다가 떼는 것으로 의기양양해서는 규하를 쳐다보며 어떠냐고 묻는 시선을 하였다. 규하가 픽 웃자 눈썹을 찌푸리며 규하를 도발하였다. 규하가 손을 내밀어 그의 허리를 끌어당기자 고개를 갸웃하면서 순순히 따라왔다. "그게 반려사이에 하는 입맞춤이라고 생각하는 거냐? 진정으로 반려를 맞이하고 싶다면 기본적인 것은 알고 있어야 하잖아. 가르쳐줄까?" 율허는 규하의 말의 함정을 눈치채지 못하고 고개를 떨어져라 끄덕였다. 규하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를 건드린느 느낌에 양심이 조금 찔렸지만 율허가 어린아이가 아니며 언젠가는 알게 될 거 안전하게 자신이 가르쳐 주겠다는 생각을 하며 그 양심이라는 것을 잠시 바닥에 묻어버리고 발로 꾹꾹 밟아버렸다. "좀전에 한건 어린아이들이나 하는 거고 성인된 자들은 이렇게 하는 거야?" 규하가 율허가 놀라서 도망치지 못하게 허리를 끌어안고 입술을 겹쳤다. "입을 열어." 멍하니 있는 율허는 규하가 혀를 내밀자 놀라 입을 꾹 닫아버렸고 규하는 달래듯 속삭이며 율허가 입을 열기를 재촉했다. 율허는 잠시 망서리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고 규하는 살며시 혀를 밀어넣어 율허의 혀를 잡아갔다. 혀가 서로 엉키자 율허가 움찔 놀라며 허리를 빼려고 하는 걸 모르는 척 규하는 놓지 않고 달래듯 등을 쓸어주었다. "괜찮아. 도망가지마 . 성인이라면 누구나 알아야 하는 거니까. .." 율허는 두려우면서도 달래는 듯한 규하의 말에 조심스럽게 규하의 혀를 받아들였다. 율허는 가장 기본적인 것도 몰랐다. 갈수록 깊어지는 입맞춤에 숨도 제대로 쉬지못하고 헐떡이면서도 지기 싫은 지 물러서지 않고 이제는 규하가 하는 대로 따라하려고 하여 규하를 당황시키고 있었다. 작은 신음소리나 움찔거리는 몸짓에 규하는 오히려 자신이 율허에게 유혹당하는 기분이 들어 미칠지경이였다. 자신의 몸을 감고 있는 율허의 손에 힘이 풀리는 걸 느껴서야 간신히 율허를 자신에게서 떼어놓고 규하역시 거칠어진 숨을 몰래 몰아쉬었다. 속으로는 정말 큰일낼 사람이군하는 감탄과 함께.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무너지려는 율허를 부축하며 규하가 괜찮은 척 미소지었지만 그역시 처음처럼 흥분해 있었다. "이게 반려나 교미상대에게 하는 입맞춤이야. 어때?" "나 이상해요.. 가슴이 막 두근거리고 무릎에 힘이 들어가지않아." 너무 솔찍한 것이 또한 규하를 자극하고 있었다. 얼굴을 붉히며 어쩔줄 몰라하는 모습에 규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처음에야 아무것도 모르는 율허를 놀려주고 싶은 심정에 율허를 도발하였지만 지금은 괜한 짓을 한것만 같아 후회되었다. 참을 수 있을 줄 알았는 데 그러기에는 율허의 모습이 너무 유혹적이였다. 평소에 고집부리고 우기고 떼를 쓰던 모습이 아닌 수줍은 듯 얼굴을 붉히며 규하를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하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웠다. 당장에라도 눕히고 그 몸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싶어 가슴이 뻐근해지고 있었다. 달빛에 보석처럼 빛나는 검고 아름다운 머리카락이 은어처럼 율허의 몸에 감싸고 있는 모습은 견디기 힘든 유혹이였다. 좀처럼 식혀지지 않는 열기에 견딜수가 없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율허가 따라 일어섰다. "여기 있어 .. 금방 다녀올게." 차라리 평소처럼 까불고 빈정거렸다면 이정도로 괴롭지 않았을걸하는 생각을 하며 규하는 호수로 달려갔다. 차가운 물에라도 몸을 식히지 않으면 긴장을 늦추는 순간에 율허를 범하고 말 것만 같았다. 달빛을 받은 검은 호수는 은가루를 뿌려놓은 듯 반짝이고 있었다. 옷을 벗어던지고 물로 뛰어든 규하는 오싹하도록 차가운 느낌에 몸을 떨었다. 하지만 한번 흥분한 몸은 차가운 호숫물에도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자신으로 인하여 일어난 파문이 가라앉을 때까지 온몸을 담그고 있던 규하는 더이상 숨을 참을 수가 없어서야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자신의 몸에서 떨어지는 물방울로 인하여 호수의 반짝임이 더 빛을 발하였다. "역시 사람들의 말이 맞았군요. 보름달이 뜨는 날 지상의 만월의 호수에 가면 당신을 만날 수 있다더니..."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화려한 옷을 입은 암컷이 서서 규하를 쳐다보고 있었다. "저는 은호족의 사강이라 하옵니다." 하며 우아하게 예를 올린다. "은호족의 사강께선 이곳까지 어인일이신가?" "당신의 상대가 되고자 찾아왔습니다. 천상계로 돌아오지 않는 당신을 위해 달마다 원하는 자들 중에 한명이 교미의 상대로서 지상에 내려오기로 결정이 났습니다. " 하며 몸에 걸치고 있는 화려한 옷을 벗고 규하가 서있는 물속으로 다가오더니 규하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그가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던 규하가 잠시후 몸을 비벼대며 유혹해오는 그를 밀어내버렸다. "미안하지만 그대는 그리 유혹적이질 않군." 규하가 돌아왔을 때 율허는 스스로 모닥불이 꺼지지않도록 나뭇가지를 더 넣은 후 그가 돌아오기전에 자고 있었다. 규하는 한쪽에서 웅크리고 자고 있는 율허에게 다가가 그 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예전의 자신이라면 유혹해오는 상대를 밀어내지 않았을 텐데 그가 자신을 유혹해왔을 때 울고 있는 듯한 율허의 얼굴이 보이는 것만 같아 그때까지 가라앉지 않았던 흥분이 그의 유혹으로 가라앉아버렸다. 그리고 못견디게 율허가 보고 싶어졌다. 당황하는 그를 지나 뭍으로 나와 옷을 입은 규하는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제 나는 홀몸이 아니니 굳이 교미상대를 보낼 필요가 없다고 전해주구려.그럼." 모닥불로 돌아오며 규하는 홀가분한 기분으로 율허를 잘 가르쳐서 교미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작은 몸을 안고 있는 자신을 떠올리자 가슴이 두근거리고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였다. 하아.. 단단히 빠졌군.... "잘자라. 꼬마.." 규하는 율허가 깰까봐 그대로 둔체 그 옆에 누웠다. 다음날 규하는 허전한 느낌에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며 그 원인을 찾았다. 항상 자신의 품에 있었던 율허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먼저 깨어난 율허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뭐...뭔일이지?" "언제까지 규하에게 의지할 수는 없으니까 오늘부터 여러가지를 배우려구요." 그동안 심술궃고 어리광만 부리던 모습은 어디로 사라진건지 찾아볼수가 없었다. 평소에는 찾아볼수 없었던 침착함만이 그자리를 메우고 있엇다. 무슨 꿍꿍이 속이 있는 건 아닌가 조심스럽게 살펴보았으나 특별히 그런 점은 없었다. "아무것도 모른다고 놀려서 화난거야?" 떠보는 듯한 규하의 말에 대한 율허의 반응은 평소의 난투질이 아니라 어른스런 미소였다. "이제는 어린아이같은 행동은 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잘 부탁합니다." 흥분하지 않는 율허하니 ... 규하는 그런 율허가 너무나 이상했다. 왠지모르게 거리를 두는 듯한 율허의 태도가 자꾸 규하의 신경을 건드렸다. 분명 더이상 떼를 쓰거나 억지를 부리지 않겠다는 말이 반가워야 할텐데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처럼 허전하기만 했다. 예를 갖추어 말하는 모습에 가슴 언저리가 따끔거렸다. 하지만 저 어린아이같은 성격으로 얼마나 버틸까싶자 조금 어디 두고보자 하는 심정이 되어 마음이 편해졌다. 오래지 않아 포기하고 떼르 쓰거나 징징거릴거라 여겼던 율허는 규하가 놀랄 정도로 잘 견디어내었다. 물고기를 잡는 법부터 초막집을 짓는 법 , 먹을 수 있는 과일과 뿌리를 찾아내는 법등 건성으로 듣는 법없이 필사적으로 배워나갔다. 열매를 따다가 나무에서 떨어져도 미리 경고해주지않았다고 규하에게 억지를 부리는 법도 없었고 팔다리에 벌레를 물려도 울면서 어린양을 부리던 행동도 없어졌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변화는 밤이 되어도 규하 곁으로 오지 않는 다는 것이다. 추워서 오들오들 떨면서도 일정한 거리를 두고 다가오지 않았고 규하의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먼저 일어나 규하가 하던 일을 하기도 했다. 율허의 몸에 상처가 하나둘 늘어가고 수척해질수록 규하의 기분도 최악을 달리고 있었다. 율허도 잘 웃지 않고 진지해질수록 규하의 얼굴에서도 웃음이 사라졌다. 잠결에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눈을 뜬 규하는 아직 모닥불이 꺼질때가 되지 않았는 데 율허가 일어나자 살며시 율허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율허는 조심스럽게 일어나더니 모닥불에 나뭇가지를 몇개 더 던져넣고 숲속으로 향해 걸어갔다. 살며시 일어나 그 뒤를 따라갔더니 율허는 호숫가로 가고 있었다. 몇번을 가르쳐주어도 길을 잃어버리더니 용케도 길을 잃어버리지 않고 제대로 찾아가고 있었다. 가끔 헷갈리는 듯 망서리다가는 바닥을 살피고 다시 바른 길로 가고는 하였다. 규하는 율허가 갈등하던 자리에 와 자세히 바닥을 들여다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바닥에는 작은 돌무더기로 방향이 표시되어있었다. 규하는 어쩐지... 하면서도 이런식으로 힘들어하면서도 굳이 홀로서기를 하려는 율허의 행동에 화가 났다. 그렇게 까지 자신에게서 떨어지려고 하는 건가 싶어 서운한 마음도 들었다. 그냥 돌아가 버릴까 하다가 발길을 재촉해 계속 미행을 하였다. 호숫가에 앉아 하현달이 되어가는 달을 보며 율허가 울고 있었다. 큰소리로 울지도 못하고 소리죽여 울면서 발바닥에 무언가를 바르고 있었다. 한참을 끙끙거리며 약초인 듯한 즙을 바그더니 절뚝거리며 호숫가로 다가가 물로 얼굴과 손을 씻어내고 있었다. 낮에는 물론 저녁무렵에도 한번도 절뚝거리는 모습을 본 적이 없던 규하로스는 혼자가 되어서야 아픈발을 치료하며 절뚝거리는 율허의 모습에 가슴이 미어지는 한편 더이상 참을 수가 없음을 알았다. 율허는 갑자기 나타난 규하의 모습에 기겁을 하였지만 곧 표정을 굳히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였다. 규하는 그런 율허를 무시하고 율허에게 다가가 율허가 감추려고 하는 발목을 잡아 발바닥을 살펴보았다. 율허의 발바닥은 이런 상태로 어떻게 걸었나 싶을 정도로 무언가에 다쳐있었다. 규하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를 참을 수가 없어 율허의 어깨를 잡고 사납게 흔들었다. "너 바보냐? 응? 왜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지 못하는 데? 왜 애써 숨기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는 건데? 그렇게 내게서 떠나고 싶어? 내가 그렇게 싫으면 천상계로 돌아가면 되잖아. 왜 이러고 고생을 자초하는 건데?" 거침없이 쏟아지는 규하의 질책과 비난에도 율허는 한마디도 못하고 듣고 있기만 했다. "돌아가버려. 지상에 남아 있지 말고 돌아가버리라구." "못가..." "뭐?" "뭇간다구요. 난 여기서 살아야 한다구요. 으아아아앙..." 율허는 서럽게 울어댔다. 너무나 슬프게 울어대서 규하는 율허를 끌어안고 토닥여주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원인을 알아내기전에 물러저서는 안된다는 생각으로 약해지려는 마음을 달래었다. "왜?" "내가 ...가면 . 많은 사람이 죽어요.. 사람들이... 아주 많이 .. 죽게 된다구요...." 밑도 끝도 없이 사람들이 죽는다고 하니 규하는 답답해 미칠지경이였다. 도통 율허가 무슨소리를 하는 건지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돌아가지 않으면 혼자서 어떻게 살아가려구... 이렇게 다쳐서 혼자서 울면서 살거야? 백택이나 흑랑이 공격하면 또 어떻할건데?" "그래도 돌아갈 수 없어요." "그럼 왜 혼자서 살려는 하는 건데? 왜 내게서 떠날려는 건데?' "......" "화내지 않을 테니까 솔찍하게 말해. 내가 뭐 잘못한 거라도 있어?" "아니에요. 규하는 잘못한 거 없어요. 오히려 규하에게 감사하고 있는 걸요." "그럼, 왜 갑자기 혼자 살려고 하는 건데? " 머뭇거리던 율허가 무어라고 작은 소리로 웅얼거렸지만 하도 작은 소리라 규하는 제대로 들을 수가 없었다. " 뭐라구? 못 들었는 데?" "흐흑흑... 규하는 ... 반려가 있잖아요."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반려가 있다니..." "저번에 봤단 말에요. 규하가 처음으로 반려끼리 하는 입맞춤을 가르쳐주었을 때 호숫가에서 그사람이랑 입맞춤하는 것 봤다규요..." 한참 멍하니 율허가 한말을 되새기던 규하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그말을 듣는 순간 그동안 율허가 무슨 생각을 했고 또 무슨 생각으로 홀로서기를 하려고 있는 지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뒤로는? 뭘 더 봤는데?" 왜 웃냐는 듯한 사나운 율허의 시선에도 규하는 웃음을 멈출수가 없었다. 그리고 혼자서 고민하고 괴로워했을 율허가 미칠지경으로 안쓰러워 꼭 끌어안고 위로해주고 싶어졌다. "더는 안봤어요. 화가 나서 돌아와 버렸다구요." "왜 화가 났는데?" "몰라요 그냥 가슴이 꽉 막히고 눈물이 날 것 같아서... 하여간 규하가 너무 미워서 보고 싶지 않았어요." 여전히 울면서 노려보는 것도 멈추지 않고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에 규하는 가슴이 설레고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혼자서 오해하고 어떻게든 자신에게 폐를 끼치지 않겠다고 다짐했을 율허의 필사적인 행동이 떠올라 가슴이 아팠다. "그사람 내 반려가 아니야.'' "거짓말." "거짓말 아니야." '하지만 규하가 그사람에게 반려의 입맞춤를 했잖아요." "율허도 했잖아." "엣?" "율허도 나랑 반려의 입맞춤했잖아." "그건 규하가 내가 모른다고 하니까 가르쳐준거잖아요." "그사람도 그런거라면?" 솔찍히 거짓말이지만 율허를 납득시키는 것이 너무 요원하여 이런식으로 둘러댈수밖에 없었다. 율허의 조금씩 밝아지는 얼굴을 보니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거라면 하지 말아요. 여기가 아프다구요." 하며 자신의 심장위를 가르키는 율허의 모습에 규하는 그만 참지 못하고 율허를 꼭 끌어안았다. 율허가 숨막히다고 해도 놓아주지 않았다. "하지만 하고 싶어지면 어쩔수가 없잖아..." "내가 해줄게요.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랑 하지 말아요." 저말이 유혹이라는 것을 아는 건지 무서운 줄 모르고 내뱉는 말조차 사랑스러운 규하였다. 규하는 율허가 자신이 한말이 유혹이라는 걸 모른다는 것에 전 재산을 걸 수도 있었다. "그럼 철 든 어른처럼 참는 거 하지 않을 거야? 억지로 견디려고 하지 않을거지?" "그게 싫었어요?" "응. 꼭 버림받는 기분이였거든." "규하는 참 이상한 사람인 거 알아요? 내가 귀찮게 하지 않으면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닌가? 나같으면 좋아하겠구먼." "아직 어린 놈은 그런 거 몰라도 돼." "흥." 콧웃음을 치며 고개를 팩 돌려버리는 모습에 규하가 웃으며 쥐어짜듯 율허를 꼭 끌어안고 흔들어댔다. 율허가 하지 말라고 짜증을 냈지만 규하는 멈출수가 없었다. 하여간 심장 떨리게 하는 데는 일가견이 있다는 생각에 안도의 숨도 내쉬며 입을 맞추자 율허가 피하기는 커녕 두손을 들어 규하의 목을 끌어안고 적극적으로 달려들어 규하를 흥분시켜버렸다. 자주는 파라에게 자신의 몸을 먹기를 바랐지만 파라는 거부하였다. 그러자 자주는 이방은 자신의 몸이 사라지지 않는한 영원히 밀폐되어 있을 거라고 경고하였다. 이미 파라가 자신의 부탁을 거절할 줄 알고 결계를 걸어두었다고 한다.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없는 상황의 밀실에서 파라가 살기 위해서는 자주를 먹는 방법밖에 남겨두지 않은 것이다. 하루가 지나갔다. 파라는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자주를 외면하고 있었다. 자신이 나타나지 않으면 자주의 재사라도 나타나 외부에서 문을 열어줄거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은 것이다. 자주는 자꾸만 문을 쳐다보는 파라의 모습에서 그의 생각을 눈치채고 한숨을 내쉬었다. "문은 열리지 않을 것이네. 이미 재사와 수신호위들은 나의 뜻을 알았고 동의 하였으니까.별도의 행동은 없을 것이라는 걸 장담하지."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 겁니까? " " 이만 포기하게, 나라고 자네에게 짐을 지워주고 싶지는 않지만 어쩔수가 없구먼.지금 자네의 힘으로는 그의 손에서 월아를 구해내기는 커녕 접근할 기회마저 얻기 힘들것이네. 그나마 내 힘을 받아들인다면 가능성이 있기는 하겠기에 결정한 일일세." 역시 파라는 비월의 이야기만 나오면 약해지고 말았다. 그러나 쉽사리 자주의 권유를 받아들이기에는 그의 감성이 이성을 넘어서지 못했다. 하루가 지나고 다시 날이 저물때까지도 고집을 부리며 자신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파라의 고집에 자주는 한숨만 내쉬었다. 차라리 훈바에게 힘을 줄까도 생각해보았지만 그 천방지축에게 비월의 미래를 맡기자니 불안하기만 했다. 비월을 구해내기는 커녕 일만 더 크게 만들것만 같은 예감에 고개를 저었다.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어쩌면 마지막 보게되는 달은 아닌지 감상에 젖어있던 자주는 공복과 갈증으로 지쳐 잠이 든 파라가 소리없이 일어서자 고개를 돌렸다. 파라를 돌아본 자주는 흠칫 놀라며 자신의 피부를 자극하는 이질적인 느낌에 긴장했다. 서서히 고개를 든 파라가 자주를 보며 미소지었다. 순간 자주는 온몸이 싸늘하게 식는 것같은 느낌을 받았다. 파라의 입술은 얼은 것처럼 창백했고 안색 역시 핏기라고는 전혀 찾아볼수없을 정도로 냉기가 가득해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주의 신경을 건드리는 것은 그 생기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차가운 눈동자였다. 그 눈은 죽은 자의 눈이였다. 파라가 자주를 보더니 미소지으며 서서히 다가왔다. 파라가 자신에게 다가오자 자주는 무의식적으로 검을 소환하려다 피만 토해내고 그제서야 이제 자신에게는 검이 없음을 인식하였다. "넌 파라가 아니구나.!!!!" "섭한 말씀... 저는 파라가 맞습니다." "이 요사스러운 기운이 진정 파라의 것이란 말이냐?" "낮의 파라도 저고 밤의 파라도 저이지요. 기생벌레에 당한 후 사라져가던 생기가 머물던 자리에 사기가 들어선 것 뿐이랍니다. 사기로는 밝은 태양아래 설 수 없어 다른 자들의 생기를 훔쳐 연명해나가는 생활이 된 것이지요. 낮의 파라는 밤의 저를 모르지만 저는 그를 알고 있지요." "설마..." "다른 자들은 모르지만 어쩌면 당신은 기억하고 계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신의 동생이 저에게 유혹당해 자진한 적이 있으니까요. 너무 오래전 일이라 잊어버리셨는지요." "말도 안되는 ... 어떻게 이런 일이... 어떻게 파라에게 네가 ..." "태천제께서 부활하셨는 데 그와 동시에 봉인된 십이천이족이 그대로 있을 거라고 안심하고 계셨던 건 아니지요? " "방의 천이족 강황!!!!! 네놈이 감히.... " "천년전 사실 무지 아쉬웠지요. 당신의 동생이 그렇게 쉽게 자진해버릴 줄은 몰랐거든요. 그 당시에는 그만큼 매혹적인 사냥감은 드물었는데. ... 좀더 놀다 그 힘을 완전히 흡수하려 했었는데 그 몸은 누가 가져갔나요? 설마 소멸시키지는 않았을 테지요? 순수월족은 소멸되면 두번다시 환생하지 못한다고 하던데 그냥 소멸시켜버리는 그런 아까운 짓을 하시지는 않았을 것이고.... 그 당시 소문으로는 월족이 아닌 아이가 월궁에서 살았다고 하던데 그아이에게 주었나요?" 자주는 자신에게 힘이 없을 지금처럼 아쉬워하고 안타까운 적이 없을 정도로 분노하고 있었다. 자신의 어린 동생... 팍 피어나기 시작한 작은 동생을 그는 잔인하게 유린하고 그 몸에 자신의 흔적을 새겨넣었다. 유달리 섬세하기만 하던 동생은 그걸 견디지 못하고 자진하였다. 그 죽은 몸에서 발견한 강황의 소유인들.... "어떻게 파라의 몸에 네가 들어간것이냐?" "그가 원했으니까요. 막 봉인에서 풀려나와 육체가 없는 저의 영혼을 불러들인 건 힘을 원하는 그였답니다. 그 염원이 너무나 간절하여 저도 모르게 끌려가고보니 그의 몸에서 부활하게 되더군요. 당신은 잘모를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태천제와는 달리 한번 봉인된적이 있는 검의 경로를 따라 다시 봉인되었었지요. 내가 당신의 검에 봉인된 것은 참 얄궃은 일이였습니다. 지금 쯤이면 또다른 자들도 부활하기위해 힘을 원하는 자들을 찾고 있을 테지요." " ......" "혹여 지금 잠이 든 파라를 깨우시려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는 지금 자신이 밤에 저지르고 있는 만행을 모르고 있답니다. 그것을 알게되면 다정다감한 그가 견디어 낼까요? 그렇다고 밤의 일을 멈추어버린다면 낮의 파라는 완전히 소멸되어 버리겠지요. 저야 어차피 그가 소멸하든 말든 밤의 생활은 유지할 수 있으니 아쉬울 것이 없지요. 그러니 궁주께서는 당신의 힘을 저에게 주셔야 겠습니다. 아쉬울 것 없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나으니까요. " 자주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처음으로 자신이 자신의 마지막 호흡을 걸고 결계를 친것을 후회했다. 다른자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인 지금 그를 이길 확율은 없었다. 그렇다고 고스란히 그에게 자신의 힘을 주자니 태천제에게 힘을 실어주는 꼴이 아닌가. 그럴바에는 스스로를 소멸시키는 것이 나았다. "당신이 지금 힘을 주지않으면 낮의 파라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계속 사람을 죽여갈텐데 그래도 되나요?" 자주의 생각을 들여다보는 듯한 교활하기 그지없는 강황을 노려보았다. 그는 분명 자신이 힘을 얻어 더이상 사람들이 생기가 필요없어도 밤이면 사람들의 생기를 빠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힘을 주지 않으면 언젠가 파라의 영혼은 영원히 소멸되고 말것이다. 무엇이 옳은 일인지 왜 하필이면 강황인지 고민하고 있는 순간 어느새 다가왔는 지 강황의 손이 자주의 가슴을 파고 들었다. 갈고리 같은 손이 가슴을 파고 들어 심장을 움켜쥐는 것을 느끼면서도 자주는 그걸 막을 수가 없었다. 강황의 손의 감촉을 느끼며 자주는 격한 신음소리를 터트렸다. 희열에 차 신음하는 강황의 모습을 보며 자주는 마지막 주문의 외웠다. 월족의 마지막 힘이여. 흑호족의 파라에게 비월이라는 이름으로 제약을 건다. 자주의 검은 머리가 백발로 세어가고 강황은 너무나 강렬한 느낌에 이성을 잃고 전율하느라 자주의 마지막 주문을 듣지못했다. 아름답던 자주의 몸이 쭈글쭈글 생기를 잃어갔고 곧이어 마른 나무토막처럼 물기를 잃은 후 산산히 흩어지자 강황이 웃음을 터트렸다. 자주의 모습이 완전히 공기중에 사라지자 공기중에서 쩌저정 거리는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나더니 그토록 단단하게 닫혀있던 문이 소리도 없이 열렸다. 문이 열리자마자 강황의 표정이 180도로 바뀌었다. 문밖에는 장로와 재사 그리고 수신호위들이 침통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중에는 우는 자들도 있었지만 누구도 파라의 몸을 하고 있는 강황에게 달려들지 않았다 이미 자주에게 들어서 일이 어떻게 될 것이라는 걸 들어 알고 있었던 것이다. 강황의 얼굴에는 어느새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재사가 다가와 그를 끌어안고 위로를 해주는 동안 어깨를 들썩이며 우는 강황의 감춰진 눈속에 가득한 것은 비웃음이였다. 14. 율연이야기. 의식이 돌아온 다하는 창밖으로 보이는 밝은 달의 모양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세상의 모든 것을 감싸줄 듯 은은한 달빛이지만 그 달을 보는 다하의 가슴은 먹먹해지고 있었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 너무 아파서, 그리고 너무 슬퍼서 영원히 소멸되기만을 기도하고 기원한 적이 있었다. 태어날때부터 알고 있는 영원 결계주문은 혀가 잘려나간 순간 다하에게서 멀어져버린 주문이였다. 마지막 순간마저도 스스로 결정할 수 없었다. 언제쯤 전의 기억이였을까 왜 하고 많은 기억중에 그때의 기억이 돌아와 버린 것일까. 누군가 자신에게서 그 때의 기억만 가져가 준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신은 언제나 자신의 편이 아니였다. 그토록 영원히 소멸되기를 두번다시 태어나는 일이 없기를 바랐건만 그때나 지금이나 신은 그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았다. 태어난 순간마저도 말을 하지 못하는 벙어리로서 영원결계주문조차 외울 수 없는 상태로 태어났다. 자신에게는 더이상 견디어낼 수 있는 힘도 이성도 없었다. 오로지 원하는 것은 다시 영면에 들어 영원히 깨어나지 않는 것... 달을 쳐다보는 다하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제발 나를 죽여줘!!!!! 자신의 몸에서 빠져나가는 가토의 움직임은 그저 율연에게는 고통일뿐이였다. 율연은 억눌린 비명같은 신음을 터트리며 배려없이 거칠게 빠져나가는 가토의 움직임에 꿈틀거리며 어떻게든 고통을 줄여보려고 몸을 웅크렸다. 가토는 자신의 욕구를 채우고 나면 더러운 듯 율연을 밀쳐내고 일어서버렸다. 피와 정액에 젖어 바닥에서 일어나지도 못하는 율연을 돌아보는 일도 없었다. 돌아서서 씻으러 가버리는 가토의 뒷모습을 보며 율연은 울음이 터질것만 같아 입술을 깨물고 눈을 감았다. 동창너머 너무나 밝은 달이 비참하게 쓰러져있는 율연을 비추고 있었다. 이곳으로 끌려와 가토의 계속되는 유린과 묘하게 상처입히는 빈정거리는 말에 몸도 마음도 성한 곳이 없었다. 그는 율연에게 어차피 죽을 몸이지만 너무 쉽게 죽으면 안된다며 세상의 괴로움이 무엇인지 새겨주겠다고 했다. 오직 그를 만나기만을 고대하며 버티어온 나날이였지만 겨우 만난 그는 자신을 증오한다고 했다. 그가 자신과 같은 피가 흐르는 형제라는 사실을 모를때도 아름답고 강한 그를 동경하였고 그가 자신의 형제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세상의 모든 것을 얻은 것처럼 기뻐하였건만 그는 자신은 물론 그를 낳아준 사람까지 증오한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과 그가 형제라는 사실을 다른 자들이 알게 된다면 태어난 것을 증오하게 만들어 준다며 자신의 손가락을 꺽고 혀를 잘랐다. 지금도 그때 꺽인 손가락 세개는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해 아차하면 물건을 떨어뜨리고 놓치기 일쑤였다. 사람들은 그를 가토의 애첩이라고 생각했다. 특별히 눈에 띄는 외모도 아니고 요염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이렇다할 매력이 있는 것도 아닌 그를 노리개로 삼은 가토의 취향에 수근거리고는 하였다. 아무도 가토가 다만 율연을 괴롭히기 위해 아무런 배려없이 안는다는 것은 몰랐다. 그래서 사람들은 율연을 부러워했다. 혹여라도 총애가 계속되어 반려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가토에게는 반려예정자가 있었다. 일천궁주의 자식으로 후계위에 오르기에 너무 약해서 가토와 반려의 예를 올린 후 가토가 반려자로서 일천궁주위에 오르도록 약조가 된 상태였다. 너무나 약하지만 그맘큼 가련하고 아름다우며 착한 연요라는 소중한 사람이 가토에게 있었던 것이다. 차마 약한 연요를 함부로 안지 못하고 욕구가 생길때마다 율연을 대신 안는 것이다. 가토는 그 사실을 율연에게 전혀 숨기지 않았고 언제나 욕구를 해결하고 나면 율연이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든 말든 신경쓰지 않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율연은 문밖으로 사라져가는 가토의 뒷모습을 힐끗 훔쳐보며 저려오는 가슴의 통증에 서글픈 미소만 지었다. 그 뒷모습을 볼때마다 자신을 안아주며 그의 이야기를 해주던 사람을 떠올렸다. 자신을 대신하여 그를 찾아달라던 그사람. 혹여라도 만나게 되면 보살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용서해달라고 그리고 사랑한다고 전해달라고 말하던 그 사람. 언제나 그가 걱정하고 안타깝게 생각하며 그리워한 사람은 옆에 있던 자신이 아닌 가토였다. 자신이 아무리 그만 바라보고 그의 애정을 갈구하여도 그는 자신을 돌아봐주지않았다. 그의 마음은 언제나 이제는 볼 수 없는 가토를 향해 있었다. 처음에는 무작정 탁제균을 찾아 일천궁으로 들어와 탁제균을 만나 가토를 찾는다고 하자 그는 율연을 위아래로 훓어보더니 누군데 가토를 찾느냐고 물었다. 자신은 가토의 동생이라고 하자 탁제균이 의심스런 시선으로 가토에게 동생이 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다고 율연을 지하감옥에 가두었다. 금방 오해가 풀려 지하감옥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지만 좀처럼 오해는 풀리지 않았고 지하감옥에서 두달여동안 갇혀있다가 일하는 노예로 지하감옥을 벗어났다. 율연은 어떻게든 다시 탁제균을 만나 오해를 풀어보려 했으나 내궁으로는 들어갈 수 없었다. 그리고 자꾸만 딴청을 피우고 게으름을 피운다는 이유로 채찍질과 노예의 낙인을 받았다. 율연이 하는 일은 노예중에서도 가장 낮은 신분의 노예가 하는 가장 지저분하고 힘든일이 주어졌다. 동물의 분뇨를 처리하는 일부터 온갖 지저분하고 더러운 일들이 율연이 하는 일이였다. 오로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언젠가는 가토를 만날 수 있다는 일념하나였다. 처음에는 그 역겨운 냄새에 구역질도 하고 음식도 먹지 못했지만 매에는 장사없다고 오래지않아 매맞는 것이 두려워 참기시작하자 일은 익숙해졌고 역겹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피곤에 절어 머리만 대면 아무데서나 잠을 잘 수 있을 정도로 적응을 하였다. 그러면서도 가토만 만나면 이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은 버리지 못했다. 일년 정도가 되어갈 무렵 율연이 분뇨지기라 불리고 있을 때 탁제균이 자신을 찾아왔다. 그가 지저분한 그를 그대로 데리고 간곳은 그토록 가보고 싶어하던 내전이였다. 그 중에서도 고급스런 장식이 되어 있는 방으로 그를 데려간 탁제균이 뒤에서 문을 닫았다. 그 방에서 율연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가끔 노예들이 있는 곳이 지나갈때마다 노예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동경해하던 사람이 서 있었다. 일천궁의 소궁주라는 사람이였다. 그리고 율연은 그가 자신이 찾고 있는 가토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그 사실은 율연에게 충격이며 기쁨이였다. 율연은 너무 기쁘고 반가워 그동안 고생한 것을 모두 잊어버릴 정도로 어쩔줄을 몰라했으나 율연을 쳐다보는 가토의 표정은 차갑고 날카롭기만 했다. 마주선 두사람은 너무나 비교되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강하고 눈이 부실정도로 아름다운 가토와 비해 율연은 비쩍 마르고 볼품없고 상거지가 따로 없을 정도로 초라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율연이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가토에게 그사람의 이야기를 하였다. 끝까지 이야기를 듣고 있던 가토가 율연에게 다가오더니 입을 열라고 했고 아무 의심없이 시키는 대로 한 율연은 영원히 말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부들부들 떨고 있는 율연에게 그제서야 가토는 입을 열었다. "나의 아버지를 죽인 네아버지를 증오한다. 나의 아버지를 죽인자에게 몸을 판 그를 증오한다. 그리고 두사람의 소생인 너를 증오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내게 독을 먹이고 태연하게 돌아선 네 아버지를 용서하지 못한다. 내가 살아있는 한 그들의 핏줄은 영원히 안식을 잃을 것이며 피눈물을 흘릴 것이다. 살아있는 것을 증오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 가토의 차갑고 증오서린 말에 율연은 의식을 잃으며 세상에 대한 어떤 기대도 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언젠가 그를 만나기만 하면 모든 고생이 끝나고 행복하게 되리란 기대를 접었다. 깨어났을 때는 자신이 일하던 곳이였다. 꺽여서 퉁퉁부어있는 손가락과 피고름을 쏟고 있는 입안의 상태가 이것이 현실임을 인식하게 만들었다. 멍하니 빗물이 새는 천장을 보며 율연은 조용히 눈을 감고 모든 희망과 기대를 버렸다. 그저 시간이 흘러가는 대로 고되면 고된대로 열심히 버티어내다가 정 견디어내지 못하면 영면에 들기만을 기다렸다. 모든 희망과 모든 기대를 버리자 주위의 어떤 것도 율연을 슬프게 만들지도 괴롭게 만들지도 못했다. 오히려 몸이 고될수록 마음은 편해졌다. 모든 것을 초월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궁으로 불려갔다. 깨끗하게 씻기고 부드럽고 아름다운 옷이 입혀지고 먹음직스런 음식이 나왔다. 율연은 꼭 전에 아버지가 찾아올때마다 시종이 벌이던 가식적인 놀이가 떠올랐다. 그리고 아버지가 떠나면 그 화려하고 아름다운 옷은 벗겨지고 허름하고 낡은 옷과 고된 일만이 남아있어 괴롭게 만들던 시절이 떠올라 안심할 수가 없었다. 좀처럼 마음을 놓지못하고 불안해하자 탁제균이 나타나 이제부터 고생할 필요가 없으며 두번다시 그곳으로 가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기대하지 않으리라 굳게 다짐했건만 따뜻하고 편안한 잠자리와 맛있는 음식들이 날마다 계속되자 긴장이 풀리고 내궁생활에 조금씩 적응을 하게 되었다. 기대하지 않으려는 율연을 가토의 증오가 사그러들었나보다고 느낄정도로 안심시키고 자신을 믿고 의지하게 만들더니 그 기대를 유린이라는 이름으로 무너뜨렸다. 어두운 밤이면 비참한 자신의 자신의 몸을 볼 수 없어 서글펐고 오늘처럼 밝은 달밤이면 그에게 마음을 줘버린 자신의 어리석음과 더이상 상처받을 것이 없을 거라고 믿었던 자신의 어리석음에 더이상 찢어질것도 없이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심장으로 울수 없어 웃었다. 아무리 발버둥쳐보았자 애초부터 자신은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할거라는 걸 깨닫자 웃음이 나왔다. 오직 한사람만을 바라보던 아버지에게 자신은 원하지 않던 부산물이였으며 오직 가토만 그리워하던 그사람에게는 그저 자신은 가토의 대용품이였고. 아버지가 같은 형제에게는 자신의 어머니를 슬프게 한 자의 조각으로 어머니가 같은 형제에게는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자의 증오스런 조각일 뿐이였다. 다하는 자신이 이세상에 태어난 이유를 알수가 없었다. 그저 숨쉬는 것마저도 고통스러워 헐떡이는 자신이 살아있어야할 이유를 알수가 없었다. 왜 스스로 호흡을 멈추지 않는 것이지.. 호흡을 멈추려 할때마다 강제적이고 일방적이기는 하지만 가토가 온기가 떠오르는 것인지.... 가토가 온기가 닿을 때마다 온몸이 찢겨져나갈 정도로 아프기만 한데도 더이상 비참해질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다시 비참해지는 자신을 느끼면서도 마지막 호흡을 놓으려고 하면 가토의 온기가 떠올라 다시 숨을 쉬고 그런 자신의 모습에 눈을 감고 자조적으로 웃고 마는 것이다. 가토의 반려예정자인 연요만이 율연을 가엽게 여겨주었다. 만신창이가 되어 꼼짝도 못하고 쓰러져 있으면 어떻게 알고 찾아오는 지 연요와 그의 시종들이 찾아와 움직이지 못하는 율연을 씻기고 치료해주었다. 자신에게 따뜻하게 미소지어주는 유일한 사람이였지만 율연은 연요를 볼때마다 율연은 새삼 자신의 불쌍한 처지를 깨닫고는 하여 그가 찾아올 때면 그 어느때보다도 서글프게 웃었다. 사랑받는 것이 무엇인지 너무나 잘알고 있는 그를 질투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어이없어 또다시 웃고는 하였다. 그를 볼때마다 어찌하여 또다시 마지막 호흡을 놓지 못하고 다시 되돌렸는 지 후회하는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율연이 가장 두렵게 생각한 것이 지금 호흡을 놓으면 다시 태어날지도 모른다는 것이였다. 그래서 날마다 자신이 고통없이 영원히 소멸되어 두번다시 태어나지 않기를 이생이 자신이 영혼이 이세상에 머무는 마지막이기를 간절히 염원하였다. 하루하루가 너무나 아프고 힘들어서 어서 그날이 오기만을 빌고 또 빌었다. 연요와 가토의 반려의 식이 있던 날. 염마천의 궁주가 선물한 황룡의 먹이로 율연과 몇명의 죄인이 던져졌다. 황룡이 사납게 울부짖으며 자신에게 던져진 율연의 몸을 갈갈이 찌저 삼키도록 율연은 비명한번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눈을 감았다. 가토와 연요에게 이게 마지막이라는 안도의 미소를 지어주며. 가토는 자신의 동생이라며 찾아온 그를 지하감옥에 가두게 하였다. 아버지를 억울하게 죽인 것도 모자라 자신에게 독을 먹여 그 존재마저 흔적없이 지우려한 그자의 핏줄이였다. 가장 고귀한 신분의 자식이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그는 볼품없고 말라있은 모습이었다. 정말 그 아름답고 고귀한 핏줄이 맞는 건가 싶을 정도로 평범하다 못해 못난 모습이였다. 그의 등에 노예의 낙인을 찍게 만들고 가장 비천한 자들이 사는 곳에 던져버렸다. 가장 더럽고 힘든일을 시키게 만들었다. 그가 태어난 것을 후회하고 증오하게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오직 그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일에 집중하였다. 고귀하게 자란 그에게 가장 견딜수 없는 일이 무엇일까 고민한 후 결정한 일이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가 그가 한시도 편안하다거나 화려하게 생활해 본 적이 없다는 것도 누군가의 따뜻한 보살핌도 받아본 적이 없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혈족이면서도 그 비천한 생활에 잘 적응해나가는 그의 모습을 경이롭게 쳐다보았다. 자신이 그들과 다르다는 인식이 없는 것인지 시간이 지나가자 그 비천한 자들과 어울려 웃기까지 하였다. 몸에서 더러운 냄새가 나고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쉬지도 못해 더 말라가면서도 그는 웃고 있었다. 감독관을 시켜 아무리 힘든 일을 시키고 채찍을 해도 그는 훌륭하다 싶을 정도로 잘 견디어 내었다. 태어나기를 애초부터 천한자로 태어난 듯 그는 잘 적응해나갔다. 그 모습이 가토의 비위를 건드렸다. 그는 웃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래서 불러들였다. 자신이 그의 형임을 밝히자 온갖 기대와 환희에 젖어 자신을 쳐다보는 그의 손가락을 꺽고 혀를 없애버렸다. 그리고 자신은 그를 만난 것이 전혀 반갑지도 않고 기쁘지도 않으며 오히려 증오해 마지않는다고 말해주었다. 다시 그 노예소굴로 돌려보낸 그를 지켜보며 그가 절망하고 스스로를 증오하기를 바랐지만 그는 오히려 모든 것을 초월하여 그 어떤 일에도 절망하거나 실망하는 일 없이 견디어 내었다. 자신을 태어나게 만든 그누군가를 원망하는 기색도 자신을 그 처지에 놓이게 만든 가토를 미워하는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다시 불러들였다. 희망하지않아 절망하지 않는다니 맘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에게 희망을 주었다. 경계를 풀지않는 그를 자신에게 의지하게 만들고 기대게 만들었다. 가토가 자신의 혀를 자르고 손가락을 못쓰게 만들었던 걸 잊어버린 듯 어느새 자신을 믿어버리는 그를 비웃듯 그를 유린하며 그 절망에 빠지던 모습을 똑바로 쳐다보주었다. 믿을 수 없는 현실에 경악하고 믿었던 자에게 배신당하며 상처받는 모습을 그대로 지켜보았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억눌린 소리만 내는 입에 핏물이 베어나오도록 거칠게 유린하였다. 끝까지 기대를 저버리지 못하고 애원하듯 자신을 쳐다보던 시선을 비웃어주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를 유린하며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즐겁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자신의 시선을 똑바로 쳐다보며 애원하지 않고 외면해버리는 그의 시선에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가 더이상 자신에게 저항하지도 않고 눈을 감아버릴 때부터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의 존재가 너무 불쾌하고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자 울화가 치밀고 견딜수가 없어졌다. 그래서 염마천의 궁주가 자신의 반려의 식의 선물로 사납기로 유명한 황룡을 보내주었을 때 그 먹이로 죄인들과 그를 황룡에게 던져주었다. 비명을 지르며 도망쳐다니는 다른 자들과 달리 초연히 서서 담담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던 모습에 온몸이 저리도록 아파왔을 때 멈추라고 말하지 못한 걸 율연의 모습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때 후회했다. 마지막에 자신을 바라보며 살며시 미소지었을 때 그 모습이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즉시 황룡의 머리를 쳐버리지 못한 걸 그가 사라지면 지금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감정 역시 사라지리라 믿었던 자신의 어리석음에 절규하였다. 그의 모습이 사라진 후 찾아온 건 공황이였다. 온세상이 텅비어버린 듯 그 적막함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리고 서서히 돌아오는 의식과 더불어 몰아닥치는 감정들에 얼어붙었다. 마지막 희생자마저 삼키고 포효하는 황룡의 모습에서 시선을 돌리지 못하고 멍하니 쳐다보았다. 관람석에서 박수를 치며 즐거워하는 율연의 형을 보고 가토는 짙은 살의를 느꼈다. 그의 형제가 아닌가. 어째서 그는 자신의 형제가 비참하게 죽어가는 데도 박수를 치며 즐거워하는 것일까. 그리고 피로연에서 만난 율연의 형이 하는 말들은 가토를 절망에 빠트렸다. 그토록 율연을 빠트리고 싶어했던 절망에 심연에 자신이 빠져버렸다. 율연이 그토록 비참한 생활에 쉽게 적응한 이유를 깨닫게 되자 자신을 저주하고 싶어졌다. 자신의 아버지는 율연이 죽으나 사나 관심이 없으니 걱정말라며 위로하는 율연의 형을 죽이지 못하는 자신을 증오했다. 온통 끝까지 상처뿐인 율연의 생이 떠올라 견딜수가 없었다. 태어날때부터 오로지 죽는 순간만을 기다온 듯한 율연의 눈빛이 떠올라 가토는 죽고만 싶었다. 태어날때부터 애정이라는 것을 받아본 적이 없는 율연에게 태어난 것을 증오하게 만들어주겠다고 한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태어나기 전부터 고통과 상처뿐인 그에게 살아있는 걸 후회하게 해주겠다고 말한 자신의 모습도 기억났다. 거기에 더불어 오직 믿었던 자신마저 그를 배신하였으니 그는 죽어가면서도 안식을 찾아 웃을 수 있었겠지. 그는 미칠것만 같았다. 자신은 물론 연요가 기뻐할 것이라며 애첩으로 알려진 율연을 죽이기를 권했던 장로들과 장군들이 증오스러웠다. 아니 미처 그를 이미 마음에 품어버린 자신을 일찍 깨닫지 못한 스스로가 더 증오스러웠다. 자신의 방으로 들어온 그는 문을 잠그고 스르륵 주저앉자 피에 젖은 것만 같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절규했다. 온통 율연의 피와 고통으로 젖어버린 것만 같아 손에서 시선을 떼지못하고 처절하게 울부짖었다. "율연!!!!!!" 살아있을 때는 한번도 불러준 적이 없는 이름이 쏟아져나왔다. 자신이 가장 불행하고 가장 고통스러운 줄 알았다. 그런데 율연은 아예 행복했던 기억이나 좋은 기억마저 없는 인생이였다. 제대로 피어보지도 못하고 사라져버리고만 율연이였다. 어찌하여 그 거칠고 비쩍 마른 모습에서 그의 고통을 미리 알아보지 못했는지 꺼져가던 눈에서 포기와 체념이라는 눈빛을 읽지 못했는지 지금은 이렇게 선명하게 그의 고통과 슬픔이 보이는 데 왜 몇시간 전에는 그것을 보지 못했는지 가토는 자신을 책망하고 책망하였다. 밤이 지나고 다음날이 밝아도 가토는 그렇게 자신을 책망하고 있었다. 반려의 방에서 밤새도록 연오가 가토를 기다렸지만 가토는 오지 않았다. 그리고 연요는 자신이 죽을 때까지 가토의 웃는 얼굴을 보지못했다. 그저 가토가 시간이 지나면 잊을 거라며 기다렸지만 그는 율연을 닮은 자들을 끌여들여 잠자리를 하였고 그 다음날이면 그 자를 죽이는 일이 반복하는 기행을 저지르는 걸 가만히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그저 율연을 괴롭히기 위해서 율연을 안던 가토가 언제부턴가 율연에게 시선을 보내기 시작하자 불안을 느낀 연요가 아버지에게 그 불안을 털어놓았다. 다음날 아버지는 연요에게 걱정말라며 자신이 처리해주겠다고 했다. 만일 자신이 아버지를 부추켜 율연이 가토의 마음을 사로잡을까봐 두려워 그를 죽이도록 유도했다는 것을 안다면 자신을 죽일 것만 같아 가슴 졸이며 살아야 했다. 죽는 순간까지도 자신을 봐주지 않는 가토를 원망하며 그렇게 기다려야 했다. 15.천수천인전.3 평상으로 돌아와 다시 뻔뻔해진 율허의 모습이 규하를 즐겁게 한 것도 잠시 예전보다 더 떼를 쓰고 우기기 시작하자 골치가 아파오는 규하였다. 무엇보다도 아무것도 모르면서 규하를 유혹해오는 통에 규하는 날마다 말라가고 있었다. 고작 아는 것이라고는 입맞춤정도이면서 알을 낳는 방법을 가르쳐달라고 보채니 규하로서는 황당하기 이를데가 없었다. 아직은 무리라고 해도 가르쳐주면 할 수 있다고 그리고 알을 낳는 법을 알게 되면 반려를 맞아 예쁜 알을 낳을 거라고 말해 규하의 복장을 터지게 만들고 있었다. 밤마다 계속되는 유혹을 뿌리치느라 규하는 미칠 지경이였다. 어떨땐 눈 딱 감고 그냥 안아버릴까 생각했지만 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가 감당하기에 너무 무리라는 생각으로 억눌러 참고 또 참건만 율허를 그걸 아는 지 모르는 지 날마다 규하를 달달 볶아댔다. 심지어 자신을 무시한다고 삐지기까지 하는 통에 규하는 죽을 맛이였다. 여전히 장난같은 두사람의 생활은 어느날 갑자기 끝나버렸다. 호수에서 낚시를 하고 있는 두사람 앞에 이십여명정도 되는 사람들이 나타난 것이다. 율허는 그 거인같은 체구의 수컷들의 등장에 놀라 규하의 품속으로 파고 들었다. 한눈에도 수인족이라는 걸 알 수 있는 특징을 가진 그들은 규하를 처음보았을 때 율허가 느낀 친근감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저 너무 위압적이고 강렬해서 보고있는 것만으로도 몸이 움추러 들었다. 그런 그들이 규하의 앞에 다가오더니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는 것이 아닌가. "수인족의 왕을 뵙습니다." 율허는 놀라서 규하를 쳐다보았다. 그들이 왜 규하를 수인족의 왕이라고 부르는 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전에 한번 본 적이 있었지만 수인족의 왕은 좀더 나이가 들었었고 규하보다 더 커다란 덩치를 가진 자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는가?" "어제 저녁 영면에 드시며 규하님을 수인왕위에 명하시고 목영님을 규하님의 반려로 내정하셨습니다. " 규하가 자신의 가슴에 안겨있다가 그들의 말에 흠칫 놀라며 물러서려는 율허의 허리를 감싸안았다. 율허가 당황하고 슬퍼보이는 안색으로 규하를 올려다보았다. 자꾸만 물러서려고만 해서 도망치지 못하게 허리를 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랬더니 이제는 얼굴을 찡그리고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은 것에 화를 내는 기색이 역력하여 규하는 하마터면 사람들이 보고 있는 곳에서 웃음을 터트릴 뻔 했다. 어쩌면 저리도 감정변화가 다양한 것인지. .... "내게는 이미 반려가 있어 목영은 반려로 맞이할 수 없다. 이의 있는가?" 무리들이 수근거렸다. 율허도 놀라서 규하를 쳐다보았다. 사람들의 수근거림은 좀처럼 가라앉지를 않았고 규하는 율허에게서 시선을 떼지않았다. 율허는 전에 내게는 반려가 없다하지 않았느냐는 힐난하는 듯한 시선으로 규하를 마주 노려보았다. 규하는 율허의 그 시선에 빙긋 웃더니 고개를 숙여 율허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생전보도 듣도 못한 자를 반려로 맞이하느니 네가 내 반려가 되는 것이 나아... 그런 척 해줄거지?" 규하의 말에 율허가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규하의 말에 기분이 좋아져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규하가 빙그레 웃는 율허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 "우선은 천상계로 귀환하신 후 장로들의 의견을 들이시지요?" 그리하여 율허는 규하를 따라 십이지천으로 귀환하였다. 간신히 적응하였더니 떠나게 되었다고 투덜거리면서...... 수인족은 십이지천에 넓게 퍼져 살았지만 그 중에서 높은 위치에 있는 자들은 수천에 모여살았다. 수인족의 궁전을 물위의 궁전이라고 부르는 데는 여기에 연유가 있었다. 수천에는 수많은 호수와 연못과 강이 있었다. 수인족의 왕이 머무는 궁전인 수인궁만 해도 백여개에 가까운 연못과 호수가 있고 그 경치는 각기 달라 장관을 이룬다. 규하가 지상에서도 호수 근처에 산 것이 원래 그가 살던 이곳의 환경과 비슷했기 때문임을 깨달았다. 규하는 율허가 많은 연못과 호수에 놀라워하자 웃으며 저중의 한개는 이세계로 갈 수 있는 입구라고 말해서 율허의 호기심을 자극시켰다. 물위의 저택이나 궁전은 그 모습이 그대로 물위에 비춰서 마치 대칭을 이루는 궁전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듯한 형상을 이루고 있었다. 게다가 맑은 하늘이 그대로 호수안에 머물고 있어 가만히 보고 있으면 빨려들어갈 것만 같은 착각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물속에 떠있는 하얀 구름이 마치 자신이 하늘위에 떠있는 듯한 착각이 들게 하였다. 바람에 잔물결이 일면 사라졌던 형상들이 물이 잔잔해지면 다시 드러내는 모습에 정신없이 빠져드는 율허를 규하가 말렸다. "계속 쳐다보다간 현기증이 생기니까 그만 봐 .. " 그래도 여전히 물속의 형상에 사로잡혀 있는 율허의 모습에 규하가 웃으며 그런 율허를 안아올렸다. 수인궁이 가까워지자 그 광장에 사람들이 몰려나와 있는것이 보였다. 율허는 바둥거리며 규하의 손에서 내려오려고 했으나 규하는 무슨 생각인지 율허를 내려놓지 않았다. 마중나온 사람중에 유난히도 율허의 시선을 끄는 사람이 있었다. 놀라울 정도로 아름답고 화려하며 우아한 암컷이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율허는 그가 바로 규하의 반려의 내정되었다는 목영이란 자라는 걸 미뤄 짐작할 수 있었다. 그의 시선을 마주 보았을 뿐인데도 기분이 두근거리고 저려와 불안해졌다. 혹여 규하가 그의 화려한 모습에 마음이 바뀌어 그를 반려로 인정하는 건 아닌가하는 불안감이 엄습하였다. 불안한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규하의 품속으로 더욱 파고 들었더니 규하는 율허의 생각을 아는 지 모르는 지 그저 웃으며 율허를 꼭 끌어안아주었다. "두려워 하지마 .. 내가 있잖아." 규하의 말에 율허가 활짝 웃었다. 규하는 율허가 눈을 반짝이며 자신이 한말에 환하게 미소짓자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씨익 웃으며 올려다보는 율허의 입술에 살짝 닿는 입맞춤을 하였다. "뭐하는 짓이에요. 사람들 않은 데서..." 기겁을 하며 소리 친 율허는 오히려 규하의 행동보다 자신의 고함소리가 더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음을 느끼고 더이상 빨개질 수 없을 정도로 붉어져서 고개도 들지 못하고 규하의 품에 고개를 박아버렸다. 규하는 율허의 행동에 호탕하게 웃었다. 사람들은 규하가 웃으며 사랑스럽다는 듯이 쳐다보며 안고 있는 작은 사람이 누구인지 규하와 어떤 관계인지 알수가 없어 강한 호기심과 걱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특히나 목영의 시선은 날카롭다 못해 냉기가 서렸다. "아니됩니다. 선왕께서 이미 목영님을 반려로 내정하셨는데 어디에서 무엇을 하던 자인지도 모르는 자를 비로 맞으시겠다니요." "선왕의 유언입니다. 선의 뜻을 받들어서 목영님과 반려의 식을 올리시지요." "그렇습니다. 규하님께서는 그자와 반려의 예를 올렸다지만 증인도 없고 그건 무효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니 목영님을 맞이하여 새로이 반려의 예를 올린다해도 뭐라 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 하나같이 규하에게 목영과 다시 반려의 식을 치루라는 장로들의 의견들뿐이였다. 규하는 갈수록 나빠지는 기분을 간신히 추수렀다. 그는 아직도 기억했다. 자신들과는 어딘가 다른 외모와 성격의 자신을 은근히 무시하고 거리감을 두고 혹여라도 선왕인 아버지가 새로이 알을 낳지않을 까 기다리던 그들을... 어쩔수 없이 자신이 왕위에 오르게 되자 이제는 규하를 자신들 뜻대로 휘두르려하는 것이 아닌가.이미 반려의 예를 올려서 목영이란 자를 반려로 맞이할 수 없다고 하는데도 오로지 자신들의 주장을 굽히려 하지않고 지금 규하에게 강요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과 율허를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라는 걸 알았다. 가만히 그들이 하는 양을 지켜보던 규하가 입꼬리만 올리며 씨익 웃었다. 순간 중구난방으로 떠들어대던 장로와 장군들이 규하를 따라 같이 미소지으며 규하가 자신들의 뜻을 받아들인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왕인가? 아니면 그대들이 왕인가?" 너무 작은 소리의 말이라 맨앞의 자들 이외에는 듣지 못해 뒤에 선자들이 무슨말이였냐고 앞에 선자들의 등을 건드렸다. 앞에 선 자들은 온화한 미소를 지은 그가 한 말의 진의를 알수가 없어 어리둥절해했다. "나는 그대들의 왕인가? 아니면 그대들의 허수아비인가?" 조금 커진 그의 말에 좀전보다는 더 많은 자들이 규하의 말을 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규하의 말을 들은자들은 여전히 온화한 표정의 규하가 한말의 의미를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왕이 그대들을 지배하는 가? 아니면 그대들이 왕을 지배하는가?" 이제 규하의 말을 듣지 못한 자들은 없었다. 그리고 규하의 말의 의미도 대충 알아들었고 그래서 규하의 말에 내재되어 있는 의미에 모두 얼어버렸다. "그대들이 다시한번 이일로 나의 심기를 어지럽힌다면 그대들이 그토록 내 반려로 삼고자하는 목영이란 자의 목을 잘라 두번다시 그 말이 나오지 않게 해주겠다. 그럼 더이상 나의 심기를 거스리는 말을 하는 자가 없어지겠지. 나는 그대들의 왕이지 허수아비가 아니며 그대들이 나를 지배할 수 없다. " 규하가 격분하여 마구 소리를 지르거나 위협을 했다면 지금처럼 장로들이나 장군들을 얼어붙게 만들지는 못했을 것이다. 차를 마시며 담화를 나누는 듯 너무나 온화하고 담담하여 그말이 분명이 협박인데도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모르도록 만들고 있었다. 그 괴리감에 사람들은 왠지모를 공포마저 느끼고 있었다. 자신들이 알고 있는 규하는 이런 인물은 아니였다. 그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고 안으로 숨어들려고만 하던 그런 인상이 남아있어 그들은 혼란스러웠다. 질식한 정도로 가라앉아가던 공기가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깨어졌다. 숨을 제대로 쉬지못하고 분위기에 눌려 창백하게 질려가던 사람들이 그소리와 함께 일제히 숨을 몰아쉬었다. "규하!!!! 내가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았어요." 심각한 상황과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말을 쏟아놓으며 안으로 들어서던 율허는 방안의 엄숙한 분위기에 '헉'하고 놀라며 멈춰서더니 물이 뚝뚝 흐르는 옷을 입은 채로 규하를 쳐다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의 손에는 작은 물고기 한마리가 퍼덕이고 있었다. 규하는 장로들과 장군들이 얼이 빠진 듯 율허를 쳐다보는 모습에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어떻게든 자신을 마음대로 조종해보려다 오히려 그 속을 규하에게 꿰뚫려 굳어있던 사람들이 뜬금없이 나타나 분위기와 전혀 어울리지않는 말을 쏟아내는 율허의 모습에 넋을 잃어버리는 멍청한 표정을 짓다니.... 자신이 무슨 실수를 했나하고 눈치를 보던 율허가 규하가 호탕하게 웃자 얼어붙어 있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규하에게 달려오더니 자신이 잡은 물고기를 자랑스러운 듯이 앞으로 내밀어 규하에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낭랑하게 웃어대는 것이다. 그동안 규하와 함께 살면서 여러가지를 배웠지만 물고기 잡는 것만은 아무리 배워도 솜씨가 늘지않아 날마다 구박을 받았던터라 수천에서 연못에 있는 물고기를 보고 호승심이 일어 달려든 것이 분명했다. "연못에서 잡았지? 그런 곳이라면 어린아이들도 물고기를 잡을 수 있다구. 겨우 그런 걸 자랑하고 싶어서 이리 호들갑을 떤거야? 정말 어리다니까." 율허는 빈정거리는 말하며 웃고 있는 규하의 모습에 와락 달려들었다. 자신은 잘했다는 소리를 듣고 싶었건만 규하는 율허를 오히려 바보라고 놀려 율허의 성질을 건드리고 있었던 것이다. 달려드는 율허를 살짝 피하며 슬쩍 입을 맞추자 그것마저 마음에 들지 않았는 지 규하의 입술을 깨물려고 덤벼들어 또다시 규하를 웃게 만들었다. 두사람은 서로의 세계에 빠져 넋을 잃고 있다가 더이상 보고 있지못하겠다는 듯이 한두명씩 빠져나가는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래서 결국 그에게서 원하는 대답을 얻지 못했다는 건가요?" 날카로운 목영의 말에 격하의 어깨가 울찔거렸다. 격하는 목영의 동생으로 수인족에서 몇 안되는 장군 중의 한명이였다. 강하고 무뚝뚝해보이는 인상과는 달리 격하는 마음이 여린 사람이였다. 어릴때부터 조그마한 일에도 잘 울고는 하였다. 지금의 모습은 목영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훈련시켜온 결과였다. 다른 사람의 두배는 되는 덩치만 보면 그가 마음이 무척 여린 자라는 걸 짐작하기 어려우리란 걸 알고 그가 어떤 일에도 당황하거나 울상을 짓지 못하도록 훈련시켰다. 덕분에 거칠고 위압적인 덩치에 사람들은 지레 겁을 먹고 물러서기 일쑤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자신의 성격을 알고 있는 목영앞에서만은 격하는 자신의 본 모습을 숨기지 못했다. "응. 규하님께서 이미 반려의 예를 올린 상대가 있으니 더이상 반려의 식을 올리란 말은 하지 말래." 힐끗 목영의 눈치를 보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던 격하는 목영의 사나운 시선에 얼른 시선을 돌렷다. "어디에 사는 누군지도 모른다면서 장로들이나 장군들이 가만히 그말을 받아들였다는 말인가요?" "아니, 규하님께서 더이상 반려의 식을 다시 올리라는 말을 하면 너를 죽이겠대.." "뭐라구요? 설마 정말 규하님이 그리 말씀하셨단 말인가요?" "응." 목영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생각이외로 규하가 그리 쉬운 인물이 아님을 깨달은 것이다. 만월의 밤에 사강이 그를 유혹한다며 지상으로 내려갔다가 참옥하게 일그러진 표정으로 돌아온 이후 자신은 수인왕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에게 자신이 규하의 반려가 되어 그를 옆에서 성실하게 보필하겠다고 청했던 것이다. 수인왕은 격하의 형제인 그를 좋게 보았고 윤허까지 떨어져 규하의 반려의 자리는 자신의 것이라는 것을 믿어의심치 않았었다. 그런데 엉뚱하게 그는이미 반려의 예를 올린 자가 있다질 않은가. 그 상대라는 자는 그가 처음 수인궁으로 돌아왔을 때 안고 있던 그 조그만 사람이 분명했다.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는 일이였다. 누가 보아도 그 조그맣고 어린아이같은 자보다는 자신이 훨씬 유혹적이고 아름답질 않은가. 게다가 장로들이나 장군들도 자신을 규하의 반려로 인정하고 있는 데 그런 근본도 모르는 자에게 가만히 앉아서 그 자리를 빼앗길수는 없었다. "따라와요." 격하는 목영을 따라 다시 내전으로 향했다. 율허는 눈을 꿈벅꿈벅 하며 위협적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거인을 올려다보았다. 지상에 있을 때 규하와 자신을 찾아온 수인족의 덩치에 놀란 적이 있었지만 지금 자신 앞에 있는 자는 그들보다도 더 컸다.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작은 동산 하나가 서있는 듯한 느낌이였다. 규하와 단 둘이 앉아 있을 때 갑자기 찾아온 목영이 같이 데리고 온 자가 이 사람이였다. 목영은 규하에게 독대를 청했고 두사람이 이야기를 하러 간 사이 연꽃이 가득한 연못위의 정자위에는 율허와 거인만 남았다. 한참동안 거인을 쳐다보던 율허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거인에게 다가가 그의 손가락을 잡았다. 그리고 자신의 손과 비교를 해보더니 환성을 지르는게 아닌가. 격하는 생각지도 못했던 율허의 행동에 식은 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손을 뿌리치기엔 율허의 손이 너무 작아서 흔들기만해도 부러질 것 같아 차마 뿌리치지도 못하고 율허가 하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와 정말 크다. " 율허는 자신의 손의 서너배는 되어보이는 격하의 손을 잡고 더듬어 보고 심지어 깨물기도 했다. 격하는 율허의 행동에 그만 간지럼을 견디지 못하고 작은 소리로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이제까지 누구도 자신의 외모만 보면 질려서 율허처럼 행동하던 사람은 없었던 지라 자신이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율허는 격하가 웃자 멍하니 쳐다보더니 손을 까닥였다. "목마 태워줘요." 이 무슨 황당한 소리란 말인가. 격하는 멍하니 율허를 쳐다보았다. 자신의 형제보다도 배나 작아보이는 율허는 자신을 두려워하기는 커녕 말도 안되는 요구를 하고 있었다. 목영이 자신과 이 작은 사람을 같이 둔 이유를 대충 짐작하고 있던 격하는 조금 당황스런 기분이였다. 목영의 의도는 자신이 규하를 설득시키지 못하면 이 조그마한 사람을 위협해서라도 쫓아낼 심산이 분명했다. 목영은 상대방을 위협할 때 절대로 자신의 의도를 드러내는 법이 없었다. 조금씩 보이지 않는 위협과 압박으로 상대방은 원인을 알수 없는 불안에 휩싸여 초조해지기 일쑤였다. 결국에는 견디다 못해 신경쇠약이나 그이외 정신적인 피곤으로 목영이 뜻하는 대로 이루어지기 일쑤였다. 자신을 이 작은 사람과 둔 것도 아마 그런 위협의 전초전이였을 것이 분명해서 격하는 마음이 어두웠는 데 지금은 오히려 당황하여 표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격하도 분명히 율허가 겁을 먹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 조그마한 사람은 자신을 두려워하는 기색은 커녕 오히려 재미있어하고 있었다. 그리고 같이 놀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격하는 환하게 웃으며 자신에게 두팔을 버리고 있는 율허의 모습에 자신이 그를 거절할 수 없음을 느끼고 율허를 안아올렸다. 목영의 화난 얼굴이 떠오르기는 했지만 이런 생소한 기분 그것도 너무 기쁘고 충만한 기쁨을 잠시라도 느끼고 싶었다. 목영은 자신이 독대를 신청했을 때 그의 차가운 표정을 잊을 수가 없었다.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는 그런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저는 납득할 수가 없습니다. 어찌하여 선왕께서 내리신 유언을 무시하려 하십니까?" 하지만 목영은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머리를 믿었다. 그리고 외모도... 규하를 처음보자마자 그가 왜소하고 연약해보이는 것에 마음이 약하다는 걸 눈치챘다. 율허를 보며 부서질까봐 걱정하는 듯한 그의 표정을 보면서 이것역시 계산에 넣은 목영이였다. 그래서 이토록 슬프고 가슴아픈 일이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역시나 규하의 안색이 잠시동안이지만 흔들리는 것을 보고 쾌재를 부른 것도 잠시 규하의 안색이 단호해지자 아쉬워 숨을 삼켜야했다. 생각보다 심리적인 약점으로는 그의 생각을 바꿔놓을 수 없을 것같다는 점을 파악해냈다. 게다가 단호해진 규하의 태도는 목영을 당황시키고 있었다. 미소를 짓고 있다니... 이런 상황에서 자신에게 미안해하거나 아니면 싫은 표정이라도 지었다면 목영도 여러가지 방법으로 그를 공략할 수 있었을 텐데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은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어찌해주길 바라는가? 그대를 위해 내 어린반려를 버리라는 것인가? 아니면 내가 그대의 말을 듣지 않으면 내 어린 반려를 죽이기라도 하려고 하겠다는 건가?" 목영의 안색이 대번에 변하였다. 규하의 온화한 표저은 그가 한말의 진의가 무엇인지 의심스럽게 만들었다. 그런 말이 저런 차분하고 여유로운 표정으로 할만한 말은 아니잖는가. "혹여 다른 자들에게 전해 듣지 못했다면 지금 말해주겠네. 목영이라고 했던가? 이날 이후 다시한번 그대는 물론 다른 자들의 입에서 그대를 반려로 맞이하라는 말이 나올 시에는 그대의 목을 칠 것이며 그 말을 꺼낸 자 역시 목을 칠 것이다. 행여 많은 수의 사람들을 동원하여 설마 이 맗은 자들을 모두 어찌할 수 있을 까 의심한다면 그 의심을 바로 불식시켜주지. 혹여 나를 어찌해볼수 없어 내 어린반려를 어찌해볼 생각이라면 그대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내 어린 반려가 그리 만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될 것이라는 걸 말해주고 싶군. 그리고 증인 없다고 했던가? 그럼 다시 반려의 식을 치루어서라도 증인을 세워주겠네.'' 목영은 그가 두려웠지만 그 것을 내색하기에 그의 자존심이 용납되지 않았다. 입술을 깸루고 표정이 일그러지는 걸 간신히 참으며 그곳을 물러나왔다. 저런 자를 두고 누가 그는 마음이 약하다고 했단 말인가. 온화해보이지만 저런 자일수록 무서운자라는 걸 잘 알고 있는 목영이였다. 설마하면서도 그에게 입을 연 목영은 역시나 자신의 생각이 옳았음을 깨달았다. 장로들이나 장군들은 그를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었다. 언제나 지상계에 내려가 있어 그를 알 기회가 없었던 탓이 있겠지만 문제는 그의 온화해보이는 그 외모때문이였다. 웃으면서 상대방을 협박할 정도의 심장을 가진 자는 웃으면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 결코 만만한 자가 아닌 것이다. 원하는 결과는 커녕 알고 싶지 않은 사실을 알게 된 목영은 밖으로 나와 또 한번 놀랐다. 자신의 형제가 그 덩치만으로 사람들에세 공포를 주던 격하가 껄껄껄 웃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어깨위에는 조그만 사람이 목마를 탄채로 격하의 머리를 만지고 있었다. "웃지마요. 자꾸 비뚤어지잖아요." 하며 격하에게 야단까지 치고 있었다. 어디에도 목영이 처음 의도한대로 그를 두려워해서 당황하는 기색이라고는 찾아볼수가 없었다. "와 됐다. 이제 내려줘요. 도데체 뭘 먹고 컸길래 앉아서도 머리가 닿지 않는 건지....' 격하는 등뒤에 목영이 서 있는 건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율허와 웃고 떠들고 있었다. 바닥으로 내려온 율허가 격하의 얼굴을 요모조모 뜯어보더니 만족스럽게 미소지었다. "역시 훨씬 나아졌어요. 덥수룩한 머리카락을 잘라내니까 이렇게 깔끔하잖아요." "정말?" "이제까지 한번도 암컷들이 격하를 유혹해오지 않은 것은 다 이 깔끔한 외모를 본 적이 없어서가 분명해요.이제부터 그 수염도 말끔히 까고 머리도 자주 잘라줘요. " "정말 괜찮아 보이는 거야?" "그걸 말이라고 해요? 오히려 예쁘고 멋만 부린느 수컷들보다 훨씬 멋져요. 집에 가면 쑥쓰러워하지 말고 웃는 연습도 해봐요. 그럼 올해는 분명 많은 암컷들이 유혹해올 걸요,.." 격하는 즐거운 듯이 호탕하게 웃고 있었다. 덩치는 어린 청년처럼 작은 율허가 노인들처럼 근엄한 표정으로 격하에게 충고하는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 목영은 입술을 깨물고 다정하게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두사람의 등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자신이 그토록 심혈를 기울여 만들어 놓은 강하고 거친 인상이 저 작은 사람으로 인해 단 한번에 무너져버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목영의 마음에 들지 않는 건 강하고 거칠던 격하보다 지금의 모습이 훨씬 더 보기가 좋다는 사실때문이였다. 자신이 아닌 다른 자가 자신의 혈육의 모습을 변하시켰다는 사실이 심기를 건드리고 있었다. 자신의 자리라 믿었던 수인왕의 반려의 자리도 모자라 혈육사이에 파고 들어 자신과 격하 사이를 벌려놓으려는 것만 같아 울화가 치밀고 짜증이 났다. 두사람의 대화는 목영이 아닌 율허를 찾으러 온 규하에 의해 깨어졌다. "율허.. 간식먹으러 가자." 세사람이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규하가 싱글벙글 웃는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목영이 굳어버린 표정으로 서 있었다. 방금전까지 웃고 떠들고 있던 격하가 목영을 발견하더니 죄를 지은 사람처럼 딱딱하게 굳어서 고개를 숙여버렸다. 율허는 웃으면서 손을 내밀어 규하에게로 달려갔다. 목영을 지나치며 힐끗 그를 쳐다보았을 뿐 아는 척은 하지 않았다. 규하는 자신에게 달려온 율허를 덥썩 안아올리더니 두사람에게 웃어보이고는 돌아서서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목영은 그 뒷모습을 한참동안 노려보았다. "무슨 이야기 했어요?" 율허는 불안해보이는 기색으로 규하의 안색을 살피고 있었다. "알고 싶어?" "응." "글쎄 무슨 말을 했을 까요?" 불안해하고 있는 율허를 보며 규하가 장난끼어린 투로 말하자 율허가 입술을 삐죽 내밀더니 규하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방심하고 있는 규하를 뒤로 밀어 넘어뜨렸다. 엉겹결에 율허를 안고 뒤로 넘어진 규하가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율허가 다짜고짜 입을 맞추었다. 규하는 자신이 율허가 입을 맞출때마다 곤란해하는 것을 알고 있는 율허가 자신을 당황시키려고 하는 듯이 달러들어 입을 맞추자 한숨 비슷한 웃음을 터트렸다. 율허 딴에는 보복성 짙은 입맞춤이지만 규하에게는 참기힘든 유혹이였다. "아.. 알았어 . 그만 ... " 생글생글 웃으며 이겼다는 표정으로 의기양양해하는 모습에 규하는 쓴 웃음을 지었다. "언젠가는 그런 짓 한 것 후회하고 말걸." "흥, 빨리 말이나 해요." "장로들이나 장군들이 한 말과 똑같은 소리를 하더군. 너와는 반려의 예를 인정할 수 없으니 자신과 반려의 식을 올리자고." 생글거리던 율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그,그래서? ....할거야?" "했으면 좋겠어?" 짖궃은 표정으로 쳐다보니 눈썹을 치켜뜨고 노려보는 율허가 너무 귀여워 꽉 깨물어주고 싶은 규하였다. 규하가 얼굴을 비벼대자 삐졌는지 콧웃음을 치며 고개를 휙 돌려버린다. "내가 율허를 나두고 한눈을 팔겠어? " 조금은 풀린 안색으로 율허가 망서리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우리는 진짜 반려가...으읍... " 규하의 갑작스런 입맞춤에 당황하여 말도 못하고 그대로 안겨 있어야 했다. 나주에야 놀리듯 살짝 살짝 건드리며 작은 소리로 웃어대는 규하에게 도발당해 적극적으로 달려들기까지 하고 만 율허였다. 체력이 따라주지 못해서 나중에 의식을 잃는 경우도 있으면서도 그 지기싫어하는 성격 탓에 적당한 선에서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그렇기때문에 규하는 율허가 자신을 잡고 있는 손의 힘이 풀리는 걸 느끼면 바로 율허를 떼어놓아야 했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율허를 끌어안고 볼을 부벼댔다. 도데체가 엉뚱한 곳에서 고집을 부리고 오기를 세워서 결국에는 제풀에 지쳐 나가 떨어지는 저 성격을 어쩌면 좋을 까 싶었다. 너무나 엉뚱해서 너무나 어린아이같아서 규하는 율허가 너무 귀여웠다 . 의욕만 넘쳐서 감당하지도 못하면서 끝까지 이기지도 못하면서 포기할줄 모르고 덤벼드는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웠다. "사랑한다." "엇?" "내 반려가 되어줘. 하는 척만 하지 말고 진짜 반려가 ..." 순간 율허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싫어?" "그,그게 아니라.. 너무 갑작스러워서...그러니까..." " 나를 싫어하는 구나.." 실망한 듯 어깨를 축 늘어뜨리자 더 당황하고 안절부절을 못한다. "누가 ..싫다구 ... 그게 아니라니까 .. 그냥 .." "싫지 않아?'' "응." "고마워, 율허 사랑한다. 꼬마연인." "꼬마 아냐." "그래 꼬마 아니다." 율허는 자신이 규하의 말솜씨에 놀아나 반려의 청을 얼렁뚱땅 받아들인 건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16. 월궁으로 "시나이라가 돌아왔답니다. 그의 옆에는 이제까지 본 적이 없던 자가 동행하고 있었고 사라졌을 때와 마찬가지로 갑자기 나타나서 그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는 보고입니다. " 탁제균의 말에도 가토의 표정엔느 일말의 변화도 없었다. 그의 시선은 생명수 안에 봉인되어 있는 다하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아무것도 먹지 않고 아무것도 보려하지 않고 오로지 죽으려고만 해서 너무나 쉽게 마지막 호흡을 놓으려고만 해서 가토는 이를 악물고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다하를 봉인하기로 한 것이다. 원래는 비월을 봉인하려고 했던 곳이다. 하지만 지금 다하가 알속에서처럼 웅크린 자세로 잠이 든 듯이 봉인되어 있었다. "어찌 할까요." "첩자들에게 말해서 격변하는 사태로부터 비월을 보호하게 하고 털끝하나도 다치지 않게 하라고 말해. 그리고 십이궁주들을 공격하고 있는 범인에 대한 정보는 ?" "아직..." "목격자가 없다는 것은 아무래도 납득이 안돼 . 좀 더 신경을 써서 조사해." "녜." "물러가고 당분간 모든 것에 대한 보고는 이곳으로 가져와." 탁제균은 근심스러운 듯이 가토를 쳐다보았다. 다하를 봉인시키도록 결정내린 후 가토에게서는 감정이라는 것이 사라졌다. 잠시도 다하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다른 것에는 의욕을 잃어버린 듯한 가토의 모습은 탁제균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가토는 저런 모습이면 안되었다. 언제나 당당하고 모든 것을 비웃으며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는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여만 했다. 그가 아주 어린 모습이였을 때부터 그만 바라보며 살아온 탁제균이였다. 순수 월족의 힘으로 영원을 살게되었다는 그가 시간이 흐르면 혼자남을 것을 걱정하여 다른 순수 월족을 죽여 그 사체를 먹으면서까지 그의 곁에 남아 그 수많은 시간을 같이 보냈다. 누구보다도 아름답고 당당한 가토의 모습을 보며 탁제균은 그런 자신이 잘했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속이고 다른 사람에게 좋은 모습만 보이려는 위선적인 사람들과는 달리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는 그의 모습에 사로잡혔다.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통쾌하고 감탄이 터져나오는 그런 느낌!! 그런 그가 저런 조그맣고 볼것이라고는 하나 없는 작은 자에게 사로잡혀 헤어나지 못하는 모습은 정말이지 탁제균의 속을 상하게 만들었다. 저 작은 자가 죽는 것이 두려워 생명수 안에 봉인한 것도 모자라 그의 공명자인 비월마저 보호하라니... 천제의 혈족은 모두 멸족시키겠다던 그의 포부는 어디로 사라져버렸단 말인가. 모든 것이 너무 안타까운 탁제균이였다. 매하는 멍하니 자신의 아버지인 염마궁주의 몸에서 궁주의 상징인 검이 타인에 의해 뽑혀지는 장면을 쳐다보았다. 그 모습을 보며 두려워하기는 커녕 자신의 아버지가 처절하게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을 치는 모습에 묘한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염마궁주가 절규하며 피를 토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율파의 손에 잡혀 나오고 있는 검만이 자신의 눈에 아프게 박히고 있었다. 가슴이 두근두근 하고 온몸이 진저리쳐지도록 떨리고 있었다. 두려워서라기보다 희열에 전율하는 그런 느낌이였다. "어째서..." 문장이 파괴되어 급격하게 생기를 잃어가는 궁주는 매하의 태연한 표정에 더 절망하였다. 어찌하여 자신의 아들이 자신의 죽음에도 저리 초연하고 오히려 즐기는 듯한 미소를 짓고 있는건지 그로서는 도저히 죽어가면서도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였다. 그가 특이한 성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친혈육의 죽음에도 그 어떤 슬픔도 나타내지 않는 것은 믿고 싶지 않은 일이였다. 그리하여 염마궁주는 자신을 죽인 율파보다도 자신의 아들이며 염마궁의 소궁주인 매하의 무정한 반응에 더 충격을 받았다. 흐릿해지는 시야에서 잠시도 매하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이 쳐다보며 염마궁주는 소멸당했다. 율파는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작은 청년을 쳐다보았다. 그로서는 어차피 매하가 결계를 빠져나가지 못하리란 것을 알고 있었기에 급할 것이 없었지만 매하의 태연한 반응은 그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러나 염마궁주가 소멸되며 염마검의 봉인 풀리자 매하의 몸에서 스며나오는 유혹의 향이 짙어지자 납득을 했다. "유혹의 천이족 찰란!! 용케도 그몸을 찾아냈군." "이 아이의 욕망이 그 누구보다도 짙더군요. 이세상의 모든 자들을 자신의 품에 가두고 싶어하는 짙은 욕망이 염마검의 봉인이 풀리자 마자 나를 불려들였어요. " 이제는 찰란이 되어버린 매하가 율파에게 다가와 그의 목을 두손으로 끌어안고 몸을 비벼왔다. 질식할 것만 같은 유혹의 향이 방안에 퍼지고 있었지만 찰란을 쳐다보는 율파의 시선은 차갑기만 했다. 매하는 율파의 냉정한 시선에 한숨을 내쉬더니 얼굴을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었다. "여전히 냉정하시군요." "글쎄 내 심장은 오래전에 멎어버렸으니까. 그 어떤 것에도 두근거리질 않는 군" "그 많은 시간이 지났는 데도 여전히 한사람만 보이시나요?" "건방진 소리마라. 네가 관여할 일이 아니다." "녜.그보다 제가 도와 드릴 일이 있나요?" "화룡궁주를 감시하라. " "훈바를요? 이유가 있나요?" "그가 내 반쪽을 잠시나마 차지하였다. 그를 감시하면 그를 찾을 수 있을 테니까." 매하는 율파가 말한 사람이 비월임을 대번에 알아챘다. 그 조그맣고 아름다운 자가 설마 율파가 찾아헤메던 그 사람이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사람이 월아라는 그사람인가요? " "그렇다." "그 사람이 태천제께서 찾으시는 그분이라는 걸 어떻게 확신하시는 거지요? 제가 보기에 전혀 다른 모습이던데요." "내 몸에 봉인된 검들이 그가 내가 찾는 자라고 말하고 있다. 이 검들은 그의 영혼으로 이루어진 여러개의 조각이니까." 매하의 안색이 차가워졌다. 그 무엇도 당할 수가 없었던 자신들을 봉인한 것이 그 십이검이 아닌가. 그런데 그 검이 태천제가 찾는 그의 영혼의 조각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자신들을 봉인한 사람이 태천제가 찾는 그라는 사실이나 다름없었다. 태천제가 검을 회수하여 봉인을 풀고 있지만 그가 있는 한 다시 십이검을 만들어 낼 수도 있으며 다시 자신들이 봉인될 수도 있다는 소리나 다름없지 않은가. 그 어둡고 차가운 검안에서 천년을 살았다. 육신은 소멸하고 영혼만 남아 언제일지 모르는 부활만 기다리며...... "그는 당신을 배신한 자입니다. 설마 그를 그대로 놔두실 건 아니지요? 그가 있는 한 우리는 물론 당신마저 마음 편하게 살수는 없는 일입니다. " 분개하며 항의를 하던 매하는 자신의 목을 움켜쥐는 율파의 손에 커억하고 숨을 들이켰다. 이제까지 담담하기만 하던 율파의 눈에 서린 것은 진득한 살기였다. 그건 보통사람이 낼수 있는 살기와는 차원이 다른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소멸당할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의 살기였다. 율파가 빙그레 웃으며 매하의 목을 움켜쥐고 그를 자신의 눈과 가까이 끌어올려 매하의 시선에 자신의 시선을 박아넣었다. "명심하라. 만일 그아이에게 손하나 까딱하면 너는 물론 내가 만들어낸 너희 모두를 영원히 부활하지 못하게 산산조각을 내줄테니까 잊어버리지 말고 지켜보기만 해라. 그 아이는 너희같은 잡종들이 건드릴 수 없는 고귀한 존재니까. 죽어도 내손에 죽고 살아도 내의지로 살아야 하니까. 그아이는 영원히 내것이다. " "쿨럭쿨럭" 매하는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질려갔다. 찰란으로서 그 누구도 자신을 거부할 수도 없고 자신에게 냉정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예나 지금이나 예외는 있었다. 자신을 만들어 낸 태천제!!! 그에게 자신은 그저 하나의 장난감에 불과했다. 가지고 놀다가 싫증나면 버릴 수 있는 장난감.!!! 자신의 아들인 율경이 자신에게 유혹당해 생기를 빨려도 냉정하던 그를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의 형제인 율허뿐이였다. 그를 배신했어도 그는 그의 율허를 버리지 못할 것임을 매하는 깨달았다. "불안해하지 마라. 어차피 그의 영혼은 여러조각으로 나뉘어 커다란 힘을 쓰지 못하니까. 지금의 시나이라는 그중에서 남은 마지막 조각임이 분명하다. 그가 자신의 영혼을 십이검에 모두 쏟았다면 비록 나일지라도 다시 부활하지는 못했을 테지. 무슨 이유에선지는 모르지만 그는 자신의 영혼을 십이등분이 아닌 십삼등분 하였고 우리를 봉인한 결계는 그 덕분에 완전하지 않아 우리가 부활하게 된 것 같으니까." 매하는 안심하였다. 그 십이검을 율파가 거두고 있으니 자신들이 다시 봉인될 위험이 없어졌음을 느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위험이 없어졌다해도 자신들이 봉인당한 것에 대한 증오심은 사라지지않았다. 비록 율파에게 협박을 받았지만 그대로 두기에 그동안 자신이 겪은 어둠은 너무 짙었다. 비월과 파라가 마지막 만난 것이 몇달전인데도 마지막에 헤어진 기억이 너무 생생하고 아파서 어제 있었던 일처럼 선명하게 기억났다. 파라는 멍하니 비월을 쳐다보았다. 울어서 붉어진 듯한 눈주위와 조금은 큰 듯한 키 그리고 그 처연한 표정까지.... 예전에도 비월은 남다른 점이 많았지만 지금처럼 모든 것을 털어버린 듯 초연해보이는 모습은 가슴이 아프도록 눈에 밟혔다. 차마 입을 떼지도 못하고 그저 쳐다보고만 있는 파라의 모습에 비월이 미소지었다. 재사에게서 파라가 소유주의 기생벌레에 당했던 이야기를 들었었기 때문에 자신에게 미안해하며 어쩔줄 몰라하는 그의 모습이 안쓰러웠다. 그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그역시 기생벌레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지는 못했지만 그 벌레가 무슨 기능을 하는 지는 대충이나마 알고 있었다. 그래서 파라가 어쩔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어디 아프지는 않았나요?" 비월의 말에 파라가 금방이라도 울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떡였다. 그 울듯한 표정이 비월의 가슴이 와 박혔다. 그동안 그가 얼마나 자신을 책망하고 괴로워했을 지 뻔히 보이는 것만 같아 마음이 저렸다. 그의 잘못도 아닌데 그는 자신의 죄를 용서하지 않고 있는 것 같았다. "와줘서 이렇게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와줘서 그리고 건강하게 잘 있어줘서 고마워요." "월아." "절망하지 않고 살아있어줘서 고마워요." "월아.. 나는..." "아무말도 하지 말고 미안해하지도 말고 과거를 되새기지도 말아요. 모두 잊어버려요. 이렇게 다시 마주보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게 된 것만으로도 기뻐해줘요." "월아...." 비월은 머뭇거리며 차마 자신에게 다가오지못하고 있는 파라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를 꼭 끌어안았다. 순간 파라가 마법이라도 풀린 듯 격렬하게 몸을 떨더니 부서지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비월을 마주 안았다. 가슴 가득 차오르는 격정에 온몸을 떨고 있었다. 비월이 손을 들더니 파라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비월의 손은 파라의 눈물로 금방 젖었다. "이제 내게는 파라밖에 없어요. 아버지도 돌아가셔버렸고 이 세상에 의지하고 바라볼 사람은 파라뿐이에요. 욕심쟁이라고 불러도 좋아요. 그러니 이제 나를 떠나지 말아줘요." "월아 내가 어떻게 너를 떠나겠느냐. 너는 나의 심장이며 영혼인것을 .... 내가 살아가는 이유인 것을... " "파라!!!!!!으흐흐흑흑.... 나 너무 .. 슬프고 .. 괴로운데... 아버지에게 이렇게 미안하고 .. 미안한데.. 파라가 있어서 ..이래서는 안되는 걸 알면서도 기뻐하고 있어요.. 내가 얼마나 이기적이고 못된 사람인지.. 이런 내가 ... 너무나 창피하고 싫은 데 .. 파라를 놓을 수가 없어요... 내 감정인데 나도 어쩔수가 없어요... " 비월이 파라의 가슴에 얼굴을 뭍고 흐느꼈다. 파라는 떨리는 손으로 그런 비월의 등을 쓰다듬어주었다. "괜찮아. 나는 월아가 그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짓을 하더라도 월아편이야. 그러니까 슬프면 울고 기쁘면 웃어.! 세상 사람들이 모두 월아를 미워한다해도 나는 영원히 월아를 미워하지 않아... 그러니 감정을 억누르지 말고 마음껏 울어서 슬픔을 지워버리고 나에게 의지해." "으흐흐흑흐흑... 왜 ..으윽 아버지께서 ... 사랑한다는 말도 제대로 해준적이 없는 데... 그렇게 가버리셨을 까요... 조금만 기다려주지.. 왜 그렇게 ... " 비월은 파라의 가슴에서 그동안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울음을 마음껏 터트렸다. 울고 울어서 눈은 퉁퉁 부어갔고 열이 올랐지만 비월은 멈추지 않고 계속 울었다. 파라는 비월이 진정할 때까지 그렇게 안고 있었다. "내가 없는 동안 울보가 되어 버렸네." "흐윽.. 후우,.. 흑.. 정말 .. 그런것 같아요... 왜 이렇게 격정적이 되어버린 건지.. 조금만 발동이 걸려도 눈물이 멈추지 않는군요." 파라는 자신을 올려다보며 웃는 비월의 모습이 너무 안쓰러웠다. 눈에 가득한 슬픔과 눈물이 그를 그를 안타깝게 만들었다. 여리고 연약해보이는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파라는 또한 슬퍼졌다. "그것보다도 훈바님께는 뭐하 할거냐?" "양해를 구하고 반려의 예를 물려달라고 할까해요." "그가 쉽게 물러서지 않을텐데?" "어떻게든 설득을 해보아야지요. 이대로는 너무 혼란스럽기만 하고 상황이 좋지않아 그 상태를 유지한다는 것은 무리에요.아버지를 대신하여 월궁주위를 물려받아달라는 요청도 있고하니 그것을 핑계로 그를 설득해야 겠지요." 파라는 고민하는 비월의 모습에 조심스레 미소를 지었다. 예전의 비월의 모습으로 조금씩 돌아오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그가 어디에 있었고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 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왠지 비월이 나서면 혼란에 빠진 천인계도 정리가 될 것만 같은 믿음이 생겼다. "누군지 골치아파하겠구나." 파라의 말에 비월이 피식 웃었다. 전에 훈바와 차람이 비월이 무언가를 의논하려고만 하면 꼬리를 말고 도망쳐버리고 좀처럼 비월과는 언쟁을 하려고 하지않던 것이 떠오른 것이다. 성격급하고 무절제한 훈바는 조목조목 따져드는 비월을 차마 때리지도 못하고 울그락불그락하다 결국 소리를 지르며 머리를 쥐어뜯기 일쑤였었다. 또다시 비월과 피할수 없는 일로 언쟁을 해야한다는 것을 알면 도망치지 못해 안달을 할 것이다. 그때 문이 열리고 파라로서는 처음보는 자가 들어와 비월에게 차를 건네는 모습에 긴장했다. 비월은 파라의 모습에 웃으며 그를 소개했다. "탁비라고 해요. 내가 기억을 찾을 때까지 내 옆에 있겠다고 하네요." "월아, 너 기억을 잃었었냐?" "저도 모르겠어요.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잃어버린 기억이 없는 것 같은 데 그는 내가 기억을 찾아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네요." 비월이 심각하게 말하자 파라도 심각해져서 그를 살펴보았다. 무생물마냥 이리저리 살펴보는 파라의 시선에도 그는 눈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한참동안 그를 살피던 파라가 어깨를 으쓱하더니 무시해버리기로 했는 지 비월에게 앞으로의 일을 물어보았다. "아직은 뚜렷하게 무엇이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알수가 없군요. 제가 없는 동안 천인계에 무척이나 복잡한 일이 벌어진 것 같아 사전조사가 필요하구요. 대책은 그 다음일인 것 같아요." "네가 돌아와서 안심이 된다." "하하하... 가끔 파라는 나를 전지전능한 능력자로 보는 경향이 있군요. 저라고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어요.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말아요." "그래도 든든하기는 한걸." 파라는 자랑스러운 듯 비월을 쳐다보았고 그런 파라를 탁비는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자주가 업무를 보던 곳에 앉아 그동안 천인계에 벌어진 일의 전모를 살피고 있으려는 데 밖이 소란스러워지더니 문이 벌컥 열렸다. 비월이 방해받은 것에 눈살을 찌푸리고 고개를 들어보니 문을 들어선 자는 훈바였다. 그의 뒤에 차람이 어쩔줄 몰라하며 서 있었다. 비월은 화가 난 듯도 하고 반가운 듯도 한 표정을 짓고 있는 훈바의 모습에 짧은 한숨을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서오세요. 훈바님." 그동안 아무일도 없었던 듯 냉정하기만 한 비월의 태도에 눈썹을 찌푸리며 비월을 노려보던 훈바는 옆에 선 차람이 입을 열자 이제는 그런 차람이 못마땅한 듯 쏘아보았다. "그동안 어디에 계셨던 것입니까 ? 모두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동안이라는 말에 비월이 살짝 차람에게 미소를 지어주었다. 자신이 없는 동안 훈바에게 시달렸을 그가 보이는 것만 같아 조금 미안해졌던 것이다. 어쩌다 저런 주인을 만나 저 고생인지... "몸이 안좋아 치료를 받았습니다." 죽을 뻔했다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어 몸이 안좋았다고 말했다. "뭣? 어디가 어떻게 아팠던 거냐?" 훈바가 노려보던 것도 잊어버린 듯 걱정어린 눈빛을 한 채 비월에게 다가와 비월의 어깨를 잡고 그의 안색을 살폈다. "이제는 괜찮습니다."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는 듯 한참을 더 비월의 안색을 살피던 훈바는 별 이상을 발견하지 못하자 비월을 와락 끌어안았다. 비월을 끌어안으며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비월은 차마 훈바를 냉정하게 밀어내지 못했다. 훈바가 끌어안고 있는대로 가만히 그의 감정이 진정되기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아직 훈바와의 대치에 대한 대책을 세운 것이 없는 터라 갑작스럽게 찾아온 그의 행동은 당황스럽기만 했다. "월아." 비월이 훈바의 낮은 음성에 흠칫했다. 그 끈적거리는 느낌이 진한 훈바의 목소리에 비월은 식은 땀이 흘리며 구원을 요청하듯 차람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차람은 고개를 돌리고 모르는 척 하는 것이 아닌가. 누가 성질 급한 화룡족아니랄 까봐 훈바가 곧바로 비월의 입술을 더듬어왔다. 훈바의 입술과 혀때문에 당황하며 비월이 그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그동안 쌓인 욕구가 많았는 지 훈바는 비월의 행동에도 물러서지 않았다. 차람이 보고 있는 것은 훈바에게 아무런 제약이 되지 않는 모양이였다. 비월은 자신의 배를 쿡쿡 찔러오는 그의 물건의 느낌에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 기분이였다. 지금 상황으로보니 훈바는 차람이 보고 있든 말든 바로 비월을 안을 기세인지라 비월은 얼굴을 붉히며 울것같은 얼굴로 빠져나갈 궁리를 하였다. "자.. 잠깐... 그만하세요.. 여긴 공무를 보는 곳이라구요... 게다가.. 차람도..있잖아요." 하지만 훈바는 이미 이성을 잃은 상태인지 밀어내려는 비월의 손을 한손에 움켜쥐더니 비월의 몸을 쓰러뜨리려하고 있었다. "차람!!!! 훈바님을 좀 말려... 아흑.. 자. 잠깐 ... 어디가는 거에요? 기다려... 우앗 어디를 무는 거에요... 차람!!! 가지 말아요." 비월의 애원에도 차람은 얼굴을 붉히며 밖으로 나가며 문까지 닫아버렸다. 훈바의 손에 풀어헤쳐진 비월의 몸에는 훈바가 새긴 자국들이 봉오리를 터트리고 있었다. 비월이 입을 열어 저지하려 할때마다 훈바는 입을 맞추거나 손가락을 밀어넣어 어떻게든 만류를 하려는 비월의 말문을 막아버렸다. 정신없이 덤벼드는 훈바에게 막무가내로 애무를 당해 정신이 어지러워져 훈바가 이끄는 대로 끌려가던 비월은 자신의 등에 닿는 푹신한 느낌에 자신이 어느새 공무실 뒤편의 휴게실오 옮겨진 것을 깨달았다. 벗겨진 자신의 몸에 닿는 훈바의 몸은 데일 듯 뜨거웠다. 비월의 몸을 안고 있는 팔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죽을 정도로 자제하고 최대한 부드럽게 자신을 안으려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를 밀어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비월은 그의 배려에 차마 냉정하게 그를 끊어내지 못했다. 파라만큼은 아니였지만 그도 자신에게 또다른 의미로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이 너무 가슴 아팠다. 그래서 이제는 그에게서 등을 돌려야한다는 사실에 슬펐다. "미안해요.. 저는..." "쉿!!!" 훈바는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려는 비월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 천천히 비월의 몸을 열어갔다.오랫만의 관계로 훈바의 침입은 비월에게는 무리였다. 이를 악물고 비명을 삼키는 비월의 모습에 훈바는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결국에 비월이 비명을 참지 못하고 터트리자 훈바는 그소리에 자극을 받아 이성의 끈을 놓아버렸다. "도데체가 말입니다. 왜 훈바님에게는 자제력이라는 걸 찾아볼 수가 없는 것입니까? 제가 그렇게 안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살펴봐야 할일이 산더미같은데 이리 일어서지도 못하게 만들면 어쩌자는 것입니까?아욱.. 그리고 저 아직 훈바님 용서하지도 않았다구요. 이렇게 막무가내로 나온다고 스리슬쩍 넘어가 줄거라 생각하신다면 큰 오산입니다. 차람님!!!! 고개 돌리지 마십시요. 제가 훈바님 좀 말려달라고 그렇게 간절하게 쳐다보았더니 외면하신 분이 고개를 돌리고 웃으시면 답니까? 도데체 이꼴이 뭡니까? 두분 모두 꼴도 보기 싫으니까 제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마세요. " 불호령을 내리고 있는 비월을 보면서도 훈바는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그모습에 비월은 화르륵 타올라 더 소리를 질러댔지만 일어나지도 못하고 누워서 꼼짝도 못하는 데야 무서울 것이 없는 훈바였다. 그렇다고 일어나봐야 자신을 이길 수도 없었고... 비월은 손이라도 움직이려면 온몸이 찌르르 울리는 것이 죽을 맛이였다. 비월이 사납게 노려보는 시선에야 죄지은 어린아이처럼 비월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고 차람은 억울하다는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비월을 쳐다보고 있었다. 파라는 오랫만에 비월의 눈치를 보며 도망갈 궁리를 하는 두사람의 모습에 고개를 돌리고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왠지 비월이 화룡궁에 있을 때로 돌아간 것만 같아 감회가 새로워지는 기분이였다. 한참을 더 잔소리를 들으며 끙끙거리고 있다가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빠져나갈 기회라 여겼는 지 만면에 웃음을 띄고 돌아보던 훈바는 처음보는 인물이 약그릇을 들고 들어오자 도망가려던 생각도 잊어버리고 긴장하여 그를 살폈다. 차람 역시 긴장하는 눈치였다. 그런 두사람의 탐색하는 시선을 느끼지 못한 듯이 탁비는 그들을 무시해버리고 비월에게 다가가 비월을 부축해 일으켜앉혔다. "으으윽.. 으드득... 훈바님!!!" 탁비의 행동에 눈살을 찌푸리던 훈바는 비월의 이가는 소리에 어색하게 웃더니 차람과 파라의 뒷덜미를 잡고 밖으로 도망쳐나갔다. 파라는 왜 자신까지 ... 하며 끌려나가지 않으려고 했으나 막무가내로 잡아끄는 훈바의 손아귀의 힘에 어쩔수 없이 밖으로 끌려나올 수 밖에 없었다. 밖으로 나온 훈바는 안색을 확 바꾸더니 파라를 쏘아보았다. "저 자는 누구인가?" "저도 알고 싶습니다." "도데체 왜 저 낯선 자가 월아옆에 당연한 듯 붙어있는 거냐고?" 잔뜩 심통난 사람처럼 금방이라도 그 낯선자를 끌어내지 못한 게 한이라는 표정으로 훈바가 투덜거렸다. "월아의 말로는 그가 월아에게 잃어버린 기억을 찾을 때까지 옆에 있겠다고 했답니다." "뭐? 월아가 기억을 잃었었냐?" "월아도 모르겠답니다." 세사람은 멍하니 각자의 생각에 잠겼다. 비월의 성격으로 그 낯선 자가 자신과 전혀 상관이 없다면 절대로 옆에 둘리가 없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월아님이 행방불명이 되어 있던 동안에 만난 자 같습니다. 그리고 아까 하는 행동을 보니 월아님을 하루 이틀에 겪어서는 알수 없는 여러가지 버릇이나 취향도 잘 파악하고 있는 걸로 보아 결코 생판 모르는 자는 아닌 듯하구요." 차람의 말에 파라가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훈바나 파라나 아직도 비월과 차를 마시는 것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서로 화분이 있는 근처에 있는 자리로 앉으려고 자리싸움까지 하고 있는 처지였다. 그런데 그 낯선 자는 비월과 차를 같이 마시는 것 뿐만 아니라 비월이 좋아하는 취향으로 차를 끓여오기도 했다는 파라의 말에 머리를 감싸쥐고 그가 진정 비월과 어떤 관계인지 고민해야했다. "왜 월아를 잘 아는 자라면 이제서야 나타난 것일까?" 핵심이였다. 그는 왜 이제서야 비월의 옆에 나타난 것일까? "염마궁주와 서천궁주가 당하였다고 합니다. 어떤 자인지는 모르지만 아무리 외부인을 막는 강한 결계라해도 그 자를 막을 수는 없다는 것이 증명되었다고 볼 수 있지요." "벌써 네명이로군. 가공할 정도로 빠른 속도야. 타천의 궁주들이 범인이 아닌 것은 분명하군. 여전히 목격자가 없는가?" 가토는 여전히 다하가 봉인되어 있는 방에 있었다. 그의 모든 생활은 이곳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나마 다하가 옆에 있을 때는 가끔 보여주던 표정이 완전히 사라졌다. 목소리에서도 그 어떤 감정도 느낄 수가 없었다. 모든 감정이 배제되어 버린 듯 딱딱하게 변해있었다. "이번에는 목격자가 있습니다. " "그래?" 탁제균의 말이 그동안 그토록 기다려온 말이였지만 여전히 가토의 얼굴에서는 그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른 때 같으면 탁제균이 머뭇거리면 질책어린 시선을 보내고 호통을 칠 가토였으나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멍하니 다하만 쳐다보고 있었다. 전혀 의욕이 없어 보이는 가토의 모습에 탁제균은 터져나오려는 한숨을 간신히 참았다. 가토가 지켜본다하여 이미 무의식상태의 다하에게 그 어떤 변화가 생기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가토는 인정하지 않으려는 듯 했다. 자신이 눈을 돌린 사이에 다하에게 무슨일이 일어날 까봐 겁을 내는 사람처럼 가토는 다하에게 눈을 돌리지 못하고 있었다. 탁제균은 차마 그 사실을 가토에게 인식시켜줄수가 없었다. 지금의 가토의 모습이 자꾸만 천년전 그 태천제의 혈육인 율연이 죽었을 때와 비슷해서 탁제균을 걱정시키고 있었다. 어찌하여 가토는 그때나 지금이나 그저 평범하다 못해 비루하고 잘난 것이 하나도 없어보이는 자에게 마음을 주는 것인지 탁제균으로서는 이해불능이였다. 그는 그때죽은 율연의 환생체가 다하임을 전혀 모르고 있었기에 가토의 취향에 대한 심한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 한참동안이나 대답이 돌아오지않자 그제서야 가토가 탁제균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탁제균을 돌아보는 그 시선에는 그 어떤 감정도 담겨있지 않았다. "목격자가 있다고 하지 않았던 가?" "네. 염마궁주의 아들인 매하가 그를 보았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의 생명이 위험하다며 화룡궁에 몸을 의탁하였다고 하더군요." "어떻게 생긴자이며 어떤 식으로 검을 빼앗았다고 하던가?" "그가 본 것은 그가 염마궁주의 몸에서 검을 뽑아내는 것을 보았을 뿐이랍니다." 처음으로 가토에게 감정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금방 사라지기는 하였지만.... "뭣? 검을 뽑아내? 염마궁주가 불러낸 것을 빼앗은 것이 아니라 몸에서 뽑아냈다는 것이 사실인가?" "네 분명히 염마궁주의 몸에서 검을 뽑아내고 문장은 나중에 파괴하더랍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그럼 이때까지 당한 자 들 역시 같은 방법으로 당했다는 소리가 아닌가? 도데체 누가 있어 남의 몸안에 봉인되어있는 검을 뽑아낼 수 있단 말인가?" "저로서도 그말을 믿어야할지부터 의심하였습니다." 한참동안 생각에 잠겨 있는 가토를 보며 탁제균은 그가 이일에 대한 대책을 세워주기를 기다렸다. 도저히 이대로는 무어가 무언지 혼란스러워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기가 힘들었다. "우리 천이족 아이들 중에 은신을 잘하는 아이들을 각 궁주들의 옆으로 보내게 . 궁주들에게 무슨일 이 있어나더라도 절대로 모습을 드러내지 말고 끝까지 지켜본 후 보고하도록 명하게." "네." "그리고 비월은?" "파라와 먼저 조우한 후 훈바를 만났다고 합니다." "당분간은 지켜보고 수상한 낌새가 보이면 즉시 보고하게." "네." 여러가지 명령을 전달받은 탁제균은 오랫만에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하가 봉인되어 있는 방을 나섰다. "지금 무어라고 했느냐?" 훈바의 낮게 깔린 음성에 차람이 움찔 놀랐고 파라 역시 흠칫 놀랐다.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사람은 비월과 비월의 옆에 그림자처럼 서 있는 탁비였다. 훈바의 사납게 노려보는 시선을 마주보며 비월이 한숨을 내쉬며 제발 자신이 그를 설득 시킬수 있기만을 빌었다. "반려의 예를 물러주십시요." 훈바의 앞에 놓여있던 찻잔이 훈바가 내리친 주먹에 산산히 부서지며 훈바의 손에 상처를 만들었다. 차람이 급히 다가와 피가 흐르는 훈바의 손을 잡고 지혈을 시키려고 했으나 훈바가 그런 차람의 손을 뿌리쳐버렸다. 차가운 그의 행동은 그의 분노를 대변하고 있었다. 여전히 시선은 비월에게 향한 채 떨어질 줄 모르고 있었다. "이유는?" 금방이라도 불을 뿜을 듯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에 안절부절 못하는 차람이였다. 자신이나 파라는 왠만큼 체력이 받쳐주니까 지금 훈바가 이성을 잃고 날뛰어도 견딜 수가 있을 테지만 비월은 한대만 맞아도 치명적인 상태가 될 것만 같아 걱정스러웠다. 어쩌자고 저 여린 사람이 대놓고 훈바가 분노할 만한 짓을 저지르는 것인지 차람은 기절하고 싶은 심정이였다. "제가 월궁위를 물려받으면 더이상 훈바님께 반려로서 도움을 드리지 못할 것 같아 드리는 청입니다. 좀 더 훈바님을 보필할 수 있는 자를 얻으시는 것이 덜 미안한 일일거라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침착한 비월의 말에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던 훈바가 빙그레 웃었다. "걱정마라. 그런 일이라면 충분히 감수하겠다. 내 월궁의 처지를 모르는 바도 아니고 충분히 이해할터이니 두번다시 그런 말은 꺼내지도 말아라." 비월은 난감하기 그지 없었다. 훈바는 말을 쉽게 하지만 막상 닥치고 나면 온갖 투정과 불만을 터트릴 것이 자명했다. 지금이야 아무생각없이 승낙했지만 나중에는 분명 여러가지로 시비를 걸고 넘어질 것이다. "진정 이해하시고 감수하시겠습니까?" "두말하면 잔소리..." "정말 믿어도 되겠습니까?" "믿어!!" "그럼 이 곳에 서명날인해주세요." "뭣?" 하며 비월이 내민 서류를 보더니 얼굴색을 바꾼다. 자신을 믿지못하고 확인받으려는 비월의 행동에 몹시 불쾌함을 느끼며 인상을 찌푸렸다. "훈바님을 못믿어서라기보다 제가 안심하고 일에 몰두하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훈바님이 약속을 어기실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이런 서류에 서명날인하시는 것을 두려워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믿고요." 은근히 부추키는 비월의 말에 결국에 훈바는 내키지 않은 듯 떨떠름한 표정으로 자신이 흘린 피로 서명하였다. 내용을 자세히 보았다면 다시한번 생각해보았을 테지만 훈바에게는 예초부터 그런 세심한 구석이라고는 없었다. "됐지?" "감사합니다." 차람은 왜 서류를 자세히 읽어보지 않느냐고 말하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왠지모르게 그 서류가 무척 불길하게 여겨졌지만 훈바의 기색을 보니 불쾌하고 골치아픈일에서 어서 빨리 벗어나고 싶어하는 기색이 다분한지라 차마 제동을 걸지 못하고 그저 안타까운 듯 아쉬운 듯 비월의 손에 들린 서류만 쳐다보았다. "참 이분은 탁비라 하며 오늘부터 저와 함께 일할 사람이랍니다. 제 목숨을 구해주신 분이기도 하지요." 세사람이 동시에 탁비를 쳐다보았다. 그들은 모든 의심을 버렸다. 그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던 사람이든 상관이 없었다. 그가 비월의 목숨을 구해주었다는 사실 하나나만으로도 그는 환영받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탁비는 극명하게 나타나는 세사람의 표정변화에 처음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그로서는 참으로 오랫만에 재미있는 일을 본 그런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어쩌면 저리도 단순하고 솔찍한 지 오래전 아주 오래전 그가 알고 있던 과거의 어떤 인물과 겹쳐보이고 있었다. 그래서 그도 그들을 자신이 짊어지고 있는 짐을 같이 지고 갈 사람들로 정했다. 17.천수천인전.4 규하는 율허가 불러서 왔다는 탁비라는 사람을 경계하였다. 척 보기에도 일반 백성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외모와 그 오만한 표정이라니... 자신이 지금 수인궁의 중심부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전혀 기죽은 기색이 없었다. 그런 그가 율허를 보더니 다가와 무릎부터 꿇고 예를 표했다. "그동안 여디계셨던 겁니까? 모두들 걱정하고 계셨습니다." 하며 나무라듯 율허를 책망하는 그의 시선과 말에 규하가 율허의 어깨를 끌어당겨 자신의 품에 가두었다. 그의 시선에는 율허를 데려가면 가만히 두지않겠다는 강렬한 의지가 번뜩였고 규하의 그런 행동과 시선에 탁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대는 누구인가? 어찌하여 율허님께 손을 대는 것이냐?" 순간 내전에 있던 장로들의 안색에 분노가 어렸다. 자신들 뜻대로 움직여주지않는 왕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자신들의 우두머리가 아닌가. 그런 그에게 무례하게 구는 탁비가 좋게 보일리 없어 누구랄 것 없이 수인족의 얼굴에는 노기가 어렸다. "탁비!! 그에게 무례하게 굴지마라. 그는 나의 반려야." 순간 탁비는 충격이라도 받은 듯 멍하니 규하와 율허를 쳐다보았다. 믿을 수가 없어 율허를 돌아보는 그에게 율허가 고개를 끄덕이자 곧 허리를 숙여 사과를 했다. "저는 탁비라 하는 율허님의 수족입니다. 율허님의 반려가 되시는 분에게 무례를 저질렀으니 용서하여주십시요." 사람들은 여전히 교만함이 사라지지않는 탁비의 표정에 불쾌감을 숨기지 않았다. "모르고 저지른 일이니 괜찮습니다." 규하의 말에도 별 감흥이 없는 지 규하의 사과의 말에 감사의 인사도 하지 않고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율허에게 시선을 돌렸다. 규하를 쳐다볼때와는 달리 그 시선에는 걱정과 염려가 가득했다. "어찌 태천궁에 알리시지도 않고 반려의 식을 치루는 짓을 하신겁니까? 태천제님이 아시면 진노하실겁니다." 순간 탁비의 교만함과 오만방자함에 술렁거리던 내전에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 정적이 돌았다. 진정 자신들이 무슨말을 들은 건지 되새겨보는 듯 하더니 곧 경악에 찬 표정으로 탁비와 율허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규하도 무심결에 율허를 안고 있는 팔에 힘을 주었다. 알수없는 불안감이 생기며 새로이 나타난 탁비란 자가 율허를 빼앗아 갈것만 같아 초조해졌다. 이미 오래전에 율허가 결코 만만한 신분의 인물은 아니라는 건 짐작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제와서 돌려보내거나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규하의 그런 심정을 아는 건지 율허가 고개를 돌려 그를 보더니 빙그레 웃었다. 그 다정한 시선에 규하도 빙그레 웃었다. "나는 규하를 사랑해. 그러니 이제 태천궁으로 돌아가지 않을 거야. 그래서 그 소식을 탁비가 전해주었으면 해서... 그리고 탁비의 거취도 정해야할 것 같아서 불렀어." "율가님이 가만히 계시지 않을 텐데요. 그런 중대한 일을 태천제의 의논도 없이 치루시다니요. 율가님은 분명히 이일을 인정하시지 않을 겁니다." 규하의 말이 계속될수록 수인족들의 안색은 더욱 창백해지고 있었다. 일반 수인족들이야 태천제가 어떤 인물인지 모르지만 권력층 그것도 상반부에 있는 자들은 태천제가 어떤 인물인지 너무나 잘알고 있었다. 그가 어떤 성격이며 얼마나 가공할 정도로 강한 힘과 능렬을 가지고 있는 지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들이 어디에 온지 무엇을 하던 자인지 모르는 자라고 무시했던 율허가 그런 태천제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떠올리자 그동안 자신들이 율허에게 한 행동이 자동적으로 떠오르고 식은땀이 주르륵 흐르는 걸 느껴야했다. "그녀석은 어린아이같아서 괜찮아... 난 오히려 홍해가 더 걱정인걸." 털썩!! 털썩!!!! 누군가 주저앉는 소리에 그쪽을 돌아보니 대장로와 평소에 소심하기로 유명한 장군 서너명이 주저앉아 있었다. 그들뿐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의 안색이 파랗게 질려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경기를 일으킬것처럼 떨고 있었다. "?" 율허가 영문을 몰라하는 표정을 지었고 그런 율허와 사람들을 번갈아 쳐다보던 규하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동안 그들이 율허를 얼마나 무시하고 못마땅해하였는지를 너무나 잘알고 있는 규하는 태천제를 그녀석이라고 부르고 있는 율허의 모습에 심장이 멎는 듯한 놀람을 겪고 있으리란 걸 물어보지 않아도 알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규하역시 속으로는 놀라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율허가 그 어떤 신분이든 놓지않을 결심을 한터라 애써 율허의 감당하기 힘든 신분에 대한 것은 머리속에서 지워버리고 있었다. 탁비는 오래지 않아 수인궁에서 율허가 어떤 대접을 받았는 지 깨닫고 분노했다. 특히나 그 화려하고 냄새나는 목영이라는 암컷이 대놓고 율허를 무시하자 참지못하고 대장로들과 장군들을 들들 볶아대여 사건의 전말을 들은 것이다. 장로들과 장군들은 고양이 앞에 쥐처럼 벌벌 떨면서 용서를 빌었고 탁비는 길길이 날뛰다가 율허의 만류로 진정하였다. "왜 참으시는 겁니까? 율허님은 그들에게 결코 그런 대접을 받아서는 아니되는 신분입니다. 그런데 반려의 식을 올린 것까지도 부정당하다니요. 증인이 없다고 감히 율허님의 반려의 식을 부정한다 말입니까?" 사실 진짜 반려의 식을 한것이 아니라고 말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이 그말을 꺼내는 순간 율허를 태천궁으로 끌고갈 것만 같은 예감때문이였다. 아마도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면 율가를 불러와서라도 자신을 끌고가려고 할것이고..그렇게 되면 간신히 받아낸 규하의 반려의 청은 그대로 물건너가버리고 말것이 분명했다. "그들이 믿지 못하는 것도 이해해줘. 자신들이 보지 않았으니 믿지 못하는 것이 당연해." "이럴수가... 이건 말도 안된다구요. 율허님이 어떤 분인데....이런 무시를...." 탁비는 자신의 일이라도 되는 듯 펄펄 뛰고 이런 대접을 받게 가만히 내버려 둔 규하를 나무랐다. 율허가 팩 톨아져서 규하를 더이상 나무라면 말도 하지 않겠다고 하자 조금 수그러들었지만 모종의 결심을 한 듯 장로들과 장군들을 모으더니 다시 반려의 식을 치구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증인 없으면 만들어서 더이상 왈가왈부하지 못하게 만들어 주겠다는 우김에 지은 죄가 있는 장로들은 탁비의 눈치를 보며 새로이 반려의 식을 준비했다. 율허의 부탁으로 태천궁에 연락을 하지 않은 탁비는 그래도 이일에 나중에 태천궁에 알려지면 큰 소란이 일어날 거라는 걸 생각하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망서리다 겨우 연락한 것이 반려의 식이 있는 당일이였다. 이걸로 자신이 율허의 뜻은 다 지킨거라 믿었다. 홍해를 비롯한 태천제의 일행이 도착한 것은 반려의 식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였다. 맹세의 식이 끝나가고 있을 무렵 식장의 문이 거칠게 열리고 그들이 등장하였다. 사람들이 놀라 돌아본 곳에는 그들이 죽어서도 한번 볼까말까한 태천제를 비롯 지계족의 왕인 홍해 그리고 십이궁주들과 대장군들이 줄줄이 들어서고 있었다. 태천제는 규하옆에 서있는 율허를 확인하더니 환하게 웃으며 자신을 반기는 율허의 모습에 이를 악물었다. 꽉 쥐어진 주먹사이로 핏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지만 누구도 감히 태천제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해 고개를 숙이고 있는 터라 그걸 눈치챈 사람은 없었다. "율가... 그동안 별일 없었지?" 조심스레 입을 열며 다가오는 율허의 모습에 율가는 억지로 미소지었다. 속에서 끓어오르는 모든 감정을 그대로 드러낸다면 상처입을 것을 알기에 그저 아닌 척하며 따뜻한 미소를 율허에게 보냈다. 율허는 율가의 미소에 안심했는 지 그를 끌어안았다. 하지만 워낙 체격차이가 큰지라 다른자들눈에는 율허가 안겨있는 것만 같은 형상이였다. 율가는 율허를 숨이 막힐정도로 끌어안았다. 그리고 자신의 품에 안긴 율허를 빼앗아가버린 규하를 율허의 어깨너머로 노려보았다. 그눈에 어린 짙은 분노와 살기에 규하는 몸이 굳어버리는 기분이였지만 애써 그의 시선을 외면하지 않았다. 왠지 겁을 먹고 시선을 돌려버린 순간 그가 이대로 율허를 데리고 가버릴 것만 같아 차마 등골이 서늘하게 굳어갔지만 정면으로 태천제를 마주 쳐다보았다. "으윽... 숨막혀..율가." 규하의 당당한 시선에 자신도 모르게 힘을 주었는 지 품에 안긴 율허가 신음을 터트리며 자신을 밀어냈다. 자신에게서 벗어나려는 작은 몸을 차마 봍잡지 못하고 애타게 쳐다보며 태천제 율가는 입술을 깨물었다. "미안, 그동안 걱정 많이 했구나.미리 연락하지못해서 화나지 않았지? 자 여기 이사람이 규하야. 오늘 내반려가 된 사람이고 규하 이쪽은 내동생 율가!! 태천궁의 주인인 태천제야." 더이상 놀랄 것이 없다고 생각했던 장로들과 장군들이 또다시 헛바람을 들이키고 있었다. 율허가 태천제를 그녀석이라고 부르고 이름을 불렀지만 그의 형이라고는 아직 짐작한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그대는 그대가 반려로 맞이한 사람이 내형제라는 걸 알고 있었는가?" 자신을 벗어나 규하의 곁으로 가버리는 율허에게서 시선을 떼지못하는 태천제의 낮은 목소리에서 그의 율허를 향한 강한 집착과 소유욕을 대번에 눈치챘다. 규하는 자신에게 다가온 율허의 허리에 팔을 감아안았다. "오늘에서야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어떤 신분이든 이제 그는 저의 반려입니다." 규하의 명백한 소유욕을 드러내는 말에 태천제의 안색이 굳었다. 규하의 말과 행동에 환하게 미소짓는 율허의 모습이 비수처럼 그의 가슴에 와 박혔다. 자신이 이제까지 어떤 심정으로 지켜온 율허이던가. 그런데 생전 본 적도 없는 자에게 고스란히 빼앗길 줄은 짐작도 못했었다. 이렇게 될줄 알았다면 기다리지 않는 건데... 태천제가 미소지으며 고개를 숙이자 홍해는 온몸이 곤두서는 공포를 느꼈다. 율허는 자신이 이제 반려를 맞이하여 그 운명에서 벗어났다고 믿고 싶어할 지 모르지만 홍해가 보기에 오히려 더 태천제를 자극한 꼴이 되어버린 것만 같았다. 자신이 권하는 방법이 이런 식으로 진행되리라 생각지 못했던터라 홍해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반려의 방에 들어선 율허는 아직도 두근거리는 심장을 주체하지 못하고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시종들이 들어와 율허의 옷을 벗기고 향유로 율허를 씻긴후 옷을 갈아입혔다. 그런데 그옷이 민망하리만치 야한 것이라 율허가 당황하여 두리번거리며 다른 옷을 찾았으나 찾지못하자 시종을 쳐다보며 다른 옷을 달라고 했다. 그런데 그들은 웃으면서 원래 첫날밤은 그런 옷을 입는 거라며 다른 옷이 없다고 하질 않는가. 그리고 율허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향로에 무언가를 넣더니 밖으로 나갔다. 무어냐고 물어보는 율허의 말에 밤의 흥취를 더하는 묘약이라는 말을 남기고.... 혼자 남은 율허는 덩그라니 앉아 있다가 아무래도 자신의 옷차림이 신경쓰여 침상위에 있는 천을 끌어다 몸을 감쌌다. 규하가 언제들어올지 몰라 과일을 먹고 기다리고 있으려니 자꾸만 몸이 나른해지고 조금씩 저려와 버티기가 힘이들었다. 열이 오르는 듯 얼굴이 화끈거리고 맥박이 뛰는 것을 확실하게 느낄 정도로 심장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팔다리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아 가만히 앉아있는 것이 힘겨워지고 있었다. "규하.. 아파.." 의식이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깨어있는 듯 하다가도 꿈을 꾸고 있는 것같기도 한 몽롱한 느낌에 눈물이 흘렀다. 답답한 느낌에 천을 밀쳐버리고 침상에 누워 몸을 최대한 웅크렸다. 시원한 손이 이마에 닿자 기분이 나아졌다. 무거운 눈을 들어보니 규하가 희미하게 보였다. "향이 너무 짙군. 도데체 장로들은 무슨 생각인건지 원... " 규하가 중얼거리며 열이 올라 숨을 몰아쉬고 있는 율허를 안아올렸다. 율허는 칭얼거리며 규하의 품으로 파고 들어 얼굴을 부벼댔다. 아픈 듯 저린 듯하던 감촉이 규하와 닿자 기분좋은 감촉으로 바뀌자 율허는 죽어라고 규하에게 매달렸다. 규하는 미열의 온기가 파고들자 낮은 신음성을 터트리며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율허.. 조금만 참아.. 이대로 안기면 나중에 후회할거야. 그러니 .. 조금만 ..." 규하는 자꾸만 파고들어오는 율허를 밀어내지도 못하고 망서리다 베란다로 나왔다. 서늘한 공기가 열이 오른 율허를 조금이라도 식혀주기를 바라며... "흐윽.. 아파.. 규하.. 아파요..." "그래 알아... 조금만 참아..." ".. 손가락이 저릿저릿해.. 그리고 .. 숨도 뜨거워..." "괜찮아질거야.. 율허 괜찮아 질거야..." " 머리도 울렁거리고... 자꾸 규하가 흔들려..." 규하는 가장 강한 최음가루를 사용한 시종들에게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였다. 방안에 들어섰을 때 후끈하게 달아오른 공기에 아찔함을 느껴야 했다. 방금전에 들어선 자신도 어지러울 정도인데 서너시간을 혼자있었던 율허가 어떨것인가를 생각하니 마음이 조급해져 침상으로 다가가니 아니나 다를까 율허는 옷이란 옷을 다 벗어버린 채 더운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모습이 참기힘들정도로 유혹적이기는 했지만 비몽사몽간의 율허를 그대로 안고 싶지는 않았다. 시종들에게 장로들이 밤의 흥취를 돋워주는 묘약을 사용하라고 했다는 말을 전해듣자 마자 뛰어들어왔지만 율허는 상당히 많은 양의 묘약을 들이마신 후였다. 이상태에서 율허를 안으면 율허는 자신의 의지가 아닌 묘약의 힘으로 자신에게 안기는 것이였고 그건 규하가 원하는 바가 아니였다. 너무 소중해서 이때까지 지켜보기만 했던 율허를 이런 식으로 안으라니... 분통이 터질일인것이다. 그걸아는 지 모르는 지 율허는 위험할 정도로 요염한 시선을 보내며 자신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춰왔다. 알고 있는 거라고는 입맞춤이 전부이면서 본능적으로 부추키듯 규하의 몸에 자신의 몸을 비벼대고 있었다. 규하는 조심스레 율허의 몸을 안고 그저 율허의 행동이 과격해지지 않도록 막아보려고 했다. 율허는 그런 규하의 마음을 전혀 배려해줄 생각이 없는 듯 했고 "크흑.. 이런 율허.. 이녀석... 미치겠네...이거..그만 .." "규하... 나 .. 이상해..." "이상하지 않아 이렇게 예쁘기만 한걸.." "규하도 예뻐요. 세상에서 제일로..." 하며 환하게 미소지었다. 그 미소가 너무 예뻐 규하는 그만 어떻게든 율허의 행동을 막아보려던 생각을 접어버렸다. 규하가 조심스레 입을 맞추자 율허가 적극적으로 파고 들며 규하를 자극했다. "내가 언젠가 이런 짓하면 큰일 날거라고 했잖아.." 그 가는 팔로 규하를 안고 적극적으로 응해오는 모습에 규하는 자신을 억제하던 욕망을 풀어버렸다. 목덜미에서 배꼽까지 규하가 남기는 흔적에 자지러지듯 흐느끼며 몸을 비틀고 부들부들 떠는 모습이 너무 매혹적이라 숨이 막혀오는 규하였다. "사랑한다.. 율허.." ".. 규하 ..사랑해요." 열기와 흥분에 취해 정신없이 애무당하고 신음하던 율허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몸이 열리려하자 아픔을 예감한 듯 규하에게서 벗어나려고 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손을 규하의 팔을 붙잡고 있었다. 처음으로 겪는 극심한 통증에 비명을 지르는 율허가 안쓰럽기도 하고 사랑스럽기도 해서 규하는 진땀을 흘리며 서서히 율허가 되도록이면 덜 아프도록 율허의 몸안으로 파고들어갔다. "하악.. 하아.." 한꺼번에 몰려온 극심한 아픔에 온몸이 굳었다가 자신의 몸안을 가득채우고도 몸안에서 꿈틀거리며 커지고 있는 느낌에 율허는 진저리쳤다. 조금이라도 그 생경한 아픔에서 벗어나려고 몸을 비틀었다가 오히려 규하를 자극하고 만 꼴이되었다. 규하는 이를 악물고 신음을 터트리며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자신을 참아내었다. 그러나 언제나 율허는 그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리기 일쑤였고 그대로 달려든 규하는 율허의 몸을 마음껏 차지하였다. 그뒤로는 규하도 율허도 기억이 없었다. "벌써 사흘째입니다. 저희가 사용한 묘약은 하루밤이면 사라질텐데 무엇이 잘못되었을 까요?" 사흘째 반려의 방에서 신음소리가 끊이지않자 묘약을 사용한 시종이 근심스러운 듯 대장로를 쳐다보았다. 하룻밤이 지났을 때야 그들의 왕이 보기보다 정력적이구나 했으나 이틀밤이 지나고 사흘에 접어들자 슬슬 약에 부작용이 있는 것이 아닌지 걱정이 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에 반하여 대장로의 안색은 밝기만 했다. "걱정말거라. 몇번인가 음식과 음료를 시키신 걸로 보아 별일 없으신 것 같으니까. 그보다 율허님의 몸이 견뎌내려나 모르겠구나. 사흘이나 밤낮으로 안기기에 그리 건강해보이지는 않던데..." 대장로에 말에 시종이 얼굴을 붉히고 물러났다. 대장로의 걱정대로 율허가 기절하기를 몇번!!! 그러나 깨어나면 또다시 안아오는 규하때문에 자신의 몸이 자신의 몸같지 않게 느껴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예민해질대로 예민해져 규하의 손이 닿을 때마다 바로 반응을 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일어나지도 못하고 규하가 먹여주는 대로 먹고 씻겨주는대로 얌전히 기대어 지냈다. 온몸에 규하가 남긴 흔적들이 가득했다. 목덜미와 가슴주위는 물론 등뒤며 허벅지 그리고 종아리에 심지어는 손가락과 발가락에도 울혈이 남아있었다. 더이상 율허가 견디지 못하는 것을 알면서도 규하는 쉽사리 율허를 놓아두지 못하고 있었다. 율허는 얼마나 지쳤으면 먹으면서도 졸고, 씻으면서도 졸고, 심지어 관계를 가질때에도 졸았다. 그리하여 사흘밤낮을 율허를 안았던 규하는 이틀을 내리 잠들었다. 그 옆에서는 율허가 실신에 가까운 잠을 자고 있었고 꿈에서라도 떨어지지 않으려는 듯 규하와 율허는 서로를 꼭 끌어안고 있었다. 잠잠해진 방안을 치우려고 안으로 들어선 시종들은 그 모습에 작은 소리로 웃어댔지만 두사람 다 이미 깊은 잠에 빠진 터라 그런 그들의 모습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날로 소문은 일파만파 퍼졌고 목영의 방에는 모든 물건이 수명을 달리하였다. 율희는 태천제의 반려가 된 이후 처음으로 통쾌하게 웃었다. 그 당당하고 조그맣고 얄미운 율허가 겨우 수인족의 반려가 되다니.... 이제 그가 아무리 태천제의 형이라해도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고 예를 올려야하는 신분으로 전락한 것이다. 그토록 태천제의 마음을 사로잡아 애를 태우게 만들고 자신의 아이에게 성정이 어떻다느니하는 소리나하더니 그 자신은 정작 천인족이라면 누구나 경원시하는 수인족의 반려가 되다니 십년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이였다. 그동안 무슨일인지 갑작스럽게 반드시 반려를 찾겠다며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모습과 한번도 반려의 청을 승낙받지 못하고 침울해하는 모습에 비웃은 것도 잠시 태천제가 실망하는 그를 위로하는 모습을 보며 분노에 떨어야했다. 조그맣기만 하고 요염한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에 반려를 찾지못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율희에게 우열감을 주었지만 모든 기분을 태천제가 망쳐버렸다. 행여라도 율허가 상처받을 까 안절부절못하던 모습이라니...... 아니 혹여라도 누군가 율허의 반려의 청을 받아들일까 걱정하는 것 같던 그 눈빛은 율희를 비참하게 만들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반려를 찾지못해 우울해하는 율허의 모습을 충분히 즐겼으리라. 그래서 율허에게 아무리 그래보았자 누가 암컷으로 변이하지 못하는 당신을 반려로 맞이하고 싶어하겠냐고 비꼬아버렸다. 그때까지도 여전히 반려를 찾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돌아다니던 율허가 그말에 창백하게 질리더니 그게 중요하냐고 물었다. "당연한 소리를 하는 군요. 원해 혼돈의 아버지께서 이 세계를 만들어놓으시고 지키기위해 모든 인종을 수컷으로 만들었지만 그 중 암컷으로 변이할 수 있는 자들을 만드신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거지요? 암컷만이 수컷을 받아들여 포근하게 감싸고 안전하게 알을 낳을 수 있도록 한거라구요. 처음부터 후계자로 태어난 당신에게는 애초부터 그 능력이 없잖아요. 그래서 혼돈의 아버지께서 체격도 뒤떨어지고 힘도 부족한 부적절한 몸을 가진 당신을 대신하여 율가님을 다시 만드신 것이 아니던가요? 당신이 아무리 율가님보다 먼저 난 사람이라지만 불량품임에는 변함이 없어요. 암컷들이 당신을 쳐다보지도 않고 수컷들은 흥미를 드러내지않는 이유가 그거라고는 생각해보지 않았나요? " "수컷으로도 알은 낳을 수 있어요." 하얗게 질려서 절망적으로 내뱉는 율허의 말에 율희는 콧웃음을 쳤다. "가능하기야 하지만 그 알들 대부분이 약해서 부화하기 전에 죽어버린다는 걸 알잖아요? 그리고 낳는 당사자에게도 커다란 부담이고..... " 율희는 더이상 자신이 그래도 쓸모있는 인간이라고 항변하지 못하는 율허를 그대로 내버려 두고 자신의 거처로 돌아가버렸다. 다음날 아침에 율허가 태천궁을 떠났다는 소식에 흠칫했으나 태천제가 아무런 내색도 하지않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런데 몇달만에 전해온 소식이 그 얄미운 자가 수인왕의 반려가 되었다는 소식이 아닌가. 불안하고 초조해하며 율허를 기다리던 태천제의 모습을 입술을 물어뜯어가며 분노를 삭이고 있던 율희는 시종이 전해온 그 소식에 아주 통쾌하게 웃어댔다. 자신을 반려로 맞이하고도 한시도 율허에게서 시선을 떼지못하던 태천제의 그 얼빠진 모습도 이제는 그 수인족의 반려가 되어 율가를 물먹인 율허의 행동도 그를 희열에 들뜨게 만들었다. 그동안 마음고생한 것을 충분히 보상받은 그런 기분이였다. 이제서야 세상 모든 것을 얻은 그런 느낌이였다. "며칠째 만화궁에서 나오시지 않으십니다." 홍해는 시종의 말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역시 갑작스런 율허의 반려의 식에 대한 소식을 전해들었을 때 그 진의를 의심할 정도였었다. 그리고 바로 뒤따라 떠오른 생각이 이 소식이 태천제에게 전해진 후의 파장이였다. 홍해의 걱정대로 그 홍해에게서 그 소식을 전해들은 태천제는 그가 보는 앞에서 쥐고 있는 홀을 움켜쥔 것만으로도 부서트렸다. 그모습에 홍해는 깊은 암흑을 보는 그런 절망을 느꼈다. 아무래도 이건 아니다 싶었다. 온몸을 태울듯이 타오르는 태천제의 오라에 홍해는 숨을 쉴수가 없어 현기증을 느꼈다. 어짜자고 그 단순한 율허를 위로한답시고 부추켜서 오히려 일을 복잡하게 만든것일까 후회하고 말았다. 율허가 반려를 맞이한다고해서 태천제가 율허를 포기할 거라고는 확신하지도 못하면서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내뱉은 말이 가져온 결과에 홍해는 절망했다. 오히려 예전보다 더 위험해진 분위기를 풍기는 태천제의 모습에 홍해는 우선 율허부터 말려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러나 급히 율허가 머물고 있다는 수천으로 달려가려던 홍해는 태천제에게 잡혀 바로 수천으로 이동당하였다. 활활타오르는 태천제의 오라에 절망하며 홍해는 다만 아직 율허가 반려의 식을 치루지 않았기만을 바라며 기도했다. 그러면 납치를 하든 포박을 하든 억지로라도 태천궁으로 끌고가 가두어서라도 더이상 태천제를 자극하는 행동을 하지못하게 만들겠다는 다짐도 하였다. 그러나 식장에 도착해보니 이미 식은 마지막단계에 접어들어 있었다. 게다가 맹세의 의식을 끝내고 자신들쪽으로 몸을 돌린 율허는 오직 운명을 바꾸겠다는 수단으로 반려를 찾던 사람이라고 볼수 없을 정도로 무척이나 행복해보였다. 흥분으로 상기된 생기있는 얼굴이며 입에 걸린 환한 미소가 진정한 반려를 찾은 사람처럼 보였다. 다른 사람들은 고개도 들지 못해 태천제의 손에서 떨구어지고 있는 핏방울 보지 못했지만 홍해는 그 모습을 발견하고 침음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저 둔하고 눈치없는 율허는 반가운 듯 다가와 태천제의 몸을 끌어안았다. 율허를 마주안는 태천제의 눈에 가득한 소유욕과 강한 집착에 홍해는 물론 규하라는 수인족의 왕이 움찔놀랐다. 그런데 그 규하라는 자는 누구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는 태천제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아니 태천제가 율허에게 품고있는 감정을 눈치챈듯했다. 당장이라도 안고 있는 율허를 그대로 가져가버릴 것만 같은 태천제의 기세에 그는 자신이 고개를 돌리면 태천제가 율허를 안고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그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게다가 태천제에게서 벗어나 자신에게 돌아온 율허를 태천제 앞에서 꼭 끌어안아 율허가 자신의 것임을 당당하게 드러내는 배짱도 보였다. 홍해는 규하라는 자가 결코 만만치않은 자임을 느꼈다. 흘러가는 상황으로 보아 이제 더이상 자신이 어쩔수 없는 상황임을 직감하고 그저 절망적인 한숨만 내쉬는 홍해였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지켜보는 수밖에 없음도 느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당장에라도 율허를 끌고갈 것만 같던 태천제가 차마 율허가 행복해하는 모습에 손만 쥐었다폈다할 뿐 더이상의 행동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였다. 어쩔수없음을 알았는지 태천궁으로 돌아온 태천제율가는 넋을 잃어버린 모습이였다. 그리고 만화궁으로 사라진 후 며칠이 지나도록 그곳에서 나오지 않는 모습에 절로 한숨이 나오고 말았다. 누구의 출입도 허락하지않고 저 비밀스런 궁전안에서 무얼 하는 건지 홍해는 불안하기만 했다. 율희는 이제 태천제도 다른 사람의 반려가 되어버린 율허를 어쩔수 없다고 생각했는 지 이제까지 한번도 본적이 없을 정도로 환하게 웃으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홍해는 그모습에 괜한 찬물을 끼얹고 싶은 생각이 없어 잠자코 지켜보기만 하였다. 결코 태천제가 그런일로 율허를 포기하진 않을 거라고 그런일로 포기할 생각이면 그의 부탁으로 율희를 반려로 맞이하면서까지 율허의 마음을 배려하지않고 그대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율허의 부탁을 거절해버리고 억지로라도 율허를 차지해버렸을 거라고 하면 저 율희는 온갖 신경질로 또다시 태천궁의 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들것을 잘 알기때문에 잠시라도 태천궁의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주고 싶은 생각도 없지 않아 있었던 것이다. 만화궁으로 사라진 태천제가 마음을 정리할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음모를 꾸밀것인지는 그의 마음이지만 홍해로서는 안좋은 쪽으로 자꾸만 생각이 흘러가 답답해미칠지경이였다. 기다리다 지쳐 차라리 어떤 결과이든 빨리 나기만을 바랐다. 그것이 원하는 결과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태천제 율가가 만화궁을 나온 것은 보름정도가 지나서 였다. 그곳을 나오는 그는 웃고 있었다. 율희는 그모습에 이제는 그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운명에 순응한 것이라고 믿었지만 홍해는 등골이 서늘해지고 소름이 돋는 것을 느껴야했다. 그런 홍해를 힐끗 쳐다본 율가가 웃으며 홍해에게 다가오더니 그의 어깨를 끌어안고 은근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디가 안 좋은 건가? 안색이 너무 창백한걸... 당분간 지계궁으로 돌아가 쉬도록 하게." 하며 등을 토닥여주는 태천제의 모습에 홍해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언젠가 혼돈의 아버지를 죽여야겠다고 말할때도 율가는 지금처럼 웃었다. 율허는 아직도 혼돈의 아버지가 가사상태에 빠져있는 줄 알지만 이미 혼돈의 아버지는 율가에게 먹혀 이세상에 사라져버린 지 오래였다. 결코 율허와 맺어질 수 없을 거라고 율가를 저주하던 혼돈의 아버지를 잔인하게 죽이고 율가는 그러면 그 저주마저 죽여버리겠다고 했던 율가였다. 18. 환생한 이유. 비월은 조용히 눈을 감고 나무들소리며 바람소리 그리고 작은 풀벌레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모두가 잠든 깊은 밤 정무실에서 창밖을 내다보니 보름달이 떠올라있었다. 다른 십이지천에 비해 유난히도 달의 영향이 많은 월궁인지라 다른 곳에서 보았던 달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환하고 아름다운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한참동안 멍하니 달을 쳐다보다 홀린 듯 자리에서 일어나 정원으로 나왔다. 월광욕실로 가면 더 가까이에서 달을 볼수 있지만 차마 그곳으로 발걸음을 하지 못하고 외면한 채 정원으로 나섰다. 자주가 가장 좋아하던 장소인지라 이미 사라져버린 그를 다시 떠올려 겨우 진정되어지고 있는 감정이 다시 복받치는 것이 두려웠다. 슬퍼하는 것은 나중에라는 다짐으로 정원으로 향하며 서글프게 미소짓는 비월이였다. 파라와 훈바에게 상처입고 지쳐서 자주 찾던 곳이라 익숙한 곳이였다. 그중에서도 자신이 가장 좋아했던 곳이라 눈을 감고도 찾아갈 수 있었다. 예전에 그저 지쳐서 자연과 동화되었다가 수야의 방해로 깨어났던 그날처럼 다시 그 감각을 느끼고 싶어졌다.오리무중의 짙은 안개속을 헤메는 지금같은 상황에서 더이상 고민하고 고심하지않고 모든 것을 잊고 조용히 쉬고싶었다. 마음속에 있는 모든 감정을 버리고 뇌리속의 가득한 모든 생각들도 버리고 자신을 자연의 일부분에 동화시켜갔다. 저멀리 우는 밤새소리를 따라 그 둥지속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나무끝에 스치는 바람을 따라 어스름한 하늘을 날기도 했다. 풀숲에 숨어 울어대는 풀벌레가 되어 보기도 하고 흔들리는 나뭇가지의 작은 잎이 되어보기도 했다. 그리고 자신이 무엇이 되었는지 잊어버린채 나무에 기대에 눈을 감고 있는 자신을 보기도 했다. 몇번이나 죽음의 문턱을 넘으려 할때마다 되돌아오고야 마는 알수없는 생명력과 운! 결코 큰 영향을 주지는 않지만 끊어지지않고 생명과 영혼을 유지시키고야하는 그 알수없는 의지를 가진 힘! 진정 그것이 자신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돌아오십시요." 무한한 무의식상태에 접어들어가던 비월의 발목을 잡는 목소리에 비월은 무의식상태에서 벗어나 서서히 깨어나듯 눈을 떴다. 그곳에는 오랜세월 비바람에 시달리면서도 그곳에 서있었던 듯한 나무같은 느낌의 탁비가 서있었다. "탁비!!!" "방금전 마지막 호흡을 놓으시려고 했습니다. 느끼셨습니까?" 비월이 고개를 젓자 한숨을 내쉬더니 탁비가 몸을 숙여 나무에 기대어 앉아있는 비월을 안아올렸다. "아직은 안됩니다. 할 일이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당신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단 말인가요?" "녜!" 비월은 고개를 갸웃하고 말았다. 역시 그가 주장하는 대로 잃어버린 기억속의 일이라고 하면 할말이 없었지만 왠지 그말이 비월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정말 아무리 되새겨보아도 기억에 없지만 어쩐지 자신이 그말을 한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들었던 것이다. 비월을 안아든 탁비가 정원을 걸어나왔다. "내려줘요." "그대로 계십시요. 내려주어도 지금은 바로 서지 못하실 겁니다." 비월은 갈수록 이 탁비라고 하는 자가 알수 없는 자임을 깨달았다. 어떻게 앉아있는 자신을 보았을 뿐인데 이리도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 잘아는 것인지..... "내가 호흡을 놓으려 했다고 했지요? 당신이 그걸 어찌 알지요?" "생명수라고 해서 온전한 치료와 회복을 바랄 수는 없습니다. 이미 한번 육체를 떠났던 영혼은 그길을 잘 알기에 마음만 먹으면 다른 사람이 비해 쉽게 육체를 벗어나버리기도 합니다. 마음을 먹지않아도 어떤 상황에서 벗어나고자하는간절한 마음이 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리될수도 있구요. 제가 당신의 상태를 어찌아냐고 하신것에 대한 대답은 이것입니다. 당신의 마지막 영혼에 제 감각이 연결되어있답니다. 그래서 당신에게 무슨일이 일어나면 금방 알수있지요. 그리 놀라지 마십시요. 제가 원해서 그리한것이니까요." "나는 도데체가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알수가 없군요." "언젠가는 기억이 나실겁니다. 이 세계를 구하기 위해 당신이 어떤 희생을 치루었는지 그러면서도 차마 마지막 한조각의 영혼을 왜 남겨두어야했는 지.... " "마지막 한조각 영혼이라니... 그럼 영혼을 여러개로 나누었다는 이야기인데.. 그게 가능하기나 한가요?" "녜 다른 사람이라면 어림도 없는 일이지만 당신이기에 가능한 일이지요. 오직 그의 처음 아이이며 가장 많은 능력을 받은 단신이라면 그보다 더한 일도 가능하답니다. 왜 마지막 영혼을 만들어야했는지는 제게 말씀하시지 않았지만 당신은 그 영혼으로 꼭 해야할 일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 어쩌면 탁비의 말이 맞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다면 그동안 자신이 그 수많은 고비에서 되살아나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런데 자신이 그토록 괴로워하면서도 하고자했다는 그일은 도데체 무엇일까 탁비의 말대로 그 잃어버린 기억을 찾으면 그일이 무엇인지 알수 있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왜 그 일이 자신의 일이라면 이렇게 아무리 고심해도 전혀 떠오르는 것이 없는 것일까? "혹시 그거 제 전생과 관련이 있나요?" 그건 확신에 가까웠다. 탁비는 잠시 망서리더니 고개를 끄떡였다. "그럼 당신이 나의 전생과 어떤 관련이 있는건가요?" "저는 ... 당신의 불안정한 영혼이 다시 태어나 같은 일을 되풀이하려하면 깨어나도록 봉인되어있었습니다. 기억나십니까? 당신이 천인계를 지키려 영원결계주문을 외웠던걸. 전생에서 당신은 그 비슷한 일을 하셨습니다. 비록 완벽한 주문은 아니였지만 당신의 피에 인식된 기억이 당신을 다시 희생하게 만들거라는 걸 짐작하고 저에게 부탁하였고 당신이 하지 못한 그일이 마무리 되기전에는 영혼이 소멸되어 버리는 짓을 하지 못하도록 막아달라고 했습니다. " 비월은 멍하니 환하게 떠있는 달을 보며 탁비에게 안겨 방으로 돌아왔다. 훈바의 전사의 피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율파가 갑작스럽게 자신 앞에 나타났을 때 훈바는 바로 그가 그동안 궁주들을 공격하여 십이검을 회수하고 있는 범인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동안 원인을 알수없는 신출귀몰한 범인의 행각에 모두들 긴장하여 밤이 되면 궁주의 처소는 여러겹의 결계는 물론 누구도 믿을 수 없어 아무도 출입을 할수가 없게 봉쇄하였다. 그런데 아무런 경종도 없이 공중에서 안개처럼 소리없이 나타나니 확신을 한 것이지만 놀랍기는 했다. 그가 천인오쇠에 들어 후궁에 들었다가 사라졌다는 소식은 전해들었지만 평소의 그 나약하고 온유한 성격의 율파가 설마 요사이 천인계를 흔들고 있는 범인이리라고는 누구도 의심해본사람이 없었다. 혹여나 그가 나타나도 천인오쇠에 들었던 몸이라 전보다 더 약해져있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다반사일것이다. 그런데 지금 훈바 앞에 나타난 율파는 보고있는 것만으로도 화룡족 전사의 피가 끓어오르고 근육이 긴장할 정도로 강한 오라를 풍기고 있었다. 게다가 그 냉엄해보이는 미소라니.. 마치 선월궁주인 자주를 보는 듯하지 않은가. 훈바는 자신의 본능이 시키는 대로 전사의 피가 끓어오르자 망서리지않고 화룡검을 소환하였다. 그리고 언제라도 공격하거나 아니면 방어할수 있는 자세를 갖추었다. 율파는 이제까지 다른 궁주들이 보여준 반응과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는 훈바의 모습에 눈을 빛냈다. "그대는 어찌하여 검을 들이대는 가?" 율파의 이죽거림에 훈바도 콧웃음으로 대응했다. "물론 당신을 죽이기 위해서지." "호오. 왜 나를 죽이려 하는 거지?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것이 아닐텐데...." "하아.. 내 사랑하는 반려가 말하길 사람의 웃는 얼굴만 봐서 좋은 사람인지 자신에게 호의를 가진 자인지는 알수가 없고 믿지도 말라고 하더이다. " 순간 훈바를 보며 웃고 있던 율파의 얼굴에 싸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훈바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느낌에 순간적으로 옆으로 비켜섰다. 방금전까지 훈바가 서있던 자리가 산산히 부서지고 있었다. 훈바는 그저 율파가 손을 저었을 뿐인데도 자신이 서있던 자리가 부서지자 놀라서 긴장했다. 무엇보다도 훈바를 놀라게 만든 건 율파가 어떤 무기를 사용했는 지 어떤 방법을 사용했는 지 전혀 알수 없다는 점이였다. "네 반려라..... 그건 네가 살아있을 때의 이야기지." 훈바는 긴장하며 다음 공격을 기다렸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고 진땀이 흘러내렸다. 이제까지 수 많은 전투를 치루었지만 오늘 지금 이순간처럼 두렵기는 처음이였다. 자신이 아무리 한다해도 그를 이기지도 그리고 자신이 무사하지도 못할 것을 예감하고 애써 자꾸만 떠오르는 그 생각을 떨어버리려는 듯 고개를 저어보았다. "네 따위가 감히 그 아이의 반려라....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일이지. 그 아이를 더럽힌 그 영혼마저 영원토록 소멸시켜주마." "이봐!!! 당신, 도데체 뭔소리냐? 내가 어디가 어때서 월아의 반려로 부족하다는 거냐?" 자꾸 긴장으로 굳어지려는 신경을 풀어주기위해 훈바는 이죽거리며 율파의 신경을 건드려댔다. 그러나 그런 훈바의 생각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 율파는 그저 히죽 미소지었을 뿐이였다. "건방진 놈! 배짱 한번 두둑하구나. 배짱만큼이나 솜씨도 괜찮은 지 봐주지." 율파가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훈바는 아직까지도 율파가 사용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지못했다. 그가 보기에 율파는 그저 맨손을 휘두르는 것처럼 보였지만 분명 무언가가 훈바를 쇄도해오고는 하였다. 훈바는 그 기색만으로 율파의 그 보이지않는 살기를 피해야했다. 시간이 흐르자 훈바는 자신이 도저히 율파를 공격할 수 없음에 절망했다. 그저 막는 것도 아니고 피하는 것만도 훈바에게는 너무 벅찼다. 자신이 이렇게 무기력하게 당한 적이 없어 더 절망적인 생각이 들었다. 율파가 자신의 공격을 여러번 피해내는 그의 모습에 놀라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알지도 못했다. 사실 저승의 신이라 불리웠던 자주마저도 훈바처럼 율파의 공격을 오래 피하지 못하리란 사실은 전혀 모르는 훈바였다. "어억!!!" 드디어 훈바는 등을 깊이 베이고 곧이어 어깨와 오른쪽 허벅지를 베였다. 사방으로 튀는 핏줄기에도 훈바는 아픔을 느낄새도 없이 정신없이 도망쳐다녔다. 결국 왼쪽 다리마저 베이자 주저앉아서도 율파를 노려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꽤나 버티었지만 결국은 이정도로군." 계속 이죽거리며 다가오는 율파를 노려보는 훈바의 눈에 독기가 서렸다. 율파는 그런 훈바를 비웃으며 다가와 그 얼굴을 치켜들어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게 만들었다. 그순간 훈바의 손이 붉어지더니 밝은 화염하나가 율파의 허벅지를 강타했다. 훈바가 검을 떨어뜨린 상태라 더이상 공격할 방법이 없을 거라고 믿었던 율파는 갑작스럽고 예상하지 못한 훈바의 공격에 허벅지에 커다란 화상을 입고 뒤로 물러서서 무의식중에 손을 흔들어버렸다. 그리고 그 손놀림에 훈바의 목이 달아났다. "이런..." 비월을 한순간이나마 차지한 그를 그리 쉽게 죽여줄 생각이 없었다. 가장 고통스럽고 잔인하게 천천히 죽이며 분노를 풀 생각이였는데 한순간에 눈이 뒤집혀 목을 베어버리고 뒤늦게 후회해보았지만 이미 훈바의 혼은 육체를 떠나 저승의 문턱을 넘어버린 후였다. 아쉬워하며 훈바의 사체를 들여다보던 율파는 혀를 찬 후 화룡검을 집어들어 자신의 몸안에 봉인하였다. 염마궁주의 검보다는 더 뜨거운 느낌으로 몸으로 파고들어가는 검의 느낌에 눈을 감고 최대한 그느낌을 즐긴 율파가 훈바의 몸에 남아있는 문장을 파괴한 후 처음에 나타났을 때처럼 공기중으로 사라져버렸다. 율파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침상 밑과 창문턱에 메달려 있던 작은 천이족 두명이 현장으로 다가와 훈바의 시체를 살펴보고 머리속에 정리를 하였다. 이곳저곳을 더 살펴본 후 돌아서서 그곳을 빠져나가려고 창문으로 다가간 그들은 창문앞에 사람이 서있음을 발견하고 긴장하였다. 그는 진한 유혹의 향을 풍기고 있었다. "이런... 새끼 천이족들이구나 ... 누군지 모르지만 제법 잘 만들었지만 너무 어설퍼서 건드리기 싫은 걸." 두 천이족은 그가 자신들은 상대도 되지 않는 고수라는 걸 단번에 알아채고 처음 명령받은 대로 한명이 방어하는 순간 다른 한명은 도망치려는 듯 반대방향으로 달렸으나 매하의 손에서 뻗어나온 길다란 손톱이 바로 두천이족의 심장으로 파고들어가 숨을 끊어놓았다. 손가락을 거둔 매하는 그 손톱끝에 맺힌 피를 혀를 햟으며 아쉬운 듯 훈바의 사체를 쳐다보았다. "참 주인님도 너무하시지. 내가 눈독들인 먹이를 그리 쉽게 부셔놓으시다니..." 차람이 보내온 자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비월은 다시한번 그에게 자신이 들은 말이 잘못 들은 것은 아닌지 확인하고 틀림없는 사실에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근일간 그와 헤어질 생각은 하였지만 방법도 찾아내기 전에 이런 식으로 헤어지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터라 아무런 생각도 아무런 감정도 느낄수가 없었다. 파라를 불러 같이 천붕에 오르며 비월은 탁비에게 뒷일을 부탁하였다. 탁비는 걱정말라며 무사히 다녀오라고 말했다. 언제나 붉었던 화룡궁의 하늘은 유난히도 더 붉게 타오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동안 천붕은 화룡궁에 익숙해졌는지 아무런 거부반응없이 광장에 순순히 내려서서 세사람을 내려놓고 다시 하늘로 날아올라갔다. 광장에는 차람과 장로 몇명과 장군들이 나와 있었다. 그동안 비월이 자리를 비우기는 하였지만 여전히 그들의 궁주인 훈바의 반려로 가장 높은 지위의 인물이었던 것이라 비월을 맞이하는 그들의 태도는 정중하기 이를데가 없었다. 비월은 예를 올리는 그들에게 간단하게 답례한 후 차람에게 다가갔다. "어떻게 된일이지요?" 차람이 대답하는 대신 파라를 보더니 입을 열었다. "파라님, 월아님을 부축해주세요, 금방이라도 쓰러지실 것 같군요." 그제서야 뒤에서 머뭇거리고 있던 파라가 다가와 비월을 급히 부축하였다. 내전으로 옮겨가면서 차람은 침묵을 고수하였다. 비월은 차람의 침울한 표정에 더이상 아무말도 묻지못하고 파라의 부축을 받고 화룡궁의 정무실로 옮겨갔다. 정무실에 도착한 차람이 비월과 파라만 데리고 안으로 들어가더니 문을 굳게 닫았다. 비월은 자꾸만 대답을 회피하려는 듯한 차람의 행동에 조용히 그가 입을 열때까지 기다렸다. 차람역시 혼란스러워보여 지금 당장 대답을 재촉했다가는 오히려 자신까지 혼란스러워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조용히 기다리며 미리 준비해둔 듯한 차를 마시고 있으려니 차람이 한숨을 내쉰 후 입을 열었다. "어제 밤이였던 듯 싶습니다. 요사이 그 신출귀몰한 범인때문에 궁주의 처소에는 누구의 출입도 허락하지 않았고 궁주가 편히 쉴 수 있도록 여려겹의 결계를 쳐두었건만 범인은 아무런 제제도 받지 않고 안으로 침입하여 훈바님을 죽이고 화룡검을 빼앗아갔습니다. 그런데 훈바님의 경우는 다른 궁주님과는 달리 싸운 흔적이 많았고 사체역시 심하게 훼손되었으며 훈바님 이외에도 정체를 알수 없는 사체 두구가 더 있었습니다. 훈바님과는 달리 그 두사람은 심장이 날카로운 병기에 꿰뚫린 점으로 보아 범인이 한명이상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 "정체를 알지못하는 사체 두구가 더요? " "녜, 장로들과 저의 생각으로는 같이 온자들 중에 내란이 일어나 서로 싸웠거나 아니면 다른 목적으로 침입하여 발칵되자 죽임을 당한 듯하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 "저번에 목격자인 염마궁의 소궁주가 이곳에 있다고 들었는데 그를 만나볼 수 있나요?" "그는 이곳도 안전한 곳이 아니라며 오늘 아침 일찍 일천으로 떠났습니다. " "일천이라구요. 그곳이라고 안전한 곳은 아닐텐데...." "그가 목격한 것은 훈바님의 경우와는 달리 몸안에 있는 검을 직접 범인이 뽑아냈다고 했는데 이번의 경우는 훈바님이 확실하게 검을 발현시켜 싸운 흔적들을 여러곳에서 발견하여 이번까지와는 많이 다른 상황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제까지는 궁주들이 전혀 반항한 흔적이 없었던 것에 반하여 훈바님은 상대방에게 상처까지 입힌 듯 합니다. " "확실히 다르군요. 이제까지는 궁주들과 얼굴을 아는 면식범의 범행이라 여겼는데 훈바님의 경우를 보면 헷갈리게 만드는 군요. 어찌하여...." 자주도 훈바도 비월이 생각지도 못한 사이 상상도 못할 속도로 그의 곁을 떠나고 있을까하는 생각을 하니 다시 가슴이 먹먹해져오고 현기증이 났다. 비월은 자주의 경우는 자신이 없는 동안 일어난 일인지라 슬프지만 죄책감이 들지 않았지만 훈바의 경우는 자신이 미리 예상하고 있었는데 모른척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돌아보며 자신의 양심과 싸워야했다. 막연하게나마 이대로라면 언젠가는 훈바도 공격당할 거라는 것을 떠올렸던 것이 기억나자 죄책감은 더해갔다. 순간 파라가 뒤에서 비월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차람이 그모습에 못마땅한 듯 눈썹을 찌푸렸지만 입을 열어 불만을 토로하지는 않았다. 곧이어 나온 파라의 말에 비월의 상태가 좋지않음을 알았던 것이다. "네 잘못이아니야. 너 돌아온지 며칠되지도 않았잖아. 게다가 그나마도 훈바님 덕분에 이틀을 누워있었고, ... 스스로를 책망하지마. 어차피 상황으로보아 훈바님께 미리 연락을 해서 조심하라고 했었어도 그분이라며 소심하게 숨어있는 것보다 범인과 대면하는 쪽을 택했을 것이 뻔하잖아. 그리고 이번이 훈바님의 차례였다는 것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잖아." "그렇습니다. 신출귀몰한 범인의 수단으로보아 월아님이 미리 경고를 해주었다해도 변하는 상황은 아니였을 것입니다. 바로 옆에 있었던 저희들도 아침까지 무슨일이 벌어졌는 지 알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자책해야할 사람들은 저희들입니다. 다행히 월아님과 훈바님 사이에는 자식은 없었지만 다 큰 후계자가 이미 정해진 후라 화룡궁을 유지하는 데는 그리 어려운 상황은 아닙니다. 곧 후계식을 치루고 파라님을 화룡궁주로 맞이하고 이 혼란한 상황을 수습하는 것에 주력한 후 범인을 수색해도 수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일견 냉정하게도 보이는 상황정리였지만 틀린말은 아닌지라 더이상의 말은 오가지 않았다. 비월은 여전히 괴로운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파라와 차람을 보고 있었다. 그때 문이 열리고 수야가 뛰어들어왔다. 파라와 소유주의 반려의 식이 있기전에 만난이후 처음이였지만 왠지 모르게 분위기가 많이 부드러워지고 솔찍해진 듯한 기운이 넘쳤다. 수야의 뒤로는 얼굴에 시퍼런 멍을 달고 있는 해조와 호하가 들어서고 있었다.차람은 그들의 무례하기 짝이 없는 행동에 한마디 하려다 해조의 얼굴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월아.!!!!!" 다른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는 듯 비월에게 달려오더니 비월을 와락 끌어안았다. 전에 비월에게 하던 행동으로 보아 전혀 상상도 할 수 없는 행동이였다. "그동안 어디있었던 거야? 왜 돌아오지 않았어? 파라가 그 너 닮은 이상한 녀석에게 홀려 미친행동을 하는 동안 나도 미쳐버리는 줄 알았단 말야. 그따위 가짜보다는 네가 훨씬 나아.... 그러니까 이제 어디가지말고 있어. 네가 있는동안은 파라가 나를 밀거나 노려본적은 없었다구." 주저리주저리 그동안 쌓인 것을 털어놓는 수야의 말에 파라가 구원을 청하는 시선으로 해조를 쳐다보았더니 그는 자신의 멍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고개를 저었다. 비월은 수야의 앙탈에 한없이 바닥으로 가라앉아가던 기분이 확 솟구치는 것을 느끼고 미소지었다. 감정을 잘 숨길줄 모르고 있는대로 신경질을 부려 스스로를 곤경에 처하게 만들기 일쑤지만 비월은 수야에게 구원을 얻은 적-결코 수야는 비월을 구원하려는 목적이 전혀 없었을 지라도-이 있었기에 수야를 보자 다시 마음이 편해지고 가벼워지는 걸 느끼고 있었다. 파라를 노려보았다가 해조를 노려보았다가 하며 이를 갈기도 하고 고함을 지르기도 하는 수야의 모습에 그만 비월은 웃음을 터트렸다. 눈에는 눈물이 흘러서 슬픈건지 기쁜건지 알수가 없어 헷갈리게 만들었지만 웃음은 맑았다. "수야,.... 정말 예뻐요. 내 새 반려가 되줄래요? 당신 옆에서라면 웃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우아아아악..... 저리가!!!!!!" 수야가 자신을 올려다보며 비월이 내뱉은 말에 기겁을 하며 비월을 뿌리치더니 달려가 해조뒤에 숨어버렸다. 그 모습에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웃는 와중에 비월이 호하를 쳐다보자 그가 비월에게 인자하게 웃어주었다. "무사해서 다행이구나." 비월은 그 따뜻한 말 한마디에 다시 울었다. 막연하게 자주가 없어졌음을 알고 이제 세상에는 자신 혼자만 남았다고 두려워하고 있던 때가 떠올랐다. 그런데 호하의 한마디가 아직은 혼자가 아님을 자신을 걱정해주고 사랑해주는 사람이 남아있음을 깨닫게 해주었다. 호하에게 다가가 그를 끌어안자 호하도 비월의 등을 끌어안고 멀리 여행을 떠났다돌아온 자식을 걱정해주듯 등을 토닥여주며 건강이며 여러가지를 걱정해주었다. 파라가 궁주위를 물려받을 때까지 화룡궁에 있기로 결정한 후 궁주의 방으로 들어온 비월은 그 화려했던 방이 삭막하게 변해있는 모습에 한숨을 내쉬었다. 내일부터 새로이 맞이할 궁주를 위해 정리를 한다고 모든 것을 버리고 침대만 남아있었다. 차람이 비월에게 객실에 머물기를 권했지만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그곳에 머물겠다고 말했던 것이다. 훈바를 가슴 저리게 좋아한 것은 아니였지만 그가 자신에게는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알기에 그냥 잊어버리기엔 감정이 허락하지않았다. 마지막이라면 이곳에서 그의 생각을 다 정리하고 싶었다. 밤이 깊도록 생각에 잠겨있다 새벽녁에야 잠이 든 비월은 얼마지나지 않아 왠지모를 섬뜩함에 눈을 떴다. 그런데 이미 잠이 들었어야 할 파라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차갑고 어두워보이는 눈빛에 소름이 돋아 비월은 당황하여 일어나 앉았다. "파라, 왠일이에요? 잠이 오지 않나요?" 본능적으로 그가 파라가 아님을 아니 파라이지만 자신이 알고 있던 파라가 아님을 느꼈다. 경계를 하며 자신에게서 떨어지려는 비월을 보더니 파라가 싱긋 웃었다. 그 미소에 비월은 소름이 돋았다. 파라가 느긋하게 시선은 여전히 비월의 눈에 맞춘 채 침상위로 올라오더니 손을 뻗어 비월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비월은 자신의 신경이 그 손끝에 모두 쏠리는 기분에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도데체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상황인지 당황스럽기만 하였다. 자신이 훈바의 반려가 된 이후로는 한번도 같은 방에 밤늦게 있어본적도 없고 묘한 분위기를 연출해낸적도 없었던터라 파라의 갑작스런 행동이 혼란스럽기만 하였다. 아무리 훈바가 없어졌다고 하지만 파라의 행동은 납득할 수가 없었다. "파라?" 그가 파라인지도 의심스러웠다. 파라는 극심한 혼란에 빠진 비월을 보면서도 당황하거나 물러서는 기색도 없이 고개를 숙이더니 기여코 입을 맞춰왔다. 순간 정신을 차린 비월이 그를 밀어냈다. "당신 누구야?" "월아, 왜그러는 거냐? 설마 나를 모르는 거냐?" "아니 당신은 내가 알고 있는 자가 아니야. 도데체 파라의 몸을 가지고 무슨 짓을 하는 거지?" 차가워진 비월의 안색을 보더니 그가 픽 웃었다. "내가 파라가 아니면 누구라는 거지?" "당신이 파라라면 지금처럼 안멸몰수한 짓은 하지않았을 것이다. 당장 파라를 놓아주고 사라져버려." "너의 파라라면 이런 안면몰수한 짓은 하지 않았을 거라구? 과연 그럴까? 그가 진정 너를 보는 것만으로 만족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천만에 그가 하루에도 수십번 마음속으로 너를 안고 싶어하는 것을 모르고 하는 소리냐? 아니면 알면서도 모른 척 하는 거냐? 정말 인정머리라고는 전혀 없는 자로군.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좋다고 스스로를 억눌러야만 하는 그가 불쌍하지도 않더란 말이냐? 차마 네가 실망할까봐 속으로만 삭이는 그가 가엽지도 않더란 말이냐?" 그의 말이 계속될수록 비월의 얼굴은 사정없이 구겨졌다. 어쩌면 그의 말이 맞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자신도 그 사실을 알면서도 모른척한것은 아닐까싶었다. 마음이 약해져 망서리는 순간 파라가 비월을 사정없이 침상위에 넘어뜨리더니 생각할 틈도없이 옷을 벗겨갔다. "파라!!!!" "쉿!!" 공황에 빠져 창백하게 질려서 소리를 지르려는 비월의 입에 그는 손바닥을 가져다대어 말문을 막아버렸다. "괜찮아.. 이제 아무도 네게 뭐라고 하지 않을 거라구.." 비열해보이는 웃음을 보이는 그는 분명 파라가 아니였다. 게다가 아무 배려없이 무작정 자신의 욕구를 채우려는 듯이 서둘러대는 그의 행동에 비월은 거부반응이 일었다. 바로 비월의 몸안으로 파고들려는 기세로 달려드는 그에게 비월은 그의 손을 물어버리고 뺨을 갈겨버리면서도 마음이 아팠다. 어쨋든 간에 몸은 파라가 분명해보였으니까. "당장 그만해!!!!!" 비월의 단호한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파라가 극심하게 몸을 떨더니 그대로 비월의 몸위로 고꾸라졌다. 비월은 기겁을 하였으나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파라에게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파라를 옆으로 밀어내고 그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그는 방금전 일이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처럼 곤하게 잠이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순간 떠오르는 단어가 있었다. 빙의!!! 방금전의 파라는 파라의 탈을 쓴 훈바같았다. 무엇이 그의 제동을 걸었는지는 알수 없었지만 자신의 말중에 그에게 제동을 걸만한 말이 있었음을 알고나자 조금은 안도가 되는 비월이였다. 그보다 이제는 위험이 없어졌다고 안심하기 전에 파라를 어떻게 처리해야할지가 더 걱정스러워지는 비월이였다. 진짜로 파라가 빙의가 되었었던거라면 깨어난 후 자신이 한일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억이 없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신이 비월옆에 있다는 것에 의문을 품고 혼란스러워할것이 뻔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이시간에 누군가를 불러 파라를 그의 처소로 옮기기에는 더 복잡한 일을 야기할 염려가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비월은 술병을 찾아내 파라의 몸과 얼굴에 들이부었다. 다음날 깨어난 파라는 비월의 예상대로 무척이나 혼란스러워했다. 아무리해도 그는 어떻게 해서 비월이 머물고 있는 방에 같이 있는 것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비월은 극심한 혼란에 당황스러워하고 있는 파라에게 태연하게 어제 자신과 이야기를 하며 술을 마신 기억이 나지않느냐고 했다. 그리고 너무 많이 마셔서 기억이 없는 거냐고도 했다. 파라는 너무 억지스러운 비월의 말을 부정하기에 그가 비월의 방에 있었던 원인을 알수없어 미심쩍은 면이 없지않아 있지만 그대로 납득하는 수밖에 없었다. ==== 파라의 궁주위 계승식이 진행된 후로도 비월은 한참동안 화룡궁에 머물렀다. 그리고 그동안 해조와 수야가 반려의 식을 치룬사이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파라의 모습에 실망하여 술에 몽땅 취한 수야가 자포자기로 자신을 덮쳤다고 해조가 웃음을 간신히 참으며 놀리듯 말하였다. 수야가 얼굴을 붉히며 내가 언제 그랬냐고 반발성 말을 했지만 강하게 반발하지 못하는 걸로 보아 어느정도 사실이라는 것을 안 비월은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고개를 돌리고 간신히 참았다. 그뒤로 수야는 변명할 말을 찾지못하자 신경질을 부리며 해조의 정강이를 걷어차며 한달동안 각방이라고 으름장을 놓는 바람에 해조가 사색이 되어 용서를 비는 모습에 그만 비월이 큰소리로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모습에 지금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는 지 이를 악물고 해조와 비월을 노려보더니 곧 눈물을 뚝뚝 흘리며 힘겹게 입을 열어 변명아닌 변명을 늘어놓았다. "정말 자포자기 였단 말야. 파라는 완전히 정신이 나가서 날마다 이상한 소문을 만들어내고 내가 아무리 설득해보려고 해도 만나주지도 않고 만나도 그 이상한 자를 노려보았다고 차갑게 나를 몰아내기나하고 그러면서 그자랑 반려의 식까지 한다잖아.월아라면 그래도 참을수가 있겠는데 그자는 도저히 인정할수가 없었다구. 반려의 식 전날밤에 하도 속이 상해서 술을 마셨는데 흐흐흑.. 해조가 다가와서 약을 올리잖아... 나더러 이제 평생 반려도 맞이하지 못하고 교미상대도 찾지못할거라고... 그래서 얼마든지 유혹할수 있다고 했더니 자신에게 해보라고 해서 덮쳤더니..... 정말 제정신이 아니였다구. 오기가 나서 덤비기는 했지만 정말 해조를 어찌해볼 생각같은 건 해본적도 없었는데 해조가 이럴땐 이렇게 하는거고 저럴땐 저렇게 하는 거라면서 가르쳐주잖아. 결국에 가서는 아픈건 나였는데 아침에 일어나더니 이제 자신을 덮쳤으니 책임지래... 흐어어어엉... 난 정말 해조를 덮칠 생각같은 건 없었단 말야....으아아아아앙..." 듣고보니 순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수야를 살살 부추켜서 꼬신것이 해조임을 알수 있었다. 비월은 아직까지도 일이 어떻게 진행된건지 의심해보지도 않는 수야의 모습에 또 웃었다. 해조가 웃는 비월을 보며 눈을 깜박인다. 그는 비월이 금방 그때의 일이 어떻게 진행된건지 짐작했으리란걸 안 모양이였다. 비월이 고개를 끄덕이자 안도의 숨을 내쉬며 대성통곡을 하고 있는 수야를 끌어안고 등을 토닥여주었다. "내가 잘못했어. 수야는 아무잘못도 없으니까 그만 울어. 머리 아파지겠다." "해조 미워..." "사랑한다. 수야 그러니 용서해주라." 비월은 해조의 말이 진심임을 그저 우는 수야를 달래려고 아무렇게나 꺼낸 말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자신도 훈바와 얽히지만 않았어도 해조와 수야처럼 파라와 서로 의지하고 사랑했으리란 생각에 부러운 감정이 생겼다. 그날 새벽녁의 이해할 수 없는 파라의 행동은 그 후 한번 더 있었다. 처음에야 비월에게 자신을 정체를 숨기고 접근하였으나 두번째는 처음부터 자신이 파라의 몸에 공생하는 -비월이 그게 공생이냐 그건 기생이다라고 비꼬았다. -자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고 다짜고짜 비월을 덮쳐왔다. 망서리는 기색이라고는 전혀 찾아볼수 없고 무언가를 알아내려는 듯 필사적으로 덤벼들었지만 비월의 '그만'이라는 거부의 말에 또다시 의식을 놓아버렸고 다음날 깨어난 파라는 자신의 술버릇이 이상하다며 절규했다. 덕분에 비월은 파라의 몸에 들어있는 또다른 영혼이 단순한 빙의가 아니며 파라가 자신의 몸안에 있는 또다른 영혼의 존재를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고 어떻게 된일인지는 모르지만 그 영혼이 비월의 거부의 말에 제제를 받는다는 것을 알아냈다. 비월은 어떻게 이런일이 일어난 것인지 왜 하필이면 파라에게 이런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아내기전에는 월궁으로 돌아가는 것을 미루기로 결정내렸다. 도저히 지금 파라의 상태를 그대로 외면할 수 없음을 직시했다. 비월이 당분간이지만 화룡궁에 머물거라고 하자 수야는 날마다 찾아와 비월의 정신을 홀라당 빼놓기 일쑤였다. 그리고 호하도 자주들러 비월에게 여러가지를 배려해주고는 하면서 다정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해조와 수야가 돌아간 이후 그날 밤에 또다시 파라의 몸을 차지한 그가 찾아왔다. 비월은 그가 자신의 거부의 말에는 어쩔수 없음을 알기에 여유를 가질수 있었다. 그는 여유롭게 자신을 보았으면서도 미소짓고 있는 비월을 노려보며 가만히 서서 더이상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 그역시 비월이 자신을 거부하는 한 비월을 어쩔수 없음을 깨달은 모양이였다. 그리고 비월이 자신이 파라의 몸안에 있는 한 결코 자신의 정체를 다른 자들에게 밝혀 파라의 육체가 위험에 빠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것도 눈치채고 더이상 비월에게 자신에 대해 숨기려하지 않았다. 처음엔 육체의 주인인 파라가 원하기 때문이라는 이유로 비월을 덮치려 했지만 나중에는 자신의 말에 흔들리거나 그렇다고 넘어오는 기색도 없는 비월에게 오기가 생긴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렇다고 그 오기를 꺽고자 억지로 안길수는 없는 노릇이아닌가. 오늘은 자신을 보고도 놀라거나 당황하는 기색도 보이지않고 느긋하게 차까지 권하자 심기가 불편해진 그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비월을 노려보았다. 비월이 머뭇거리는 자신을 보고 얄미운 미소를 짓자 비월이 일부러 자신을 자극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성큼성큼 다가와 비월이 권하는 자리에 앉더니 차를 음미하며 고상하게 마시기 시작했다. 한참 차를 마시다 고개를 든 그는 비월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자 또다시 눈썹을 찌푸렸다. "무어냐? 왜 그리 쳐다보는 거지?" "흐음 아무리 같은 육체라해도 영혼이 다르면 식성도 달라지는군요." "뭔소릴 하고 싶은 건냐?" "한마디로 파라는 제가 모르는 줄 알고 있지만 그는 차라면 질색을 하거든요.식성을 보니 의심할 여지도 없이 당신이 파라가 아님을 알수가 있겠네요." 그런 사소한 것로 자신이 다른 자임을 확신하는 비월에게 그는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밤의 천이족 강황! 사람의 생기를 빨고 사는 자인 그이지만 왠지모르게 이 조그맣고 엉뚱한 자에게서만은 생기를 빼앗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비월이 거부하기전에 얼마든지 그의 생기는 물론 몸까지 마음대로 할수 있건만 문제는 그런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행여 자신의 영혼이 육체의 주인의 영혼과 동화되어 가는 것은 아닌가 걱정스러울 지경이였다. "이제 그 쓸모없는 육탄전보다 대화로 이야기를 풀어볼까요? 당신은 누구죠?" 자신이 무슨말을 하든 비월은 이육체를 지키지 위해 침묵을 지킬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는 숨기고 싶은 마음이 들지않았다. 그리고 이런식의 대화는 처음이라 그가 자신에대해 어띠까지 알아낼지도 궁금해졌다. "밤의 천이족 강황이라 한다." "돌연변이라... 으음. 당신은 어떤 이유로 파라의 몸에 들어가게 된건가요?" "그가 힘을 원했기때문이다. 그가 육체없이 떠도는 나의 영혼을 강한 염원으로 불러들였다." "재림이군요. 그럼 분리방법은 없나요?" "파라를 죽이면 나는 그 육체에서 벗어날 수 있다. 어떠냐, 시도해보겠느냐?" 이죽거리며 비월을 비웃는 그의 모습에 비월은 콧웃음으로 응대했다. "언젠가는요." "재미있는 녀석이로군." "칭찬 고맙군요. 그럼 당신은 왜 육체도 없이 떠돌았나요?" 순간 강황의 얼굴에 감탄이 스쳤다. 비월의 질문들이 핵심적인 부분만 공격해오고 있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어떻게 대답해야하나 꼭 대답을 해야하나를 갈등하는 데 비월이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바람에 무심결에 입을 열었다. 그리고는 왜 자꾸 교활하고 잔혹하기로 유명했던 자신이 비월에게 약해지는 것인지 알수가 없어 끙끙 앓고 말았다. "우리는 십이검에 봉인되어 있었다. 그게 천년정도 전의 일이지. 어쩐일인지 봉인이 풀려서 이렇게 부활했지만 오래전에 육체는 소멸되어버리고 영혼의 상태로 떠돌다 자신을 원하는 자의 몸에 들어가게 되더군. 나는 이곳이 아닌 다른 십이지천에서 부활했지만 이 육체의 주인의 강한 염원에 이끌려 이곳까지 오게되었다. 생기라고는 하나도 없으면서 이 육체의 주인은 무엇을 그리고 잊지못하는 지 끝까지 호흡을 놓지 않고 간절히 빌고 빌더군. " 강황의 말이 계속될수록 비월은 자신의 가슴이 비수에라도 베인듯 아릿하게 아파오는 걸 느꼈다. 기생벌레에 당해서 모든 생기를 빨렸으면서도 마지막 호흡을 놓지 못할 정도로 그가 원한 것이 무엇인지 짐작했던 것이다. 자신은 그에게 아무것도 해준것이 없건만 그는 끊임없이 자신에게 마음과 정성을 다하려고 하였다. 비월은 자신의 감정에 취해 강황이 눈을 빛내며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걸 미처 눈치채지못했다. 그래서 갑자기 들이닥쳐 강황이 자신의 입부터 막았을 때 기겁을 하였다. 그뒤로 그가 자신을 침상이 있는 곳으로 끌고 가는대로 고스란히 끌려가야 했다. 있는 힘껏 발버둥을 치고 할퀴고 때려도 강황은 꼼짝도하지않았다. 여전히 비월의 입을 막은 채로 헝겊을 꺼내어 비월의 입에 밀어넣었다. 그리고 비월이 그 헝겊을 꺼내지 못하도록 두손목도 묶어 버렸다. 입안 가득하게 들어찬 헝겊을 혀로 밀어내보려고 했으나 끄떡도 하지않자 초조해진 비월이 애원하듯 강황을 쳐다보았다. 그 시선을 받은 강황은 낄낄낄 웃으며 느긋하게 비월의 옷을 벗겼다. 한순간의 방심으로 가져온 결과에 비월은 극렬한 공포를 느꼈다. 양쪽으로 벌어진 옷사이로 드러난 쇄골에 이를 들이대고 잘근잘근 씹어대기도 하고 공포에 예민하게 곤두선 유두를 깨물기도 하며 여유롭게 비월을 탐해가던 강황의 물건의 자신의 몸에 느껴지자 비월은 두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무엇보다도 비월을 괴럽히는 것은 상대가 비록 다른 영혼을 가진자이지만 육체는 파라라는 사실이였다. 자신의 마음 한구석에서 그를 용서해버릴 것만 같아 미칠지경이였다. 견디다못한 비월이 눈물을 흘리자 그모습을 빤히 쳐다보던 강황이 혀를 차더니 비월의 입안을 막고있는 헝겊을 잡아뺐다. 설마 그가 자신의 눈물에 물러설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터라 말문이 트였음에도 불구하고 비월은 멍하니 그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왠지 그의 행동이 파라와 자꾸 겹쳐보였다. 강황역시 스스로에게 놀라고 있었다. 분명 파라가 깨어난 것도 아닌데 비월의 눈물에 더이상 덤비지못하게 되자 그는 비월의 눈물이 그의 거부의 말처럼 자신의 행동을 막는 힘을 가진거라고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비월의 거부의 말을 들으며 바로 의식이 멎어버리는 것과는 달리 지금은 전혀 그런 기미가 보이지 않았지만 그 사실도 외면해버렸다. 월궁으로 귀환한 비월은 며칠동안 깊은 잠을 자지못한 터라 도착하자마자 자신의 방으로 가 잠을 청했다. 막연하게나마 강황이란 그가 자신에게 함부로 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었지만 확신은 없었기때문에 긴장을 늦출수가 없었던 것이다. 파라와 그를 분류해낼 방법을 알아낼 수 없자 그대로 화룡궁을 떠나왔다. 꿈도 꾸지 않고 깊은 잠을 자고 난 비월은 깨어나자 마자 탁비를 찾았고 그가 자신을 대신해 월궁의 전반적인 일을 처리하고 있다는 소리를 듣자 곧바로 정무실로 갔다. 탁비는 정무실로 들어서는 비월을 보더니 빙그레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언제부턴가 정무실 가운데에 설치된 화로위에 차주전자를 올려놓았다. 다른 자들이 타주는 차는 비월의 취향에 잘 맞지않았고 그래서 비월은 직접 타 먹거나 탁비가 타준것만 마셨다. 차를 끓일 준비를 끝내고 비월이 여전히 피곤한 안색으로 자리를 잡고 앉자 그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혹시 알고 있었나요? 십이검의 봉인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다. 혹시...." 탁비는 말끝을 흐리며 비월의 눈치를 살폈다. 비월이 무엇을 알아냈는지 알아보려는 생각이였다. 갑자기 너무 많은 것을 알아내면 지금상황으로서는 혼란만 더 가중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혹여고 뭐고 파라에게 그 중 한명이 씌웠습니다 스스로를 밤의 천이족 강황이라고 하더군요. 아는 자인가요?" 탁비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의 얼굴이 창백해지자 비월의 얼굴도 덩달아 딱딱하게 굳었다. 그동안 비월이 지켜본 탁비는 왠만한 일로는 감정변화를 별로 일으키지않는다는 것을 알수 있었기 때문이다. "상대하기 힘든 자인가요?" "매우 좋지 않은 자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봉인된 천이족은 모두 여섯명으로 예상되는 천이족의 절반정도인데 그중에서 그는 그리 큰 힘을 소유하였거나 계략이 뛰어난 자도 아니며 그리 특출나게 잘난 것이 있는 것도 아니건만 이상하리만치 왠만한 큰 사건에는 그의 이름이 거론되었습니다. 당시 소문으로는 선궁주였던 자주님의 동생분도 그에게 속아 유린당한 후에 자진하였다고 합니다. 문제는 항상 그의 화려한 외모였습니다. 그 감당하기 힘든 외모로 암컷이고 수컷이고 그에게 홀려 사리분별을 잃고 휘말려들어 그가 벌이는 일에 동조하였지만 정작 사건 장소에는 그의 흔적은 없었답니다. " 비월은 탁비의 말을 들으며 자신이 지켜본 그를 떠올려보았다. 첫날 비월을 덮치며 그가 파라가 아님을 밝혀내자 말로써 비월의 심리를 자극하여 자신의 마음을 흔들어놓을 정도로 교묘한 솜씨를 보였지만 두번째나 세번째에서 보인 그의 행동은 탁비의 말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그 교활한자가 왜 굳이 비월을 쉽게 덮칠 그 기회를 그냥 포기해버렸을 것인가. 무엇이 진실인가. "아마 여섯명의 궁주가 검을 빼앗겼으니 부활한 자들도 여섯명은 되리라 봅니다. 어쩌면 범인은 그 천이족을 부활시키기 위해 검을 강탈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지요." 비월과 탁비는 수심에 잠겨 서로의 생각에 빠져들었다. 탁비는 차를 마시며 차마 마지막말은 속으로 삼켰다. 어쩌면 그가 십이천이족을 부활시켜 천수천인전을 재발할 목적일지도 모른다는 그말을..... 19. 천수천인전.5 목영은 멍하니 율가를 쳐다보았다. 그가 자신을 만나고 싶어한다는 소리에 그는 이제 수인왕의 반려가 된 율허의 형제로서 그를 시기할 만한 감정을 가졌을 자신을 달래기 위해서 부른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목영의 예상을 깨고 목영에게 자신과 계약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닌가. 처음부터 수인왕의 반려의 자리를 원한 것도 규하에게 관심이 있어서라기보다는 그 반려자리가 탐이났기 때문이였다. 그런데 지금 태천제 율가가 자신을 도와주면 원하는 것을 주겠다고 하질 않은가. 이곳에 와서 들은 소문으로 지금 율가의 반려인 율희는 태천제에게 그리 총애를 받지못하고 있다고 했다. 그가 자신을 도와주며 원하는 것을 주겠다고 하자 목영은 무엇이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지 재빠르게 계산하였다. "저를 안아주세요. 그리고 당신의 알을 낳으면 그 아이에게 '율'자 돌림을 주세요." 그것은 도박이였다. 어차피 자신에게는 손해볼 것없는 도박이였다. 거절하면 돌아가면 그만이고 그가 받아들이면 어쩌면 총애받지못하는 율희를 제치고 그의 반려의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는 기회였던 것이다. 율가는 그런그의 계산속을 꿰뚫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어쩌면 영리하게 구는 그가 더 이용가치가 많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영리한 줄 알고 대범하게 굴다 실수라도 하면 그걸 이용해줄 생각도 있었다. 율허를 차지하기 위해서 그 어떤것도 감수할 것인지라 주위사람들이 어떻게 되든 율가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목영이 열심히 머리를 굴려 빠른 시간안에 태천궁을 혼란스럽게 만들수록 율허를 불러들일 기회도 많아지리라는 걸 알고 있기에 율가는 웃으며 그 조건을 승낙하였다. 어차리 율허가 아니라면 어떤자가 되었든 상관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에게 어떤 감정을 품게되어도 신경쓰고 싶지 않았다. 목영은 자신의 모든 능력을 동원하여 율가를 유혹하였다. 그동안의 교미상대들은 자신을 떠받들었지만 자신이 직접 해준적이 없었지만 상대가 태천제라면 그 어떤 짓도 할 용의가 있었다. 게다가 자신과 교미를 하려던 자들이 자신만 보며 헐떡이며 달려들던 것과는 달리 담담하고 냉정하기만 한 율가의 반응이 목영을 초조하게 만들뿐아니라 그동안 겪어보지 못한 그의 반응에 자극을 받아 한껏 달아올랐다. 격렬하게 몸을 흔들어 그의 사정을 유도하고 있는데 문이 벌컥 열렸다. 고개를 돌린 그곳에는 자신의 미모에 버금갈 정도로 화려한 자가 두눈에 불을 품고 서 있었다 . 그모습에 그의 정체를 단번에 눈치챈 목영은 그의 처참하게 일그러지는 얼굴을 보며 묘한 만족감을 느끼며 더욱 신음을 높이며 몸을 움직여 율가의 사정을 유도했다. 자신의 몸안에 가득 차오는 액체를 느끼며 목영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 웃음소리에 침입자는 비명을 지르더니 달려나가 버렸다. 율희는 타오를 듯한 분노에 타올랐다. 비명을 지르며 방안의 온갖 화려한 장식품을 박살을 내놓았지만 진정이 되지를 않았다. 어떻게 태천제율가가 자신에게 이럴수가 있단 말인가. 이제 겨우 반려로서 제대로 된 대접을 받겠다고 생각했더니 또다른 자를 끌어들여 자신을 상처입히다니......어떻게 자신이 들어온 것을 뻔히 보면서도 전혀 미안한 기색도 보이지않고 그대로 진행할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그 요물같은 자는 무엇이란 말인가. 율허는 생긴것이 요염한 구석이 없고 유혹적이지도 않았는데 그는 자신이 보고도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런 율허에게서도 열등감을 느끼고 질시를 해야했는 데 이제는 어떻게 해야만 하는 건가싶어 눈앞이 깜깜했다. 게다가 이제서야 기억나는 것은 그의 뽀족한 귀였다. 한마디로 천인족도 아닌 수인족이라는 것이 아닌가. 이런 모욕이 없었다. 천인족인 율허도 용납할수가 없는데 수인족이라니... 마치 율허가 수인족의 반려가 되었으니 자신도 수인족을 교미상대로 맞이하겠다는 선고나 별다를바없는 것이 아닌가. 죽여버리고 싶었다. 태천제를 유혹하던 그 요염하기 짝이 없는 수인족도 그리고 자신을 제껴두고 자꾸만 다른 자를 품에 안는 태천제도.... 율희가 그 장면을 목격한 뒤로 태천제와 목영은 자신들의 애정행각을 숨길생각도 하지않았다.장로들고 대신들이 걱정어린 시선을 보냈지만 태천제는 모르는 것인지 모르는 척 하는 것인지 자제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날이 갈수록 율희의 신경질은 더해갔고 그 주위사람들은 견뎌내지못했다. 그런 와중에 그 수인족이 태천제의 알을 낳았다. 율희는 너무 큰 충격으로 며칠동안 의식을 차리지못할 지경이였다. 자신이 알을 낳았을 때는 별관심도 보이지 않던 태천제가 그 알을 보러 그자의 처소에 자주 찾아가는 등 그 알을 소중히 하는 모습에 율희의 인내가 바닥을 드러냈다. 태천제가 목영에게 하사한 저택으로 달려간 율희는 온갖 신경질을 부리며 목영에게 하사된 보물들을 산산히 부서트리고 나왔다. 그리고 목영을 시종들을 시켜 방자하다는 이유로 매질을 하게 만들었다. 시종들이 붙잡고 굴욕스러운 자세로 꿇어앉혀 매질을 할때도 목영은 웃으며 율희를 비웃어 매를 더욱 벌었다. 결국 정신을 잃어가는 목영에게 알을 없애지 않으면 목숨마저 앗아가버리겠다고 엄포를 놓은 후 태천궁으로 돌아왔다. 율희가 물러간 후 목영은 알을 보러온 태천제에게 울면서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하소연 하였지만 태천제는 냉담하기만 했다. 그제서야 목영은 자신이 알을 낳은 것만으로는 태천제의 가호를 받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태천제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일수 있는 자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야한다는 계산이 생겼다. 그가 누구일까를 궁리하던 목영은 율허를 떠올렸다. 그러나 왠지 그만큼은 이곳으로 불러들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 혼란의 중에 알이 깨어났다. 일주일이 지나 태천궁으로 이름을 받으러간 목영은 율희의 차갑게 타오르는 눈빛을 무시해버렸다.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자신을 물어뜯을 것 같은 기세의 그를 외면하고 태천제에게 안고 있는 아기를 내밀었다. 태천제는 한참동안 아기를 들여다보더니 '율,효'라는 이름 두자를 주었다. 태천제의 입에서 율이라는 말이 떨이지자 율희의 안색은 창백하다못해 새파랗게 질려갔다. '율'이라는 이름자는 천인족중에서도 가장 고귀한 혈족만이 가질수 있는 이름자로서 왠만한 혈족들에게도 주어지지않는 이름자인 것이다. 그런데 태천제는 천인족도 아니고 수인족 사이에서 태어난 아기에게 율이라는 이름자를 주었다. 앞으로도 영원히 자신의 아이에게만 주어질 거라고 믿었던 돌림자가 천하디 천한 수인족의 아기에게 주어지자 율희는 이성을 잃고 창피한 것도 모르고 소리를 지르며 태천제와 목영을 저주하는 발언을 서슴없이 내뱉었다. 목영은 율희의 저주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자신의 아기가 당당하게 가장 고귀한 자에게 주어진다는 율이라는 이름자를 받은 것만으로도 모든 것을 너그럽게 봐줄수 있었다. 이제 저 이성적이지 못하고 성질사나운 율희만 서서히 압박하여 물러나게 만들거나 없애버릴 궁리를 하면 되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목영의 뜻대로 움직이지는 않았다. 무엇보다도 율희의 아이인 율경이 드러내놓고 율효를 무시하자 대부분의 태천궁의 사람들도 율효를 무시하였다. 중요한 연회나 행사에는 율효를 참석하지 못하게 제안을 두었고 목영의 자리는 항상 제일 말단에 마련하였다. 목영이 너무 분해서 태천제에게 호소라도 할라치면 그는 차갑게 자신을 외면해버렸다. 이래저래 구박만 받고 무시를 당하자 목영은 점점 이성을 잃어 갔다. 게다가 밤이면 누군가 침입하여 율효를 죽이려는 시도를 하기시작하자 목영은 율효가 자신의 생명줄이나 되는 것처럼 신경을 곤두세우며 보호하기에 급급했다. 하루하루가 지치고 짜증이 났다. 이제까지 자신이 다른 사람을 압박을 주어 불안하게 만든 적은 있어도 자신이 그 입장에 처하게 되자 정말 시간가는 것이 두려워져갔다. 이렇게 계속당하자니 목영은 치가 떨려와 견딜수가 없어졌다. 그때 자신을 보러온 격하를 보자 그만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격하에게 그동안에 있었던 일을 하소연하며 기여코 율희와 그 무리들을 도륙을 내버리겠다고 이를 갈아부쳤다. 무엇보다도 서운한 건 태천제가 전혀 자신의 편을 들어주지않는 것이였다. 그리고 사람들이 이죽거리며 율희가 낳은 두번째 알도 수가 틀려서 교룡의 먹이로 던져줘버렸다고 하면서 그까짓 정통 혈통도 아닌 아이 하나를 믿고 거만하게 굴지말라던 사람들의 말에 치를 떨기도 했다. 밤마다 계속되는 공격에 지쳐가던 목영은 예전의 화려한 모습이 아닌 수척해진 모습으로 격하를 쳐다보았다. "수인궁이 그리워요." 정말 이대로는 견디기가 힘들었다. 그 어리버리한 율허를 제치는 것이 훨씬 쉬운 일인것만 같았다. 그저 태천제와 언젠가는 율허를 태천궁으로 불러들이기로 한 계약만 아니였다면 지금 당장에라도 수인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상태에서 계약이 깨진다면 자신은 율희의 손에 갈갈이 찢겨 죽고 말리라. 아마 태천제는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할것이고. 자신이 이곳에 계속있으며 율허를 불러오기전까지는 목숨만은 부지할 수 있을 것이다. "격하, 율허는 어때요?" "이번에 아기가 알에서 깨어나서 지금 수인궁은 잔치분위기야. 글쎄 그 조그만 알 하나 낳는데도 죽을 고비를 넘긴데다 잠시도 알을 떼어놓지 않으려고 해서 알을 낳고도 한동안 쉬지않아 아주 비실거렸다니까. 규하님이 얼마나 초조해했는지 주위 사람들이 불안해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대. 그런데 이번에 아기님이 알에서 무사히 깨어나서 모두들 안도하고 있어. 나도 얼마전에 가서 봤는데 얼마나 귀여운지. .... 규하님이 싱글벙글 웃으며 아기와 율허님을 같이 안고 다니시던걸. 장로들도 한번이라도 다시 볼려고 날마다 서로 가겠다고 야단이고.. 하여간 나도 그렇게 예쁜 아기는 처음이야. 시종들도 서로 보살피겠다고 난리라니까." 목영은 가슴속에 열화가 끓어올랐다. 지금 율허가 앉은 자리에 자신이 앉았다면 모든 수인족에게 사랑받는 자는 자신이였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아이도 날마다 생명의 위험을 받는 이런 일은 없었을 테고.. 목영은 율허가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웠다. 자신이 지금 이런 처지가 된 것도 모두 율허의 탓만 같았다. 수인궁에서라면 무서울 것이 없는 자신이 이 태천궁에서는 모두를 무서워하고 있는 자신의 처지가 율허의 저주인 것만 같아 이가 갈리고 피를 토하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그가 행복해질수록 더 증오스러웠다. 한번 마음을 열면 모든 것을 주는 수인족이 아닌가. 이제 아기까지 생긴 율허는 명실상부한 수인왕의 진정한 반려가 되어 존경받고 사랑받겠지. 모두의 존경을 받고 사랑받는 그자리는 원래 자신의 자리였다. 그래서 더욱 율허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꼭 가야 하는 거야?" 규하가 아기를 들여다보며 미소짓고 있는 율허에게 걱정스러운 듯 입을 열었다. 어쩌면 이리도 작고 보드라운 지 율허는 잠시도 꼬물거리는 아기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 그런 율허가 규하는 우습기만 했다. 사실 워낙이나 큰 수인족에게 율허도 옆에 세워두면 작은 아이같아 보이건만 그런 율허가 아기가 혹여라도 다칠까봐 안절부절하는 모습을 보면 아이가 아기를 보살피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율허가 아기를 안고 있는 모습이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더 위험해보인다는 걸 전혀 모르는 율허였다. "전에도 율가 그녀석이 자기의 아이가 될 알을 던져버린 적이 있어요. 그걸로 보아 새로 태어난 아기도 잘 보살펴주리란 것을 믿을 수가 없거든요. 이렇게 조그많고 귀여운 아기들이 날마다 위험한 일을 당한다는 데 가서 율가를 따끔하게 야단을 치고 잘 보살피겠다는 약속을 받던지 아니면 그녀석이 말을 안들으면 홍해에게라도 잘 보살펴달라고 부탁하려구요. 우리 아기는 이렇게 사랑받고 있는 데 같은 아기이면서도 목영의 아기가 핍박받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요." 규하는 말리고 싶었다. 왠지모르게 떠오르는 것은 반려의 식장에서 보이던 그 집착이 가득하던 눈빛!!! 하지만 말릴만한 구실이 없었다. 율허가 아기를 예뻐하면 할수록 말릴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전에도 어린 아기들을 싫어하는 편은 아니였으나 아기가 알에서 깨어난 이후로는 정말 정도가 지나치고 있었다. 전에 왜 그렇게 걱정을 하느냐고 아이들은 내버려둬도 잘 자란다고 했더니 눈물이 글썽거리면서 자신이 암컷으로 변이하지 못하기때문에 어렵게 얻은 아기라서 그런다고 했다. 누가 그에게 그런 말을 했는 지 모르지만 율허는 수컷의 몸으로 알을 낳으면 대부분의 알이 부화하지 못하고 죽어버리는 줄 알고 있었다. 아니라고 해도 고집스럽게 그 믿음을 고수했다. 사실 규하도 율허가 두번다시 알을 가지게 만들 생각은 없었다. 아직도 알을 낳을 때 율허가 죽을 뻔한 것을 생각하면 정신을 아찔해지는 것을 느끼니까. "하지만 굳이 그를 직접 만나러 갈 필요는 없잖아? 다른 사람을 보내도 될텐데." "그러고 싶지만 확실하게 해두고 싶어요. 그리고 태천궁에 남아있는 내물건들도 가져올게요." "같이 갈까?" "고마워요. 하지만 곧 장로회의가 있잖아요. 게다가 수천의 모든 물의 정화활동에 대한 것이라 최고지휘자들이 다 모이는 데 규하가 빠지면 안되지요. 걱정말아요. 태천궁은 내가 나고 자란 곳이라 이곳보다도 더 잘아는 곳이니까. 그보다 내가 없는 동안에 설마 만월의 밤이라고 이상한 짓 하는 거 아니지요?" 규하가 픽 웃음을 터트렸다. 전에 율허가 알에만 집착하고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자 화가 나서 다른 자와 교미해버리겠다고 협박했던 것이다. 율허가 길길이 날뛰며 그러면 그 상대를 죽여버린다고 살벌하게 달려들어 무작정 규하를 넘어뜨리고 물어뜯으려고 해서 고생을 했던 것이다. 아무리 그냥 한소리라고해도 화를 가라앉히지 못하고 나중에는 대성통곡을 하는 바람에 시종들이 기겁을 해서 달려온 적이 있었다. "웃어요? 내말이 우습단 말이지요?" "아, 아니야. 설마 내가 율허의 말을 우스워하겠어? 전에처럼 물어뜯기면 어쩌려고." 율허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전에야 이성을 잃어버리고 날뛰었지만 나중에 귀를 물려 피를 뚝뚝 흘리는 규하를 보고는 자신이 기절할 정도로 놀랐던 것이다. 귀를 물린 규하가 별로 아프지 않다고 했지만 그 상처가 나을때까지 율허는 안절부절을 못했었다. 율허가 지난 일을 꺼내어 자신을 놀리는 규하를 노려보았다. 규하가 노려보는 율허를 안아올리며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내게는 너 밖에 없다. 알잖아. 나는 지금 우리의 아기도 질투하고 있다고... 잠시라도 내게서 너를 빼앗아 가는 모든 것을 질투하는 질투쟁이인 내가 한눈을 팔겠어? 율허야 말로 전에 살던 곳에 갔다고 한눈을 파는 것은 아니겠지?' "으하하하... 어지러워요... 하하 걱정하지 마시지요. 전에 살던 곳에서 나는 별로 인기있는 인물이 아니였으니까요. 이제 남의 반려가 되어버린 내게 관심이나 주겠어요?' "뭘 모르는 소리.!!!율허가 어디가 어때서.. 내보기엔 세상에서 가장 예쁘구만." "바보!!! 규하 눈에나 그렇게 보이는 거라구요." "하하하.. 그런가?" 규하는 여전히 자신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율허의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느사이 서로 얽히기 시작한 입맞춤이 농도가 짙어지고 열기가 더해가자 같은 방안에 있던 시종들이 얼굴을 붉히고 밖으로 나가며 문을 닫아주었다. 목영은 환하게 피어난 율허를 보자 속에서 피가 끓어올라 숨이 막혀오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전에도 그리 밉상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수인궁에 있으면서 사랑을 받은 것이 역력한 것이 눈에 보였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묘한 매력이 넘쳤다. 속에서 끓어오르는 살기를 간신히 감추고 목영은 반갑게 웃으며 율허를 맞이했다. 그리고 율허가 오기전에 자신이 때린 상처를 가진 어린 아이를 데리고 와 율허에게 보여주었다. 율허는 대번에 어린아이의 얼굴의 상처를 보더니 안색을 굳히고 놀라워 했다. 아이는 머뭇거리며 목영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간신히 걷기 시작한 아이는 간간히 화가 날때마다 자신을 때리고 구박하는 목영을 두려워했다. 율허는 아이에게 다가가 그 얼굴에 난 상처를 쓰다듬었다. 두려움만이 가득했던 아이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이름이 뭐지요?' "율,효.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수인족의 혼혈이 율이라는 돌림자를 받았다고 아주 못마땅해하고 있답니다. " "저런... 아이에게 무슨 잘못이 있다고.... 이렇게 예쁜데..... " 목영은 율효를 사랑스러운 듯 쳐다보는 율허가 가증스럽기만 했다. 자신이 차지해야 할 행복을 가로채고 자신을 동정하는 것만 같아 자신을 직접적으로 괴롭히는 율희보다도 그가 더 증오스러웠다. "율희님은 특히나 아이를 볼때마다 노려보시고 소리를 지르시면서 가끔 때리기도...." "맙소사.. 이 아기가 때릴 때가 어디있다고..." 화를 내는 율허를 보며 목영은 속으로 비웃었다. 왜 율희 뿐아니라 자신도 어떨땐 자신이 고생하는 것이 아기때문인 것만 같아 때린 적도 있었던 것이다. 지금 아이의 얼굴위의 멍도 자신의 손찌검에 생겼다는 것을 알면 저 착한 척하는 율허의 얼굴이 어떻게 변할지 보고 싶었지만 간신히 그 충동만은 참아냈다. 이제 저 율허만 자신의 편으로 만들면 율희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섰던 것이다. 태천제도 꼼짝 못했다는 그를 이용하여 율희를 괴롭혀줄 생각을 하니 조금은 그동안 자신을 괴롭히던 분노가 아주 조금은 삭여지는 기분이였다. 율희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자신에게 율허가 왔음을 알린 시종의 얼굴을 내리 쳤다. 시종은 이를 드득드득 갈면서 소리를 질러대는 율희에게서 무사히 벗어날 수 있기만을 신에게 빌었다. 문이 열리고 그동안 몰라보게 환하게 변한 율허가 안으로 들어왔다. 율희는 목영과는 또다른 의미로 율허가 싫었다. 아니 증오스러웠다. "어인 일이신가요? 율허!!! 수인궁에 계셔야 할 분이 이곳에 행차하시다니..." 전부터 느낀 것이지만 율희가 자신을 싫어한다는 것을 다시한번 그가 자신을 보며 노려보는 시선에서 느끼는 율허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를 알지못하는 율허였다. 그를 율가의 반려로 선택한 사람도 자신이고 그에게 이름을 준 사람도 자신이였다. 자신으로서는 그에게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건만 그는 자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동안 잘 지냈어요?" 율허의 말이 끝나기기 무섭게 율희가 콧웃음을 쳤다. "잘 말인가요? 제가 잘 지냈을 거라고 생각하셨단 말인가요? 어디가요. 저 냉정하기만 하고 저에게는 관심도 없던 저의 반려가 다른 자를 안아 알까지 낳고 율이라는 이름자까지 주었어요. 제가 기뻐해야 하는 건가요? 당신의 그 수,인,족, 반려가 다른 자를 품어 알을 낳게 했다면 당신은 어떨것 같은 가요?" 율허는 율희를 질책하기위해 찾아왔지만 그의 말을 듣다보니 그의 심정도 이해가 갔다. 자신도 규하가 다른 자를 품어 알까지 낳았다면 길길이 날뛰었을 테니까, 모든 것은 율가의 잘못이였다. 왜 반려가 있는데도 마음을 잡지못하고 다른 자를 품는단 말인가. 율희의 분노를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래고 아기는 아무런 잘못이 없지 않은가. 자신이 그를 이해하고 물러선다면 아기는 계속 위험속에서 자라게 될 것이 아닌가. 어떨게든 싸우더라도 아기에게는 해가 가지 않기를 바랐다. "율가가 잘못을 했다고 해도 아기에게는 잘못이 없으니 아기를 위협하는 행동은 멈추어주길 바라요." 순간 율희는 이성을 잃어버리고 율허의 뺨을 갈겨버렸다. "감히 누구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거지요? 당신은 언제까지 태천제의 형이라고 기고만장할건가요. 당신은 이제 수인왕의 반려일 뿐이라구요. 감히 태천제의 반려인 나에게 명령을 하다니... 당장 꺼져요.그 증오스런 얼굴을 내앞에서 치우라구요.나는 태천제보다도 그 교활한 자보다도 당신이 더 증오스러워요." 율허는 넋을 놓아버렸다. 태어나서 이때까지 한번도 누군가에게 뺨을 맞아본 적이 없었다. 불같이 따갑게 뺨을 자극하는 아픔도 충격이였지만 죽일 듯이 노려보는 율희의 시선도 충격이였다. 누군가 자신을 이정도로 미워할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터라 한동안 멍하니 서있기만 하였다. "여봐라. 어서 이자를 끌어내지않고 뭐하느냐?" 그러나 시종들은 망서리면서 율허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그모습이 더욱 율희의 신경을 자극한 모양인지 율희는 망서리고 있는 시종에게 다가가 그의 뺨도 내리쳤다. "그만,, 내가 나갈게요. 그러니 그 사람은 내버려둬요." "나가요. 이곳은 수인족의 반려따위가 들어올 곳이 아니니까. 그리고 이제부터는 나를 볼때면 정중하게 예를 차리도록 하세요. 당신이 수인족의 반려인 이상 난 당신의 윗사람이라구요." 증오로 이글이글 타오르는 율희를 멍하니 쳐다보며 율허는 그곳을 물러나와서야 아직 율희에게서 아기를 해치지 않겠다는 말을 듣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것을 인식하기엔 율희에게 맞은 충격이 너무 커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목영은 붉게 부어오른 율허의 얼굴을 보고는 고소를 금치못했다. 속으로는 쾌재를 부르면서도 내색하지않고 율허의 얼굴에 찬수건을 가져오게 해서 열을 가라앉히게 만드는 둥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율허는 괜찮다고 하지만 충격을 받은 듯 해보이는 율허의 표정에 목영은 이제야 겨우 자신의 잔머리가 돌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가끔 왜 율가가 자신을 불러 이런 계약을 하였는 지 생각을 해보기는 하였지만 그저 율허를 불러들여달라는 것만으로는 납득할 수 없는 다른 이유가 있을 것만 같았다. 굳이 자신이 아니더라도 율허를 불러들이는 일은 그가 직접 할수도 있는 일이며 다른 사람이 필요한 일이 아니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목영은 율허의 반려의 식에서 자신을 본 태천제인 그가 자신의 외모에 넘어간 것은 아닐까하고 가슴 부풀었던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저 자신은 하나의 장식품일 뿐이라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율허를 쳐다보는 율가의 시선에서 담긴 그 간절한 바람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율허 본인 뿐이리라.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면서 율가는 유달리 율허가 자신을 쳐다볼 때는 당황하며 자신의 눈에 담긴 감정을 숨기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는 하였다. 그모습을 지켜보며 목영은 치밀어오는 시기심을 또한 속으로 삭여야했다. 전에 같으면 율희따위의 감정은 전혀 이해할 생각도 없었지만 지금은 자신도 같은 감정을 느끼고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도 율희와 같은 감정을 느끼고 마는 것이다. 평소에는 자신의 아이에게 전혀 관심도 없으면서 율허가 방긋방긋 웃으며 아기를 달래면 그 모습을 사랑스러운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자신의 아이가 그의 관심을 받고 있었지만 목영은 전혀 기쁘지 않았다. 그 관심은 온전히 율효의 것이 아닌 그저 율허의 그림자에 의해 생긴 것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감정의 산을 율허는 가지고 있었다. 율허는 율희에게 맞았다는 사실은 숨긴듯했다. 만일 알았다면 율허를 쳐다보는 율가의 시선으로 보아 분명 커다란 분란이 일어나고 말것이 분명해보였다. "저기 뺨은 괜찮으신가요?" 율가와 이야기를 하고 있던 율허가 흠칫 놀라 급히 목영을 돌아보며 고개를 저어 더이상 그 이야기를 하지 않기를 바라는 시선을 보냈지만 목영은 모른 척 하였다. 이왕 이렇게 된 것 태천제의 애정을 기대할 수 없다면 그 자리라도 차지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용하기로 작정을 하였다. "뺨이라니? " 율가가 눈살을 찌푸리며 목영과 율허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아무것도 아니야." 율허가 급히 수습에 나섰지만 율허의 일이라면 단 한가지라도 율가에게는 그냥 넘어갈만한 것이 없었다. 율가가 당황하며 무언가를 숨기려는 율허의 행동에 더욱 이마를 찡그리며 목영에게 시선을 던졌다. 목영에게 무슨 일인지를 묻는 듯한 시선에 목영은 당황한 척하며 머뭇거리며 입을 열지 않았다. "무슨 일인가. 당장 이유를 말하라." 차갑다. 자신이 율희에게 죽을 정도로 맞을 때만 해도 관심한번 보이지 않았으면서 지금 태천제는 율허의 뺨이라는 이야기 하나에도 격렬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목영은 속에서 열이 뻗어올랐지만 그렇다고 목적을 잊어버릴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다. 밉고 서운한 것은 나중일이였다. "그게... 저... " "당장 말하라." 단호한 율가의 명령에 목영은 고개를 숙였다. "저기 사실은 율허님이 율희님을 찾아가 저의 아기를 건드리지 말라고 하셨는 데 그분이 이미 율허님은 율가님의 형이기전에 수인족의 반려이니 당신에게 충고할 신분이 아니라고 하시면서....." 말끝을 흐렸지만 충분히 내용은 율가에게 전달되었다. 율가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고개를 숙인 목영의 머리위에도 그 살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조용히 살기만 흘려대던 율가가 율허를 돌아보았다. "별거 아니라니까. 율희의 말이 전혀 틀린 것도 아니잖아. 내가 생각없이 그런 짓을 해서 괜히 심기를 불편하게 해서 그런거니까 신경쓰지 말고 잊어버려. 그보다 나는 율가에게 부탁을 하려고 온거야. 아직 어린 이 아이를 잘 보살펴주길 바래.약속해줄거지?" "원하는 것은 그것뿐?" "응." 율가가 한참동안 무언가를 더 말하기를 기다렸지만 율허는 그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율희를 그대로 두라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잘못을 한 사람은 나라니까. 너 율희에게 화내면 나도 너에게 화를 낼거다." 목영은 저런 바보같은 것이라는 말이 혀끝까지 치밀어 오르는 걸 느꼈다. 애써 율희를 징계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었건만 저 위선적인 자가 그걸 없애버렸음에 화가 치밀었지만 참을 수 밖에 없었다. 지금 자신이 무슨말을 꺼낸다해도 율가의 마음을 흔들지는 못하리란 것을 어렴풋이 느꼈던 것이다. 태천궁에서 태천제를 다룰수 있는 사람은 태천제의 형인 율허뿐이라고 하더니 율가는 율허의 한마디에 애써 살기를 죽이고 있었다. 아마도 이일로 율희를 밀어내기는 힘든 모양이였다. 목영은 자신의 생각에 잠겨 있느라 율가의 시선이 자신의 머리위를 스치고 지나간 것은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입술 끝에 걸린 비웃음도 보지 못하였다. 규하는 율가가 안고 있는 아기를 안타까운 듯 쳐다보았다. 율가는 아기를 사랑스러운 듯 조심스럽게 쓰다듬고 있지만 그 눈빛에는 일말의 감정도 담겨있지 않았다. 일이 왜 이렇게 된건지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할 수 없는 규하였다. 왜 자신의 아이가 태천제의 손에 안겨 있단 말인가. 그리고 그 앞에는 자신의 아기와 별차이나지 않는 어린 아이가 울고 있었다. 분명 누군가에게 납치당하였다고 하여 천상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던 그 아이가 분명했다. 아이를 납치한 걸로 의심받은 율허가 태천궁에 갇혀있는 이시점에서 갑자기 자신을 찾아온 태천제가 잠들어 있는 규하와 율허의 아이를 안아들었다. 그리고 그가 품에서 내려놓은 것은 사라진 그의 아이였다. 그는 놀라고 있는 규하가 보는 앞에서 율효를 내버려 두고 새근새근 잠에 취해있는 율허의 아기를 안아들고 한참동안 들여다 보았다. "율허를 닮았군. " 규하는 율가의 행동의 이유를 알수가 없어 멍하니 그의 행동을 지켜보기만 했다. 순간 규하는 숨이 턱하고 막히는 것을 느끼고 율가에게 달려들려고 했다. 그가 자신의 아기의 목을 눌렀던 것이다. 아기가 놀라 깨어나 낑낑거리며 억눌린 신음소리를 흘렸다. "하지만 약해.. 이렇게 누르고 있으면 곧 죽겠군." "무슨 짓입니까? 도데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어서 손을 떼십시요." 규하로서는 그가 이런 짓을 하는 이유를 알수가 없었다. "너는 내게서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아갔다. 너무 소중해서 손도 대지 못하고 쳐다보고만 있던 것을. 그러니 이제 그에 상응하는 댓가를 받고자 하는 것이다. 이 아이가 소중한가?" '...." "소중하겠지? 그 약한 율허의 몸안에서 나온 아이니까. " "도데체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원하는 것?" "글쎄... 그대가 그걸 할 수 있을까?" "무엇입니까?" "......" "무엇입니까? 율허를 돌려달라고 하는 것만 아니라면 무엇이든지 하겠습니다." "그럼 네 앞에 있는 아이를 죽여라." 규하는 자신이 무슨 말을 들은 것인지 이해할수가 없어 멍하니 율가를 쳐다보았다. 특히나 율가가 미소짓고 있었기에 더욱 더 자신이 무언가를 착각한 것은 아닌지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아이를 죽이라니... "그 아이를 죽이면 이 아기를 놓아주지." 잘못들은 것이 아니였다. 규하는 여전히 미소짓고 있는 율가를 믿을수없다는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어떤 부모가 자신의 아이를 죽이라고 협박한단 말인가. "왜?" "이유를 알고 싶은가 ? 내 소중한 것을 빼앗아간 수인족을 증오하기 때문이지. 그런데 이 아이에게는 그 수인족의 피가 흐른다. 이 귀 뽀죡한 귀를 가진 아이를 나는 내 혈육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이미 이름이 받은 아이니 천인족은 이 아이를 없앨 수가 없지. 그러니 누군가는 이 아이를 없애줘야겠기에 찾아왔다. 죽여라. " "저는 할 수 ...없습니다. " "그럼 이 아기가 죽게된다. 그래도? 더불어 율허도 무사하지못할텐데....." 그 때 문이 거칠게 열리고 목영이 뛰어들어왔다. 그는 율가의 앞에서 울고 있는 자신의 아이를 보고는 놀라서 규하와 율가를 번갈아 쳐다보며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알려는 듯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없어졌다는 아이가 이곳에 그것도 수인왕의 처소에 있다는 사실이 심상치 않게 느껴졌는 지 조심스럽게 아이에게 다가갔다. 특별하게 자신의 아이에게 애정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율의 돌림자를 받은 아이였다. 자신의 위치를 견고히 해줄 아이인지라 지금은 소중했다. 아이에게 손을 뻗는 순간 율가의 손이 목영의 등을 파고 들어 심장을 파괴했다. 핏물을 토해내며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그는 급히 고개를 들어 율가를 쳐다보았다. 그는 자신이 죽어야하는 이유를 알수가 없었다. 그리고 자신을 차가운 시선으로 쳐다보며 서서히 자신의 몸안을 파괴하는 율가의 모습에 죽어가면서도 공포에 질려 전율했다. 규하가 비명을 지르며 다가가려다 멈춰섰다. 율가가 또다시 가토의 목을 누르며 미소짓자 멈춰설 수 밖에 없었다. 목영을 아무런 망서림없이 죽여버리는 그의 모습을 보고나니 그가 자신의 아이인 가토도 역시 죽이고자하면 망서리지 않을 거라는 걸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자신의 아이를 살리고자 남의 아이를 죽인단 말인가. "그대가 망서린다면 내가 이 아이를 죽이고 더불어 내아이도 죽이는 수밖에 없겠군. 어차피 그럴 목적으로 낳은 아이니까." "어떻게 그런 짓을... 너무 잔인하지않습니까? 그 어린 아이에게 무슨 잘못이 있다고......" "선택은 자네의 몫이야. 나는 이 수인족의 혼혈을 살려둘 생각이 없고 자네가 망서린다면 결국에는 이 율허의 아이도 같이 죽이면 되니까. 한명이라도 살리고 싶다면 자네가 그 아이를 죽이는 수밖에 없겠지. 아이를 잃은 율허가 과연 견뎌낼 수 있을까? " 규하는 도저히 손을 들 수가 없어 망서릴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율가가 손을 들어 가토의 가슴속에 손가락을 밀어넣자 절규하며 율효의 목을 쳐버리고 몰려오는 죄책감에 진저리를 치며 주저앉았다. 쥐고 있던 수인왕의 검을 차마 더이상 쥐고 있지 못하고 바닥에 내팽겨쳐버렸다. 이제까지 사람을 전혀 죽여본 적이 없는 것도 아니건만 아직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를 죽여보기는 처음인지라 스스로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이로써 자네는 율허의 인생에서 사라지게 되겠군. 아마 그대는 내가 얼마나 자네를 부러워하고 증오하는 지 짐작할 수도 없을 것이다. 내가 얼마나 죽을 힘을 다해 이 증오심을 눌러왔는 지 당장에라도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간에 그대를 죽여버리고 율허를 차지해버고 싶은 걸 참아냈는 지 이런 복잡한 절차같은 거 다 무시해버리고 오로지 율허를 가두고 나만을 보게 만들고 싶었지만 그로인해 율허의 앞날이 복잡해지는 것은 막고싶어 기다리고 기다려서 오늘에서야 이런 일을 꾸민 것인지는 모를 것이다. 자네가 끝까지 내 아이를 죽이지 않았다면 여전히 명분이 없어서 더 기다리며 나는 미쳐가버렸을 테지... 이제 그대는 나의 오랜 바람을 위해 죽어줘야 겠다. 이건 오로지 나의 것을 당연한 듯 차지한 댓가라고 생각하고 얌전히 죽어주게." 율가의 손이 자신의 심장에 파고 들어 올때까지도 규하는 도망치지 못하고 고스란히 당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 반려의 식날 태천제인 그가 보여준 그 집착을 보며 오늘날을 예감했을 지도 모른다는 착찹한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하지만 후회는 하지 않았다. 잠시나마 그 사랑스러운 작은 사람을 안을 수도 있었고 그의 마음도 차지할 수 있어서 좋았다는 생각만이 들었다. 규하의 차분한 반응이 율가의 손을 더욱 잔혹하게 만들었다. 문이 열렸다. 아마 목영이 태천제를 뒤따라오며 율허마저 데리고 온 모양이였다. 율가는 빛속에서 방안으로 걸어들어오는 율허의 모습에 미소지었다. 이제 모든 것은 끝났다. "왜?" 가슴 속 가득히 차오르는 수 많은 말이 무언가에 막힌 듯 터져나오지 못하고 겨우 꺼낸 말은 외마디 비명같은 한 음절이였다. 하고 싶은 말은 너무 많은 데 묻고 싶은 말도 너무 많은 데 율허는 자신의 목에 갇혀버린 그 말들을 하지 못했다. 그 말들이 너무 무거워서 그리고 너무 무서워서 입밖으로 내 뱉는 순간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모든 장면이 꿈이 아닌 현실로 다가올까봐 두려워서 수많은 의문과 걱정과 분노를 삼키려고만 했다. 사라져 버렸다던 목영의 아이 율효의 목이 바닥에 외따로 구르고 있는 모습이나 피를 머금은 듯 아직까지도 피를 뱉어내고 있는 목영이 부들부들 떨며서 이승의 문을 닫고 있는 모습이나 규하의 가슴속으로 빨려들어간 듯 보이는 율가의 손이 현실일리가 없었다. 한폭의 잔혹한 그림을 보는 듯한 정지되어버린 장면에 율허는 터져나오려는 비명을 삼켰다. 오래전 탁비와 단 둘이서 가슴 두근거리며 들여다 본 미래의 어떤 장면을 보았을 때처럼 이것도 그것은 아닐까? 하지만 그렇게 믿기에는 미래를 보여주던 수경도 탁비도 보이지 않았다. 그 때 율가가 서서히 규하의 가슴에서 손을 빼내었다. 그의 시선은 현실을 외면하려는 율허의 시선을 붙잡은 채로 이것이 꿈이 아님을 율허에게 인식시키려 하고 있었다. 율허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면서도 온몸이 후들후들 떨리고 있는 것을 느끼고 억눌린 침음성을 터트렸다. 순간 율허의 눈이 더이상 커질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율가가 방금전 규하의 몸속에 있었을 그 검붉은 핏덩어리를 꺼내들더니 입으로 가져가 먹어버렸던 것이다. 율허는 머리속이 아득해지고 뱃속이 요동을 치는 감각에 더이상 견디지 못하고 주저앉아 몸속에 있는 모든 것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온 몸의 피가 머리로 몰린 듯 눈알은 빠질 듯이 아파왔고 귓속은 회오리속에라도 들어간 듯 윙윙 울려댔다. 서서히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와 비릿한 혈향이 이게 그저 지독한 악몽이 아님을 이게 현실임을 자각시키려는 듯 했지만 율허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어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건 꿈이야. 이게 현실이리가 없잖아." 현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마음에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어보지만 아무리 눈을 감아도 뇌리에 각인되어 버린 장면들이 지워지지않고 선명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아니라니까.. 으흑흑흑 ... 이건 현실이 아니야." 아무리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어도 꿈이라고 그저 하룻밤의 악몽이라고 받아들이지못하는 스스로를 감당하지 못해 율허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렇게 믿고 싶다면 그리하도록 해. 언제까지든 꿈을 꾸게 해줄께. 이 모든 것이 한순간의 악몽으로 깨어나면 잊혀지도록 만들어 줄께. 그러니 너는 내옆에 있어. 아무런 의심도 갖지말고 내 옆에서 나만을 보고, 나만을 느껴." 아이러니하게도 이게 현실일리없다는 율허의 간절한 바람은 율가의 말에 이것이 현심을 자각하게 만들었다. 바닥이 사라져버린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져내리는 그 허망함과 절망감에 율허는 온몸에 힘이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무너져내리는 자신을 부축해주는 율가의 손을 진저리치며 밀어냈다. 율가는 율허의 사나운 행동에도 그저 아무런 반응없이 손을 뻗어 율허의 얼굴을 적시고 있는 눈물을 닦아냈다. "울지마. 이건 꿈이잖아. 그러니 모든 것을 잊어버려." 무리한 요구였다. 율허는 사납게 율가를 쳐다보며 뒤로 물러서려고만 했다. "왜?" 힐난하는 듯한 율허의 시선에 율가가 이를 악물고 자신의 마음을 여전히 받아들이려하지 않는 율허를 노려보았다. "넌 태초부터 나만의 것이고 내 옆을 떠나서는 안되는 존재니까. 이건 그것을 깨닫지 못한 너의 어리석음에 대한 댓가야. 기다리다 지쳐버린 내가 너를 붙잡고 있는 모든 것을 없애도록 만든 것은 너야." "아니야." 부정을 해보지만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없었다. "아니 이미 너는 알고 있었잖아. 이렇게 되리란 걸. 내가 다른 자를 볼 수 없다는 것도, 오직 너하나만이 나의 심장을 뛰게 만든다는 걸. 미성숙기시절 너무나 무감정한 나에게 네가 한말만이 나의 감정을 움직였다는 걸. 그리고 오직 그 말만 믿고 언제까지고 내가 기다릴 거라는 것도. 그런데 너를 기다린 댓가가 이거였어. 어느날부터인가 네가 나를 멀리하기 시작했지. 왜 놀라지? 내가 모를거라 생각했어? 나는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어. 아마 그 시점이 네가 혼돈의 아버지를 만나고 난 뒤 부터였어. 그가 너에게 뭐라고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때부터 너는 내가 느끼지 못할거라 여길정도로만 조금씩 조금씩 네게서 멀어져갔지. 알면서도 나는 무언인가 이유가 있을거라고 믿고 기다렸어. 율희를 내 반려로 밀었을 때도 율경이 태어나자 소천제위까지 넘기고 자취를 감추었을 때도 나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기다렸어. 꼭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그러니 참고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이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지. 네가 영원히 내 곁으로 돌아올 생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어. 수인왕을 보면서 행복한 듯 웃는 너를 보면서 네가 날 배신한 거라는 걸 알게 되었다. 어린 시절 나를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다는 말도 다 믿을 수 없는 말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더이상 기다리지 않기로 했어. 네가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라면 돌아올 생각이 들도록 만들기로 작정했지. 돌아오지 못할 상황이라면 돌아올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만들기로 다짐했다." 율허는 더이상 버틸 힘이 없었다. 율가가 붙잡는 대로 축 쳐져 율가가 하는 말을 모조리 뇌리에 가슴에 새겨들었다. 숨을 쉴 수가 없을 정도로 옥죄어 오는 무게로 의식이 멀어져가는 데도 율가의 말은 작은 숨소리까지 선명하게 들려와 각인되었다. "규하를... 하아아.. 그를 .. 죽일 필요까지는.. 없었잖아." "천만에 너는 그가 살아있는 한 내게 오지 않을 거잖아. 내게 와도 언젠가는 그에게 돌아갈려고 할거잖아.온전한 나만의 것이 되지 않을 거잖아." " 율효는 ..." "저 아이를 죽인건 저 수인족이다. 나는 내 아이를 죽인 그에게 복수를 한거라는 명분이 있어." 이죽거리는 율가의 말에 율허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그느 규하가 결코 율효를 죽일리가 없음을 굳게 믿었다. 율허의 항의어린 시선에 율가가 웃었다. "그런 억울한 듯이 쳐다보지마. 그가 자초한 일이고 네가 자초한 일이니까. 나는 그저 작은 계기를 제공했고 그걸 선택한 것은 그였으니까. 이로써 수인족이 나를 성가시게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 "용서하지 않을 거야." "맘대로." "너의 것도 되지않을 거야." "글쎄." "내게 손가락 하나 댄다면 죽어버릴거라구." 그제서야 여유롭던 율가의 시선이 사나워졌다. 율허는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는 율가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쳐다보았다. 한참을 노려보며 살기를 피워대던 그가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한참을 무언가를 중얼거리더니 고개를 다시 돌려 율허를 보며 이를 갈았다. 이를 갈면서 율허에게 다가온 그가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율허를 잡아챘다. "절대로 너는 그러지 못해. 네가 죽는다면 너와 저 수인족의 아이도 죽을 테니까. 영원히 환생하지 못하도록 조각조각 내어 무저갱에 던져버리고 그 영혼은 두번다시 환생하지 못하도록 완전히 소멸시켜버릴거니까 그럴 용기있다면 마음대로 해. 하지만 이것만은 명심해 너는 죽는 후에도 네게서 벗어나지 못할거다. 너의 영혼과 나의 영혼은 원래 하나니까. " "!!!!!!" 율허는 극심한 공포에 질려버렸다. 이 장면 언젠가 탁비와 보았던 미래의 운명과 똑같질 않은가. 자신이 다른 반려를 맞이하여 바뀌었을 거라고 믿었던 운명은 여전히 제자리를 돌고 있었던 것이다. "안돼...." 20.잔재들 탁제균은 심한 자괴감에 무너져내렸다. 평소의 그는 그리 양심의 가책같은 건 받아 본 적이 없는 사람이였다. 오히려 상대방을 아무런 가책없이 함정에 몰아넣고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것을 보며 희열을 느끼는 쪽이였다. 성공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짓도 서슴치않고 할 수 있는 그인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는 심한 자괴감을 느끼고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로서는 일이 어떻게 된 상황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분명 차분히 이야기를 하다가 상대방이 조금 사랑스럽다고 생각을 했던 것까지 생각이 났다. 다음순간 생각나는 것은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을 치는 저 어린 사람을 거칠게 유린하던 자신의 모습이였다. 어떻게 시작되었고 무엇때문에 그렇게 되었는 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아무리 머리속을 뒤집어 생각해보아도 그저 한순간 미쳤다고 밖에는 납득할 수 없는 짓을 저지르고 만 것이다. 몸짓 하나 손짓하나가 미치도록 유혹적이고 매혹적이라 자신을 멈출수가 없었다. 몇번인가 자제를 해보려고 해보았으나 작은 신음소리하나에 다시 이성을 잃어버리고 몇번이고 미친 듯이 탐하고 말았다. 생전처음이라고 해도 좋을 만한 지독한 쾌감에 모든 이성이 사라져버렸다. 새벽녁에야 상대방이 완전히 의식을 잃은 후에야 탁제균도 마법에서 풀려난 듯 이성을 찾고 앗차해서 뒤로 물러섰을 때는 이미 상황은 최악을 달리고 있었다. 방안을 가득 해운 정사의 흔적들과 냄새에 탁제균은 넋을 잃어버렸다. 처음이였다. 이성을 잃을 정도로 누군가에게 달려들어 탐한 것도 극렬한 쾌감을 느낀 것도, 그리고 사람이 사랑스럽다고 느낀 것도. 모든 것이 자신에게는 생소하기만한 경험들이였다. 자신에게는 영원히 생겨나지 않을 것이라 믿고 있던 것들이였다. 그런데 전혀 그린 기미도 예감도 없이 갑작스럽게 닥쳐온 감정들의 폭풍에 너무 혼란스러워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그때, 의식을 잃었던 그가 작은 신음소리를 내며 꿈틀거리며 의식을 되찾고 있었다. 탁제균은 그 신음소리에 또다시 진한 욕망이 달아오르는 기분에 당황하여 어쩔줄을 몰라하며 멍하니 그가 깨어나도록 지켜보기만 하고 있었다. 의식을 찾은 그가 탁제균을 발견하더니 아주 처연하게 미소지었다. 탁제균은 생전처음 사람의 미소를 보며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왜 자꾸만 자신이 이런 감정들을 느끼는 것인지 의심도 하지 못하고 그저 안쓰러운 듯 그를 쳐다보았다. 매하는 탁제균의 표정을 보며 그의 생각을 눈치챘다.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어쩔줄몰라하는 모습에 웃음이 나올것같았지만 참아냈다. 그는 어떻게 된 상황인지 몰라 당황스러울 테지만 이건 모두가 매하가 유도한 일이였다. 율파에게 거절당한 후 자신감이 떨어지자 시험삼아 그를 두고 시험을 했던 것이다. 결과는 매우 만족스러웠다. 자신의 유혹의 향기는 천년전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아마 이 육체의 주인이였던 자의 영향인 듯 했다. 하지만 부작용은 있었다. 너무 과도한 유혹의 향에 상대방을 자신의 뜻대로 저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요령이라면 자신있는 그가 오랫만에 혼절이라는 것도 경험할 정도였지만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였다. 누군가 이성을 완전히 잃고 미칠정도로 거칠게 자신을 원했다는 사실에 매하는 포만감을 느꼈다.그나마 자신이 탁제균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요령을 부렸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 이 곳은 피바다를 이루고 있었을 것이 분명했다. "저.. 좀 일으켜주시겠어요?" 다 죽어가는 듯 신음소리를 내었더니 당장 달려와 자신을 조심스럽게 부축하는 모습에 또 웃음이 나왔다.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하는 그에게 살며시 미소지었더니 얼굴이 잘 익은 과일처럼 붉어진다. "괜찮아요. 저는 괜찮으니까. 어쩌다 일어난 소소한 일이였을 뿐이니까..... 너무 괴로워하지 마세요." 라고 말하면서도 슬프고 괴로운 기색을 잔뜩 실어보여줬더니 탁제균이 안색을 딱딱하게 굳힌다. "사소한 일이라니... 잊어버리라니.... 말도 안됩니다. 내가 책임지겠오." '픽' 웃음이 터지려는 걸 간신히 참으며 매하는 부끄러운 척 고개를 숙였다. 당분간 이자를 어떻게 이용해볼까하는 잔머리를 굴리며..... 자신의 성격이 결코 아름다운 것에 동요하는 편이 아니라고 알고 있었던 매하였지만 가토의 외모에는 가슴이 진동하는 듯 했다. 차가우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아련해보이는 것이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상대방을 유혹하고 농락하는 것에 만족을 느끼던 매하였지만 이상하게 가토를 보니 그저 그의 옆에 그냥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정작 그토록 자신의 마음을 흔들어놓은 당사자인 가토는 탁제균을 따라온 자신에게는 별관심을 보이지 않고 멍하니 이상한 물속에서 마치 알속의 아기처럼 웅크리고 있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자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럼 그대가 본 것은 범인의 뒷모습 뿐이라는 것인가?" "녜, 그가 아버지의 몸에서 검을 뽑아내는 모습을 보고 놀라서 들키지 않으려고 숨어있었어요. " "알았네. 물러가게." 매하는 너무 쉽게 자신을 밀어내는 듯이 말하는 그 모습에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자세히 말하고 싶어지는 걸 느꼈지만 그렇게 되면 자신이 살아난 경위를 의심받게되고 일이 복잡해질 것을 알기에 그를 위해 무언가를 해주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접었다. 그가 자신을 한번이라도 돌아보기를 바랐지만 그는 한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마치 자신이 없는 사람처럼 전혀 신경을 써주지 않았다. 매하는 자신이 낼 수 있는 유혹의 향을 진하게 내뿜었으나 가토는 꿈쩍도 하지 않고 탁제균만이 숨을 급하게 들이쉬었다. 매하는 아쉬웠지만 얌전히 물러났다. 어차피 일천에 있는 동안은 얼마든지 기회가 있을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 어두운 방을 물러서며 매하는 상기되어 있는 탁제균을 보며 미소지었다. 탁제균의 손을 잡고 두사람이 밤을 보낸 방으로 조용히 들어선 매하는 그의 눈에 자신의 시선을 맞춘 채 서서히 옷을 벗었다. 탁제균은 움찔 놀라며 매하를 외면해보려고 했지만 이상하게 자신의 시선을 뜻대로 할 수가 없었다. 마치 못이라도 박힌 듯 잠시도 매하의 시선에서 자신의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격렬하기 그지 없는 정사였다. 고조되어 가는 매하의 신음소리에 탁제균은 이성을 잃어버리고 있었다. 그는 그런 스스로를 납득하지 못하면서도 제어할 수가 없었다. "그 이상한 물속에 있는 자는 누구지요?" 매하의 목소리가 꿈속에서 듣는 말처럼 현실적이지 않아 탁제균은 최면에라도 걸린 사람처럼 스스럼없이 입을 열었다. "그는 선천제 율파의 동생이오." "아!!! 그 벙어리 천인족이란 말인가요? 모두 행방불명되어 죽은 줄 알고 있었는데 왜 이곳에 있는 거지요?" "가토님이 그렇게 하시길 바랐기 때문이오. 납득할 수 없는 일이지만 가토님은 그를 자신의 영혼의 반려로 삼고 싶어하시지요. " "어머, 그저 평범하다 못해 말도 못하는 벙어리잖아요. 가토님이 왜 그를 그렇게 애지중지 하는 것이죠?" 자신은 한번도 돌아보지도 않았으면서 시선도 떼지 못하고 쳐다보던 가토의 모습이 떠오르자 심술이 나는 매하였다. 그는 살아어면서 태천제 율가를 제외하고 자신의 유혹을 뿌리칠만한 인물을 만나본 적이 없었다. 오늘에서야 자신의 매력이 통하지 않는 새로운 인물을 만난것이다. 매하는 왜 자신의 유혹을 뿌리치는 인물들이 하나같이 더 욕심이 날 만한 인물인지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이유는 모르겠오. " "그리고 왜 그는 그 이상한 물안에 있는거지요? 잠자는 것처럼 보이던데?" "그가 가토님을 거부하고 아무것도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고, 죽으려고만 해서 어쩔수없이 가토님이 내린 결정이라오.자진하지 못하도록 봉인한 것이요." "기가 막히군요. 생긴 걸로 봐서는 가토님의 관심에 감지덕지해야 할텐데... 분수도 모르고...." 매하는 심술이 났다. 자신이 그런 보잘것없는 자에게 밀려났다는 것이 분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물속에 있는 자보다 자신이 더 매력적이고 아름다웠다. 그런 자때문에 자신이 무시를 당했다고 생각하니 오기가 생겨났다. 자신의 이름을 걸고 이건 결코 그냥 넘어가서는 안되는 자존심이 걸린 일이였다. 비월이 탁비를 쳐다보았다. 탁비는 한동안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이제 남아있는 문장을 가진 남은 궁주들을 한곳에 모으는 일만 남았는 데 어디가 좋을 까요? " 비월의 말에 탁비가 골치가 아픈 표정으로 머리를 짚었다. 천제도 없는 지금에 이르러 누가 있어 궁주들을 통제하고 명령을 내릴 수 있을 것인가. "아무래도 그들은 남의 궁에는 머무르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 비월 역시 한숨부터 나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위기도 위기지만 궁주들을 한 곳에 모은다는 것부터 그 후의 일을 생각하면 골치가 아파지는 기분이였다. 이럴 때 아버지라도 살아계셨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이 들자 가슴이 짠해졌다. "그렇다면 천궁으로 불러들이는 방법밖에는 없겠군요. 그런데 그들이 얌전히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일지 걱정이군요." 비월의 말에 탁비가 고개를 저었다. "그들도 지금은 자존심을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님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가장 강하다는 인물들이 고스란히 당했는 데 자신들의 힘으로는 범인을 어쩔수없음을 잘 알았을 테니 소란이야 떨겠지만 잘 설득하면 천궁으로 모여들것이라 봅니다." "한시가 급합니다. 지금 곧 파발을 띄우고 참 천궁에는 누구에게 허락을 받지요? 천제혜림아 이후에는 누가 천궁을 관리하고 있나요?" "서나려라는 선천제 율파님의 종이 관리를 하고 있습니다. 우선 그에게 동의를 얻어야 하겠지요.사실 지금 상태에서는 천제의 피가 흐르는 사람은 월아님이 유일하니 그로서는 월아님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할 것입니다. " "그렇게 되는 군요. 그럼 제가 그곳에 다녀오겠습니다. " "조심하셔야 합니다. 지금은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상황이니 ..... " 아직까지 누가 범인인지 무슨 목적인지 밝혀진 것이 없는 상황에서 과연 궁주들을 한곳에 모으는 것이 잘하는 짓인지 걱정스럽기만 한 두사람이였다. 하지만 어차피 공격당할 거라면 혼자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하고 당하느니 여러사람이 같이 있으면 그중에 누군가는 범인에게 대적할 수도 있을 것이고 혼자있을 때와는 달리 쉽사리 당하는 일도 없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 후였다. 이것이 범인을 자극하여 불러들이는 일일지라도 말이다. "혼자서는 위험하니 파라님이라도 부르시지요." 탁비의 말에 비월은 움찔 놀라며 탁비의 시선을 피했다. "아니 괜찮아요. 그도 화룡궁주위를 물려받은 지 얼마되지않아 무척 바쁘고 이런 일로 불러들이다니... 미안한 일이에요." 차마 그가 밤마다 자신을 덮치려한다는 소리는 할 수 없는 비월이였다. 낮의 파라와 밤의 강황은 비월을 너무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그가 자신의 거부의 말에 제동이 걸린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문제는 바로 자신이였다. 밤의 강황이 파라가 아님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외모가 파라이다 보니 마음이 약해지고는 했던 것이다. 이러다가는 그를 받아들이고 마는 것은 아닌지. ... 아마 강황은 자신의 심리를 눈치챈다면 쾌재를 부르며 사정보지않고 달려 들어 자신을 삼키고 말것이다. 그러면 끝장인 것이다. 매하는 당장이라도 태워죽여버린 듯이 생명수안의 다하를 쳐다보았다. 자신의 유혹에도 흔들리기는 커녕 귀찮은 기색이 역력하던 가토의 표정이 뇌리에 박혀 떨어지지를 않았다. 태천제조차도 자신을 그런 식으로 쳐다본 적은 없었다. 다만 유혹당하지 않았을 뿐. 그런데 가토는 자신에게 시선을 돌리려는 매하의 의도에 차갑게 쳐다본 후 무시해버렸다.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방법을 사용하였으나 가토는 끄덕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매하때문에 잠시라도 다하가 아닌 다른 것에 시선을 돌려야 하는 것이 싫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매하는 분한 마음을 속으로 삼키며 그 방을 나왔다. 탁제균을 통해 그 봉인을 푸는 주문을 알아내고 기회를 보아서 다하를 없애버릴 생각이였다. 그렇게 하면 가토가 자신을 돌아봐 줄 것 같았다. 하지만 좀처럼 기회는 오지 않았다. 탁제균은 매하의 의도를 알아챘지만 그 역시 다하가 평소에 못마땅했던 터라 모른 척 해주었다. 매하는 탁제균에게 그를 위해 일천궁주인 가토를 그 방에서 벗어나게 해주겠다는 식으로 인식시켜놓은 상태였다. 기회만 엿보고 있던 매하에게 가장 적절한 기회가 왔다. 절대로 다하의 곁을 떠나지 않을 것 같았던 가토가 천궁으로 와달라는 파발을 받고 망서리다 탁제균의 설득에 잠시 다녀오겠다며 천궁으로 갔던 것이다. 생명수안에 다하를 아무리 살펴보았지만 자신보다 나은 것이 하나도 없어보였다. 평범하다 못해 말도 못하고 비쩍 말라서 조금도 매력적이지 않았다. 한참동안 다하를 노려보던 매하가 봉인을 풀었다. 그때까지 미동도 하지 않던 다하가 쿨럭이며 표면으로 떠올랐다. 가까이 다가간 매하는 잠시 다하를 노려보다 의식을 깨웠다. 탁제균의 말로 그가 깨어있을 때 자꾸 자진을 하려고 했다고 했으니 자신이 깨어놓기만 하면 스스로 죽어주리라 믿었던 것이다. 일부러 자신의 손을 더럽힐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깨어난 다하가 전혀 힘이 없다는 것이였다. 스스로 죽을 힘도 없을 정도로. 매하는 이대로 목을 눌러버릴까 아니면 조금 회복을 시킨후 스스로 죽게 만들까를 고민하였다. 하지만 지금 이시점에서 자신이 직접 다하를 죽여버린다면 자신이 유혹하려고 하는 가토가 그 사실을 안 후에 벌어질 사태가 조금 걸렸다. 그토록 아름답고 매혹적인 자를 한번 유혹한 걸로 만족이 되지 않을 것이 분명했고 그럼 그와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낳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하는 다하를 현재 율파가 지내고 있는 곳으로 이동시켜버렸다. 어차피 언젠가는 서로를 죽이기 위해서 만날 두사람이니 다하가 그 매개체가 되어도 별 상관은 없을 것이고 타 궁주들이 쳐놓은 결계를 쉽사리 깨어버리는 율파이니 이렇게 다하가 사라졌다해도 자신이 의심받을 일도 없을 테니 여러가지로 자신에게는 이로운 상황이였다. 자신은 괴로워하는 가토를 위로해주는 척 유혹하면 그만 인 것이다. 생각이외로 궁주들은 별반발없이 천궁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평소의 그 당당하던 모습들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초조하고 두려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비월이 자신들을 모은 것에 대해 그닥 별 거부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가 자주의 아들이기전에 천제의 하나남은 혈족이라는 사실이 예전에 비월의 부모중 한명인 진비월을 무시하던 것과는 편이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어쩌면 정식으로 천제위를 물려받지는 않았지만 이제 천제위를 물려받을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은 비월밖에 없음을 인정한 것인지도 모른다. 소문에 선천제였던 율파가 살아있다고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소문일 뿐이고 어디서도 그를 보았다는 사람이 없는 지금에는 유일하게 그들이 보고 있는 비월만이 천제의 혈족인 것이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가까이 있는 희망을 붙잡고 싶은 심정인지도 모른다. 게다가 선천제 율파의 호위였던 서나려가 눈에 띄게 비월을 감싸고 도는 모습에 궁주들의 생각도 굳어졌다. 비록 천제혈족에게 주어지는 '율'이라는 이름은 받지 못했지만 그는 다음대 천제라고...... 가토는 다른 의미로 비월을 주시하였다. 그가 살아있는 한은 다하도 살아있다는 것을 알기에 그에게서 다하의 상태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다하에게 무슨일이 있으면 저자 역시 살아나지 못한다는 사실이 못마땅하면서도 이럴때는 도움이 되었다. 그런데 맘에 걸리는 것은 비월의 옆에 서있는 탁비라고 하는 자였다. 왠지 그가 자신을 알고 있는 듯한 시선을 보내오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더욱 가토를 놀라게 만든 것은 그의 이름이였다. 그도 직접 만나본 적은 없었지만 천년전 율허의 옆을 지키던 자도 그 이름을 가지고 있지않았던가.그 이름을 가진 그가 마치 자신을 알고 있는 듯이 쳐다보니 혼란스러워졌다. 하지만 곧 의심을 거두었다. 자신이야 순수월족을 먹어 천년을 살아있다지만 자신이 알기로 순수월족은 자주의 그 동생뿐이였으니까. "여러분도 알다시피 지금 누군가에 의해 강탈당하고 있는 십이검은 십이궁주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다른 비밀이 있습니다. 그건 그 검에는 천년전 천수천인전을 이끌어 천인계를 큰 혼란속으로 몰아놓았던 십이천이족이 봉인되어있다는 것입니다. " "그 소문이 진짜란 말입니까?" "설마요. 그건 단지 소문일 뿐입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그검을 지니고 있는 저희들이 그 사실을 모를리가 없지않습니까?" "맙소사 , 설마 그런 일이...." 궁주들은 비월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혼란에 빠져 술렁거렸다. 다만 가토만이 차분하게 앉아 비월의 말을 듣고 있을 뿐이였다. 자신이 그 때 그 장소에 있었음에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처럼 비월에게 자주가 말해준 것인 모양이라고 단정짓고 있었다. 자신은 몰론 다른 십이궁주는 그때당시 태천제와 십이천이족이 봉인된 일이 십이검에 의해서인지 아니면 십이검이 한자리에 모여든 힘의 회오리 때문인지 확신을 하지못했다. 자신도 요근래에 와서야 십이검이 십이천이족을 각자 봉인함과 동시에 한자리에 모인 십이검이 태천제를 봉인할 수 있었음을 깨달았었다. 태천제가 봉인되어있지 않는 한은 언제든지 십이검에 각자 봉인되어 있던 십이천이족을 부활시킬 수 있다는 사실도.....그래서 가토가 가장 걱정하는 것은 누군지모를 그가 십이천이족만이 아닌 태천제를 부활시키려고 십이검을 회수하는 것은 아닌가하는 점이였다. 아무리 자신이 천제의 혈족을 죽이고 싶어하고 그 핏줄을 완전히 없앨 목적을 가지고 있다지만 태천제의 부활은 차원이 다른 일이였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은 천제의 혈족이 만들어놓은 세계의 붕괴지만 태천제의 부활은 천제중심의 세계의 붕괴뿐아니라 이세계의 파괴를 가져올 것을 알기때문이다. 그속에 다하가 들어갈 것임을 생각하면 그의 부활만은 막고 싶은 심정이였다. . 그가 그러지 않았던가. 이 모과를 완전히 파괴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그때의 일은 그곳에 있던 십이궁주들이 평생을 짊어지고 가야할 비밀이였다. 가토는 애써 태천제가 부활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외면했다. 그것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릴정도로 두려운 일이였던 것이다. 사람들은 아직도 수인족이 천수천인전의 주범이라 믿고 있지만 사실은 천상계를 유지하고 있던 태천제가 주범이란 사실을 안다면 천인계는 물론 천인족이 약해진 틈을 타 천인족을 공격하여 실패한 후 지상계로 쫓겨 내려간 지계족이 자신들의 잘못을 받아들여 순순히 물러난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할 것이고, 자신들로 인해 생겨난 천수족이며 천이족에게 많은 인간들이 죽었음에 얌전히 천상계를 떠났던 수인족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은 물론이다. 같은 천인족 역시 큰 혼란에 빠져 실질적으로 모과에서의 우열권을 잃을 것은 뻔했기 때문이다. 가토는 자주가 그일에 대해 비월에게 알린 것 같다는 생각에 눈살을 찌푸렸다. 어쩌면 자주는 이미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여러분을 이곳으로 모이시라 연락을 드린 것입니다. 지금 상황으로 보면 여섯명 정도의 천이족이 부활하였다고 예상하시면 될 것입니다. 믿고 싶지 않으실거라는 걸 알지만 현실은 똑바로 직시하고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누가 무슨 목적으로 천이족을 부활시키는 지는 모르지만 그는 어쩌면 천년전에 일어난 천수천인전을 재발시키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아직은 무사하신 여러분의 안전이 더욱 중요합니다. 대충 짐작하시겠지만 범인은 한사람의 궁주님의 힘으로는 막을 수 있는 자가 아닙니다. 저희 아버지는 물론 거칠기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저의 반려이신 선화룡궁주인 훈바님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 궁주님이 각자 떨어져 있는 것은 위험하다는 생각입니다. 더불어 범인이 한곳에 모여계신 여러분을 습격하는 것은 망서릴 거라는 계산도 있습니다. 아직까지 그의 의도가 십이검의 회수인 것 같으니 최선을 다해 그것만은 막아보도록 여러분의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누구도 비월의 말에 의문을 제기하지도 반발하지도 않았다. 비월은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가토가 벌떡 일어났다. 그때까지 초연하게 상황을 설명하고 동의를 얻어내 차를 마시던 비월이 갑자기 쓰러졌기 때문이다. 아무런 조짐도 없었고 징조도 없었다. 옆에 있던 탁비란 자가 놀라는 걸로 보아 그역시 예상치 못한 일인 듯 했다. 가토는 순간 떠오른 것이 다하였다. 급히 정청을 물러나와 일천으로 이동하였다. 탁제균은 가토가 내지른 주먹에 그대로 얻어맞고 구석으로 나뒹굴고 말았다. 그 곁에 있던 매하는 가토의 살벌한 기세에 섬뜩함을 느끼고 조용히 뒤로 물러섰다. 자신이 아무리해도 돌아보지도 않더니 그 다하라는 자가 없어졌다는 사실하나에 가토는 죽일 듯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탁제균 그를 끌어다 고문해서라도 범인에 대한 단서를 정확하게 알아내와라. 이 모든 것이 그대의 책임임을 알겠지? 내가 그대를 믿고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이런 사고가 생기도록 방치하다니...... 아무리 그대라해도 용서할 수가 없다. 당장 모든 일천에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사람들의 모든 이동경로를 확인하고 수상쩍은 자취가 남아있는 이동은 전부 정리해서 보고하라." "일천궁주!!! 그건 너무 심하잖아요. 내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항의를 하려던 매하는 가토의 이글거리는 시선에 말끝을 흐렸다. 왠지 그가 두려워졌다. 자신은 누구도 죽일 수 없던 천이족이였건만 그를 보고 있으려니 당장이라도 목이 달아날 듯한 살기를 느꼈다. "당장 물러가고 나는 천궁으로 가있을 터이니 바로 보고하도록." 가토가 천궁으로 이동해버린 후에야 안도의 숨을 내쉰 매하는 구겨지는 자존심에 다시 눈썹을 찌푸렸다. 어째서 자신의 의도대로 되지 않는 건지 도무지 맘에 드는 것이 하나도 없어 짜증이 났다. 다행이라면 자신이 다하를 훔쳐낸 범인이라는 사실을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다는 것 뿐이였다. 가토는 곧바로 천궁으로 들어 비월을 찾았다. 그를 보아야지만 다하의 상황을 알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비월이 머물고 있는 거처를 찾아가니 그 탁비라는 자가 비월에게 무언가를 먹이고 있었다. 얼핏보기에 무슨 약인 듯 했다. "그는 괜찮습니까?" "무언가에 충격을 받은 듯 합니다만 별이상은 없습니다." 가토는 안도의 숨이 저절로 새어나오는 걸 느끼고 있었다. 그가 무사하다는 것은 다하가 무사하다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범인이 무슨 이유에선지는 모르나 죽일 목적으로 다하를 데리고 간 것은 아닌 것 같아 안도하면서도 초조함을 견딜수가 없었다. "그런데 어디를 다녀오신 겁니까?" 탁비가 의심스런 시선으로 가토를 쳐다보았다. 가토는 망서리다 이렇게 된 이상 그도 알고 있는 것이 자신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알고 있으면 더이상 위험한 짓은 자제하여 다하를 위험하게 만드는 일도 줄어들 것이고.. .. "제 이야기를 믿지 못하실 지 모르지만 여기 계시는 월아님과 제 반려가 공명을 하고 있습니다." "예엣?" "!!!" 놀라서 반문하는 탁비에 비해 비월은 덜 놀라고 있었다. 어쩌면 어렴풋이나마 자신이 누군가와 공명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 황량하고 서글픈 느낌은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정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이질적이였던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자의 감정이라는 것인데 왜 자신이 다른자의 감정을 느끼는 것인지 혼란스러웠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 말로만 전해지는 공명인가하고 의심을 하고 있었고 그게 누구일까하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막연하게 자신이 알고 있는 누구인가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을뿐 설마 한번도 본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는 일천궁주의 반려가 자신과 공명하고 있었다는 것은 놀랍기는 했다. 그리고 일천궁주가 자신과 그의 반려가 공명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제가 월아님이 쓰러지시는 것을 보고 바로 일천궁으로 달려간 것도 그 이유입니다. 그가 납치된 듯 합니다. " 탁비의 안색이 대번에 굳었다. 그로서는 비월의 안전을 지켜야할 임무가 있었다. 그런데 그 비월의 안전에 비상이 걸린 것이다. 그 공명자에게 무슨일이라도 일어난다면 비월도 결코 무사하지는 못할것은 뻔한 이치가 아닌가. 탁비는 비월을 돌아보며 혹시 그런 일을 알고 있었는 지 묻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비월의 차분한 태도가 탁비의 의심을 더욱 부추켰다. "알고 계셨던 겁니까?" "확실하지는 않지만 누군인지 모를 자의 감정을 느끼기는 했었습니다. " " 왜 말씀해주시지 않으셨습니까? " 탁비는 나무라는 듯한 시선으로 비월을 쳐다보았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비월의 안전이 그에게는 가장 중요했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자신의 안전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닌가. 그게 걱정스럽고 앞으로 무슨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심란해졌다. 물론 가토 역시 다른 의미로 비월이 자신의 안전을 소홀히 하고 있는 듯한 인상에 눈썹을 찌푸렸다. 비월 자체가 걱정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그가 위험해짐으로서 다하마저 위험해진다고 생각하면 자신의 안전에 관심이 없는 비월의 행동에 화가 났다. "조심해 주십시요. 저로서는 그가 위험해지는 것은 바라지않습니다. 행여라도 위험한 행동은 자제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비난이 서린 가토의 말에 탁비와 비월이 빤히 그를 쳐다보았다. 약간은 못마땅한 듯한 탁비의 안색과는 달리 비월의 안색은 온화하였다. "죄송합니다. 미처 그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그를 무척이나 사랑하시는 군요." "네." 가토는 무심결에 내뱉은 자신의 말에 태어나서는 처음일 정도로 얼굴을 붉히고 당황해서 급히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 모습에 비월은 자애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에 탁비는 비월이 아직 기억을 찾지는 못했지만 본능적으로 그를 알아보는 것은 아닌가하고 짐작해보았다. 다하는 멍하니 상대방을 쳐다보았다. 자신의 형이며 천제인 율파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모든 사람으로부터 사랑 받고 관심의 대상이였던 자. 자신으로서는 올려다볼 수 없을 정도로 높은 곳에 있던 그가 지금 자신을 마주보고 있었다. 아름답고 화려한 그를 부러워하며 남몰래 쳐다보기도 했었지만 그는 한번도 자신을 제대로 쳐다본 적도 없었다. 어쩌다 눈이 마주쳐도 그저 스쳐지나가는 눈빛으로 쳐다본 것이 고작이였다. 그랬던 그가 지금은 뚫어질 듯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다하는 그의 시선이 부담스럽고 또한 낯설었다. 전에는 그가 자신을 바라봐주기를 바란 적이 있었지만 막상 그의 시선을 받고 있자니 숨이 막히고 차라리 무시당하는 것이 나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은 것이 아니였구나. " 다하는 그 차가운 시선에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율파가 자신에게 한 말의 의미가 새록새록 가슴을 짓이기고 있었다. 죽어도 누구 하나 슬퍼하거나 관심조차 보이지 않을 하찮은 존재였던 자신이 다시 떠올랐다. 무심한 듯 내뱉는 한마디의 말에 역시나 자신이 그동안 행방불명되었어도 누구하나 걱정하던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 것이다. 그건 되살아난 전생의 기억과는 또다른 상처였다. "부활한 녀석들 중에 누군가 너를 죽여주기를 바란 것 같군." 율파가 다가왔다. 다하는 자신이 이제와서 죽을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너무나 쉽게 다른 사람의 손에 망서림없이 처리되어버리는 전혀 쓸모없는 사람임에 씁쓸해졌다. 아마 지금 죽고 다시 태어나도 여전히 자신은 변함없이 하찮고 쓸모없는 인간으로 태어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쓰렸다. 율파의 손이 목을 조여왔다. 다하는 마음을 비우고 애써 스스로를 동정하고 있는 마음을 접고 눈을 감았다. "손을 거두십시요."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가 아니였다면 다하는 마지막 호흡을 놓았을 것이다. 조금만 참으면 이 고통스런 순간이 다 지나가리라 믿었건만 여전히 신은 자신을 외면해버렸다. 마지막 순간마저 쉽게 보내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라고 다하는 자신의 의도와는 달리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멈추어가던 심장을 다시 뛰게 만들고 있는 몸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너는 누구인가?" 율파의 말에 광장에 내려선 자는 차람이였다. 율파는 익히 그가 누구인지 알고는 있지만 이곳을 알고 있는 자가 화룡족의 평범한 재사일리 없음을 알기에 그의 다른 모습을 물은 것이다. 막연하게나마 부활한 천이족의 한명임을 짐작하면서도 어떤 천이족의 부활한 모습인지 언뜻 떠오르는 자가 없어 그 정체를 물은 것이며 차람 역시 율파의 의문을 알고 있는 듯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불의 천이족 화랑입니다. " "화랑..... 너로군. 그런데 왜 이자를 죽이지 말라는 것이냐? 이자를 보낸자가 너와 같은 천이족이라는 것은 알텐데.... 그의 행사를 방해하려는 것이더냐?" "그자를 죽이는 것을 반대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그리하면 태천제님은 분명히 후회하실겁니다." "내가? 왜?" "그는 비월님과 공명하고 있기때문입니다. 그에게 무슨일이 있다면 분명 비월님도 무사하지 못하실 겁니다." 다하를 쳐다보는 차람의 시선은 이제까지 그누구도 보이지 않던 측은함이였다. 왜 그가 자신을 그리 쳐다보는 지 알 수가 없는 다하이지만 왠지 그가 자신에 대해서 모두 알고 있는 듯한 그런 인상을 받았다. 차람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이제까지 자신에 대해서는 일말의 관심도 없던 율파의 시선은 180도로 바뀌었다. 의문과 당혹감이 서린 가득 서린 시선이 다하를 향했고 다하는 그시선에 담긴 감정들에 도저히 마주쳐다보지 못하고 시선을 돌려버렸다. "어째서 그가 비월과 공명을 한단 말인가?" "제가 알고 있는 것은 두사람이 공명하고 있다는 사실뿐입니다. 왜인지는 이유를 알수가 없지만요." 다하는 비월이라는 말에 가슴이 뛰었다. 진비월의 아이..... 이세상에 자신이 살아있을 유일한 이유였던 그 사랑스럽던 아이의 조각인 비월. 한번도 본적도 없는 그 아이가 자신과 공명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차왔다. 메말라 아무것도 자라지 않던 가슴속에서 조용히 단비가 내리고 아무것도 살수 없을 거라고 포기했던 감정에 새싹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이미 이세상 사람이 아닌 진비월이 여전히 자신을 생각해주고 있는 것만 같아 가슴이 두근 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율파는 차가운 시선으로 다하를 쳐다보았다. 왜 비월이 이런 말도 못하고 하찮기그지없는 자와 공명을 하는 것인가 그 생각에 질투와 시기가 담긴 시선으로 다하를 쳐다보았다. 자꾸만 천년전 자신을 버리고 그 수인족을 선택했던 기억이 떠올라 당장에라도 다하를 죽여버리고 싶은 생각에 손이 근질거렸다. "혹시 규하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으신가요?" 가토는 역시 자신의 짐작대로 탁비라고 하는 이자가 자신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에 당황스럽기만 했다. 자꾸만 아직까지 건재한 자신의 태양검으로 손이 가려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그가 자신을 독대하려는 의도를 생각했다. 그가 그저 물어보기 위해 자신의 부모인 규하라는 이름을 꺼낸 것이 아니며 그 것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긴장할 수 밖에 없었다. "묻는 이유는?" "알고 있으시군요. 역시나 ..... 어떻게 천년을 넘는 시간을 살아계신 것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내가 당신이 짐작하고 있는 인물임을 어찌 확신하는 것이지? 내 이름이 전혀 없는 이름도 아닐 것인데말야? " "왜냐하면 당신의 이름을 지어준 사람이 저이기 때문입니다." "뭣?" "제가 율허님과 규하님의 부탁으로 당신의 이름을 지어주었다구요. 한마디로 저는 당신의 대부입니다. " "그럴리가.... 그럼 당신이 천년을 살아남았단 말인가?" "아니요. 저는 천년을 살아 남은 것이 아니라 천년의 시간을 멈추었답니다. 모종의 이유로 천년을 잠들어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지요." 가토는 믿을 수가 없다는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가 천년을 잠들어 있었다면 과거의 자신을 알고 있는 것은 이해가 된다. "그래서 저는 궁금한 것입니다. 당신의 그 외모는 천년전 율허님을 그대로 닮아있는 데다 이름 또한 제가 지은 가토입니다. 저처럼 천년을 잠들어있었던 것도 아니면서 지금까지 건재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요." "인간이 천년을 사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보는 건가?" "네. 아무래도 연구가의 시선으로 보기에 일부러 신체흐름을 막지 않는 한 노쇠하지 않고 천년을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런 그대는 선월궁주를 본적이 없는 모양이군." "선 월궁주님이요? 그를 볼 기회는 없었지요. 제가 비월님을 데리고 돌아왔을 때는 이미 선월궁주님은 돌아가신 후였으니까요." "아까운 기회였겠군. 그대가 선 월궁주를 보았다면 내가 천년을 살아남은 이유를 대번에 알아볼 수 있었을 텐데...." "?" "순수월족에 대한 소문을 모르는가?" "순수월족이요? 소문은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들을 먹으면 불사의 몸을 얻는다고 하지만 믿는 사람은 아마..... 설마...." "그대의 예상대로다. 나는 선월궁주의 동생의 몸을 먹었다. 빙해족의 피를 먹은 후 다 죽어가는 것을 불쌍히 여긴 그가 자신의 동생의 몸을 내게 주었지." "!!!!!!!" 탁비는 놀라운 시선으로 다시한번 가토의 몸을 살펴보았다. 막연하게나마 항간에 떠도는 소문은 들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한동안 월족은 남몰래 불사의 몸을 노리는 자들에게 사냥당해 그 수가 급속도로 줄어들었지만 한번도 불사의 효과를 본 자가 있다는 소문은 들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건 다만 소문에 불과하고 다만 강한 힘을 가진 월족을 시기한 자가 퍼트린 헛소문일 뿐이라는 것이 정설이였다.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만큼 순수월족은 흔한 존재는 아니였다. 내가 아는 것으로는 선월궁주인 자주와 그의 동생이 전부였을 정도였으니까... 그 이외로 작은 아이가 하나 더 있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본자는 없다고 하더군." "그렇군요. 그럼 그 소문이 그저 항간에 떠도는 헛소문만은 아니였군요." 아쉬운 생각에 탁비는 혀를 찼다. 그 자신이 불사의 몸을 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학자였다. 자신이 모르는 것이 있었다는 사실에 그의 심장이 요동치는 그런 사람인 것이다. 그것을 알아내고 밝혀내고 싶은 그런 충동을 가진 자인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순수월족은 완전히 멸족되어버린 종족인 것이다. 무언가를 더 알아내고 싶어도 알아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보다 왜 당신이 비월의 곁에 있는 것인가? " 그가 천년만에 깨어나 옆에 있는 인물이 비월이라는 사실이 가토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었다. 막연하게나마 가슴 저 밑으로부터 불쾌한 상상이 떠오르고 있었다. 아니기를 바라면서도 어쩌면 자신의 예상이 맞을 거라는 확신이 들고 있었다. 그건 자신이 가장 바라지 않는 결과였다. 천년전에도 율허의 종이였던 자였다. 자신이 죽는 순간까지 율허의 뜻을 받들겠다고 맹세했던 자였다. 그런 그가 비월의 곁에 있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가. 그래서 가토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불쾌감을 느꼈다. 설마 그런 일이 하면서도 계속 치고 올라오는 불안감.... 만일 비월이 그라면? 자신의 아버지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우고 자신을 죽이려한 자에게 몸을 내주었던 그자라면? 결국에는 지금 다하와 공명하고 있는 자가 자신이 저주해 마지않는 그 자라는 소리인 것이다. "아니야..." 탁비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미리 짐작이라도 한 듯 가토는 부정부터 하고 보았다. 탁비는 더이상 자신이 무슨 말을 하여도 가토가 긍정하지 않으리란 것을 알기에 침묵했다. 어차피 자신이 아니라고 해도 그가 알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입을 다물었다. 21.천수천인전.6 홍해는 어떻하든 율허를 만나고 싶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벌써 몇번째인지 수인족의 장로들과 장군들이 찾아와 율허를 돌려줄 것을 부탁하였으나 율가는 눈썹하나 깜박이지 않고 모두 거절할 뿐 아니라 이제는 그들을 만나려고도 하지않았고 태천궁안으로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고 있었다. 그들이 아무리 율허는 죄가 없음을 하소연하였지만 율가의 태도는 강경하기만 하였다. 율희가 미쳐날뛰며 기여코 이런 식으로 율허를 태천궁으로 불러들이고 만 태천제에 대해 장로들을 대동해 항의를 하자 그는 대장로 열명의 목을 치고 그 시체를 효시하였다. 그리고 비웃듯 율희에게 그 자리가 싫으면 당장 떠나라고 까지 하였지만 율희는 오기로 버티며 이자리만은 양보하지 않겠다고 소리쳤다. 율가는 그런 율희를 보며 그 자리를 빼앗기지 않으려면 자신의 행사를 방해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다. 만일 더이상 방해를 하고 나서면 율경의 목을 치겠다고 원래 그자리는 율허의 자리이니 그 자리를 원래의 주인에게 주겠다고 선언했다. 누구도 태천제의 행사에 더이상 직접 나서서 항의하지 못했다. 그건 홍해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율가와 율허에게 가장 오래된 지기이기는 하지만 그에게는 완전히 돌아버린 태천제를 막을 힘이 없었다. 오로지 태천제의 행사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율허는 남과의 접촉이 금지되어 갇힌 지 오래였다. 직접적으로 태천제와 면담이 어려워진 수인족의 장로들이 여러 십이궁주를 부추켜 홍해를 찾아와 부탁을 하였지만 그 역시 율허를 본 지가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걱정이 되는 것은 율허였다. 이미 감정을 숨기는 것을 그만 둔 율가가 율허를 얌전히 내버려 둘리가 없었고 그동안 율가가 자신에게 그런 감정을 가지고 있었는 지도 몰랐을 율허가 겪을 혼란을 생각하니 그걸 잘 견디어 낼련지 걱정스럽기만 했다. 그동안 율가가 자신의 감정을 막아두었던 것 만큼이나 그 감정의 봇물은 클 것은 뻔했고 자신의 감정을 조절한 여력이 없을 것도 뻔했다. 조심스럽게 다가가도 감당하기 어려울 율가의 감정들이 터진 봇물처럼 들이닥친다면 율허는 어떠할 것인가. 세상에서 가장 믿었던 자의 배신을 어찌 감당할 것인가. 홍해는 율허가 스스로를 포기하지않기만을 빌었다. 그 이면에는 율허를 걱정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율허가 그 것을 감당하지 못해 사고라고 친다면 율가가 다른 것을 향해 터트릴 것들이 더 걱정스러운 홍해였다. 탐욕스러웠다. 한마디로 율허를 차지하는 율가의 몸짓에 대한 느낌이였다. 그동안 어떻게 참아냈는지 놀랄 정도로 율가는 격렬하고 탐욕스러웠다. 율허는 숨이 막힐 정도로 격렬하게 자신을 차지해가는 율가의 행동에 그저 버티어내는 것도 벅차하고 있었다. 기절하기를 몇번인지.... 손가락 끝은 물론 발가락 끝까지 물리고 삼켜지는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율가에게 휘둘리고 있었다. 며칠째인지 기억하기도 힘들었다. 물한모금조차도 자신의 의지로 먹어보지 못했다. 율허의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율가의 입을 통해서였다. 태어날 때부터 한몸인 듯 떨어질 줄을 모르는 율가의 몸이 이제는 익숙해져갈 정도였다. 율허는 숨쉬는 것마저 율가의 허락을 받아야 할 정도로 호흡마저 율가에게 붙들려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율허는 지치고 있었고 고민할 시간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폭풍처럼 몰아치는 율가를 감당하기에 율허의 몸도 의식도 벅찼다. 오직 존재하는 것은 율가와 자신뿐인 것 같았다. 눈을 뜨면 보이는 것은 율가였고 잠이 들때조차도 옆에서 온기를 나눠주는 것도 율가였다. 어쩌다 규하를 떠올리거나 가토를 떠올리라치면 율가는 귀신처럼 알아채고 더욱 율허를 몰아댔다. 율가는 율허가 아무런 생각을 할 틈을 주지 않으려는 듯 지치지도 않고 율허를 안았다. 율가는 율허와 자신이 머무는 곳에 그 누구의 출입도 허용하지 않았다. 오로지 자신과 율허만이 존재하는 장소로 만들었다. 기절한 듯 잠이 든 율허를 직접 씻기고 먹이는 일을 손수 하면서 율가는 그 어색하고 서툰 일에 기뻐하며 정성을 다하였다. 그는 자신의 품에 잠이 든 율허의 모습에 세상의 모든 것을 얻은 듯 기뻐하고 또한 슬퍼하였다. 자신이 기뻐하는 것과는 달리 언제라도 틈만 주면 율허가 자신이 아닌 다른 자를 기억할 것을 알기에 그는 필사적이였다. 처음 그는 자신의 적수였다. 혼돈의 아버지는 자신을 만들어내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해주었다. 그 수많은 능력과 재능들.... 그를 보기전까지 그는 자신이 물리치고 밟고 올라서야할 상대일 뿐이였다. 혼돈의 아버지는 은근히 그에 대한 적대감을 심어주었고 자신이 그를 시기하도록 유도하였다. 자신에게 물려주지 못한 많은 능력을 그가 빼앗아가버린 것처럼 말했다. 그래서 율가는 그를 만나면 가장 처참하게 죽여줄 거라고 생각했다.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그에게 적의를 불태우며 만날날만을 기다렸다. 그리하여 처음 율허를 만난 날. 적의를 불태우며 율허를 쳐다보는 자신을 느끼지도 못한 듯 율허는 자신을 보더니 뺨을 발그레하니 붉히고 어쩔줄을 몰라하는 작은 사람을 보았다. 반가워하며 자신을 안아주려는 그를 거칠게 뿌리치자 당황한 듯 하면서도 상처받은 표정을 간신히 숨기고 억지로 웃어주는 그 모습이 뇌리에 박혀 그를 괴롭혔다. 자신이 아무리 그를 거부하고 적의로 대해도 율허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자신이 그를 반드시 물리쳐야할 적으로 보는 반면 그는 자신을 반드시 보살펴주어야 할 어린 동생으로 보는 듯 했다. 그게 더 싫었다. 자신을 그의 정정당당한 적수로 봐주기만을 바랐다. 그러나 아무리 자신이 그를 괴롭혀도 그는 모든 것을 이해하려고만 하였다. 자신이 아무리 심술을 부려도 그는 자신을 보고 웃었다. 이마에 자신이 낸 상처로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그는 자신이 놀랄까봐 더 걱정을 하였다. 자신으로 인해 뼈가 부러져도 그는 자신 앞에서는 울지않았다. 언제나 그는 홍해앞에서 울었고 홍해에게 치료를 받았다. 홍해가 자신을 나무라려는 기색만 보여도 자신을 위해 변명을 하느라 진땀을 빼기 일쑤였다. 모든 것이 너무나 맘에 들지 않았다. 언제부터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홍해의 옆에 있는 그가 못마땅하고 시간이 지나 다른 자들의 시선을 받는 것도 못마땅해졌다. 그 어떤 것을 보아도 변하지 않는 자신의 차가운 감정이 그를 보면 끓어올라 넘쳐나기 시작했다. 그를 볼때마다 짜증이나고 화가 치밀면서도 그가 다른 곳을 보면 견딜수가 없어졌다. 갈수록 잔인해지는 자신에게 웃기만하는 그가 미워졌다. 그래서 그가 가장 아끼던 작은 시종을 죽여버렸다. 그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율허가 자신을 원망하며 울었다. 그눈물이 그대로 상처가 되어 자신에게 돌아왔다. 그 뒤로 한동안 율허는 자신을 피해다녔고 자신은 알수없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자신과 시선이 마주치면 허겁지겁 시선을 돌리고 홍해의 뒤로 숨기 바빴다. 그래서 그를 죽이기로 결심하고 칼을 들이밀었다. 그런데 뻔히 보이는 자신의 행동을 보면서도 그는 그대로 자신의 칼을 받아들였다. 칼끝이 파고 들어간 자리에 흘러내리는 피를 보며 율가는 전율했다. 왜 피하지 않는 것인지 왜 저항하지 않는 것인지 묻는 듯한 시선에 율허는 율가가 원하면 스스로도 죽어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말이 그 미소가 율가의 심장을 격렬하게 뛰게 만들었다. 그때부터였다. 쓰러지는 그를 끌어안고 그가 자신을 위해 죽을 수 있다면 자신 역시 그를 위해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느낀 건. 자신이 성인식을 치루고 원래는 율허의 자리였을 태천제위에 오르며 그때까지 율허를 없애지않은 것에 못마땅해하는 혼돈의 아버지의 시선으로부터 율허를 지키기로 결심하였다. 그러기위해서는 힘이 필요했고 열심히 그 힘을 길러갔다. 그저 율허가 웃을 수 있다면 무엇이든지 할 각오였다. 자신이 율허를 없앨 생각이 없음을 깨달은 혼돈의 아버지가 율허를 없애고자 하자 직접 처리할 정도로 율가에게는 율허보다 소중한 것은 없었다. 그가 웃을 수만 있다면 뭐든지 견디어 낼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모든 것이 생각대로 되는 것은 아니였다. 그렇게까지 웃게 만들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지금은 자신이 그를 울게 만들었다. 하지만 후회하지는 않았다. 그가 웃는 것은 자신의 옆에서여야 했고 우는 것도 자신의 옆에서라면 모든 것을 감수 할수 있었다. 자신의 손이 닿는 곳에 있다면 그의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직접 닦아줄수 있으니까. "더러운 자!!!!! 추잡하기 그지 없는 인간!!!!! 어떻게 자신의 반려를 죽이고 자신의 자식까지 죽인 자에게 몸을 내주고 그 사이에서 또다른 자식까지 낳을 수가 있지요? 고귀한 피? 웃기지마시지... 이런 곳에 편하게 있는 동안 자신의 피가 섞인 자식들이 어떤 일을 당했는 지도 모르고 편안하게만 보이는 군요." 수인족의 발호로 천상계가 혼란스러워지자 좀처럼 율허의 곁을 떠나지않던 율가가 자리를 비운 사이 율희가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있는 율허를 찾아왔다. 그 눈에 서린 독기와 증오에 율허는 숨도 쉬지 못할 지경이였다. "당신의 자식은 영원히 내 저주로 인해 다시 태어나도 영원히 불행하게 살다가 죽을 거에요. 당신의 죄값으로 그아이는 죽는 것보다 못한 생을 살다 태어난 것을 원망하면서 죽는 날만을 바라면서 연명해야 하는 삶을 지속할거라구요. 다시 태어난다해도 내 저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겠지요. 당신이 외면한 그아이는 만화궁에서도 시종들의 시중을 들면서 그 어린 나이에도 노예처럼 부려지다 일천궁으로 가서도 여전히 가장 천한 노예짓을 했다더군요. 그러다 일천궁의 후계의 눈에 들었지만 노리개로 이용되다 결국에는 짐승의 먹이로 먹히고 말았지요.어떤가요? 슬픈가요? 이 모든 것이 당신때문이라는 것을 알겠나요? 태어나 이때까지 사랑한번 받아본 적 없이 그 끝마저 그저 짐승의 먹이로 전락하여 사라져 버린 그 아이가 바로 당신과 태천제의 아이에요.다시 태어난다해도 내가 건 저주에 의해 그 아이는 영원히 이 불행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발버둥치다 결국에는 다시 죽어가겠지요. 당신이 이곳에서 태천제의 과분한 사랑을 받고 있는 동안 당신이 외면한 그아이는 그렇게 죽어갔다는 걸 기억해요. 당신이 이곳에서 태천제의 관심을 받고 있는 동안 당신의 반려의 부족들이 당신을 찾기위해 발호하여 이 천상계를 어지럽혀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도 기억해요. 이 모든 것이 당신의 죄임을 당신의 존재로 인해 발생한 일임을 기억하라구요.당신은 살아있는 것 자체로 죄악덩어리에요." 율허는 멍하니 율희가 쏟아놓은 저주같은 말을 듣고 있었다. 혼돈의 아버지가 자신을 불러서 한말이 지금 율희의 입을 통해 쏟아지고 있었다. 자신의 곁에 있는 자는 결코 행복하지 못할거라던 그의 말!!!!! 그래서 그는 서서히 율가에게서 멀어져갔다. 처음으로 자신의 심장을 뛰게 만들고 사랑스러운 감정을 복받치게 만들었던 그 아이로부터 자신의 감정을 떼어놓았었다. 심술궃던 그의 표정에 자신에 대한 애정이 서리는 것을 아픈 심정으로 외면하고 속으로 접어갔다. 외면하고 외면해서 그의 감정을 왜곡하고 자신의 감정또한 왜곡했다. 자신만 숨기면 모든 것이 잘 될 줄 알았다. 율희를 율가의 반려로 추천하면서 소천제위를 율경에게 물려주면서 그리고 천상계를 떠나면서 서서히 자신의 감정을 묻어버렸다. 자신에게 향하는 율가의 시선을 모르는 척 그렇게 외면했다. 결국 이렇게 되고 말것을 알면서도 오늘에 이르고 만 것이다. 태어난 것 자체로 불행인 자가 되어버린 자신의 아이와 존재하는 것 자체로 남을 불행하게 만든다는 자신!!!!! 모든 것은 자신의 죄였다. ===== 탁비는 예전의 발랄하고 고집스런 모습은 찾아볼 수도 없는 율허를 보고 신음했다. 율허가 죽는 순간까지도 우수어린 율허를 보는 일은 없을 거라고 믿고 있었건만 지금 율허는 보는 사람이 가슴이 저리도록 아련하고 수심이 어려있는 것만 같았다. 예전에 심술에 차서 자신의 반려가 되어 주면 태천궁에서 일해주겠다고 말한 적은 있었지만 그때 당시에도 결코 율허가 매혹적이거나 자신의 심장을 뛰게 만들어서가 아니라 다만 율허를 당황하게 만들기 위해서였었다. 그런데 지금 율허의 모습은 탁비의 심장을 거칠게 뛰게 만들었다. 금방이라도 사라져버릴 듯 안타깝고 조마조마하여 당장에라도 다가가 그를 안고 위로하고 그가 행복해지기만 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수많은 시간이 지나 만난 그는 마치 다른 영혼을 가진 사람같았다. 전에는 담담하게 쳐다볼 수 있었던 그 외모를 이제 똑바로 쳐다보는 것도 두려울 지경이였다. 어째서 힐끗 윤곽만 쳐다보아도 가슴이 미친 듯이 뛰는 것인지... 시선을 똑바로 마주 쳐다보지 못하고 자꾸만 시선을 빗겨가는 자신을 보더니 율허가 한숨을 내쉬었다. "오랫만이에요.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요? " 탁비는 비명이 터져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어찌하여 처음들어보는 목소리도 아닌데 그 목소리 하나에 심장이 이렇게 요동을 치는 것인지.... 등뒤로 식은 땀이 흐르는 기분이였다. 도데체 태천제는 율허에게 무슨짓을 한 것일까.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변하도록 만들어 버린 것일까. "탁비?" 생각에 잠겨있는 탁비에게 다가온 율허가 그에게 손을 뻗으려했고 탁비는 당황하여 그 손을 쳐내버렸다. 그리고 '앗차'하여 율허를 쳐다보니 율허는 슬픈 듯이 웃으며 탁비가 쳐낸 손을 다른 손으로 움켜쥐고 고개를 숙여버렸다. "역시 당신도 나를 용서할 수가 없는 모양이군요. " "아,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다만 ..." "애써 변명하지 말아요. 제 스스로도 잘 알고 있으니까요. 어차피 존재하는 것 자체가 죄인일뿐이라는 거..." "누가 그런 소리를 합니까? 누가 율허님을 그런 존재라고 한겁니까? " "탁비?" "그런 말에 신경쓰지 마십시요. 왜 당신이 그런 소리를 들어야 합니까? 당신은 그저 피해자일 뿐이라구요. 이렇게 된 것이 당신이 원해서 그렇게 된것도 아니고 당신이 일부러 도발시킨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것을 왜 당신 혼자서 책임지려고 합니까? 당신은 율허일 뿐입니다. 그냥 태천제의 약한 형일뿐이며 운명의 수레바퀴에 이끌려가는 나약한 인간일 뿐이라구요. 모든 것이 당신의 책임이 될 수 없습니다. 인간들 각자에게는 스스로 짊어지고 가야할 무게가 따로 있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당신을 비난해서는 안되는 거라구요." "탁비..." "당신은 어찌하여 세상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볼 수 있을 것처럼 똑똑하게 굴면서 자신의 일에는 그리 어리석습니까? 이게 당신 혼자서 노력한다고 바뀔 운명이였습니까? 당신이 원하지 않든 원하든 이미 이렇게 될 것을 막연하게나마 알고 있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그렇게 당신이 발버둥을 치면서 그 운명을 바꿔보려고 하지않았습니까? 그게 제대로 되지 않았다고 모든 것을 자신의 죄처럼 뒤집어 쓰려고 하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짓일 뿐이라구요." 하도 열변의 토하느라 탁비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갔다. 그누군가 율허를 비난한 자가 옆에 있었다면 멱살이라도 잡고 뒤흔들 기세에 율허는 멍하니 탁비를 쳐다보다 흥분한 탁비의 모습에 가슴속에 무겁게 내려앉아있던 죄책감과 좌절감을 조금씩 덜어놓기 시작했다. 어쩌면 탁비의 말처럼 이 모든 것은 자신 혼자서 감당하기엔 너무 무거운 운명이였는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오르자 언제나 자신을 좀먹어가던 절망이 서서히 걷혀가기 시작했다. 한참동안 열변을 토하며 소리를 지르던 탁비는 자신이 너무 흥분했음을 느끼고 어색하게 웃으며 율허를 쳐다보고 그 미소에 얼굴을 다시 붉혔다. 그 밝은 미소가 탁비의 가슴에 묘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고마워요. " "천만에요. 당연한 소리를 한것뿐입니다. 그보다 왜 이렇게 약해보이시는 겁니까? 태천제가 왜 이렇게 율허님이 약해지시도록 내버려 두신 겁니까? " "그의 탓이 아니에요. 아마 그는 내가 이렇게 약해진 사실에 대해 무척이나 자신을 책망하고 있지만 원인은 다른 곳에 있지요. 탁비.... 지금부터 그대에게 어려운 부탁을 하려고 해요. " "무엇입니까? 저는 당신의 종입니다. 당신이 원하는 일이라면 제목숨과 영혼이라도 드릴 수 있습니다. ' "나는 오늘은 넘기지 못해요. 그래서 그대를 불렀어요. " 탁비가 창백하게 질려서 율허를 빤히 쳐다보았다. 오늘을 넘기지 못한다는 율허의 말을 믿기가 힘들었다. 너무 태연하게 자신의 죽음을 말하는 율허의 태도때문이기도 하고 그에게 보이는 율허의 편안한 표정때문이기도 하였다. "태천제는 아시고 계십니까? " "아니 그에게는 아무말도 하지 않을 거에요. " "율허님...." "나는 끝까지 그에게 죄인으로 남고 싶어요. 다시 태어나면 ... 그에게 용서를 빌지언정 이번에는 ..... 이건 나에 대한 벌이기도 하고 그에대한 벌이기도 해요. 내 아이... 내 반려를 죽인 그에 대한 ..." "........" "탁비 이제부터 그대에게 마지막 임무를 주겠어요. 이걸 십이궁주에게 주세요. 이 문장을 몸에 새긴 순간 몸안에 내 영혼이 담긴 검이 생길거에요. 오직 그 문장만이 그 검을 불러낼 수 있으며 그 힘을 사용할 수 있게 만들었어요. 어떻게 전하든 간에 그건 탁비의 손에 맡기겠어요. 그리고 탁비 그동안 나를 보필해주어서 정말 고마웠어요. 딱히 그대에게 해줄것이 없군요." "이게 당신의 영혼인가요? 그래서 당신의 몸이 그렇게...." "완벽한 것이 아니라 언제 깨어질지 모르지만 도움은 될거에요. 나는 끝까지 내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마지막 영혼까지 희생하지 못하고 말았어요. 이 영혼에는 다른 할일을 남겨두었답니다. 오늘이 지나면 다시 만나게 될지 영원히 만나지 못하게 될지 모르지만 탁비!!!!! 그대는 내 영원한 친구입니다."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는 탁비를 내보낸 율허는 자리에 누워야했다. 서둘러 탁비를 내보낸 것은 이미 자신의 체력이 바닥이였기 때문이다. 이미 희미해지기 시작한 생기를 느끼며 율허는 이제 홀로 남을 율가를 생각했다. 사랑스럽지만 결코 사랑해서는 안되는 율가.... 항상 강제적인 수로 밖에 자신을 차지하지 못하고 뒤돌아서 괴로워하던 그 아이... 한번도 자신에게 환영받지 못하면서도 자신을 놓지 못하고 그렇게 상처받으면서도 자신을 사랑하는 걸 멈추지 않는 사람.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에게 배신당한 것을 알면 그는 어떻게 될까? 탁비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지금 전쟁에는 율가가 깊이 관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을 탁비에게 숨긴 것은 율가를 위한 마지막 배려였다. 오로지 자신을 차지하기 위해 이 모과를 뒤흔들어놓고 있는 가엾는 사람. 그 마지막 보상일 자신이 사라져버린다면 그는 그 허망함을 어찌 감당할 까? 규하를 죽이고 자신의 아이를 죽였지만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자. 자신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정신적 지주인 혼돈의 아버지 마저 죽인 자. 모든 사람들이 그를 성토하여도 자신만은 그를 미워하지도 거부하지도 못한다. 그러기에 더욱 불쌍하고 가엾은 것이다. 자신을 향한 그 끝없는 갈구어린 시선에 마주 쳐다보지는 못하지만 자신을 향한 그 끝없는 애정을 받아주지는 못하지만 거부하지는 못했다. 조용히 눈을 감고 마지막을 받아들이고 있는 율허의 이마에 율가의 온기가 닿았다. 언제나 너무 안타까워서 슬픈 손길에 율허가 눈을 떠 자신을 걱정스럽게 쳐다보고 있는 율가를 쳐다보았다. 한번도 그를 위해 웃어준 적이 없다는 생각이 새삼들자 더욱 가슴이 아려왔다. "울지마...." 오히려 자신이 울것만 같은 목소리로 율허를 달래는 율가의 말에 율허는 그일이 있고 난 후 처음으로 그를 보고 미소지었다. 그 모습에 넋을 잃어버린 듯한 율가의 모습이 뇌리에 가슴에 박혀들었다. 자신에게 닿아있는 손이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율허...." 손을 뻗자 얼굴까지 붉히며 어쩔줄을 몰라한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듯 감격해하는 그모습이 율허의 심장을 찢어놓았다. 제발 지금 이순간이 마지막 순간에 조금이라도 율가에게 조그마한 위안이라도 되기를 이제는 믿지도 않는 신에게 빌었다. "율허.." "용서해... 율가... 나는 정말 너에게 죄만 짓는 구나.." "아니야.. 너는 내게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잖아. 너를 괴롭힌 건 나야. 그리고 설혹 네가 어떤 잘못을 했더라도 모두 용서해 ... 너는 내 영혼인걸. .... 너만이 나를 숨쉬게 하고 살아가게 하는 걸.... ..이렇게라고 차지하고 싶을 정도로 너만 보이는 걸... " "아니 ... 나를 용서하지마 ....너를 사랑하는 나를 용서하지마..." " 뭐? 설마 내가 잘못들은 건 아니지? 나를 사랑하는 거야? 정말 그런거야? 내가 환청을 들었나보다. 너무 바라고 바라서 ... 헛소리가 들렸나보다. 네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다니..." 율허는 그 어떤 부정도 하지않고 그저 미소지었다. 율가는 두려운 듯 그런 율허를 쳐다보았다. 그렇게 듣고 싶어했던 말인데 막상 듣고나니 자신의 귀를 의심하고 있는 자신이 그렇게 싫을 수가 없는 율가였다. "너를 사랑해.... " 석상처럼 굳어버린 율가가 갑자기 달려들어 율허를 꽉 끌어안고 흐느꼈다. 온몸이 격렬하게 떨리도록 율가는 울음을 멈출수가 없었다. 너무나 기쁘고 너무나 행복해서 웃음이 아닌 울음이 멈추지 않았다. 자신을 마주 안아주는 율허의 작은 몸짓이 그를 너무나 흥분시키고 있었다. 이세상을 모두 얻은 것이 이보다 기쁠까? "고마워... 고마워.... 나의 연인... 나의 반려... " 22. 시간속으로..... 자신이 율가로서 각성한 후 처음으로 본 비월이였다. 너무 자고 너무 약해서 금방이라도 사라져버릴 것처럼 조마조마하기만한 영혼이였다. 자신의 영혼이 격렬하게 그 조그맣고 약한 영혼을 향해 반응하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을 배신해버렸던 작은 사람.... 그런데도 자신은 그를 미워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그를 본 순간부터 영혼의 저 밑바닥부터 그를 안고 싶고 위로해주고 싶고 사랑해주고 싶은 마음이 요동쳤다. 자신을 배신하고 상처를 입혔다는 것은 그 어떤 영향을 주지 못한 듯 그저 사랑스러워서 이렇게 다시 만난것만으로도 기쁘고이렇게 숨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호흡이 너무나 미약해서 금방이라도 심지를 다한 촛불처럼 꺼져버릴 것만 같아 안타까워지고 마는 것이다. "너를 원하는 것이 그렇게 큰 죄가 되는 것일까?더이상 원하는 것은 없는데 .... 너만 내 곁에 있어준다면 이세상같은 거 미련이 없는데 ..... 너를 그저 내 옆에 두겠다는 것이 이렇게 어렵고 힘든 일인것일까? 언제쯤이나 내 곁에 있을 줄거냐? 응?" 독백하듯 내뱉는 말에 비월이 무언가를 느꼈는지 깨어나려는 듯 뒤척였다. 율파는 자신도 모르게 비월의 숙면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숨을 죽였다. 옆으로 돌아눕는 몸이 너무 가늘어서 율파는 입술을 깨물었다. 전에도 건장한 체구는 아니였지만 지금의 몸은 너무나 아슬아슬해서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왜 그런 짓을 한거냐? 너의 모든 능력을 왜 그런 곳에 쓴 것이더냐? 네가 그러지말라고만 했어도 나는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네가 내곁에만 있어주겠다고 했다면 나는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하였을 텐데...." 침상으로 가까이 다가가려는 데 누군가 들어왔다. 율파는 미처 자신의 모습을 숨길 생각도 하지 못하고 막 비월의 침소로 들어선 그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 낯익은 인물의 모습에 놀라 신음했다. 탁비는 인기척도 없이 비월의 침소에 침입하여 비월을 살펴보고 있는 인물의 모습에 놀라 긴장하며 경계심을 일으켰다. 그로서는 아직까지 많은 사람을 접해보지는 않았지만 그가 결코 궁주들보다 존재감이 덜한 사람이 아님을 대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머리속에서 그동안 자신이 주시하고 주의를 기울였던 인물들을 떠올렸으나 지금 비월의 침소에 있는 자에 해당하는 인물이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탁비?" 탁비는 등골이 섬뜩해지는 걸 느끼고 숨을 들이켰다. 이미 비월과 대면한 궁주들이나 그를 만난 몇몇 인물들은 자신의 이름을 들은 적이 있지만 입에 담는 자들은 없었다. 그런 자신의 이름을 매우 익숙한 듯 묻는 그는 누구란 말인가. 섬뜩한 예감에 탁비는 손이 떨리자 서로 마주 잡아 그 떨림이 보이지 않도록 감추어 보려고 했다. "비월에 있다던 알수 없는 자라는 것이 그대인가? 천년전과 변함없는 모습에 내가 놀라야 하는 건가? " 그의 말이 계속될수록 탁비는 공황에 빠져들었다. 천년전의 자신의 모습에 대해 알고 있는 듯 말하는 그는 누구인가? 부활한 천이족들이라고 해도 자신의 얼굴을 아는 자는 없을 터인데.....뇌리속에 언뜻 스치는 인물이 있기는 했지만 설마했다.그런데도 심장은 두려움으로 조금씩 거칠어지고 있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어떻게 저에 대해 알고 있는 겁니까?" "그대 역시 율허의 영혼에게 끌린것인가? 반갑다고 해야되나..... 그대가 옆에 있다는 것은 비월이 조금이라도 각성을 했다는 것으로 받아들여도 되는 것인가? " "아직은 아닙니다. 그보다 율허님에 대해 알고 있는 당신이 제가 지금 짐작하고 있는 분과 같은 지 확인부터 하고 싶습니다."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 "태천제 율가님이 아니신가요?" 망서리는 듯 조심스럽게 내뱉는 탁비의 말에 율파가 미소지었다. 율파의 미소에 탁비의 얼굴에 낭패감이 서렸다. 그로서는 그가 천년전 저지른 일에 대해서 알지는 못했지만 그가 율허를 가두고 괴롭게 만들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참으로 집착이 대단한 사람이구나라는 감탄사가 터져나올지경이였다. 천년의 시간이 지났건만 그는 여전히 이제는 외모도 달라지고 영혼도 희미하기 그지없는 비월에게마저도 그는 강한 소유욕을 보이고 있질 않은가.... "내가 태천제율가다. 더불어 행방불명된 선천제율파이기도 하지...." 비월과 궁주들은 탁비를 대동하고 회합실에 들어선 선천제 율파를 보고 모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여기저기에서 경악에 찬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모두들 그가 진정 살아있으리라고는 믿지않았었다. 그런데 선천제율파가 전보다 더욱 강건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다하의 일이외에는 별로 놀라지않는 가토마저 놀라서 숨을 들이킬 지경이였다. 놀라서 시선도 떼지못하는 자신과 그의 시선이 부딪쳤다. 순간 율파의 눈빛이 반짝 빛난것만 같아 가토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천궁을 지키고 있을 때도 자주 만난적이 없는 사이였고 다하를 자신이 감금한 후로는 그가 사라질때까지 얼굴 한번 마주친적이 없는 관계였다. 그런데 자신을 보며 의미심장한 듯한 눈빛을 보내는 율파의 저의는 무엇일까싶어 가토는 내심 불안해졌다. "오랫만이오." 사람들은 갑작스럽고 놀라운 출현을 한 그를 어떻게 대해야할지 몰라 머뭇거렸다. 이미 죽은 사람이라고 거의 확실시하고 있던 사람의 생환은 그만큼 여러사람에게 충격과 혼란을 가져다주었다. 사람들의 머리속은 수많은 생각으로 아수라장을 이루고 있었다. 선천제가 어떻게 천인오쇠에서 벗어나 살아났는가하는 것부터 그동안 그가 어디에 있었으며 왜 모습을 감추고 있었는가하는 것등 극심한 혼란으로 회합실에는 그저 어수선한 침묵만이 자리잡았다. 그런 사람들의 반응을 예상한 듯 율파는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들을 둘러보다 비월을 쳐다보았다. 비월 역시 놀라기는 했으나 다른 사람들에 비해 침착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사실 그는 그가 어디엔가 살아있으리란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궁금해한 것은 왜 그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가하는 점이였다. 그리고 그에 더해 그는 선천제율파를 궁주들의 검을 강탈하는 범인으로 의심하고 있었다. 하지만 짐작만 했을 뿐이고 사람들이 생사여부를 의심하고 있는 그를 지목하여 조심하라고 말할수는 없는 지라 침묵하고 있던터였다. 그런 비월의 의심을 눈치라도 채고 있었을까 선천제율파가 의미심장한 눈으로 비월을 쳐다보았다. 비월이 가장 혼란스러워하는 것은 탁비가 그와 함께 등장했다는 사실이였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사람처럼 두사람은 친숙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이제까지 한번도 탁비가 선천제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않은데다 그가 자신과 월궁으로 돌아온 시기가 이미 선천제율파가 사라진지 꽤 지난 시점인지라 탁비가 그에대해 알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심조차해보지 않았었다. 무엇인지 모를 괴리감에 비월은 자꾸만 뒤끝이 깨끗하지 못한 느낌이였다. 선천제 율파가 살아왔다. 혼란에 빠져있는 천인계의 상황으로보아서는 반갑게 생각해야할 일이지만 비월은 전보다 더 극심한 혼란에 빠진 기분이였다. 겨우 실마리를 잡아가던 사건이 더욱 가중된 혼란에 빠져 엉켜버린 느낌이랄까. "그동안 그대가 나를 대신하여 이 천인계를 잘 지켜주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오. 그래서 내가 돌아오기는 하였지만 아직 상황이 어떤지는 잘 알지 못하니 그대가 나를 도와 이 혼란으로부터 천인계를 지키는 것을 도와주었으면 하오." 비월은 자신을 쳐다보는 그의 시선에서 훈바를 떠올렸다. 적나라하게 자신을 원하던 그의 시선처럼 뜨겁지는 않지만 더욱 자신을 옭아메려는 듯한 진득한 느낌에 숨이 막혀왔다. 선뜻 대답을 하지못하고 망서리며 탁비를 쳐다보았더니 그가 자신을 외면하는 것이 아닌가. 어떻게 하면 좋은가를 물어보려는 자신의 눈빛을 피하기라도 하려는 듯이 말이다. "신 미흡하기는 하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영 개운치않는 느낌이기는 하지만 우선은 천인계를 안정시키는 것이 먼저라는 생각에 애써 진득하게 들어붙는 싫은 생각들을 떨쳐버리고 고개를 숙였다. "그말을 믿으라는 것인가?" 매하의 말에 파라는 마시던 차를 내려놓으며 매하를 노려보았다. 매하는 샐쭉하니 입술을 삐죽이며 콧방귀를 뀌었다. 그 옆에는 차람이 밀린 화룡궁의 여러가지 사무처리를 하고 있었다. 그로서는 각성을 하기는 하였지만 천년전 자신과 지금의 자신이 무엇이 다른지 알수가 없었다. 왜 그런지 머리속에서만 천년전의 일이 어제일처럼 떠오르기는 하였지만 그저 그건 과거일 뿐이고 지금과 별다른 차이를 느끼지못하고 있었다. 그런점은 매하 역시 마찬가지였다. 수컷들을 유혹하여 자신의 뜻대로 휘두르고 즐기는 것이 천년전과 뭐가 다른지 알수가 없었다. 마치 다른 사람의 육체를 억지로 빼앗고 그 영혼을 빼앗아버린 것이 아닌 원래부터 자신의 영혼을 찾은 듯 익숙하기까지 해 별다른 괴리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오직 파라만이 극심한 괴리감을 느끼고 있었다. 차람은 그가 현재 파라의 영혼상태인지 아니면 강황의 영혼상태인지 구분하기 위해 그에게 차를 권하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교활하기그지없는 강황이지만 취미는 고상하여 차를 즐겨마시는 편이라 그가 인상을 찌푸리고 거부하는 기색이 역력하면 그는 파라인것이고 아니면 즐기는 듯한 인상이면 강황인상태라는걸 구분할 수 있었다. 강황은 파라와 자신이 무척이나 다른 자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차람이 보기에 그가 차를 마신다는 습관이외에는 별다른 차이를 느낄수가 없었다. 일천궁에서 빠져나온 매하는 이미 몇몇의 수컷을 유혹하여 정기를 빼앗은 후로 강한 색기의 여운을 흘리고 있었다. 하지만 차람은 동요되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천년전부터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저 작은 체구의 천이족을 안는 건 큰 댓가를 치뤄야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당시 서로 힘겨루기에 바빳던 그들은 아무런 힘도 없어 보이는 작은 체구의 그를 얕보고 덤빈 천이족이 그에게 이틀을 유혹당한후 생기를 다빨리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그가 원하면 극락같은 쾌감을 주는 것으로 만족하다가도 수가 틀리면 모든 생기를 뺏기도 했다. 가까이 다가가 손을 뻗다가도 그의 시선을 마주치면 감당하기 힘든 욕정이 발동하여 힘이 빠져버리고는 하였다. 그뒤로 누구도 유혹의 천이족이라는 그를 함부로 자극하여 건드리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 그가 지금 강황을 유혹하고 있었다. 하지만 천년전에 자주 관계를 가진 두사람이였지만 지금 강황은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린 사람같았다. 차람은 그것이 아마 비월일거라고 짐작할 뿐이였다. 왠지 그는 육체의 주인인 파라의 영향인지 다른 자들에게 흥미를 갖지않았다. 오로지 비월에 대한 일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내가 왜 그런 거짓말을 하겠어요. 태천제께 직접들은 이야기라구요. 우리를 봉인한 십이검은 그가 그의 영혼으로 만들었다고 했어요. " 천년전 세상은 그들의 것이였다. 누구도 그들을 막을수가 없었고 마음껏 활개를 치며 자신들의 욕망을 풀수 있었다. 자신들의 손에 좌지우지되는 사람들을 보며 그들의 머리위에 서서 세상을 제멋대로 휘두를수 있었다. 그 십이검이라는 궁주들의 검이 나타나기 전까지..... 그 무엇으로도 자신들을 막을 수가 없었는데 십이검은 그들을 저지했을 뿐아니라 봉인했다. 태천제의 힘이 갈무리된 자신들을 그 십이검이 막아낸 것이다. 처음으로 두려움이 생겼다. 사태를 파악했을 때는 이미 모두 십이검에 봉인되어버린 상태였다. 그것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다. 세상에 자신들을 가둘수 있는 그런 기물이 있다는 사실을 미처깨닫지못한 자신들을 경망함을 후회해보았지만 이미 늦은 상태였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들을 만든 태천제가 남아있었기에 절망하지는 않았다. 진짜 절망은 태천제에 의해 봉인이 풀린 후에 일어났다. 세상의 빛을 다시 본 것도 잠시 그들의 희망이였던 태천제마저 그 십이검에 봉인되었다. 그뒤로 그 어둡고 적막한 세계속에 갇혀 절규하고 절망하였다. 가슴속에는 십이검에 대한 두려움과 절망과 원독으로 물들었고 그 검을 만들어낸 자에 대한 강한 저주를 되새겼다. 서로다른 성격에 다른 능력을 가져 잘 섞이지 못했던 그들이 오직 한가지 십이검을 만들어낸 자에 대한 원독만으로 융합이 되었을 정도였었다. 지금 매하는 그 증오의 대상자가 비월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잔잔하던 차람의 가슴속에서마저 불길이 치솟는 듯한 감정이 끓어올랐다. 봉인된 상태에서 그들 모두가 동시에 바란 것은 십이검을 만들어낸 자에 대한 원한이였다. 언젠가 부활하면 반드시 그자에게 복수를 하겠다는 강한 원념.... 매하의 눈이 차갑게 타올랐다. 파라의 육체를 차지하고 있는 강황의 눈빛도 타오르고 있었다. 여전히 서류더미를 살피고 있는 차람의 몸에서도 한기가 피어올랐다. "문제는 부활하신 태천제가 여전히 그를 원한다는 것이지요." 매하가 비꼬듯 내뱉는 말에 파라와 차람의 안색이 굳었다. "대단한 집착이군요. 천년인데..... " 차람의 말에 파라역시 한숨을 내쉰다. 원한은 원한이지만 가장 껄끄러운 자가 그를 비호하고 있다면 그들의 복수는 물건너간거라고 봐야할 상황이였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 만은 없는 일이아닌가. 자신들의 창조주가 원하는 사람이라지만 그 원한은 쉽게 접을 수 있는 것이 아니였다.. 게다가 태천제가 언제 그에게 설득당해서 마음을 바꿔 자신들을 반목할지 모르는 지금같은 상황에서는 더욱.... "없애야해요." 매하가 이를 갈았다. 강황은 결코 좋은 기분은 아니였지만 매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로서는 방법이 없었다. 다른 자들이 모두 그를 향해 비수를 들이댈수있어도 자신은 그가 거부의 말을 꺼내면 꼼짝도 못하는 상태가 아닌가. 게다가 그런 지금 자신의 상태에 일말의 안도를 느끼는 자신에게 극심한 혼란을 느끼는 강황이였다. "하지만 태천제가 그의 곁에 있는 한 어려울텐데요. 그는 우리들의 기색을 대번에 알아채고 막을 거에요." 매하가 눈썹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어째서 태천제는 그런 자에게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인지 영 못마땅하기만 했다.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에요." 차람의 말에 매하가 눈을 반짝이며 차람을 쳐다보았다. 강황은 차람의 말에 자신의 심장이 거칠게 뛰는 것을 느끼고 눈썹을 찌푸렸다. 왜 다른 자들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자신은 쉽게 비월을 없애는 것에 동의하지 못하는 것인지 짜증스럽기만했다. "이게 왜 아직까지 살아있는 거야?" 매하가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다하는 두려운 듯 자신앞에 나타난 세사람을 쳐다보았다. 모두 낯설고 두려운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자신이 비월과 공명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 이후 율파는 자신을 노려보면서도 조심스러울 정도로 보호하려고 했다. 덕분에 다하는 태어나서는 처음으로 편안하고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 누구도 자신에 대해 아무런 제제도 가하지 않았고 자신이 불편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보살펴주었다. 처음에는 그게 너무나 어색하고 부담스러웠으나 마음속에 자신이 편하면 그아이도 편할거라는 생각이 들자 이제까지 한번도 가져본 적이 없는 욕심을 부리게 되었다. 이제까지 자신의 건강에대해서는 별관심도 없었으면서 지금은 조금이라도 이상한 기미가 보이면 율파가 붙여준 의원에게 달려가 손짓발짓으로 자신의 증상을 표현하여 치료하기 바빴다. 때로는 자신의 그 낯선행동에 얼굴을 붉히기도 하였지만 이 모든 것이 비월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런 낯선 감정과 어색한 느낌을 털어버려야한다고 다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노려보는 탁제균도 없고 자신을 억지로 구속하려고만하는 가토도 없는 생활에 조금씩 생기를 찾아갔다. 그런데 지금 눈을 뜨자 자신은 한번도 와 본 적이 없는 낯선곳에 있었고 그곳에는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는 세사람이 있었다. 한사람은 자신이 율파에게 죽을 뻔 했을 때 구해준 사람이였고 또한명을 자신을 죽이려다 율파에게 보낸자였고 나머지 한명은 본적이 없는 사람이였다. 그들에게 느껴지는 공통된 분위기는 뚜렷한 살기였다. 차람이 데리고온 다하의 모습을 보자 매하가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분명히 자신의 손을 더럽히기 싫어 태천제에게 보냈던 그 볼품없는 작은 자가 죽기는 켜녕 오히려 건강해진 모습을 하고 있질않은가. "그가 살아있는 것은 태천제의 뜻입니다. " "아니 왜? 이유가 없잖아... 내가 보냈다는 것을 모르실분도 아니면서 왜 살려두신거야?" "그건 그가 비월과 공명하고 있기때문이지요." "뭣? 그게 가능하기나 한 이야긴가?" "분명합니다. 저의 지난 신분이 일천궁의 간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요? 그때 탁제균에게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는 솔찍히 무척이나 못마땅해하였지만 일천궁주가 하도 감싸고 도는 바람에 해치지도 못하고 지켜보고만 있었다고 합니다. " "말도 안돼..... 왜 이런 아이가 그 율허의 영혼과 공명을 한다는 거야? " "저도 그리고 그의 연인이였던 일천궁주도 원인은 모릅니다. 하지만 증상은 확인된 터입니다. " 파라는 빤히 그저 겁을 잔뜩먹은 초식동물같은 다하를 쳐다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저자와 그 비월의 연관관계를 찾아낼수가 없었다. 그 조그많고 영리한 자와 저 어수룩하고 게다가 말도 못하는 자가 공명을 한다고? 왜? "아마도 탁제균과 가토님이 생각은 이 사람이 율파님과 같은 피를 가진 천제일족이기때문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 "천제일족? 그럼 저게 천제의 피가 흐른다고?" 매하가 매우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그리고 언뜻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다시한번 다하를 쳐다보다 설마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 저게 그 벙어리 천제혈족이야? 오래전에 행방불명되어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알수없다고 하던 그?" "맞습니다. 오래전부터 일천궁주가 그를 감금하고 구속하고 있었지요. 저 사람이 가토님에게 잡혀있다는 사실은 저와 탁제균만이 알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일천궁주가 저사람을 감싸고 숨기셨지요." 매하는 눈에서 불을 뿜을 듯이 다하를 노려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일천궁주의 취향이 의심스러울 지경이였다. 저렇게 평범하기 그지없는 자의 어디가 그리도 끌려서 그렇게까지 했단 말인가. 색기라고는 찾아볼수도 없는 데다가 보고있는 것만으로도 지겨워보이는 인상인데말이다. 으득.. 매하가 이를 갈자 다하는 흠칫하며 매하의 사나운 시선을 피했다. 예전같으면 이런상황에 초연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였다. 자신이 위험해지면 진비월의 아이도 위험해지는 것이 아닌가. 어떻게든 살아나야 한다는 생각과 지금 그들이 자신을 당장은 아니더라도 죽일려고 한다는 것을 알수가 있었다. 그래서 초조하게 누군가 아니 그렇게 두렵고 자신을 구속하는 가토일지라도 자신을 이곳에서 구해주기를 빌고 빌었다. "그럼 이 자를 죽이면 비월도 죽는다는 거잖아?" 그때서야 차람이 다하를 데리고 온 이유를 깨달은 매하가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지었다. 그 눈에는 진득한 살기가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먹이를 앞에둔 맹수처럼 날카로운 그 눈빛에 다하는 옴싹달싹도 할 수가 없었다. 매하가 손을 휘두른 순간 파라는 자신도 모르게 그 손을 막았다. 그리고 무심결에 저지른 자신의 행동에 사색이 되어 뒤로 물러섰다. 그에게도 복수는 꼭 해야할 이유가 있었지만 저 작은 사람이 죽으면 그 비월이 죽는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사납게 다하에게 달려들어 그를 찢어발기려는 매하의 손을 거의 의식 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막고 있었다. ''뭐야?" 자신의 행동을 방해받은 매하가 파라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파라가 괴로운 듯 이마를 찡그리더니 몇발자국 물러서서 고개를 저어댔다. 차람은 혼란스러워하는 듯한 파라의 모습을 보자 불길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매하나 다른 천이족과는 달리 강황은 파라의 육체를 차지했지만 쉽사리 융화되지 못하고 자주 원래의 육체의 주인에게 밀려나기 일쑤였다. 비월의 이름이 그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는 전에도 본적이 있는 지라 지금 보이는 강황의 행동이 그런 징조는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매하나 자신이 힘을 합친다면 그를 제압할수는 있지만 태천제가 그 기운을 알아챌것이 분명했고 그렇게 되면 태천제가 보호하라고 한 다하를 해치려한것도 밝혀질것은 뻔했다. 결국 자신들이 복수를 한답시고 태천제가 원하고 있는 비월을 다하를 죽이는 방법으로 없애려했다는 것도 밝혀진다면? 생각만 해도 그 뒤가 끔찍해졌다. 우선은 그가 누구인지 아직 강황인지를 확인하는게 우선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차람.... 조금 기다려요... 아직은 이릅니다. 쳔년을 눌러온 복수입니다. 이렇게 쉽게 보내려는 것은 아니겠지요?" 무엇으로도 매하의 격해진 감정을 막을 수 없을 것 같더니 차람의 말에 매하의 눈에 독기가 스쳤다. 그렇다. 천년인것이다. 이렇게 쉽게 처리하기엔 그동안 쌓인 원한이 너무 깊었다. "어떻하자는 거야?" "서서히 죽여야지요... 우리가 겪은 고통의 만분의 일이라도 겪게 해주어야지않겠어요?" 자신을 방해하는 것에 불만이 가득하던 매하가 그말에 진득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야지... 아니 만분의 일? 천만에 만배로 갚아주고 말겠어." 매하가 순순히 물러서는 걸 보며 차람은 다하를 가두어두고 두사람을 데리고 휴게실로 갔다. 그리고 차를 끓였다. 조심스럽게 파라에게 차를 권하며 그를 살피던 차람은 그가 차를 음미하듯 마시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다하는 어둠속에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낯선 그를 경계하며 쳐다보았다. 세사람은 자신을 고통스럽게 죽일 뜻을 내비치고 있는 터라 한밤중에 다른 자들이 모두 잠든 사이에 자신을 찾아온 그가 두렵기만했다. 다른 자들이 말리기전에 자신을 몰래 죽이려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자신이 두려워하고 경계한다고 한들 지금 자신의 힘으로는 그를 피하지도 그렇다고 막지도 못하는 실정이였다. 그가 죽이면 고스란히 죽어야하는 그런 상황인 것이다. 억울한 느낌이였다. 왜 자신은 다른 자들처럼 기본적인 방어능력조차 없는 것인지... 이렇게 약해빠져서 비월이 위험해지는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인지... 자신에게 다가온 그가 다하를 조심스럽게 안아들었다. 낮의 그 조그맣고 화려하기 그지없던 자와 같이 있었던 자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다정한 태도에 다하는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지금부터 이곳을 빠져나갈 것이다. 그러니 조용히 해주길 바란다. 그러면 네가 원래 살던 천궁으로 보내주마. 그곳에 가면 지금 너와 공명하고 있는 비월을 만날수 있을 것이다. 그가 아는 지는 모르겠지만 그대가 그의 공명자임을 명심하고 부디 그대라도 다치지않게 조심하길 바란다.'' 그의 말에 다하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을 비월이 있는 천궁으로 보내주기만 한다면 자신은 무슨짓이라도 할 수 있었다. 커다란 새였다. 다하는 화룡궁의 공터에 소리없이 내려서는 커다란 새의 위용에 놀란 입을 다물지를 못했다. 파라는 그런 다하를 가볍게 그 천붕의 위에 올려주었다. "그리고 이건 그대의 능력에 달렸다. 비월을 만나거든 파라는 잊으라고 하라. 그는 이미 밤의 천이족에게 동화되어 본성을 잃어버렸다고.... 그대를 보내주는 것이 마지막 배려라고...." 파라의 손짓에 천붕이 높이 날아올랐다. 다하는 현기증을 느끼고 천붕의 깃털속으로 깊이 파고들었다. 멀어져가는 천붕을 보는 파라의 표정에 씁쓸한 기운이 감돌았다. 천붕의 갑작스런 출현에 놀란 건 비월이였다. 그 천붕은 흑호족만이 다룰수 있는 것으로 혹여 파라가 온 것은 아닌가 걱정스러워졌다. 아직까지도 그에 대한 적응이 되지 않은 터라 대면하기가 껄끄러웠던 것이다. 아무리 고문서를 뒤져보고 연구를 해보아도 그의 육체에 스며든 다른 자의 영혼을 분리해내는 방법을 찾아내지 못했다. 알아낸 것이라고는 강한 능력을 가진 영혼이 그 육체를 차지한다는 것뿐. 그래서 천붕이 정원에 내려섰을 때 망서리다 다가가며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탁비가 비월의 앞을 막아섰다. 한참이 지나도 천붕에서 누군가 내릴 기미가 보이지않자 고개를 갸웃하던 비월이 탁비에게 천붕위에 올라가 볼 것을 부탁했다. 그리고 경계를 늦추지말고 위험하면 곧바로 개인 결계를 쳐 스스로를 보호하라고 충고했다. 탁비가 고개를 끄덕이고 천붕위로 올라가더니 곧 그 위에서 작은 사람 한명을 안고 내려와 비월 앞에 섰다. 비월은 그제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탁비가 데리고 내려온 작은 사람을 쳐다보았다. 작은 사람이 망서리며 탁비의 품에서 고개를 들더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모습이 겁을 먹은 작은 짐승처럼보여 비월은 미소지었다. "그대는 누구지요?" 비월의 나즈막하면서도 온화한 말에 그의 시선이 비월에게 향했다. 창백하게 질리고 여기저기 먼저가 잔뜩 묻어있는 모습이 서서히 비월을 향해 움직였다. 비월은 그가 자신을 돌아보는 순간이 천년처럼 길게만 느껴졌다. 가슴 저 밑바닥에서부터 온몸의 피가 소용돌이치듯 거칠게 끓어올랐다. 맑고 깨끗하지만 수많은 아픔에 지쳐보이는 눈동자에 비월은 자신의 심장이 찢어지는 것같은 통증을 느끼고 입술을 깨물었다. "월아님?" 탁비가 얼어붙은 듯 굳어서 말없이 눈물만 흘려대고 있는 비월의 모습이 이상했던 듯 이마를 찌푸리며 무아지경에 빠져들고 있는 비월을 불렀지만 비월은 탁비는 보이지도 않는 듯 다하에게서 시선을 떼지못하고 있었다. 다하는 단번에 그를 알아보았다. 진비월을 그대로 닮은 모습하며 그 다정한 눈빛하며.... 그런데 의아한 것은 자신을 한번도 본적이 없을 텐데도 지금 진비월의 아이인 그가 자신을 보고 울고 있다는 점이였다. 마치 오래전 잃어버린 혈육이라도 만난 듯 서러워보이는 눈빛을 한채로 한없이 울고 있었다. "너로구나." 비월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탁비도 다하도 이해할수 없는 말이였다. 너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그보다 몇십년을 먼저 태어난 연장자가 아니던가. 그런데 마치 비월은 그를 자신보다 한참은 어린 사람처럼 부르고 있었다. "그래 바로 너였어....." 혼잣말을 하듯 비월이 먼추억이라도 더듬는 듯한 시선으로 허공을 한번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슬픈 미소를 짓기도 하더니 손을 뻗었다. 다하는 비월이 내민 손에 최면에라도 걸린 사람처럼 탁비에게서 벗어나 비월에게 다가가 그를 마주안았다. "그래 너였어. 내가 마지막 영혼을 남긴 이유가....." 다하는 비월이 독백이라도 하듯 내뱉는 말의 의미는 알지 못했다. 막연하게 처음 본 그인데도 무척이나 그리운 느낌을 주는 사람이라는 것 밖에는 .... 다하를 보고 가장 놀란 사람은 가토와 율파였다. 다른 자들이야 이미 그의 얼굴을 잊어버린 지 오래라 왠 낯선사람인가한 정도였지만 가토와 율파는 각자 다른 이유로 다하를 보고 놀라고 있었다. 율파는 분명 자신의 처소에 보살핌을 받고 있어야할 그가 지금 비월과 함께 회합실로 들어서서 놀랐고 가토는 잠시도 마음편할시간없이 가슴 졸이며 걱정하고 있던 그가 건강해진 모습으로 전혀 뜻밖의 장소에 나타나자 놀랐다. 가토를 발견한 다하가 놀라더니 자신과 별차이나지 않는 비월의 등뒤로 숨어버렸다. 그런 다하의 행동을 가토는 가슴아픈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살아있기만을 빌었다. 비록 지금 자신의 곁에 없지만 그가 살아있기만을 빌고 빌었다. 되살아난 기억에 그 고통스러운 과거에 잠식당해 스스로의 호흡을 놓아버리지않기만을 기원했다. 이렇게 다시 보게되어 한없이 기쁘면서도 자신을 두려운 듯 피하는 다하의 행동에 상처받고 마는 자신의 모습에 가토는 입술을 깨물었다. 비월은 잠시도 다하에게서 시선을 돌리지못하는 가토의 모습에 쓴웃음을 지었다. 다하는 그저 그가 두렵기만 한 모양이지만 비월이 보기에 가토는 절대로 다하를 해칠 인물이 아님을 대번에 눈치챘다. 게다가 가토는 다하를 자신의 반려라고 하지 않았던가. 다하를 증오하는 인물이라면 결코 다른 자들에게 그를 자신의 반려라고 당당하게 밝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저의 공명자입니다. " 비월의 간단한 말에 사람들이 수근거리기 시작했다. 공명자라는 것은 그들에게 무척이나 생소한 말이였다. 세상에 그런것이 존재하기나 한 것인가를 의심하는 부류가 대부분이였다. 가토는 자신이 이렇게 초조한 기분으로 비월을 찾아가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비록 그가 다하와 공명하기는 하지만 결코 자신이 그에게 아쉬운 소리를 할 일은 없을 것이라 믿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은 안절부절하다못해 꼬리에 불붙은 강아지마냥 황망하게 비월을 찾아갔다. 어떻게 행방불명되었던 다하가 그의 옆에 있는 것인지 그의 행방불명에 그가 관여한 것인지부터 온갖 잡생각으로 머리속은 뒤죽박죽이였다. 탁비라는 자는 정말 그의 마음에 들지 않는 자이지만 지금처럼 마치 자신이 올거라는 것을 알고 있기라도 한 듯이 문을 열어주며 안으로 안내하는 그는 얄밉기까지 했다. 가토는 안으로 들어서며 다시한번 입술을 깨물었다. 당장이라도 비월을 찢어죽이고 싶은 것이 그의 심정이였다. 다하가 비월에게 지나치게 가까이 다가가 바짝 붙어있었던 것이다. 다하가 진비월을 좋아했던 것을 알고 있는 가토로서는 그 진비월을 그대로 닮은 비월의 외모가 거슬릴수밖에 없었다. "가토." 못마땅해죽을 지경인데 자신을 부르는 비월의 음성에는 자애로움이 가득하다. 분명 그는 자신과는 비교도 되지않는 어린 사람이였다. 다하마저도 그의 나이의 두배는 넘는 처지가 아닌가. 그런데 가만히 보면 비월은 마치 어미가 자식을 감싸듯이 다하를 보살피는 그런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게 전혀 어색하지않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탁비 ... 잠시 자리를 비켜주겠어요? 다하님도 잠시 탁비님을 따라가 주세요. " 가토의 시선이 사나워졌다. 자신은 다하를 만나러 온 것이지 저 얄미운 비월에게는 용건이 없었던 터였다. 그런데 비월은 자신의 의견은 물어보지도 않고 다하를 탁비에게 붙여 내보내버리질 않은가. 불만스럽기는 하지만 지금은 비월의 행동에 대놓고 항의하지 못하는 형편이였다. 그에게 다하가 있다는 사실하나만으로도 가토는 그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닫혀지는 문을 원망스러운 듯 쳐다보며 가토는 입술을 질끈 물었다. 연륜이라면 그를 따를자가 없다고 자부했건만 이런 작은 일에 이성을 잃는 꼴이라니...자신이 한심스러워지고만 가토였다. 한참을 다하가 사라진 문을 노려보던 가토가 고개를 돌려 비월을 노려보았다. "가토..." 자신의 이름이 비월의 입에서 나왔다는 자체로도 불쾌감을 느끼는 가토였다. 그것도 오랜 세월 불러온 듯 매우 친숙한 느낌으로.... "그대가 이 세상에서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비월은 그가 세상에서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지만 마치 그것을 확인이라도 받으려는 듯한 기색으로 가토를 떠보고 있었다. 가토는 그의 의도를 알아내기라도 하려는 듯 뚫어져라 비월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가토가 어떻게 쳐다보던 비월의 안색에는 변화가 없었다. "도데체 그런걸 묻는 의도가 무엇인지 물어도 되겠오?" "의도라......글쎄요. 하도 많아서 그중에 어떤 것을 물어보는 것인지 알수가 없군요." "마치 그대는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줄 수 있다는 듯이 말하지 않았오. ?" "그럴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겠지요. 내가 생각하는 것이 맞다는 가정하에서 당신의 생각과 일치하면 나는 그대에게 한가지를 들어줄수 있답니다. " 가토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자꾸만 흔들리는 마음에 기대하지말라고 기대하면 할수록 실망도 크다고 되뇌었지만 한번 뛰기 시작한 심장이 가라앉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짐작한 듯한 태도구려." "그럴지도.... 다만 당신이 내게 맹세만 해준다면요." "맹세?" "네, 절대로 울리지 않겠다는 맹세요." 가토는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어떻게 울리지않는단 말인가. 자신만 봐도 두려워서 울고 싶어하는 사람인데.... "그 아이가 영원히 당신에게 사랑받을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필요해요." "난..... 내 영혼을 걸고서라도 그점은 맹세할 수 있오. 하지만 나만 보면 두려워 우는 그를 울리지않을 자신은 없오." "고마워요. 그말을 들으니 안심이 되는 군요. 지금 그사람은 절대로 행복해질수 없는 저주에 걸려있답니다. 이제부터 저는 그 저주를 풀거에요. 그가 과거를 기억하기를 바라나요 영원히 지워버리기를 바라나요?" 가토는 다하가 전생의 기억마저 기억해내고 날마다 괴로워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사는 것마저 두려워하던 전생의 기억이 그대로 남아 다하를 괴롭히는 것은 결코 바라지 않는 일이였다. "지워주시요. 내가 그에게 행복한 기억을 채워주겠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그만 두라니...." 한밤중에 자신의 처소로 찾아온 비월이 다짜고짜 율파에게 그만두면 안되냐고 묻자 율파는 그 진의가 무엇인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아직까지 아무런 접촉을 가진 적이 없는 비월과 자신의 사이가 아닌가. 게다가 자신이 태천제의 환생이며 궁주들의 검을 회수하고 있는 범인이라는 사실은 십이천이족을 빼놓고 아는 자는 없었다. 그런상황에서 마치 한밤중에 연인들이나 교미상대방을 찾을 시간에 자신을 찾아온 비월의 의도는 무엇일까 이제와 새삼 예전의 어린시절 자신을 예뻐하던 기억으로 자신을 찾기는 너무 억지같은 이유가 아닌가. "천년전 당신의 손으로 일으킨 전쟁을 다시 일으키려 하시는 겁니까?" 다만 곤혹스러워할 뿐이였던 율파의 안색이 대번에 굳었다. 지금 비월이 한말의 뜻은 무엇인가. 마치 자신이 태천제의 부활체이며 천년전 십이궁주만 알고 있는 천수천인전의 숨은 주모자라는 내막을 알고 있다는 듯 말하는 것이 아닌가. 놀라는 율파의 시선에 비월은 아픈 시선을 할 뿐이였다. "각성했군." 율파의 입에 미소가 어렸다. 비월은 율파의 말을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비월이 부정하지 않자 율파는 갈무리하고 있던 힘의 봉인을 풀었다. 다른 궁주들의 의심을 받지않으려 속으로 갈무리했던 힘이 해방되며 방안을 휘저었다. 비월은 천년전보다 더욱 강대해진 그의 힘에 신음했다. 이제는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자신이 과거의 힘을 모두 가졌다해도 그를 막을 수가 없음을 깨달았다. "나는 이순간만을 기다렸다. " 비월에게 서슴없이 다가온 그가 비월의 턱을 잡아 자신을 올려다보게 만들었다. 수심어린 비월의 눈빛에 미소지으며 그는 고개를 숙여 비월의 귓가에 조근조근 작은 소리로 말하였다. "네가 천년전에 나를 배신한 댓가가 무엇인지 똑똑히 보여줄 것이다." 나즈막하게 속삭이는 말투는 사람을 나누는 연인에게 말하는 듯한 느낌이지만 그 내용은 심히 듣는 것만으로도 두려워지는 것이였다. 비월은 심한 현기증을 느끼며 주저앉을 뻔했다. 율파가 잡아주지않았다면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을 것이다. "율가...." "이모든 건 네가 자초한 일이야. " "제발 그만뒤주면 안되는 거야? " "내가 왜? 어차피 원하는 것도 얻지못하는 세상이라면 내가 깨끗하게 쓸어버릴 거야. 끝까지 나를 받아들이지 못해 기여코 죽어버린 너잖아. 결코 용서하지않아. 내가 천년을 어떤 심정으로 기다렸는 줄 알아? 네가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하는 이세상을 완전히 파괴해버리면 그때가 되면 너는 영원히 내것이 될거라고 반드시 그렇게 만들고 말거라고 다짐했다. 그러니 너는 가만히 이세상이 어떻게 절망하고 멸망해가는 지 구경하기만 해. 두번다시 그무엇으로도 너를 빼앗지 못하게 만들거야." "정말 나만 미워하는 것으로는 안되는 거야?" "바보구나.... 율허... 내가 어떻게 너를 미워할 수 있다는 거냐? 세상의 모든것이 너를 미워해야한다고 해도 난 너를 미워하지않아. 절대로." ==== 비월이 기억을 찾았다는 사실을 안 탁비는 진정 기뻐하였다. 그 환한 표정에 비월은 자신의 기억이 돌아왔을 때 맨먼저 그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미안해질 지경이였다. 탁비는 비월에게 율허라고 불러야하냐고 물었다. 비월은 기억이 돌아왔다해도 그건 과거의 이름이니 그냥 비월이라고 불러달라고 했고 탁비는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는 못했지만 그리하겠다고 말했다. 그로서는 비월이 과거의 기억을 찾은 것만으로도 기쁜 모양이였다. "걱정이 있으십니까?" 월궁으로 돌아온 비월은 며칠째 아무것도 하지않고 달만 쳐다보고 있었다. 아니 하지않는다기보다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낮에는 다하와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다정한 한때를 보내면서 밝은 척하였지만 다하가 처소로 가버린 후의 비월은 그 가면을 벗어버리고 멍한 상태가 되기 일쑤였다. 탁비의 물음에 비월이 그를 돌아보았다. 친구이며 동료이며 자신의 종을 자처한 자.... 하지만 율파에 대한 이야기를 그에게 하기에는 비월은 자꾸 망서려지고 있었다. 다하에게 걸려있는 저주를 풀고나면 자신의 영혼은 소임을 마치게 되어 어떻게 될지 알수가 없는 상태였다. 미약한 힘을 다 소진하고 이대로 영원히 소멸하여 모과에서 그 흔적을 영원히 지우게 될지 아니면 이제까지처럼 그 끈질긴 생명력으로 되살아나 평범하게 살아가게 될지.... 가토의 그 초조하고 괴로운 듯한 기색을 보면 머뭇거리고 싶지않지만 만일 자신에게 무슨일이 일어난다면 이미 이성을 잃어버린 듯한 율파가 그들을 가만히 내버려둘지 걱정이되어 차일피일 의식을 미루고 있었다. "탁비, 사람의 집착이란 것은 도데체 뭘까요? 천년의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마음이란 것은 사랑일까요? 아니면 집착일까요?" 탁비가 씁쓸한 기색이 가득한 비월의 말을 듣더니 조그맣게 한숨을 내쉰 후 비월이 앉아있는 자리의 맞은 편에 앉았다. 그자세가 무척이나 편해보였다. "저는 천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마음은 운명이라고 봅니다. 인간의 수명이 길어봐야 백년에서 삼백년사이인데 그 짧은 기간중에도 인간의 마음은 수없이 변하는 것이 일상입니다. 그때당시는 아무리 괴로웠던 시절도 시간이 지나면 그 아픔이 퇴색해서 그리워지기도 하듯이, 죽고 못살던 사이라도 어느날은 그 좋던 감정이 사라져 서로 죽이지못해 안달을 하는 것도 보았습니다.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 같던 마음도 시간이 지나면 그때는 왜 그랬을까 생각하기도 하지요. 그러니 천년이란 세월동안 변하지 않는 마음이란 원래부터 그렇게 되도록 정해졌기때문이 아니면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 "그렇게 될수밖에 없도록 정해진 거라구요?...... 그렇겠지요? " "네." "그렇다면 나는 어쩌면 좋을까요?" "무엇을 말씀입니까?" "율가가..... 태천제가 환생을 했습니다.' 탁비는 순식간에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사실 그는 태천제 율가가 환생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비월이 과거의 기억을 아직 각성하지 못하고 있었기때문에 자신이 말해준다고 해도 혼란스럽기만 할거라는 것을 알기에 내색하지 않고 있었다. 이제와 비월이 그가 각성했다는 것을 자신에게 힘겹게 꺼내는 것에 당황스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사실 비월이 각성했다해도 그가 율가를 알아보지 못한다면 말하는 것을 망서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여전히 태천제가 천년의 세월이 무색하게도 여전히 비월에 대한 집착이 퇴색되지 않은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천년전 천수천인전이 일어나도록 방치하면서도 태천제는 비월을 수인족에게 돌려주지 않았다. 태천제가 비월만 수인족에게 돌려주었다면 천수천인전이라는 말은 예초부터 생겨나지도 않았을 지도 모른다는 것이 탁비의 생각이였다. 천상계가 어떤 위험에 처하든 태천제는 비월의 원래 영혼인 율허를 소유하는 것이 더 중요한 사람이였다. 그러니 다시 재발할지도 모르는 천수천인전보다 비월을 어떻게 소유할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할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전혀 지금 천인계를 안전하게 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였다. "탁비..... 천년전 그날 난 그대에게 하지 않은 말이 있어요. " "마지막 영혼이 해야할일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니요. 그보다 더 중요한 이야기에요. 어쩌면 내가 그날 탁비에게 그말을 했다면 지금 천인계의 판도는 바뀌었을지도 모른답니다." "?" "탁비, 그대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천수천인족의 주모자는 수인족이 아닌 다른 자랍니다. 그들이 시작을 했지만 그 속에서 돌연변이 천이족을 조종하여 천상계를 흔들어 놓은 사람은 ......태천제인 율가였어요." "!!!!!!" 탁비가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자신의 귀로 직접 듣고도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도저히 그대에게 율가가 주범임을 밝힐 수가 없었어요. 혹여라도 그 사실이 사람들에게 알려진 뒤에 그가 비난받고 성토받을까봐 나로인해 상처받고 아팠을 그가 가엾어 이제는 세상에 홀로 남아 나를 원망할 그가 가엾어 도저히 사실을 밝힐 수가 없었어요. 그대에게 준 십이검은 바로 율가를 가두기위한 결계주문이였어요. 그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나는 그가 완전하지 않은 결계주문이지만 바로 내가 원하는 것이기에 그가 스스로를 가둘 것을 알고 만든 것이였지요.그래서 아무말도 하지않았어요. 그런데 이제 그로인해 천인계는 더 큰 위험에 처하고 말았군요....." 비월은 차마 놀라서 입도 다물지 못하고 있는 탁비를 쳐다보지 못하고 밝게 빛나는 달만 쳐다보았다. "그럼, 지금 궁주들의 십이검을 회수하고 있는 자가 태천제가 환생한 그자라는 겁니까?" "네, 그런것 같아요. 생각해보면 간단한데... 누가 있어 십이궁주의 몸안에 든 십이검을 타의로 소환할수 있었겠어요. 처음부터 답은 정해져있었는데 나는 애써 그 사실을 외면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몰라요. 이제 그는 다른 이유가 아닌 내가 그를 배신한 이유로 이 모과를 흔들어놓을 생각이라고 합니다. 나는 어쩌면 좋을까요?" 비월의 말이 너무나 고통에 차있어서 듣고 있는 탁비는 가슴이 답답해지는 기분이였다. 마치 피를 토하는 듯 진득한 고통이 스민 비월의 표정도 그를 흔들어놓았다. 그는 지금 자신이 무엇으로인해 혼란스럽고 당황스러운지 알수가 없었다. 비월은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인 듯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있지만 탁비는 그게 옳은 생각이 아니라는 생각만하고 있었다. 너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에 탁비는 더욱 그를 비난하고 싶지않았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그건 비월님이 원해서 그리 된것이 아니잖습니까?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미래의 일까지 비월님이 책임을 지실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그리고 어쩌면 천년전에 멸망되었을 천인계를 구한 사람은 비월님일지도 모릅니다. 지금에 와서야 다시 위험해졌다고 그것마저 비월님이 책임지실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지난 천년을 유지시켜주신 비월님께 감사를 해야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 탁비의 말이 억지스럽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그런대로 비월을 위로해주었다. 비월은 잠이 든 다하를 안쓰러운 듯 쳐다보았다. 너무나 힘든 운명을 가진 사람... 모든 것이 자신으로인해 벌어진 일이였다. 그래서 더욱 마음이 저리고 아파왔다. 잃어버린 규하와의 아이가 걱정되어 그에게 마음을 열어주지 못했다. 자신을 보며 애정을 갈구하던 애타는 시선을 모르는척 하였다. 그래서 더욱 미안했다. 낮에 가토를 찾아가 이 천인계와 다하 중 어느쪽을 선택하겠냐고 묻자 그는 비월의 예상을 깨고 망서리는 기색도 없이 다하를 선택하였다. 이 천인계가 영원히 사라진다해도 다하를 가질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다는 것이다. 너무나 명백한 그의 대답에 비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하만 있으면 다른 사람들이 없어도 괜찮다는 겁니까? 앞으로 몇십년이고 몇백년이고 두사람만 있어도 상관없다는 건가요?" "내가 원하는 바입니다. 나만 보고, 나만 느끼고, 나만 의지해주길 바라고 있습니다. 내가 천년을 버티어 온 이유이며 목적이지요. 이 사람만 옆에 둘수 있다면 나는 모든 것을 버릴 겁니다." 그의 모습에서 율가를 겹쳐보고 있는 자신을 느끼며 비월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회하지 않겠어요?" "후회? 절대로.... 그를 두번다시 잃지않는다면 이세상이 멸망한다해도 신경쓰지 않을거요." "그렇다면 만월의 밤 내방으로 와주세요. " 비월의 말에 가토가 긴장한 듯 숨을 들이쉬었다. 이제까지 비월이 자신에게 물어보는 말이 결코 그냥 물어보는 것이 아닌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다하의 저주를 풀고나면 자신과 다하가 처할 처지에 대한 설명과도 같은 말들이라는 것을 짐작했기에 막상 자신있게 대답은 했으나 머뭇거리고 만 것이다. 하지만 곧 이렇게 하지 않으면 다하가 영영 자신의 곁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도 짐작했기에 힘있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가토의 그 모습을 떠올리며 비월은 잠시도 자신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다하를 사랑스러운 듯 쳐다보았다. 그는 자신을 어린 아이를 보호하려는 듯 여러가지로 신경써 줄려고 하지만 비월은 그런 다하의 행동이 더 귀엽기만 했다. 참으로 약하고 착한 영혼이였다. 그렇게 고통받고 아팠으면서도 증오에 때묻지않고 깨끗하기만 했다. 그러니 이제와서 그가 행복해져도 될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로인해 다른 자들이 고통받게 되더라도 말이다. "비월님과 다하님... 그리고 가토님이 사라지셨습니다." 천인계가 큰혼란에 빠져있었지만 여전히 만월의 축제는 아무도 막을 수가 없었다. 그건 수많은 자들의 생존욕구이며 종족번식의 욕구였다. 자신의 유전자를 남기기 위한 피의 각인이였다. 어디서 칼날이 날아들지 모르는 상황이지만 사람들은 들떠서 화려하게 자신을 꾸미고 교미상대방을 찾으려 했다. 삭막하게 굳어있던 천궁에도 꽃이 넘쳐나고 화려한 옷을 입은 자들이 활보하고 다녔다. 그중 가장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 된 자는 으뜸 되돌아온 선천제율파였다. 누구나 한번쯤 그를 보고 싶어하고 그의 시선을 받고자 그가 시찰을 도는 곳에 진을 치고 기다리기도 하고 천궁주위를 어슬렁거리기도 했다. 그의 연인이였던 소유주도 없는 상황이니 이제 그에 눈에 들면 그의 마음을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덕분에 다른 어느때보다도 천궁주위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암컷들과 수컷들로 붐볐다. 그동안 십이검의 탈취범때문에 긴장하고 있던 궁주들도 오랫만에 그 긴장속에서 벗어나 그 화려한 무리들을 구경하는 것에 전념했다. 그들은 소유주가 사라지기는 했지만 그를 닮은 비월이 있는 한 그가 다른 자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으리란 것을 알고 다른 자들에게 추파를 던지고 있었다. 탁비가 아침이 지날무렵 율파를 찾아왔다. 왠만한 일로는 그를 찾지 않았을 테지만 그는 세사람이 천궁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알자마자 불길한 예감에 그를 찾고 만 것이다. 그로인해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지는 생각나지도 않았다. 그저 어제밤 자신을 불러 조용히 차를 마시며 과거의 이야기를 하며 웃었던 비월이 갑자기 사라졌다는 사실만이 뇌리속에 남아 그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있었다. "지금 뭐라했는가? 비월이 사라져? 다하라는 그 공명자와 일천궁주도?" 다른 자들이 사라졌다면 이렇게까지 당황하지 않을 율파였다. 아니 비월만 없어졌다거나 일천궁주만 사라졌다해도 이렇게까지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세사람이 동시에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그역시 가토가 규하와 율허의 자식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고 다하가 자신과 율허의 자식으로 고통받다가 죽게되었다는 사실은 최근래에 알게되었다. 그래서 다하를 끔찍하게 감싸고 도는 비월의 태도에도 다하를 가만히 내버려둔 상태였었다. 과거에 그를 보살펴주지 못한 죄책감이라는 것을 왠만큼 이해했기때문이기도 했다. 자신을 버린 비월이지만 그가 또다시 슬퍼하게 만들고 싶지않다는 생각이 다하와 가토에 대한 애정어린 시선을 보내는 비월의 시선에도 자신을 억눌렀다. 그런데 지금 그 세사람이 없어졌다. 그것이 무엇이 의미하는 지는 자신도 확실하게 알수는 없었다. 전혀 낌새도 없었던 터라 더 충격이 컸다. 왜 행방을 감춘단 말인가. 무엇으로부터 자신들을 숨긴단 말인가. "짐작가는 것은?" 율파의 안색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천년전에는 맥없이 보내야했지만 지금은 아니였다. 절대로 무슨일이 있어도 그를 놓는 일은 없었다. 그가 두사람을 데리고 사라진 것은 죽기위해서는 아니라는 결론이였다. "......." 탁비는 얼핏 떠오르는 곳이 있었지만 설마하는 심정이였다. 비월 혼자라면 모를까 다하와 가토마저 데리고 그곳에 갈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율파가 즉시 대답을 못하는 탁비를 빤히 노려보았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그가 맘에 들지 않았다. 가토는 손을 뻗어 허공에 헤엄쳐다니고 있는 물고기를 만져보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그는 태어나 허공에 물고기가 헤엄쳐다니는 곳이 있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일견 신기하기도 하지만 그 모습이 너무 현실적이지 않아 무슨 결계의 일종인가보다고 쉽게 생각해버리고 환상적인 현상을 무시해버렸다. 그에 비해 다하는 옆에 있는 가토를 의식해 두려워하던 것도 잊어버리고 신기한 듯 넋을 잃고 물고기를 향해 손을 뻗어보고 있었다. 오히려 가토는 그 환상적인 장면보다 신기한 듯 물고기에게 손을 뻗고 있는 다하를 쳐다보느라 바빴다. 다하에게 이곳은 아무도없으니 마음편한대로 행동해도 된다고 말하고 가토를 불러 내궁으로 데리고 갔다. 다하는 두사람이 사라져도 밖의 장면에 홀린듯 모르고 열심히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곳은 십이지천과 별로 다른 것은 없지만 인간이라고 부를 존재만 없답니다. 그러니 두사람이 이곳에 정착하여 산다해도 별 불편은 없을 거에요. " "왜 저희를 이곳에 두려하십니까?" 가토는 그가 다하의 저주를 풀어주면 무엇이든 할 생각이기는 하였지만 두사람을 이곳으로 데리고와 이곳에 살라고 하는 것은 이해하기가 힘든 일이었다. 굳이 이곳이 아니라도 다하의 저주가 풀린다면 세상 어느곳에 살아도 상관없는 일이 아닌가하는 생각이들었다. "그건 이미 천인계는 돌이킬수 없는 상태에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 "천이족의 부활때문입니까?" "그건 전조입니다. 이제 천인계는 천년전과는 비교도되지않는 혼란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그곳에서 살아남고 살아남지못하고는 그들의 운명입니다. 나는 다하가 행복하기를 빕니다. 이제 저주가 풀리고 과거의 기억을 온전히 잃어버릴 다하가 그 혼란속에 빠지기를 바라지않습니다. 이제까지 그의 인생이 고달펐던 만큼 그가 안정되고 평온한 분위기에서 살아가길 바랍니다. 비록 그것이 나의 이기적인 욕심일지언정 많은 사람들이 나를 욕할지언정 나는 그를 이렇게라도 지켜주고 싶습니다. " 가토는 할말을 잃었다. 어쩌면 그도 이제 천인계가 돌이킬수없는 상황으로 치달을 것을 예감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이 그동안 저질러놓은 일만 해도 그렇고 그에 더불어 자신보다 더 강한 존재가 나타나 십이지천의 궁주들을 하나씩 소멸시켜가는 것뿐 아니라 그 뒤를 이을 후계위를 허수아비로 만들생각인지 십이검마저 탈취해가버렸다는 사실을 알게되었을때부터 짐작하고는 있었다. 한번 구르기시작한 운명의 수레바퀴는 그 어떤 힘으로도 막을 수가 없다는 것을...... "이곳에서 아이를 낳고 그아이를 키우며 아무 근심없이 평온하게 ....그렇게 살아주기를 바라는 것이 나의 바람이며 꿈입니다. 이미 십이지천을 비롯한 모과의 모든 곳은 안전한 곳이란 없습니다. 이곳만이 천인계는 물론 지상계로부터 영향을 받지않고 안전하게 지낼수 있는 유일한 곳이라고 믿으니까요." 가토는 더이상 반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로서는 이보다 더 바랄것이 없다는 생각이였다. "마지막 영혼이 해야한다고 했던 일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니 .... 율허가 봉인결계주문을 완전하게 만들지 않은 이유가 다른 할일이 있어서란 말인가?" "네. 그분이 마지막 숨을 거두기 전에 저를 부르셔서 자신의 욕심이지만 그로인해 봉인이 완전하지 않아 언젠가 깨어지더라도 꼭 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이제 과거의 기억이 돌아오셨으니 그 것이 무엇인지도 기억하셨을 테고 아마 그것이 다하님과 관련이 있지않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 율파 역시 율허가 하는 일치고 봉인이 완전하지않은 것에 의아해 하기는 했었다. 하지만 자신이 소멸되는 것이 망서려져서라고만 생각했지 달리 할일이 있어서 그 숙원을 해결하기위해서 남겨두었을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었다. 탁비의 말을 떠올리자 자신의 반려였던 율희가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절규하듯 내뱉던 말이 떠올랐다. ...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 이제 그토록 차지하고 싶어했던 그 자도 없는 세상에서 잘 견디어 보라구요. 그리고 당신과 그자의 피가 이어진 자가 영원토록 그 영혼이 절망과 고통의 나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허덕이는 것을 지켜보며 평생을 피눈물을 쏟도록 하세요. 나를 슬프게 하고 내 아이를 내쳐버린 당신과 그 자의 아이는 내 아이보다 수만배 더한 고통을 받게 될거라는 걸 명심해서 후회하고 후회하도록 하라구요. 당신이야 눈하나 깜빡하지 않을 테지만 저 약하고 소심한 율허가 과연 견디어 낼수 있을 까요? 자신때문에 그렇게 된 자신의 핏줄을 보며 행복할 수 있을까요? 천만에 피를 토하고 싶을걸요. 그런 그를 보는 당신도 피를 토할테구요. 그러니 절망하세요. 비록 내가 두번다시 환생하지못하게 되었지만 나는 그걸로 만족하지요..... 그말을 꺼낸 후 율희는 자신의 손에 죽음을 맞이했다. 그는 자신의 손에 죽어가면서도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귀기어린 그모습이 선명하게 뇌리에 남았지만 이미 율허를 잃은 후 그에게는 다른 자의 절망을 느낄 그런 심성이 남아있질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건 저주였다. 그런 상황을 율허가 알게 되었다면? 비로소 율가는 율허가 끝내 마지막 영혼을 남겨야했던 이유를 납득했다. 가토는 생명수안에 잠긴 두사람을 빤히 쳐다보았다. 비월은 가토에게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고 말했다. 며칠이 될지 몇달이 될지... 그리고 몇년이 될지도.... 가토는 기다리겠다고 다하가 그 저주로부터 벗어나 깨어날때까지 몇년이 되어도 기다리겠다고 했다. 그말에 비월이 미소지었다. 다하도 처음으로 가토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제까지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는 것마저 거부하던 다하가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모든 시간이 멈추어진 기분이였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전혀 느낄수가 없었다. 두사람이 생명수안에 봉인된 것처럼 자신역시 시간속에 봉인된 그런 느낌이였다. 영원히 움직이지 않을 것 같았던 시간이 그 두사람의 출현으로 고요한 호숫물이 바람에 일렁이듯 흔들리더니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토는 탁비와 율파의 출현에 적지않이 놀랐다. 비월은 분명 이곳은 아무도 모르는 곳이라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탁비가 익숙한 듯 가토앞에 나타나 생명수안을 보더니 신음성을 터트렸다. "늦어버렸어요. 이미 의식은 시작되었으니 이제 멈출수가 없어요. ..... 이제 비월님이 완전히 소멸하기 전까지 이 의식은 멈추지 않을 거에요." 가토도 이번에는 크게 놀랐다. 그는 이 의식이 그저 다하의 저주를 푸는 일이라고만 알고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른다는 것 정도가 전부였다. 한번도 그 의식으로 인해 비월이 완전히 소멸하게 될거라는 것은 생각해본적도 없었다. 비록 다하를 위해서라면 그 어떤 짓도 할수 있었지만 비월이 자신의 영혼마저 소멸시켜가며 다하의 저주를 풀려고 했다는 사실에는 마음이 흔들리고 말았다. 아직까지도 그의 마음속에는 그에 대한 증오와 원망이 남아있었다. 다하의 저주를 풀어주기 위해서 노력하는 모습에 그 감정이 조금 수그러들기는 했지만 여전히 그를 완전히 용서하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래서 그가 마지막으로 생명수안으로 들어가며 자신을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을 때도 냉랭하게 쳐다보았을 뿐이였다. 그가 자신의 모습에 무언가를 포기한 듯 고개를 숙여버렸을 때도 그저 외면해버렸다. 그게 마지막 모습일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당장 멈추게 해." 안색이 대변하여 생명수로 다가가는 율파를 막을 감각도 잃었다. 오히려 탁비가 급히 그를 막아섰다. "안됩니다. 그러다간 두분 다 소멸하고 말것입니다." "그럼 어쩌라고 또다시 이렇게 그를 보내라고? 그것도 이제 두번다시 환생하지도 못하고 영원히 그 존재마저 사라져버리는데 가만히 두고보라는 건가? 내가 어떤 심정으로 천년을 기다렸는데....... 내가 어떤 생각으로 천년을 참아냈는데...... 이렇게....이렇게 다시 안아보지도 못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보내라는 거야? ....." 율파의 말이 가토의 심장을 관통했다. 오로지 자신만이 다하를 기다려온 것처럼 그역시 비월을 기다렸다는 사실에 넋을 잃었다. 그리고 그가 누구인지 자연스럽게 알수 있었다. 자신의 감정만이 소중했었다.다른 자의 감정따위 자신이 알바가 아니였다. 이렇게 똑같은 감정인데.... 자신은 다른 자의 감정은 무시했었다. 자신도 그와 똑같은 짓을 저지르고 있었으면서 그들을 용서할 생각조차하지 않았다. 자신 역시 그 상황이면 그런 짓을 저질렀을 것이면서 증오라는 이름으로 그들을 단죄하려 했다. 율파가 절규했다. 율가의 영혼이 절규했다. 그리고 가토의 영혼이 그에 동화되었다. 비월은 고통받는 다하의 영혼의 기억에 눈물을 흘렸다.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다하의 영혼에 자신의 영혼을 겹쳐 그의 기억을 생생하게 느끼며 비월은 한없이 가슴저리게 울고 있었다. 태어나서 찬밥신세처럼 한구석에 있는 작은 영혼.... 그리고 만화궁의 시종들에게 무시당하며 그 작은 몸으로 힘들게 부려지다 태천제가 찾아오는 날이면 예쁘게 단장되고 그가 가버리면 다시 그 예쁘고 화려한 옷이 벗겨진 후 낡아서 금방이라도 헤질듯한 옷을 입고 작은 손으로 시종들의 시중을 드는 모습이며, 너무나 작고 초라한 방에서 어둠속에서 두려워 흐느끼는 모습.... 비월은 한없이 울었다. 가슴이 찢어지고 헤어져서 손만대어도 쓰라릴정도로 울고 그런 아이를 감싸주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에 또 울었다. 오로지 자신의 부탁을 위해 모든 수난을 참아가며 가토를 찾기위해 일천궁으로 가서 겪었던 모든 일들이 비월의 심장을 다 찢어놓았다. 자신은 그동안 무얼하고 있었을까 저 아이가 저렇게 고통받고 있는동안 자신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왜 돌아보지 않았을까. 왜 내버려두었을까 너무나 고통스러워 절규하는 비월의 영혼에게 온화하면서도 따뜻한 영혼이 다가와 비월의 영혼을 감쌌다. 슬퍼하는 비월의 감정을 감싸주기라도 하려는 듯 위로라도 하려는 듯 너무 미약한 영혼이 다가와 비월의 영혼속으로 파고들어왔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 끈임없이 속삭이는 작은 영혼을 보며 비월은 미소지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 비월은 시커먼 연기에 감싸여있지만 여전히 밝은 빛을 내뿜고 있는 영혼을 감싸안았다. 그가 자신을 보호하려는 듯이 자신역시 그 영혼을 보호하려고 감싸안았다. ... 모든 것은 나의 잘못... 율희그러니 그 저주를 나에게... 그대의 뜻대로 영원히 절망해도 좋으니 그 저주를 나에게... 비월의 중얼거림에 다하에게 스며 좀처럼 떨어질 것같지않던 시커먼 기체가 다하에게서 벗어나고 있었다. 다하에게서 떨어져나온 영혼의 조각은 생전의 율희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다하에게서 벗어나자 비월에게 서서히 다가와 비월을 감쌌다. 원래부터 이렇게 될것을 알고 있기라도 한듯 기세좋게 비월을 질식이라도 시킬듯 감싸기 시작했다. 네가 미워... 네가 미워... .... 그를 빼앗아간 네가 미워... 그의 마음을 차지한 네가 미워... 영원토록 네가 절망했으면좋겠어... 비월은 자신의 몸을 감싸고 도는 검은 기체에 자신을 온전히 맡겼다. 다하가 당황스러운 듯 다가오려했지만 이미 시작된 의식은 멈추지않았다. ..나의 아이... 이제는 행복해지렴.... 너의 불행한 과거는 내가 가져갈게.... 그러니 너만 바라보는 그와 이제는 행복해지렴.... 다하의 기억들이 비월에게 빨려들어갔다. 멍하니 풀려가는 다하의 영혼이 어린아이의 형태로 변하더니 작은 아기모양으로 변했다. 이제 가렴.... 네가 기다리는 사람에게로.... 생명수가 요동을 치기 시작하더니 다하의 몸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가토가 달려가 떠오르는 다하의 몸을 건져내었다. 탁비와 율파가 떠오르는 다하의 몸이 아닌 아직까지도 생명수안에 머물고 있는 비월의 모습을 응시했다. 행여라도 그가 떠오를 기미를 보이길 빌었지만 비월은 꼼짝도 하지않았다. "비월!!!!!! 어서 나와 . 제발..... 내가 잘못했다. 그러니 제발 깨어나 줘...." 율파의 절규에도 비월에게는 아무런 요동이 없었다. 게다가 존재감이 점점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안돼. 제발.....이대로 가버리면 용서하지않을거야. 다하도 죽이고 가토도 죽여버린다. 그러니 깨어나... 왜 이러는거야... 왜 내게 이러는 거야... 왜 너만 쳐다보는 나에게 이러는 거야....." 율파의 절규에도 비월의 몸은 점점 흐릿해져가기만 했다. 율파가 탁비의 멱살을 잡았다. "말해, 어서 말해. 어떻게 하면 되는 거야? 어떻게 하면 저 영혼을 붙잡을 수 있는거야? 비월이 다하의 영혼을 잡아주었다면 나도 그의 영혼을 잡을 수 있다는 거잖아.... 말해... " "보시지 않았습니까. 저도 비월님이 소중하지만 당신의 영혼마저 희생하라고 권유할수는 없습니다." "내가 가겠다. 이대로 사라져가는 꼴은 내가 못봐. " "하지만 그렇게 되면 당신이 사라지게 될지도 모릅니다." "상관없어... 그가 없는 세상에 더이상 존재하고 싶은 생각이 없으니까." 탁비가 고개를 저었다. 어쩌면 이리도 이사람은 ..... "그럼 가십시요. 가망성이 있는지는 의심스럽지만 가서 그의 영혼을 붙잡으십시요. 제가 기다려드리지요. 천년이건 만년이건 기다려서 당신과 비월님의 몸을 이곳으로 불러오겠습니다." 그말에 율파가 미소지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를 놓지 마십시요. 제가 도와드리지요." 사람들은 그들의 존재가 먼 하늘의 땅에 유래한다고 믿었다. 오래전 그들의 조상은 저 먼 하늘의 궁전에서 살았다고 믿었다. 자신들의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그들은 저 하늘 어디에는 자신들의 조상이 살던 궁전이 있다고 믿었다. 아이가 태어나면 부모들은 그 이야기를 해주었다. 옛날 저 하늘에는 열두개의 하늘과 그 하늘의 중심인 천궁이 있었다고.... 하지만 타락하고 더렵혀진 인간들을 벌하기위해 하늘이 저 하늘너머로 사라져버렸다고.... 자신들이 어떻게 태어났지도 모르고 왜 태어났는지도 모르는 그들은 그 믿음을 저버리지않았다. 언젠가 저 하늘에서 자신들의 조상인 날개달린 신들이 내려와 자신들을 그곳으로 데려갈 날만을 기다리며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그들이 죽음을 맞이하고 그 후손이 죽어가도 그들은 오지않았다. 그런데도 그 믿음은 형태를 달리하여 사람들 속에 자리잡아갔다. 죽은 자들의 영혼이 그곳으로 향한것이라고 무거운 육체를 벗어버리고 가벼운 영혼의 상태로 날아올라갔다고... 죄를 많이 짓는 자들은 그 영혼에 무게가 더해져 그 곳에 닿기 전에 지상으로 떨어져 나무가 되고 흙이되는 것이라고... 1. 천수천인전-특별편. "홍무와 반려의 식을 하기로 했어." 율하의 말에 선요와 율비가 퍼뜩 고개를 들어 율하를 쳐다보았다. 율하는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두사람의 얼굴을 차마 똑바로 마주보지 못하고 얼굴을 붉힌 채로 시선을 돌려 연못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고는 있었지만 자신의 얼굴 옆에 와닿는 두사람의 시선은 따갑게 느끼고 있었다. "왜?" 율비가 무언가에 억눌린 듯한 투로 물었다. 율하는 머뭇거리며 얼굴만 더 붉힌 채로 고개를 푹 숙였다. 사실 선요와 율비 그리고 율하는 항상 같이 다녔지만 홍무는 혼자다니기를 좋아했다. 그래서 선요나 율비는 그를 약간 낯설게 여기고 어색하게 생각하는 편이였다.자신들과는 달리 홍무는 가볍고 장난기가 넘쳐보이지만 옆에서 오래지켜본 두사람은 그가 묘하게 생각이 깊고 초연한 면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율하는 여전히 대답을 하지못하고 얼굴만 붉힌 채 어쩔줄을 몰라했고 그를 지켜보는 율비의 시선은 점점 사나워지고 있었다. "혹시 두사람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냐?" 율하가 그 물음에 긍정적인 대답은 하지않았지만 그 행동이 적나라해서 율비의 생각을 적중시켰다. 더이상 빨개질수 없을 정도로 빨개져서는 고개가 떨어져라 흔들어대지만 불안하게 흔들리는 시선으로 보아 두사람사이에 무슨일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선요는 험악하게 굳어서 벌떡 일어서는 율비를 급히 붙들었다. "놔!!!!" "기다려. 내가 보기에 저거 분명 입맞춤정도나 당하고나서 반려의 식이니 뭐니를 생각하는 것이 분명해." 선요의 말에 설마해서 돌아보니 율비는 '끙'하고 신음을 터트린 후 자리에 주저앉았다. 율하는 어떻게 알았냐는 듯한 놀라는 시선으로 선요를 쳐다보았던 것이다. "도데체가..." 율비가 이를 악물고 호통칠 기세로 노려보자 율하가 움찔 놀라더니 슬금슬금 선요의 옆으로 숨어들어갔다. "너 정말... 세상에 입맞춤정도로 반려의 식까지 생각하는 놈은 세상에 .. 너 하나뿐일거다. 엉? 도데체가 어떻게 그 나이가 되도록 그런 것을 생각하는 거냐구." 율비의 고함소리에 율하는 부들부들 떨면서 선요의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평소에도 율하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면 화를 내고 때리기 일쑤인 율비였다. 선요가 보기에 그 손에는 전혀 힘이 없어보였지만 율하는 꽤 아팠던 모양인지 그런 기미만 보여도 줄행랑을 놓아버렸다. 그모습이 더욱 율비의 성질을 건드려 더 괴롭히고 싶어진다는 것은 전혀 모르는 채. "하..하지만 홍무가 나보고 이제 큰일났다고했단 말야. 자기하고 입이 부딪쳤으니 자신의 반려가 되지않으면 머리에 뿔이 생길거랬어." 율비뿐아니라 선요까지 얼어버렸다. 율하는 얼어버린 두사람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내뺄 기색이였고.. "너. 바보냐? 그깟일로 왜 뿔이나?' "나도 처음에는 믿지않았다구... 그런데 탁비가 그렇다고 했단말야." 탁비라면 율하의 스승이였다. 모든 것에 초월한 듯한 분위기를 풍기고 다니지만 가끔 그 평소의 모습에 전혀 맞지않는 엉뚱한 짓을 하고는 하였다. 이래저래 호기심많은 율하에게 탁비는 절대적인 존재였다. 그의 말이라면 한치의 의심도 없이 그대로 믿어버리는 율하였다. 그런 탁비가 뿔이난다고 했으니 율하가 믿는 것도 당연했다. 아무리 그건 탁비가 장난친거라고 해도 그것이 진실이라고 해도 율하는 두사람의 말보다 탁비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율비가 답답한 듯이 가슴을 팍 치더니 울먹이는 율하에게 다가왔다. 율하는 고집스럽게 탁비가 그렇다고 했으니 자신의 말이 맞다고 고집어린 시선으로 율비를 쳐다보고 있었다. "선요, 이녀석 잡아." 율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선요가 키득키득 웃더니 달려들어 놀라 도망치려는 율하를 뒤에서 끌어안아 꼼짝도 못하게 했다. "놔, 이거 놓으라구 ... 선요는 왜 율비의 말만 듣는거야? 다가오지마. 때리지마. 아프단말야." 율하는 선요에게 붙잡힌 몸을 빼내려고 이리저리 비틀어댔고 율비는 그런 율하가 가소롭다는 듯이 쳐다보더니 율하의 얼굴을 붙잡고 그 입술에 자신의 입을 맞췄다. "흐읍." 경악으로 부릅떠진 눈에 혼란과 두려움이 섞여가는걸 보며 율비가 입술을 떼었다. "이제 어쩔건데? 홍무와도 입맞추었고 나도 입을 맞췄으니 너 이제 큰일났다. 홍무와 반려의 식을 해도 뿔이 날테고 나와 반려의식을 해도 뿔이 날텐데..." 율하를 붙잡고 있던 선요가 숨이 넘어가도록 웃어제꼈다. 율하는 멍하니 있다가 곧 율비의 말을 이해한 듯 억지로 참아보려고 해도 안되었는지 기여코 울음을 터트렸다. 선요는 웃느라 숨도 제대로 쉬지못하고 있었고 율하는 우느라고 숨을 못쉬고 있었으며 그런 두사람을 율비는 가소롭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율하가 좀처럼 울음을 멈추지못하고 호흡곤란으로 창백하게 질리자 어떻게 알고 나타났는지 탁비가 다가오더니 울고있는 율하를 안아올렸다. 율하는 탁비의 품에 안겨서도 여전히 흐끅흐끅 울어대고 있었다. "왜 자꾸 율하를 울리십니까?" 탁비의 말에 율비가 사납게 그를 노려보았다. 당장에라도 달려들어 탁비를 물어뜯고 싶어하는 기세였다. "네가 엉뚱한 소리를 하니까 그렇잖아." "엉뚱한 소리라니요? 저는 그런 소리한 적 없습니다." "없다고? 그럼 입맞춤해서 반려의 식을 하지않으면 뿔이난다고 한말이 엉뚱한 말이 아니란 말야?" 으르렁거리며 따지고 드는 울비의 모습에 탁비가 가소롭다는 듯이 픽 웃었다. "어, 아니였습니까? 저는 그런줄 알고 있는데요." "너어엇!!!" 율비가 탁비에게 달려들려고 하자 선요가 웃는와중에도 율비의 몸을 붙들었다. 이직도 제대로 웃음을 멈추지 못하고 큭큭큭... 거리면서..탁비는 그런 율비를 한번 슬쩍 보더니 율하를 안고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으드득... 저자식... 언젠가 죽여버릴거야." "그래 네 맘대로해라." 너무 웃어서 배가 아파와서야 선요는 웃음을 멈췄다. "그보다 홍무는 무슨 생각으로 저 아무것도 모르는 것에게 입을 맞췄대냐?" 조금 진정이 되어가던 율비가 선요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화르륵 타올랐다. 선요가 아차했을 때는 이미 율비는 홍무가 자주가는 곳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멀어져가는 율비를 보며 선요는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사람들은 자신을 보고 성격이 불같다고 하지만 율하에 대한 일이라면 율비의 불같은 성격을 따라갈수는 없었다. 세상의 모든 것에 초연하고 관심이 없는 율비가 흐트러지는 모습을 보고 싶으면 율하를 건드리면 되었다. "휴우우... 도데체 율비는 왜 홍무를 잡아먹으려 드는 건지..." 며칠째 홍무와 치고박고 싸우는 율비의 모습을 보며 다하는 고개를 저었다. 평소에는 그렇게 의젓하다가도 한번 불이 붙으면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하고 악에 받쳐 끝장을 보려고 한다. 그 옆에서 과자를 먹고 있는 율하를 보며 차를 마시고 있던 탁비가 히죽 웃었다. 사실 그는 그 원인이 율하라는 것을 알지만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는 그 부모를 그대로 빼다박은 아이들이 재미있었다. 가토와 다하의 아이인 율비 그리고 율파와 비월의 아이인 율하... 그리고 그들이 흑천궁에서 나와 인간계라 불리는 곳으로 나와 살며 알게된 아이들과 사람들.... 그들은 가토나 다하 그리고 두 아이가 시간을 초월한 존재라는 걸 모른다. 태천제가 흑천궁의 시간을 멈추어버렸었던 것이다. 비월이 깨어났을 때 아무도 없는 쓸쓸한 곳으로 돌아오고 싶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때문에 봉인에 들기 전에 자신의 힘으로 시간의 굴곡시켜버린 것이다. 그가 절대로 소멸하지 않을 거라는 걸 믿기라도 한 듯이 .... 멈추었던 시간이 다시 흐르고 두아이가 태어나자 그들은 흑천궁에서 나와 인간계로 나왔다. 그리고 그들이 알게 된 것은 너무나 변해버린 모과의 모습이였다. 십이지천은 물론 천궁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아볼수가 없었다. 그리고 태천제는 자신의 힘을 잃었고 비월은 다하처럼 과거를 잃었다. 비월이 다하의 기억을 가져가버린 것처럼 비월의 과거는 율파가 가져가 버린 것이다. 가끔 탁비는 율파에게 왜 비월의 기억을 지워버렸냐고 했더니 그는 비월의 과거에서 비월이 절대로 기억해서는 안되는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율파는 웃으며 그건 자신만 알면 된다고 대답하기를 거부했다. .... 혼돈의 아버지가 자신을 만든 이유... 그리고 율허를 죽여서 먹으려한 이유... 그 모든 것은 자신만이 알고 가면 되는 것이다. 신이라 불리우는 그 역시 똑같은 감정을 가졌던 자일뿐이였다는 사실도 말이다. ======